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진출
까마득하다는 단어가 썩 잘 어울리는 위치. 날이 맑지 않았으면 보이지도 않을 곳에 건물이 세워져 있다.
하도 멀어 정확한 판단은 할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나마 저게 성벽과 첨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평선까지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했었지? 대충 5킬로 정도였던가.’
언젠가 읽었던 과학 저널의 한 내용이 떠올랐다. 그리고 50킬로도 아니고 5킬로면 충분히 가 볼 만했다.
「가 보자.」
「둘러보실 작정입니까?」
도르마가 짐짓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병갑은 배낭의 버클을 조이며 대답했다.
「무슨 문제 있나?」
「혹 위험한 것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위험이라.」
글쎄, 성벽을 넘은 순간부터 이미 각종 위험에 노출된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호기심이 일었다. 무려 문명이지 않은가? 어쩌면 이곳의 원주민을 만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험을 감수해야 얻는 것도 있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걱정할 거 없어. 위험 요소라 봐야 그러글밖에 더 있냐. 그리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빠지면 돼.」
「음, 알겠습니다.」
「로드, 저기로 가는 거예요?」
「그래. 잘 발견했다, 도란.」
「헤헤!」
「이동하자.」
고병갑 일행은 멀리 보이는 건물 방향으로 다리를 놀렸다.
‘예전에 에아가 말했었지. 정령과 그러글 외 생명체는 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저곳은 혹시 정령들이 모여 사는 곳인가?’
정령 이외의 무언가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설마하니 그러글의 도시는 아닐 테니까.
만약 정령들의 도시라고 한다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정령이란 놈들도 말이 통하는 족속이야. 어쩌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몰라. 또 저기에 도시가 있다는 건 저곳의 토양이 그럭저럭 괜찮다는 의미일지 몰라.’
물론 정령들이 살갑게 반겨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흥선대원군 뺨치게 배타적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고병갑은 그들을 구워삶아 자기편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내달리길 몇십 분.
신아스빌람 최초로 정령 왕국과 국가 연맹을 맺겠다는 행복한 기대는 와장창 깨져 버렸다.
「로드시여, 이건?」
「…어, 폐허네.」
그들을 맞이한 건 폐허였다.
한때 장엄한 문명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았다.
반쯤 허물어진 성벽, 터만 남은 건물들.
그나마 높게 솟은 첨탑이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이던 게 이것인 듯싶었다.
‘정령은커녕 아무런 기척도 안 느껴지는군.’
생명의 움직임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땅도 다를 바 없고.’
꽤 먼 거리를 이동했지만 주변이 황무지인 것은 변치 않았다. 어쩌면 대륙 전체가 이 모양일지도 모를 일이다.
「킁킁? 로드, 이 근처에서 물 냄새가 나요.」
「물 냄새? 어디?」
「저쪽이요.」
도란이 앞장서서 달려갔다. 넓은 성벽을 빙 둘러 반대쪽으로 가자 정말로 강이 있었다.
원래는 상당히 큰 강이었던 모양. 못해도 한강 정도 크기는 됐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7할 정도가 메말랐다. 가장자리에는 물이 흘렀던 자국만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는 아무것도 없는 모양입니다.」
도르마가 허물어진 성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러게. 황무지가 돼서 다 떠나 버렸나 봐.」
「솜니움과는 딴판이군요.」
그러고 보면 참 신기했다. 솜니움은 그야말로 양질의 땅이 아니던가? 맑고 깨끗한 강과 숲엔 생명의 기운이 넘쳐 났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이런 황무지라니.
‘어쩌면 안개가 숲을 지키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고병갑은 착잡한 마음을 달랬다. 그가 폐허가 된 성으로 몸을 돌렸다.
「일단 들어가 보자.」
「예.」
「좋아요!」
그들은 허물어진 성벽을 넘었다. 허물어졌다곤 해도 그 높이가 상당했다.
부서진 성벽에 올라 성 내부를 들여보는데, 고병갑은 물론이고 도도 고블린즈까지 감탄사를 흘렸다.
「허… 높은 곳에서 보니까 또 색다른 느낌이군요. 이렇게 넓은 줄이야.」
「그러게, 못해도 솜니움의 열 배는 되겠어.」
「로드, 우리가 새로 살 곳도 여기처럼 넓게 지으실 거예요?」
「글쎄다, 이만큼 넓게는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훌쩍 뛰어내렸다. 두 고블린도 즉시 뒤따랐다.
「그러글이 있을지 모르니까 긴장하자.」
「네!」
「알겠습니다.」
고병갑 일행은 폐허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 * *
「로드. 이건 뭐 하는 데예요?」
「이야, 이거 목욕탕 같은데? 옆에 수로도 있고.」
그들이 폐허를 탐사한 지 어느덧 2시간이 흘렀다. 사실 말이 탐사지 거의 뭐 유적지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풍화 정도를 보면 족히 수백 년은 됐을 듯하다. 까마득한 과거의 흔적치고는 문명 수준이 상당했다.
더구나 아주 체계적으로 설계된 도시인지 구역마다 특성과 개성이 뚜렷했다. 이곳을 보니 솜니움에서 하던 건 소꿉장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고병갑은 이 유적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여기로 하자.」
그래서 늦은 점심을 먹는 도중 심경을 밝혔다.
「…예?」
즉각 취식형 보존 식량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도르마가 입을 헤 벌렸다.
「여기에 터전을 잡자. 가만 보니까 좀 망가지긴 했어도 완전히 못 쓸 정도는 아니네. 수로나 도로도 조금만 손보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고, 멀쩡한 건물도 꽤 있잖아. 성벽이 좀 문제긴 한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저는 좋아요! 저도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도란은 손까지 번쩍 들며 찬성했다.
고병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옆에 강도 흐르고 솜니움이랑도 가깝잖아. …사실 애들 데리고 무작정 허허벌판으로 나서기가 망설여졌는데, 이만하면 보금자리로 썩 괜찮은 것 같다. 네 생각은 어때?」
「로드께서 그리 정하셨다면 저야 따를 뿐이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게 있습니다.」
「뭔데?」
「보시다시피 이곳은 너무 척박합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겠습니까? 가축을 키우겠습니까?」
「그건 괜찮아.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고병갑은 종이 밥그릇을 잠시 바닥에 두고 고대의 상점을 불러냈다. 그가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하나의 물건을 사냈다.
이젠 하도 봐서 정겹기까지 한 성장의 묘약이었다.
그는 묘약 뚜껑을 열고 우선 한 모금 마셨다. 도르마와 도란은 ‘저 양반이 뭘 하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너희도 한 모금 할래?」
「…저는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아요. 그거 맛없거든요.」
「달달하니 먹을 만한데.」
고병갑은 그런가 보다 하고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대충 20밀리 정도 남았을 때 귀한 묘약을 바닥에 부어 버렸다.
「뭐, 뭘 하시는……?」
「봐 봐.」
흙이 아주 빠르게 묘약을 흡수했다. 마치 바싹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리고 잠시 후. 거의 잿빛이나 다름없었던 토양에 묘한 황톳빛이 돌았다.
고병갑은 흙은 한 줌 쥐었다. 가루 같던 감촉은 어디 가고 촉촉하고 굵은 입자가 느껴졌다.
내친김에 냄새도 한번 맡아 보았다.
「으… 로드 뭐 하세요? 왜 흙을 얼굴에?」
「이제야 좀 흙답네.」
그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묘약으로 땅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어. 말하자면 초 고성능 비료인 셈이지.」
성장의 묘약의 효능은 이미 익히 경험해 알고 있다.
닭은 타조로 만들고 고구마를 호박으로 만들지 않던가.
땅에 뿌리는 게 아깝긴 해도 이거면 황무지를 기름진 땅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역시 로드께선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그럼 이곳으로 정하신 겁니까?」
「응, 여기로 하자. 땅 개간하는 게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맨땅에 머리 박는 것보단 낫겠지.」
도르마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 그럼 이제 솜니움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조금 더 둘러보자. 아직 해가 저물려면 좀 남았으니까.」
그들은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유적 탐사를 계속했다.
고병갑은 이 넓은 영지를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계속 구상했다.
‘이 건물은 쓸 만하네. 보수 공사만 좀 하면 쓰는 데 지장 없겠어. …저건 아까워도 허물어 버려야겠다.’
그렇게 다시 1시간 정도 거닐었더니 어느덧 도시 한 바퀴를 다 돌았다.
고병갑 일행은 도시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마지막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이건… 성이로군요. 아니, 사원이라고 하는 게 더 알맞을까요?」
「와, 진짜 크다. 로드! 얼른 들어가 봐요!」
「그래, 들어가 보자.」
수십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장엄한 건물. 기둥 하나만 해도 7, 8미터는 될 법했다.
절반쯤 허물어지긴 했어도 장엄한 위용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건물로 들어섰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이야…….」
「이건 정말이지 놀랍군요.」
부서진 틈새로 햇빛이 들어왔기에 구태여 랜턴을 켤 필요가 없었다.
서늘한 건물 내부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돌로 만들어진 기다란 의자가 줄지어 늘어져 있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단상이 있었다. 마치 교회의 예배당을 보는 듯하다.
창문은 온통 모자이크 양식을 취하고 있었다. 색색의 빛이 내부로 투시되면 마치 건물 안으로 무지개가 뜬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복도와 용도 모를 방, 2층, 3층까지 뻗어 올라간 계단까지.
고병갑은 박물관에 처음 온 어린이처럼 쉴 새 없이 눈을 돌렸다. 조금 바보스럽기까지 했다.
「로드. 로드가 여기 살아요!」
아이처럼 내부 곳곳을 뛰어다니던 도란이 말했다. 고병갑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야, 여기 살면 밤에 화장실 가려다가 길 잃어 먹겠다. 애당초 여긴 주거용 시설이 아니야.」
「그치만 로드한테 잘 어울리는데.」
「넓은 게 뭐가 좋냐? 청소만 더럽게 힘들지.」
「그런가……. 그럼 내가 여기 살아도 돼요?」
「안 되지. 주거용이 아니라니까. …뭐, 에아가 보면 눈 뒤집히긴 하겠다.」
장난스레 대답하며 찬찬히 건물을 훑어보는 고병갑.
‘여긴 완전히 무너졌네.’
한쪽 벽면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로 인해 뒤쪽과 연결된 통로도 막힌 상태였다.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광경이기에 지나쳐 가려던 순간, 무언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음?’
그가 허리춤의 랜턴을 뽑아 앞을 비추었다. 건물 잔해로 그늘졌던 부분이 훤히 드러났다.
한 덩이의 커다란 파편. 원래 벽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암석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일종의 벽화인 셈이다.
거기엔 나체의 여성이 여럿 그려져 있었다. 부서진 탓에 다른 부분은 떨어져 나갔으나, 한 명의 여성만은 온전했다.
고병갑은 홀린 듯이 그림을 응시했다. 나신의 여성이 야릇하게 느껴져서가 아니다. 그림의 여성이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도, 도란.」
「네? 부르셨어요?」
「이, 이리… 와 봐.」
고병갑이 떨리는 목소리로 도란을 불렀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와 고병갑 옆에 섰다.
「왜요, 로드?」
「너 저 그림 앞에 가서 서 봐.」
「그림?」
도란은 그제야 그림을 발견했다. 그녀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로드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이렇게요?」
‘맙소사.’
고병갑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벽 잔해에 그려진 여성은 분명 ‘여성 고블린’이었다. 뾰족한 귀, 고운 흑발, 구릿빛 피부. 누가 뭐래도 도란과 닮은 부분이 많았다. 너무 비슷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고병갑은 번뜩 고개를 쳐들며 사위를 훑었다.
‘여긴 아스빌람인 건가!? 아스빌람의 옛 유적이란 말이야?’
자기가 이때까지 둘러본 것들이 아스빌람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오싹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
등 뒤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카르마와 내력의 일렁임. 힘의 파동이 꽤 커다랬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건 도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순식간에 검을 뽑으며 힘의 파동이 넘실대는 곳을 쏘아보았다.
고병갑과 도란의 시선이 합치한 곳엔 도르마가 있었다.
홀린 듯 단상의 석상을 바라보는 도르마. 그에게서 시커먼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마드무트…….」
그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