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진출
「끄… 끄기긱… 끼에엑!」
도르마가 머리를 얼싸쥐며 주저앉았다. 눈이 까뒤집히고 입은 쉴 새 없이 비명을 토했다.
하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카르마와 내력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분출되고 있다. 마치 보가 무너진 댐을 보는 듯했다.
‘위험하다!’
본능적인 위협이 감지됐다.
통제되지 않는 힘. 그건 주변인은 물론이고 도르마 본인에게도 큰 해를 가할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건물 내부. 자칫하면 건물 자체가 폭삭 내려앉을 수도 있다.
「로드! 물러나세요!」
「도란! 잠깐―!」
말릴 틈도 없이 도란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가 칼을 휘둘렀다. 날이 아닌 옆면으로.
「으윽! 꺅!」
하지만 검은 도르마에게 닿지도 못했다. 일순 도르마가 새카만 카르마 덩어리를 사방으로 방출했고, 도란이 속수무책으로 휘말렸다.
그녀는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전신에 찰과상이 가득하다. 그녀가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그때 도르마가 눈 깜짝할 사이 도란의 머리맡으로 이동했다. 녀석의 눈이 새빨갰다.
「마… 마드무트. 마드무트!」
「너 뭐, 뭘 하려는…….」
「도르마! 안 돼! 하지 마!」
「꺄아악!」
도르마의 손바닥에서 암흑 물결이 쏟아져 도란을 덮쳤다. 도란은 채 피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격류를 온몸으로 받았다.
피투성이가 된 도란의 몸이 갑자기 둥둥 떠올랐다. 도르마가 보이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린 것이다. 다른 손에선 다시 한번 암흑 물질이 생성되고 있었다.
「야, 인마!」
고병갑은 즉시 튀어 나갔다.
「…….」
도르마가 고개를 획 쳐 돌리더니 시뻘건 눈으로 고병갑을 쏘아보았다.
「마드무트?」
「뭔 헛소리야! 정신 차려!」
「마드무트!」
생성된 암흑 물질이 고병갑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즉시 내력을 발산하며 몸을 보강했다.
새까만 파도가 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흡사 수천 자루의 칼이 몸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내력이 아니었다면 뼈와 살이 분리될 만큼 매서운 공격이다.
‘끄으윽!’
고병갑은 신음을 삼키며 꾸역꾸역 앞을 디뎠다. 그냥 피해 버릴 수도 있다. 하나, 그가 방패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건물이 위험했다.
셋이 나란히 생매장당할 수야 없잖은가.
한 발. 한 발.
태산을 오르는 산악인처럼 이 악물고 땅을 딛는다. 도르마와 고병갑 사이 거리가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덥석! 고병갑이 도르마의 팔을 잡아챘다.
「마… 마드무―」
「이 나쁜 놈아! 나도 못 알아보냐!」
그가 팔을 획 잡아당기는 동시에 다른 주먹으로 도르마의 복부에 때렸다.
「커헉… 끅!」
힘 조절했음에도 어마어마한 충격. 도르마가 왈칵 속을 게워 내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잠시 후 눈이 풀리며 기절해 버렸다.
「꺅!」
공중에 대롱대롱 걸려 있던 도란이 풀썩 쓰러졌다.
고병갑은 얼른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안색이 파란 것을 보니 꽤 오랜 시간 질식한 모양이었다. 외상의 정도도 심했다.
「콜록! 하악! 하악!」
「괜찮아, 괜찮아. 이제 끝났어.」
「로… 로드. 피가…….」
「됐어, 난 멀쩡하니까 네 몸 회복하는 거나 집중해.」
「네에…….」
고병갑은 미리 챙겨 온 포션을 도란과 도르마에게 먹이고 자신도 조금 마셨다.
그 뒤 쓰러진 도르마를 안아 들고 도란 옆에 눕혔다.
「얘 좀 봐주고 있어. 그리고.」
그가 몸을 일으킨 뒤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는 곳엔 우두커니 선 석판이 있었다.
도르마가 폭주하게 된 원흉이다.
「절대 내 쪽으로 다가오지 마.」
「아, 알겠어요.」
그가 석판으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무언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도르마는 대체 무엇을 읽었길래 정신을 놓아 버린 걸까.
그는 심호흡하며 심신을 다잡고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높이가 1미터 정도 되는 석판은 훼손된 정도가 심했다. 군데군데 부서지고 풍화도 진행돼 일부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읽어 나갔다.
-수많은 동족이 죽었다. 빌로소담마저 함락됐다. 이곳 발타드렌은 최후의 보루다. 더는 물러설 곳도, 물러날 수도 없다.
-여섯 번째를 죽이자 일곱 번째 신성 전사가 나타났다. 그 거인은 천둥과 지진을 일으킨다. 트로바틴도, 타란테라도, 파르파판도 죽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한때 뜻을 함께했던 모든 종족이 등을 돌렸다. 그들은 비열하고, 은혜를 모르며 아둔하다. 공포에 눈이 멀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니 통곡할 일이로다.
-일곱 번째 신성 전사 알샤론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아스빌람의 모든 장수가 죽었다. 랜드리올은 위독하다. 우리는 구심점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가르며 마드무트가 강림했다. 랜드리올은 자신의 애마를 직접 잡아 제를 지내고 예를 갖추었다. 그런데도 들려온 것은 호통뿐이었다.
-마드무트가 일갈하길, 우리가 ‘고블린’ 했다고 한다. 랜드리올은 호소했다. 정녕 우리가 ‘고블린’ 했소? 지상의 질서를 바란 것이 ‘고블린’ 한 것이라면 지상의 만물은 태어나기를 서로 미워하고 투쟁할 운명으로 태어났단 말이오?
-마드무트는 격분했다. 네놈들이 무슨 자격으로 질서의 척도를 세우는가? 게다가 신을 사칭한 것은 나를 능멸한 것이다!
-랜드리올은 단호했다. 우리는 항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오. 마드무트가 답했다. 너희는 멸족할 것이다.
-마드무트가 다시 천상으로 올랐다. 그 후 더 이상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의 분노를 산 대가는 참혹했다. 우리는 저주받았다.
-여인네들이 사라진다. 젖먹이 계집도, 그 계집의 어미도 해가 지고 뜨면 자취를 감춘다. 아흐레 전엔 왕비께서 사라지셨다. 랜드리올은 큰 상심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고블린’ 했을지 모른다.
“…….”
마치 일기나 수필처럼 시간별로 나열된 글귀. 아랫부분에 내용이 더 있었지만 갈려 나간 탓에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고병갑은 모든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나, 원래 알고 있던 지식과 맞물려 어느 정도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주를 내린 개자식의 이름이 마드무트인 건가?’
과거 키리얀이, 그리고 오늘 도르마가 폭주하며 중얼거린 이름 마드무트.
그건 신의 이름이었다. 얼마나 미웠으면 그 이름을 떠올린 것만으로 경기를 일으킬까.
고병갑은 숙연해진 마음으로 도르마를 흘겨보았다. 녀석은 악몽이라도 꾸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고블린 했다는 게 무슨 소리야?’
그는 읽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던 단락을 다시 한번 훑었다. 몇 번을 봐도 문구는 바뀌지 않았다.
“고블린? 고블린 했다는 게 뭔 말이야? 어떻게 고블린을 해? …자, 잠깐. 고블린이라고?”
한참을 중얼거리던 고병갑은 순간 망치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고블린이란 단어에 숨겨진 의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숨겨졌다기보다 퇴색된 본래 뜻이랄까?
그걸 어떻게 떠올렸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다시 석판을 보았을 때 이제야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읽혔다.
“랜드리올은 호소했다. 정녕 우리가 오만했소… 라고.”
그랬다.
고블린은 오만이란 뜻이었다.
* * *
「으으…….」
「정신이 좀 드냐?」
「헉! 로드시여? 이, 이게 무슨?」
고병갑의 등에 업힌 도르마가 눈을 떴다. 그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 내려 주십시오. 제 발로 가겠습니다.」
「됐어, 인마. 그냥 업혀 있어.」
고병갑은 날쌔게 다리를 놀리며 대답했다. 도르마는 다만 송구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얕게 신음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으윽! …제가 정신을 잃었던 겁니까?」
「기억나지 않는 거냐?」
「…사원에 들어갔던 것까지는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 뒤로는… 으윽!」
‘이 녀석,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고병갑은 말을 삼켰다. 괜한 말을 늘어놓았다가 도르마가 다시 폭주할까 우려됐다.
그때 도란이 못마땅한 얼굴로 도르마를 쏘아보며 말했다.
「야! 로드 옷에 피 묻은 거 안 보여? 너 때문에 로드께서 얼마나―」
「야 도란! 조용하지 못해!」
「힉!」
그가 버럭 소리쳐 도란의 입을 막았다.
도르마는 뭔가 싸한 기운을 감지한 듯했다.
「호, 혹시 제가 로드께 무슨 결례되는 짓을 한 겁니까?」
「됐어, 그런 거 아니야.」
「로, 로드… 화나셨어요?」
「됐으니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늦었다. 얼른 가자.」
도르마가 깨어나길 기다리다가 그만 시간이 지체됐다. 고병갑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해가 저물고 어둑해질 무렵. 그들은 무사히 솜니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드가 돌아왔단 소식에 온 고블린이 성벽으로 몰려들었다.
「로드시여, 돌아오셨습니까?」
「어, 고붕아. 별일 없었냐?」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행이네.」
「그, 그런데. 로드시여. 옷이?」
고병갑의 행색은 남루했다. 도르마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 내느라 옷이 다 찢어졌다. 피도 잔뜩 묻었고.
고병갑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사래 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너희 밥은 먹었냐?」
「아, 옙. 방금. 먹었습니다.」
「잘됐네. 시계탑 앞으로 모두 모이라고 해.」
「지금. 말입니까?」
「오냐.」
그가 시계탑 앞으로 고블린들일 집합시켰다. 인원이 1,500명이나 되니 앉아만 있어도 웅장했다.
「경계병들 빼고. 전부. 모였습니다.」
인원을 파악한 고붕이가 다가와 보고했다. 고병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고붕아, 신입들 밑 작업은 다 끝냈냐?」
그가 말하는 밑 작업이란 묘약 복용과 교본 각인을 뜻하는 것이다. 아스빌람에 고블린이 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그 작업이었다.
「예, 전부 끝마쳤습니다!」
「묘약이랑 교본 부족하진 않던? 많이 사 두긴 했다만.」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조금. 남았습니다.」
「그래? 내일 갈 때 싸가야겠구먼.」
고병갑이 혼잣말하자 고붕이가 깜짝 놀랐다.
「엇!? 내, 내일. 가십니까?」
「쩝. 뭐… 그러기로 했다.」
「그러… 십니까.」
정말로 떠난다니 아쉬운 모양.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고붕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곤 앞으로 나서 고블린들에게 말했다.
「모두 내 말 들리냐?」
「예! 들립니다!」
「어우, 시끄러! 야야, 대답하지 마. 그러글 몰려올라!」
「흡!」
로드의 한마디에 급히 입을 다무는 고블린들.
스무고개나 하자고 모은 것이 아니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
「모두 집중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솜니움을 떠날 거다.」
「음!?」
「지금부터 행동 강령을 말해 줄 테니 나와 함께 가기로 한 녀석들은 잘 새겨듣도록 해.」
넓은 들판에 고병갑의 목소리가 한동안 울려 퍼졌다.
* * *
솜니움에 아침이 밝았다. 보통 같았으면 이제야 슬슬 잠에서 깨어날 시각. 하지만 고블린들은 벌써 한참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리 분류, 정리해 두었던 짐을 싹 챙긴다. 누구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누구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꾸렸다.
이곳엔 정확히 1,549명의 고블린 있다.
그중 524명을 솜니움에 남고, 나머지 1,025명이 고병갑과 함께 길을 나설 것이다.
솜니움에서 마지막 식사를 마친 고블린들이 성문 앞에 모였다. 그들의 얼굴엔 긴장과 기대가 동시에 녹아 있었다.
고병갑은 떠나기 전 고붕이에게 주의 사항 몇 가지를 일러 주었다. 흘끗 보니 녀석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얀마, 너무 울상짓지 마. 아예 떠나 버리는 게 아니라니까.」
「예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두 달간은 솜니움에 자주 들릴 거야. 산에 길 내야 하거든.」
「저, 정말입니까? 그런데. 산에. 길이라니?」
「차가 다닐 수 있게 도로 하나 내려고.」
「오오!」
「원거리 통신 수단도 지금 강구 중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예, 알겠습니다!」
「오냐, 아무튼 내가 일러 준 것들 절대 잊어 먹지 말고 제발 건강하게만 있어라.」
「명심하겠습니다! 로드께서도. 건강히 지십시오!」
「오냐.」
고병갑은 고붕이의 등을 두드려 준 다음 기다란 행렬의 선두로 이동했다.
그가 고블린들을 향해 외쳤다.
「산만 내려가면 새 보금자리까지는 금방이다. 행군이 고되더라도 모두 잘 따라와 주길 바란다!」
「예! 알겠습니다!」
「몸 아프거나 이상 있는 놈들은 지금 말해!」
「…….」
「없냐? 없는 거 확실하지?」
「예! 없습니다!」
「좋아!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지키던 비스트 고블린들이 문을 열었다. 반원 모양의 문이 활짝 열렸다.
「가자!」
고병갑이 선두에 서서 행렬을 이끌었다. 고블린들은 오와 열을 칼같이 맞추며 성문을 통과했다.
마지막 인원들까지 모두 뼈져 나오자 성문은 도로 닫혔다.
바로 그때였다.
「전체! 차렷!」
성벽 위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고병갑은 깜짝 놀라서 그쪽을 보았다.
솜니움의 고블린들이 모두 성벽 위에 올라가서 이쪽을 내려보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고붕이가 외쳤다.
「로드께! 인사!」
「건강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로드시여!」
「보고 싶을. 겁니다!」
산이 떠나가라고 쩌렁쩌렁 울리는 배웅 인사. 고병갑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새끼들, 그러글 나온다고 소리치지 말라니까. 하여간 말 안 들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고병갑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뭘 멍하니 보고들 있냐? 어서 가자!」
「예! 알겠습니다!」
아스빌람 제2의 거점.
옛 지명을 그대로 딴 ‘발타드렌’을 향해 긴 행렬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