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64화 (64/151)

064. 성벽을 올리다.

24.

-쏴아아!

마치 무대 위 장막이 걷히듯, 순식간에 안개가 사라졌다. 그 마법 같은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입을 모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신기하다.」

탐험자의 깃발은 안개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역시나 일회용 아이템이다. 예상은 했다만 아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고병갑은 얼른 마음을 다잡고 고블린들을 이끌었다.

「모두 나를 따라와!」

「옙!」

「가자!」

안개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광활한 숲이었다. 이름 모를 활엽수가 빽빽하다. 키가 그리 크진 않지만, 몸통은 무척 튼실했다.

땔감 걱정은 없겠군. 고병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위를 훑었다.

‘이 정도면 되겠어.’

「도란 출발해.」

「네! 갔다 올게요.」

「너무 멀리 나갈 필요는 없어. 그리고 절대 섣불리 전투를 벌이지 마. 안 다치는 게 최우선이니까. 명심해.」

「걱정하지 마세요. 자, 가자 바보들아!」

도란이 보병대와 공격대를 이끌고 나섰다.

「로드시여.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 도르마. 애들 좀 잘 부탁한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수색대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따라가고 싶었으나, 급하기로 치면 이곳 일이 더했다. 다들 강한 녀석들이니 믿기로 하자.

「자자! 우리도 일하자!」

성벽을 올리기 전 땅부터 골라내야 했다. 고블린들은 로드가 지정해준 곳의 나무를 몽땅 베어냈다.

고병갑이라고 팔자 좋게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그는 도끼 대신 검을 들고 벌목을 시작했다.

‘이까짓 나무쯤이야.’

그가 한껏 내력을 뿜으며 검을 휘둘렀다. 상위 몬스터의 베리어에 비하면 나무줄기는 두부나 다름없었다.

「하나, 둘, 셋!」

「흣짜!」

나무가 넘어가기 무섭게 운반 담당 고블린들이 들고 날랐다.

차츰 숲에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디스크야.”

고병갑이 저릿한 허리를 달래며 검을 회수했다. 그의 주위로 썰린 통나무가 한가득하였다.

그가 단신으로 벌목한 범위만 해도 운동장 한 개 너비는 됐다.

「애들아. 여기 나무도 치워라!」

「예! 바로. 가겠습니다!」

‘나무 베는 건 거의 끝났네.’

수두룩하던 나무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이제 고작 1단계 작업이 완료된 것뿐이다.

지금부턴 흉측하게 남은 나무 밑동을 쪼개서 땅을 편평하게 만들고, 바위도 옮겨야 했다.

한 차례의 휴식도 일이 진행됐다. 그러려니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여러분 점심밥 받아 가세요!」

에아와 쪼꼬미들이 소쿠리를 들고 작업터를 방문했다. 소쿠리 안에는 커다란 주먹밥과 감자, 삶은 달걀이 가득했다.

‘주문한 대로 잘 만들어 왔네.’

고병갑은 아침에 에아에게 따로 부탁했다. 작업 인원들이 먹을 간편한 점심을 만들어달라고.

에아는 그의 요구를 아주 충실이 이행했다. 주먹밥이 밥과 소금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쉽긴 했지만, 땀 흘리고 먹으니 꿀맛처럼 느껴졌다.

「우와. 그 많던 나무를 다 잘라냈군요? 반나절도 되지 않았는데 역시 대단해요.」

「애들이 고생해줬지, 뭐.」

고병갑은 주먹밥을 우물우물 씹으며 대꾸했다. 머릿속으론 성벽을 어떻게 배치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나저나 당신에게 할 말이 있는데요.」

「음?」

「당신이 어제 내게 물었잖아요. 여기 남을 건지 함께 갈 건지. 거기에 대한 답을 하려고요.」

입가로 가져가던 주먹밥이 멈칫했다. 고병갑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어떤 결정을 했건 존중해줄 거야.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봐.」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정말? 괜찮겠어?」

에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글이 무섭긴 하지만 당신과 고블린분들이 지켜주시리라 믿으니까요.」

「당연하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네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후후.」

에아가 작게 웃으며 숲을 둘러보았다.

「사실 나가고 싶은 마음은 전부터 있었어요.」

「전부터 나가고 싶었다고?」

고병갑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에아는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동안 너무 굴렸나.’

가슴이 뜨끔거렸다. 하기야 매일 새벽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에아의 고충을 너무 나 몰라라 한 게 아닌지 후회됐다.

「그간 힘들었구나. 맞아. 네가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 내가 너한테 너무 무신경―」

「아뇨, 아뇨!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녜요.」

에아가 말을 끊으며 급히 손사래 쳤다. 그녀는 고병갑을 위로하듯 설명했다.

「이곳에서 생활은 무척 행복했어요. 여긴 안전하고, 풍요롭고, 또 언제나 활기 넘치잖아요. 나는 단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진심이에요.」

「그런데 왜?」

「그냥······ 가끔은 나도 동족이 보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아.」

고병갑이 짧게 탄식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솜니움엔 온통 고블린뿐이다. 그녀가 사교적이고 고블린들도 낯가림이 없어 잘 지낸다고만 생각했는데, 결코 넘을 수 없는 종의 차이는 존재했던 모양이다.

「사실 우리들 정령은 당신들처럼 서로에게 각별하지 않아요. 각자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부락을 꾸렸을 뿐, 정서적인 교감을 즐기지는 않았죠. 그런 의미에서 당신네를 관찰하는 일은 몹시 흥미로웠어요. 로드의 뜻 아래 일치단결하여 역경을 헤쳐나간다니. 정령의 사회에선 좀처럼 없는 일이거든요.」

「음······ 그러냐.」

「네. 그토록 서로에게 무신경한 게 우리의 생리인데도 이상하게 밤이면 동족이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나 말고 다른 니피가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당연히 있겠지.」

고병갑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충동적으로 말을 뱉어냈다.

「당장은 힘들어도 몇 달쯤 후면 여유가 생길 거야. 그때 네 동족을 찾으러 가보자. 내가 도와줄게.」

「어머? 정말인가요?」

「당연하지. 너도 우리 식구인데.」

「식구라······. 후후. 말만이라도 되게 고맙네요.」

「진심이야.」

에아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내가 가버리면 남은 고블린분들이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을까요?」

「가르쳐야지.」

고병갑이 담뱃갑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도와줘, 에아.」

「도와달라니 뭘요?」

「네가 아이들한테 요리를 가르쳐 줘. 식자재를 어떻게 보관하는지도 가르쳐 주고. 시간은 충분할 거야.」

에아는 얼마간 생각하다가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근거 없는 말은 내뱉지 않죠.」

「응. 고맙다.」

「고맙긴요! 나도 당신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걸요.」

짧은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고블린들은 다시금 작업에 착수했고, 고병갑의 진두지휘 하에 순조롭게 일을 진행했다.

오후 2시경에는 성벽을 올릴 만큼의 충분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들 내 뒤로 물러나라! 지금부터 성벽을 올릴 거다!」

「로드의. 명령이시다. 물러나라!」

로드의 명령을 듣고 고블린들이 모여들었다.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을 열고 ‘성벽’을 사들였다.

[고급 성벽]

-가격 : 55,000 수정

-설명 : 견고하게 제작된 고급 성벽.

[‘고급 성벽’을 구매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성벽을 구입한 순간. 허공으로 거대한······.

아니. 거대하단 표현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장엄한 건축물이 떠올랐다.

설치하기 전 단계라 허상에 불과했음에도 그 위용에 절로 움츠러들었다.

「우오!」

「어, 엄청. 크다!」

고블린들도 입을 쩍 벌리며 탄성을 뱉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크기로도 전방을 다 틀어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예닐곱 개는 사들여야겠군. 수정을 충분히 모아 놔서 다행이야.’

[해당 위치에 ‘고급 성벽’을 설치하시겠습니까?]

[설치를 시작합니다.]

[소요시간 약 150분]

‘150분이라. 오래도 걸리네.’

고병갑은 바위산과 맞닿은 부분부터 차근차근 성벽을 놓기 시작했다. 하나가 자리를 잡으면 옆으로 이동해 새로운 성벽을 올렸다.

성벽은 자기들끼리 저절로 맞물리며 조화로운 모양새를 이루었다. 마치 블록 장난감을 조립하는 기분이었다.

성벽 배치는 눈 깜짝할 사이 끝났다. 문제는 성벽이 실체를 잡기까지 3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는 것.

고병갑은 흘끗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 해가 저물 무렵에야 성벽이 완성될 터다.

‘그나저나 수색대 애들은 왜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거야? ······안 되겠다. 찾으러 가야겠어.’

「고붕아.」

「예. 로드시여.」

「나 잠시 수색대 애들한테 갔다 올 테니까 네가 알아서 애들 관리하고 있어라.」

「앗! 옙!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그렇게 말해둔 뒤 몸을 돌렸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 고붕이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저, 저기. 로드시여!」

「왜?」

「그······ 작업 인원들을. 복귀시키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다른걸. 합니까?」

「······.」

아무래도 너무 두루뭉술하게 명령한 터라 어려워하는 듯했다. 이전까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라’라는 식으로 시켰으니 말이다.

고병갑은 습관적으로 대답하려다가 급히 말을 삼켰다. 그리고 일부러 얄궂게 굴었다.

「네가 알아서 해 인마. 이제 네가 여기 수장이잖아. 애들 복귀시켜서 쉬게 하든지, 아니면 다른 일 시키든지. ······에이, 난 몰라. 네 맘대로 해.」

「어어······ 자, 잠시만!」

고병갑은 녀석을 무시하고 쌩 가버렸다. 고붕이가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하려면 짓궂어도 이렇게 해야 했다.

그는 우거진 수풀을 미끄럽게 스치며 한껏 내달렸다. 동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 기척을 느꼈다.

‘저쪽인가?’

확실치는 않지만, 남쪽 부근에서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숲은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점점 고도를 낮추었다. 위로는 까마득한 절벽지대인데 아래는 영 딴판이었다.

‘길만 잘 닦으면 차가 다니는 데도 문제가 없겠어.’

훗날 다른 곳에 거점을 잡더라도 차를 통해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리라. 그는 지형지물을 눈으로 익히며 열심히 움직였다.

대략 삼십 분 정도 쉴 새 없이 다리를 놀렸을까? 숲이 끝날 무렵 고병갑은 도란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녀석들은 잔뜩 긴장한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등장한 것이 로드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로드시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도르마가 암흑 구체를 거두어들이며 물었다. 고병갑은 차오르는 숨을 달랜 뒤에야 대답했다.

「야 너희들! 주기적으로 와서 얼굴 비춰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밥시간 되면 재깍재깍 밥 먹으러······. 도란 너 뭘 들고 있는 거냐?」

「아, 이거요?」

도란이 의기양양하게 뭔가를 들어 보였다.

짙은 회색빛 덩어리인데 걸쭉한 회색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젖은 걸레인 줄 알았다.

고병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히 들여보았다. 얼굴을 가까이 댄 순간 엄청난 악취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가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고개를 뺐다.

‘윽! 무슨 시궁창 냄새가? 그것보다 저거 설마 눈깔인가?’

시뻘건 동그라미가 두 개 보였다. 그 아래는 아가리로 보이는 커다란 구멍도 있었다. 그렇다면 도란이 들고 있는 건 무언가의 대가리란 말인가?

그가 뭐라고 질문하기 전에 도란이 입을 열었다.

「이거 아무래도 로드가 말한 괴물인 것 같아요. 이름이 뭐랬지? 구로갈?」

「그러글이오.」

도르마가 점잖게 정정해주었다.

「아 맞다. 그러글.」

「이게 그러글이라고?」

「로드! 얘들 무지 약하던데요? 그냥 슬쩍 때리니까 픽 죽어버렸어요.」

「잠깐만. 얘들이라고?」

고병갑은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도란이 들고 있는 것 외에 괴물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도르마가 어련히 눈치를 채고 말해주었다.

「나머지 수급은 저 아래에 있습니다. 보고를 위해 하나만 챙겨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로드께서 오신 겁니다.」

「전투를 벌였다는 거야? 몇 놈이랑?」

「흠······ 대략 스무 마리 정도였습니다.」

20마리라는 말에 고병갑은 뭔가 끊어지는 걸 느꼈다.

「도란! 내가 섣불리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했잖아! 놈들을 발견하면 보고부터 했어야지! 한두 마리고 아니고 자그마치 스무 마린데!」

「로, 로드 화내지 마세요······.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도란이 억울해 죽겠단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어딨느냐고 따져 물으려던 찰나. 도르마까지 거들고 나섰다.

「로드시여.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전투가 불가피했습니다.」

「불가피했다니 왜?」

「그, 그게······ 말로 설명하기가 좀······.」

「무슨 말이야 그게?」

도르마가 어렵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고병갑은 한번 들어나 보자는 듯이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병갑의 등 뒤로 향하던 도르마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그는 다급히 전투 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로드시여! 뒤입니다!」

「뭐?」

고병갑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곤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것들이 어디서······.」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회색빛 괴인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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