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72화 (72/151)

72. 보급로를 뚫다

「나무를… 키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고붕이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고병갑은 그저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계몽의 씨앗’을 구매하시겠습니까?]

구매 의사를 묻는 홀로그램. 그는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다. 잠시 후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강낭콩만 한 씨앗 하나가 떨어졌다.

손톱보다도 작은 씨앗. 비록 크기는 초라했지만 그 자태만큼은 남달랐다.

씨앗은 무지갯빛으로 은은하게 발광했으며 영롱한 기운을 마구 내뿜었다.

「오오!」

「이, 이게. 대체. 뭡니까?」

놀란 고블린들이 뒷걸음질 쳤다. 고병갑은 신줏단지라도 모시듯 조심스럽게 씨앗을 다뤘다.

「나도 잘은 모르는데, 이게 싹을 틔우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거다.」

「조, 좋은 일. 말입니까? 어떤……?」

「글쎄다, 너희가 좀 잘생겨지려나?」

고병갑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몸을 움직였다.

「너, 가서 삽 하나 가지고 와.」

「아, 알았다!」

노멀 고블린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가 삽을 들고 왔다. 고병갑은 들판 중에서도 가장 양지바른 곳으로 이동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충분할 만큼 깊게 판다. 촉촉한 땅에 씨앗을 살포시 놓고 다시 흙으로 덮는다. 그는 씨앗을 묻은 자리에 삽을 꽂으며 말했다.

「고붕아, 이 주위로 울타리를 쳐라. 너무 넓게 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울타리 안으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

「울타리 치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옙! 알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하루에 한 번 묘약이랑 물을 섞어서 이 자리에 뿌리도록 해. 밭에서 감자 키우는 거랑 똑같아.」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묘약 많이 남았지?」

「옙. 충분히. 있습니다.」

「다행이네.」

‘빈털터리가 돼 버렸으니…….’

무려 1천만 수정 짜리 상품을 사들였다. 이제 남은 수정이라 봐야 9만 개쯤이었다.

당분간은 절약 모드다.

「그, 그런데. 로드시여.」

「음? 왜?」

「땅에 심으신 것. 말입니다. 귀중한 거. 아닙니까?」

「어, 맞아. 더럽게 비싼 거야.」

고붕이가 우물쭈물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잠자코 기다리니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저… 저한테. 맡기셔도. 괜찮은. 겁니까?」

「나 참, 무슨 말을 하는가 했네.」

고병갑이 피식 웃었다.

「왜? 잘 못할 것 같냐?」

「조금. 걱정됩니다. 혹시. 잘못될까 봐…….」

「잘못되면 어때?」

「예?」

「키우다 잘못되면 뭐 어떠냐고. 다시 열심히 수정 모아서 새로 키우면 되지.」

고붕이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고병갑은 녀석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거 걱정하지 마라. 시간은 많다. 그리고 뭐 키우는 거 관해서는 네가 나보다 나을 것 같아서 맡기는 거야.」

귀중한 계몽의 씨앗.

그것을 굳이 솜니움에서 키우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안전, 두 번째는 환경이다.

자신이 발타드렌에 있다곤 하나 그곳은 여러모로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 고병갑은 에아가 말했던 ‘산만 한 체구의 그러글’을 잊지 않았다.

당장은 평화로울지 모르나 언제 어떻게 재난이 몰아닥칠지 모르는 일. 그런 의미에선 ‘최후의 보루’인 솜니움에 씨앗을 맡기는 게 옳았다.

그리고 환경.

아무리 개간 사업으로 토양을 양질로 개선하고 있다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게 현실이다. 나무가 자라면 땅 깊이 뿌리를 내릴진대, 심토가 형편없다면 성장하기 힘들 터.

그러한 이유로 세계수는 솜니움에서 기르자고 판단한 것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아무튼 고붕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가십니까?」

「가야지. 일해야 하는데.」

그가 단호하게 말하자 고붕이를 비롯한 고블린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고병갑은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부러 밝게 말했다.

「오늘부터 산에 길 뚫는 작업을 진행할 거다. 공사가 완료되면 오가기가 한결 편해질 거야. 그럼 하루에도 서너 번씩 왕복할 수 있어.」

「지, 진짜입니까?」

「그래, 너희한테 이것저것 보급도 해 줘야 하니 하루바삐 뚫어야지.」

고병갑은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급히 솜니움을 나섰다. 슬슬 작업대 인원들이 도착할 시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숨을 헐떡이며 산 초입에 이르렀을 때 500명이 넘는 작업 인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힘들어 죽겠네. 극기 훈련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본의 아니게 철인이 될 판이다. 이 고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서 길을 닦아야 했다.

고병갑은 터질 듯한 심장을 달래며 작업대를 통솔했다.

「자! 얼른 일 시작하자!」

* * *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산 초입부터 중턱에 이르는 기다란 길을 내는 작업. 나무를 베고 바위를 치우는 일은 분명 고됐다. 하지만 한 명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모두가 합심하니 작업 진행률이 무시무시했다.

작업대가 공사하면 도란과 보병대는 그 근방을 수호했다. 며칠 동안 몇 차례 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죄다 나약한 그러글이라서 피해는 없었다.

「오늘은 내가 토벌 가야 하니까 너희가 알아서 애들 통솔해야 한다. 할 수 있겠지?」

「문제. 없습니다!」

「믿고. 맡기십시오!」

「자신감 아주 좋아. 그럼 믿고 간다.」

한 번 기틀이 잡히니 알아서도 척척 진행한다.

‘나 없이도 애들이 살 수 있어야 해.’

고블린들이 자체적, 능동적으로 일 처리를 해 나가는 것. 그것이 고병갑의 최종 목표였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맡길 것이다. 언젠가 로드의 도움 없이도 자립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평생 같이 있어 줄 수는 없으니까.’

속된 말로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헌터의 생 아니던가. 고병갑은 고블린 로드라는 직책이 주는 책임감이 어서 덜어지길 바랐다.

이날은 토벌을 돌았다. B랭크, C랭크 균열을 하나씩 도니 낮 2시 무렵이 됐다.

여느 때 같았다면 곧장 아스빌람으로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예, 사장님. 그럼 5시쯤에 뵙겠습니다.”

-예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토벌이 끝나고 그가 향한 곳은 연천군의 어느 돼지 농가였다. 당연히 삼겹살이나 구워 먹겠다고 간 것은 아니다.

“아스빌람 제2의 가축은 돼지로 정했다.”

돼지를 키우는 일은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발타드렌에 안정기가 찾아왔으니 이제 가축이고 작물이고 들일 때가 됐다.

가축 운반용 트레일러까지 빌려서 방문한 돼지 농가. 초장부터 돼지 꿀꿀대는 소리가 극성이었다.

“아유,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하하.”

농장주는 간단히 인사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리로 오시죠.”

농장주가 고병갑을 이끌고 향한 곳은 어린 돼지들이 머무는 우리였다.

“요크셔 종이고요, 생후 8, 9개월을 넘긴 애들이라 가임이 가능합니다. 예방 접종도 다 맞춰 놓은 상태고요. 들어가서 한번 살펴보세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고병갑은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반들반들한 암퇘지들. 피부가 깨끗하고 몸도 튼튼하다. 눈이 총명한 것이 새끼를 순풍순풍 잘 낳을 듯했다.

“좋네요, 얘들로 30마리 하겠습니다.”

“예예, 잘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씨수퇘지 보러 가시죠.”

“좋죠.”

고병갑은 튼튼한 씨수퇘지 여덟과 암퇘지 30마리를 사들였다.

“꿰에에엑! 꿰에에엑!”

“꾸이이익!”

“아이고, 이놈들아! 너희 도축장 가는 거 아니라고! 협조 좀 해라!”

트레일러에 욱여넣으려니 아주 발광해댄다. 천신만고 끝에 모든 돼지를 싣고 나서 차를 몰았다.

물론 농장만 벗어난 뒤엔 모두 아스빌람으로 넘겨 버렸다. 그도 덩달아 넘어갔다.

“꾸이이익!”

“꾸익! 꾸익!”

‘헉! 낭패다!’

발타드렌의 땅을 밟은 돼지들이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고병갑은 급한 대로 지척의 돼지 한 마리를 잡고 늘어졌다.

“꾸이익! 꾸이익!”

“염병! 큰일 났네!”

「로, 로드시여?」

마침 한 무리의 고블린이 옆을 지났다. 고병갑은 별안간 소리쳤다.

「야야! 빨리 저놈들 잡아! 한 놈씩 잡으라고!」

「이 짐승들을. 잡으면. 되는 겁니까?」

「아니, 말하지 말고 붙잡으라고!」

「예, 옙! 알겠―!」

「케르르륵! 케륵!」

「…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비스트 고블린이 사납게 소리치자 돼지들이 얼어붙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말이다.

비스트 고블린이 계속해서 으르렁거렸다.

「케르륵!」

“꾸… 꾸이이…….”

잔뜩 풀 죽은 돼지들이 종종걸음으로 모여들었다. 놈들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꼼짝을 못했다.

비스트 고블린이 여유롭게 물었다.

「로드시여. 어디로 끌고 가면. 됩니까?」

「이야… 너흰 재주가 많구나?」

「헤헤. 별거. 아닙니다.」

「아무튼 정말 잘했다! 나 따라와.」

그 전날 만들어 두었던 우리로 돼지들을 이끌었다. 고작 38마리 가두기엔 지나치게 넓지만 문제없다. 곧 머릿수가 불어날 테니.

‘내일은 작물 들여와야겠네. 콩이랑 옥수수 심어서 돼지 먹이로 삼고, 남는 땅엔 구황 작물 위주로 심으면 되겠다.’

들뜬 기대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닷새, 여드레, 열흘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열하루째 되는 날.

드디어 솜니움까지 길이 뚫렸다.

공사가 끝났을 때는 한마음 한뜻으로 만세를 부르짖었다.

「고붕아, 이거 한 대는 내가 끌고 간다.」

「옙!」

솜니움에 주차돼 있던 트럭 두 대. 한 대는 발타드렌으로 옮겨 놓기로 했다.

그가 트럭에 올라 닦아 놓은 길을 탔다.

‘좀 덜컹거리긴 해도 이만하면 다닐 만한데?’

짐칸에 경유 드럼 두 통을 싣고도 주행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제 보급로가 뚫렸으니 고기나 물자 운반이 한결 수월해지리라.

‘그나저나 씨앗 심어 놓은 건 감감무소식이네.’

솜니움에 계몽의 씨앗을 심은 지 20일이나 지났다. 하지만 씨앗은 싹조차 틔우지 않았다.

혹시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걱정됐으나 도로 파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원래 싹 틔우는 데 오래 걸리나 보지. 걱정한다고 나무가 쑥쑥 자라는 것도 아니고.’

잡념을 떨쳐 낸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트럭을 몰았다.

도로가 완공된 이후부터는 아스빌람에 색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트럭 짐칸에 냉동된 고기가 잔뜩 실렸다. 운전석에는 에아가, 조수석에는 도란이 탑승했다.

「그럼 갔다 올게요!」

에아가 들뜬 목소리로 핸들을 잡았다.

「운전 조심해라. 촐싹거리지 말고.」

「후후, 걱정할 거 없어요. 당신이 저번에 말했잖아요? 내가 꽤 유능한 드라이버라고요. 내가 생각해도 나는 운전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그래, 아무튼 고기나 잘 갖다줘.」

「당연하죠! 그럼 정말로 갔다 올게요.」

「로드, 이따 봐요!」

고기를 잔뜩 실은 트럭이 성문을 빠져나갔다. 도란이 있으니 혹 그러글이 나타나도 큰 탈은 없으리라.

「에휴, 일이나 해야지. 칠붕아, 팔붕아!」

「예, 로드!」

「옥수수 따러 가자. 연장 챙겨라.」

「옙!」

아스빌람에서 2월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 * *

전라남도 나주. 예로부터 넓은 평야와 국밥이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현재 나주를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 드는 ‘마석 발전 단지’였다.

실제로 마석이라는 신연료가 등장한 이후 대한민국 전력의 90%는 마석 발전소가 담당하게 됐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랬다.

마석은 효율, 발전 단가, 환경 세 가지 부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성능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구태여 구시대적 화석 연료를 땔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학자들은 10년 내에 모든 동력원이 마석으로 대체될 거라 예견하기까지 했다.

마석은 그만큼 획기적인 소재였다.

어쨌든 나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발전 단지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흐헉! 다, 당신 뭐야!?”

“다, 당장 보안 업체에 연락을―끅!”

어둠이 짙게 깔린 2월의 마지막 밤. 복면의 괴한들이 발전소를 급습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거대한 검을 소지한 각성자 무리였다.

그들이 내뿜는 위압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사람들은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스터, 전부 처리했어요.”

앳된 목소리의 소녀가 말했다. 그녀의 발치에는 기절한 사람들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고생했구나.”

장신의 여인이 짧게 대답했다.

“이제 사람들을 데리고 멀리 피신하렴.”

“네, 이자들을 옮겨 놓은 뒤엔 H 지점으로 가면 되죠?”

“응.”

여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또 한 명의 복면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소년의 목소리였다.

“마스터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저희가 도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혼자서도 충분하단다. 시간이 지체됐구나. 어서 가렴.”

“…네, 알겠어요.”

“이따 봬요, 마스터.”

“조심하세요.”

세 명의 괴한이 기절한 사람들을 둘러업고 사라졌다.

장신의 여인은 눈을 감고 부하들이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쯤이면 되겠구나.’

단지 내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여인이 검을 들었다. 일순 검 끝으로 태산 같은 카르마가 몰려들었다.

그녀가 검을 긋자 전방에 있던 모든 것이 가루가 되며 사라졌다.

여인은 지휘 통제소를 무너뜨린 후 본격적으로 발전 시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보통 각성자가 아니었다. 검격 한 번에 높이 15미터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동강 날 정도였으니.

이날. 나주 발전 단지에 들어찬 20기의 발전소가 모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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