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69화 (69/151)

69. 몬스터

1,025명의 고블린은 새 보금자리인 ‘발타드렌’에 무사히 정착했다.

물론 이주 직후 3일간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했다. 여러모로 손볼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제일 시급한 사안은 누가 뭐래도 성벽 보수 건이었다. 허물어진 성벽을 어떻게 하면 다시 쌓아 올릴 수 있을까. 고병갑은 온종일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런데 갖은 고민이 무색하리만큼 일이 쉽게 해결됐다.

‘설마 성벽끼리 덧대질 줄이야.’

보수가 필요한 부분에 새 성벽을 놓으면 저절로 부족한 부분이 메워지며 수리됐다.

실체화하지 않은 부분의 퍼센티지만큼 수정을 환급받을 수도 있었다. 하여간 똑똑한 시스템이다.

성벽을 바로 세운 뒤엔 주거지 조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다만 도시 계획이란 게 하루 이틀로 될 일은 아니었다. 일단은 당장 필요한 시설만 몇 가지 갖춘다. 그것만 해도 3일이 훌쩍 가 버렸다.

발타드렌에서 맞는 4일째 아침. 고블린들은 경계조와 작업조, 그리고 취사반으로 나뉘어 제 일을 해 나갔다.

“로드시여. 북문 쪽 정화 작업. 완료됐습니다.”

물뿌리개를 든 고블린 무리가 다가와서 보고한다. 고병갑은 ‘좋아, 좋아.’라고 중얼거리며 명령했다.

“잘했다. 다시 서문으로 가서 그대로 반복해.”

“그대로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북문으로 가 보았다. 잿빛이었던 토양이 이젠 건강한 황톳빛을 띤다.

정화조가 떠난 후엔 괭이와 삽을 든 작업반이 와서 땅을 뒤집어 까기 시작했다. 땅을 고르는 것이다. 다른 한 편에선 자이언트 고블린들이 거대한 통나무를 굴리며 평탄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좋아. 몇 사이클만 더 돌리면 농사를 지어도 문제없겠어.’

일의 진행이 순탄하다. 그는 이번엔 성벽에 들렀다. 비스트 고블린들이 그를 맞는다. 경계 임무에는 역시 비스트 고블린이 제격이다.

「별일 없지?」

「예! 특이 사항. 없습니다!」

비스트 고블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고병갑은 아래로 펼쳐진 넓은 황야를 쓱 둘러보았다.

‘너무 평화로운데.’

발타드렌으로 온 지 벌써 나흘째다. 한데 포착한 그러글이라 해 봤자 서너 마리가 전부였다. 그 서너 마리마저 먼 곳에서 어슬렁거리다 사라지기 일쑤였고.

‘뭐… 좋은 게 좋은 거라니까 좋게 생각하자.’

그러글과 매일 사생결단을 내는 것보다야 조용한 게 훨씬 나았다.

다음엔 주택가로 이동했다. 망치를 든 고블린이 철거 판정이 내려진 건물을 때려 부순다. 그러면 쪼꼬미들이 수레에 파편을 가득 실어 한쪽으로 옮겼다.

본격적으로 건물을 세우기 전에 터를 잡는 것이었다.

‘아주 순조롭구먼.’

고병갑은 고블린들처럼 부지런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중노동을 척척 해내니 이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아! 당신, 여기 있었군요!」

흐뭇하게 작업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에아가 찾아왔다.

「날 찾아다녔어? 왜? 무슨 일이 있나?」

「아니요, 고블린분들께 식사하라고 말 좀 해 달라고요. 여긴 너무 넓어서 나 혼자로는 도저히 역부족이네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아무튼 알았어.」

「고마워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얘들아! 밥 먹자! 작업 중단!」

「앗! 옙!」

고블린들이 빠릿빠릿하게 알아먹고 일을 갈무리 지었다.

에아의 말마따나 발타드렌은 너무 넓었다. 작업 인원들도 온 사방으로 흩어져서 일했고. 그러다 보니 식사나 집합 때 인원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도 꽤 고행이었다.

「다른 구역에서 일하는 애들도 전부 불러와. 식사 추진조는 이따가 경계병들 밥 챙기는 거 잊지 말고.」

「옙! 알겠습니다!」

「얼른 움직이자.」

고블린들이 쌩 사라졌다.

고병갑이 만족하며 몸을 돌렸다. 떠난 줄 알았던 에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안 갔었네?」

「할 말이 하나 더 있어서요.」

「또? 뭔데?」

「챙겨 온 고기가 거의 다 떨어졌어요. 아마 내일 아침을 해 먹고 나면 완전히 동날 거예요. 당신한테 말해 둬야 할 것 같아서요.」

고병갑이 작게 탄식했다.

「아… 벌써 떨어졌나.」

「인원이 많으니까요. 솜니움처럼 다른 먹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슬슬 토벌을 재개하긴 해야겠네. 하긴, 오래 쉬긴 했지.’

원정을 갔다 온 후로는 아스빌람에 집중하느라 토벌을 쉬고 있었다. 해 봤자 일주일에 한 건 정도였다.

「걱정하지 마. 내일 중으로는 공급해 줄게.」

「네, 알겠어요.」

짧은 점심 식사가 끝나고 작업이 재개됐다. 그는 공격대 인원들을 불러 내일부터 토벌을 재개하겠다고 일러두었다.

「바몬드, 너도 이제부터 공격대야. 내일 내가 부르면 쟤들이랑 같이 따라 나오면 돼.」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블린 프리스트 바몬드도 공격대에 합류시켰다. 비록 전투 능력은 떨어져도 치유라는 고유 권능이 있으니 1인분은 톡톡히 해내리라.

「자자! 해 졌다! 작업 마무리하자!」

「옙!」

「작업. 종료!」

그렇게 바쁜 하루가 또 지나갔다.

* * *

삐비비빅!

경쾌한 알람 소리. 고병갑은 오랜만에 집에서 눈을 떴다. 이른 새벽인 만큼 바깥은 아직도 어두컴컴했다.

“다시 헌터 일과 시작이네. 에휴, 돈 벌어야지.”

최근 돈을 너무 많이 썼다. 최대한 아꼈음에도 아스빌람에 들어간 돈은 어마어마했다.

아직 많이 남긴 했다만 덮어놓고 쓰다 보면 금세 알거지가 될 터. 고병갑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토벌을 준비했다.

샤워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는 이번에 출고된 신차가 주차돼 있었다.

“캬아, 잘 빠졌단 말이야.”

새 자가용을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참고로 전에 타던 경차는 발타드렌으로 옮겨 놓은 상태다.

“어우, 추워라.”

싸한 내부 공기. 고병갑은 차를 예열하는 동안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오늘 갈 곳은 포천이다.

“오늘 두 탕 정도 뛰어 버릴까. …쩝, 일단 가자.”

뜨겁게 달아오른 차가 부드럽게 바퀴를 굴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동이 뜬 뒤였다.

포천시 일동면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민가와 떨어진 굴다리 아래에 균열이 발생해 있다. 발생한 지 26시간밖에 안 된, 따끈따끈한 신상 균열이었다.

고병갑은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잠시 여운을 즐겼다.

“토벌 오랜만이네. 한 보름만인가.”

불안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균열이 아니었을 뿐 전투는 항상 있었으니까.

더구나 원정에서 S급 최상위종인 발록과 맞붙기도 했잖은가?

이제 담력만큼은 일류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일하자, 일.”

꽁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넣은 후 균열에 몸을 담근다. 이윽고 세계가 반전하며 이면 세계가 그를 맞이했다.

“스으읍! 하아……. 이 엿 같은 공기도 오랜만이구먼.”

이면 세계 특유의 꿉꿉하고 무거운 공기. 뭐,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자고로 송충이는 소나무에서 살아야 하는 법.

“구오오오…….”

살기를 온 사방으로 방출하며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D급의 혼 가브리. 초입답게 약한 몬스터다.

“마침 고기 많이 달린 놈들로 나와 주네. 애들 부르기 전에 몸이나 좀 풀어 볼까.”

두드득. 두드득.

그가 가볍게 몸을 풀고 검을 뽑았다.

“히이잉!”

“히잉!”

혼 가브리가 네 갈래 아가리를 벌리며 덤벼들었다. 고병갑은 여유만만 태도로 서 있다가 일순 벼락처럼 움직였다.

척! 척! 척!

“꿰에에에엑!”

샤프디어의 뿔로 만든 예리한 검이 빠르게 뻗어 나갔다. 내력을 싣지 않았음에도 그 날카로움만으로 혼 가브리를 절삭한다.

혼 가브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투지를 불태웠지만 남는 거라곤 자신의 주검뿐이었다.

“히이잉―칵!”

“대충 정리됐나.”

중급 교본의 성취율이 Max에 다다른 지금, 혼 가브리 서른쯤이야 가뿐했다.

고병갑은 검을 땅에 박아 넣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며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얘들아, 나와라.」

그가 일갈하자 대기하고 있던 공격대와 작업 인원들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고블린들은 쓰러진 혼 가브리의 시체를 보고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드시여, 이것들을 혼자 상대하신 겁니까? 왜 저희를 부르지 않고?」

「됐어, 그냥 몸이나 풀 겸 설렁설렁 한 거야. 자자, 너희 뭐하냐. 얼른 고기 옮겨라.」

「옙!」

「옮기자!」

홉 고블린과 쪼꼬미들이 합심해서 말 괴물의 시체를 옮겼다. 운반 작업이야 금방 끝났다.

「바몬드.」

「아, 예. 로드.」

「너는 키리얀이랑 도르마 뒤에 잘 숨어 있어라. 힐러인 너는 절대 다치면 안 돼.」

「아, 알겠습니다.」

「투르카, 오르카.」

「예! 로드시여!」

「말씀하십시오!」

거대한 방패를 짊어진 두 거한이 일제히 답했다.

「별건 아니고 긴장하라고. 오랜만에 토벌이잖아. 까딱하면 다친다.」

「명심하겠습니다!」

「창식이랑 태식이는 내 옆에서 잘 붙어 있어라.」

「옙!」

「그래.」

고기 운반이 끝났다. 고병갑은 꽁초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뒤 검을 다잡았다.

「후딱 끝내고 돌아가자.」

토벌이 진행됐다.

* * *

E랭크 균열에도 쩔쩔매던 게 불과 반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B랭크 균열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혼 가브리와 이어 등장한 몬스터는 염마. C급에 등재돼 있으며 가브리보다도 1.5배가량 큰 덩치의 말 괴물이다.

체급도 체급이지만 마치 갑옷처럼 전신에 두르고 있는 화염이 까다롭다. 입에서 불을 내뿜기도 했다. 사거리라 봤자 50, 60센티가 고작이긴 하지만.

「다들 내력으로 몸을 보강해.」

「옙!」

물론 카르마로 몸을 보호하는 상위 각성자에게는 먹히지 않는 불꽃이다.

고병갑을 비롯한 고블린들도 내력을 두르면 저런 불꽃쯤 버텨 낼 수 있었다.

「몰아라!」

「케르륵!」

마치 양치기처럼 염마 떼를 한 곳으로 몰면 키리얀과 도르마가 원거리 공격으로 일망타진한다.

까다로운 적이지만 전략적으로 사냥하니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균열도 거의 막바지였다. 슬슬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리라.

고병갑은 짬 나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며 죽은 염마를 바라보았다. 자랑하던 불꽃은 다 사그라져 고깃덩이만 남았다.

“말 괴물만 나오는 테마 파크구먼. 그럼 보스는 센타우로가 나오려나.”

실없는 농담을 하는 중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대체 정체가 뭘까?’

몬스터의 기원, 몬스터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시도는 이미 수도 없이 진행됐다. 그들과 의사소통하려는 시도 역시 숱하게 이루어졌고.

하지만 빈번히 실패했다.

몇몇 몬스터가 인간에 버금가는 지성을 가졌다는 사실이 이미 15년 전에 밝혀졌음에도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몬스터들의 밑도 끝도 없는 공격성 때문이었다.

인간만 보면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대화는 무슨 대화?

그렇다고 균열 밖으로 끄집어내서 실험하자니 픽픽 죽어 버리기 일쑤고.

그렇듯 몬스터 연구는 큰 차질을 겪었다.

하지만 저번 몬스터 웨이브 사건 이후로 상황이 180도 반전됐다.

‘이제는 몬스터들이 균열 바깥에서도 안 죽으니까 실험하기 한결 수월해졌다지?’

실제로 얼마 전 뉴스까지 떴다. 생포한 몬스터가 전문 연구 기관으로 옮겨졌다고 말이다.

뭐… 그런 걸 다 떠나서 오직 고병갑만이 품을 수 있는 의문이 따로 있었다.

그는 고블린 로드다. 그래서 고블린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여러 사건을 통해 고블린이 과거 번영했던 어떤 종족의 후손이란 것까지 알아냈다.

‘그래, 고블린은 그렇다 치자고.’

고블린에 대한 의문은 차츰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면 다른 몬스터는? 고블린처럼 균열 안에 사는 이것들은 뭐란 말이야?’

혹시 이것들도 각각의 로드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스빌람처럼 저마다의 고향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짠해지기도…….

「짠하긴 개뿔. 내가 지금 몬스터 걱정할 때냐?」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키리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고병갑은 휘휘 손사래 쳤다.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자, 대장 놈 잡으러 가자.」

「로드께서 이동하자고 하신다!」

「이동하자.」

몬스터에게 어떤 뒷사정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그저 남 일에 불과했다.

애당초 헌터가 괴물 사정 봐줘서 어쩌겠다고?

얼마간 이면 세계를 진행한 끝에 고병갑 일행은 보스 몬스터와 대면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말 형상의 괴물이 나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피였다.

벌거벗은 여체, 손톱 발톱에 난 날카로운 발톱. 팔에는 새의 것을 닮은 날개가 돋았고, 면상은 새와 인간이 5:5의 비율로 섞여 있다.

B급 중위에 기록된 강자다.

그 밖에 한가지 특이 사항이 더 있었다.

“저거, 설마…….”

고병갑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피의 배가 애를 밴 것처럼 불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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