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63화 (63/151)

063. 성벽을 올리다.

21.

“슬슬 가볼까.”

고병갑이 현관에 서서 집 내부를 쓱 둘렀다. 정갈하게 정돈된 거실은 어쩐지 냉랭했다. 6평 자취방 같은 아늑함이 없다.

씁쓸함을 뒤로하고 길을 나선다. 앞으로 2~3주간은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 그가 어딜 가느냐고?

“고블린 파밍이 잘 돼야 할 텐데.”

새 식구를 찾으러 갈 심산이다.

현재 아스빌람의 고블린은 457명. 거기에 에아와 도란, 고병갑 자신까지 합치면 딱 460명이었다.

처음 33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10배도 넘게 불어난 것이나, 아직 모자랐다. 고병갑은 적어도 1,500명은 만들고 싶었다.

‘솜니움에 500~600명 정도 남겨두고 1,000명 이끌고 나가면 딱 좋은데.’

1,500명은커녕 150명이나 더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길을 나섰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밖에 더 되겠는가.

경차에 몸을 싣고 부지런히 내달린다. 전국을 2~3바퀴 돌려면 2주도 촉박할 듯했다.

22.

「자, 이 문을 넘으면 아스빌람이다. 줄 맞춰서 들어가.」

「오오! 아스빌람!」

초장부터 일진이 좋다.

처음 발을 들인 D랭크 균열에서 107명의 고블린을 만났다. 자고로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은 법 아니겠는가.

「고붕아 신입 받아라!」

「옙!」

「일단 좀 씻기고 밥 먹여라.」

「알겠습니다!」

신입 교육은 고붕이에게 맡기고 바로 다음 균열로 향했다. 그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흐흐흐. 이 기세면 닷새면 떡을 치겠는데?”

······놀랍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허탕.

세 번째 허탕.

네 번째 역시 허탕.

“우어어어―얽!”

“아니 뭔 놈의 두두리만 이렇게 나와!? 테마파크냐?”

고병갑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그었다. 식물형 괴수 두두리가 온 사방으로 파편을 쏟으며 죽었다.

‘이것들은 먹지도 못하는데 그냥 나갈까? ······아니다. 장작이나 재료로 쓰면 되지 뭐.’

어차피 오늘은 날이 늦어 더이상 균열 탐사는 어렵다. 결심을 굳힌 그가 파죽지세로 검을 휘두르며 이면 세계를 섭렵했다.

이제 E랭크 균열쯤이야 준비운동도 되지 못했다.

두두리의 수급을 회수하는 것으로 일과가 끝났다. 그는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며칠 사이 급변한 아스빌람이 낯설다.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지.’

이제는 번듯한 마을 느낌이 났다. 물론 좀 향토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그게 또 아스빌람만의 매력 아니겠는가?

「아! 로드. 오셨습니까?」

「어, 고붕고붕 고붕이. 저녁은 먹었냐?」

「방금. 먹었습니다. 로드께선. 식사하셨습니까?」

「나도 먹었지. 새로 온 애들은?」

고붕이가 손가락으로 숙소를 가리켰다.

「숙소로. 안내해주었습니다. 작업은. 내일부터. 가르치려 합니다.」

「오냐 잘했다.」

「헤헤!」

「그것보다 고붕아. 애들 좀 집합시키자.」

「지금. 말입니까?」

「응. 전부 시계탑 앞으로 모이라고 해. 새로 온 애들도.」

「알겠습니다!」

고붕이가 숙영지 쪽으로 얼른 뛰어갔다. 고병갑은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며 들판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닭장도 들렸다. 요새 수탉과 암탉을 자주 합방시켰더니 영계나 병아리가 심심찮게 보였다.

‘닭장 넓힌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늘려야겠네. ······얘들은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새끼 치고 다 하는구나.’

그는 닭을 보며 고블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수탉과 암탉의 합방.

수컷 고블린과 암컷 고블린의 합······.

“스읍. 그건 좀······.”

그는 머리가 탁해지는 것을 느끼곤 얼른 생각을 떨쳐냈다.

솔직히 그의 입장도 곤란했다.

처음 비싼 돈을 지불하고 암컷 고블린을 들일 때만 해도 금술 좋은 고블린 부부가 순풍순풍 자식을 낳는 그림을 기대했다.

그런데 도란을 본 순간 그런 기대가 와장창 무너졌다. 도란은 아무리 높게 쳐줘도 고작 열 대여섯이었다.

‘그 조그만 애한테 어떻게 그러냐. 말도 안 되지.’

물론 고블린들에게 인간의 윤리관을 대입하는 게 무의미한 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가 인간인 것을.

사실 윤리보다도 고블린들의 사상 자체가 문제였다. 녀석들은 ‘수컷’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어떤 욕망’이 전혀 없었다.

‘도르마에게 듣긴 했다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아스빌람의 고블린 중 도란에게 연심을 품는 녀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도란이란 동료 고블린, 혹은 무서운 교관일 뿐이었다. 물론 반대 입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고병갑은 이 대목에서 안심해야 할지, 탄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가 됐건 사건 사고가 없으니 다행이긴 하다만······.

“생각 없는 연놈들 한 지붕 안에 밀어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휴 골치 아프구먼.”

「로드시여! 전부. 모였습니다!」

고붕이가 손을 머리 위로 휘저으며 소리쳤다. 고병갑은 몸을 일으켰다.

「어 지금 간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일단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고블린들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내면 어떻게든 되리라.

시계탑 앞에 가니 고블린들이 잔뜩 모여 있다. 도란과 에아도 함께였다.

「전부 모인 거야?」

「옙! 한 명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좋아. 고붕이 넌 내 옆에 있어라.」

슬쩍 빠지려던 고붕이가 멈칫했다. 녀석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밥은 잘들 먹었냐?」

「예!」

저녁 안부를 묻는다. 고블린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니 들판이 쩌렁쩌렁 울렸다.

‘아이고 귀야······.’ 고병갑은 소리를 낮추라 듯 손동작을 취했다.

「쉬는데 불러내서 미안하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모은 건 몇 가지 공지할 게 있어서다.」

「무엇입니까?」

「우선은 이곳의 지명을 전파해주마. 오늘부로 이곳 바위산을 솜니움이라고 명명하겠다! 솜니움은 아스빌람의 제1 거점이 될 거야.」

「솜니움?」

고블린들은 그 단어가 익숙지 않은지 몇 번이나 되뇌었다.

「다들 잘 기억해둬. 훗날 내가 솜니움으로 가라고 하면 이곳으로 오면 되는 거야.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으엇?」

그가 고붕이의 팔을 잡아채고 자기 앞에 세웠다.

「솜니움의 수장은 이놈 고붕이가 맡는다. 내가 없을 때는 고붕이의 말을 들으면 돼. 알아듣겠냐?」

「알겠습니다!」

「자, 그럼 고붕이는 소감 한마디 해라.」

「예? 소, 소감. 말입니까?」

녀석이 당황한 기색으로 군중과 로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빨리해. 애들 기다리잖아.」

「아! 옙! 어······ 자···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자아, 박수.」

짝짝짝!

박수갈채를 받으며 조촐한 임명식이 끝났다.

반박이나 이의는 전혀 없었다. 모든 고블린은 로드 아래 평등했고, 로드의 명령을 절대적이니까.

「그리고 이제 본론을 말하겠다. 도란!」

「네, 로드!」

호명된 도란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고병갑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제 일이 보병대. 내가 부른 애들 일어나 봐.」

고병갑이 지목한 고블린들이 몸을 일으켰다.

총 61명이었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작업에서 열외야.」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 고블린이 물었다. 고병갑은 대답을 미루고 안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블린들도 자연히 그를 따라 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저 안개를 걷을 거다.」

「음!?」

「갑자기 말입니까? 아직 말씀하신 기한이 남지 않았습니까?」

도르마가 당황한 기색으로 질문했다. 다른 고블린들도 웅성거리긴 마찬가지였다.

「하산하겠다는 말이 아니야. 솜니움에 성벽을 쌓을 거다.」

「성벽 말입니까?」

「그래. 강을 안으로 두고 성벽을 쌓아야 해. 그러려면 숲의 나무도 베어내야 할 거고 바위도 치워야 하지.」

고병갑은 고개를 돌려 도란을 보았다.

「도란. 네가 앞으로 보병대장이다. 너는 내일부터 보병대를 이끌고 경계를 서.」

「경계요?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간단해. 솜니움 근방을 돌아다니며 위험 요소가 있는지 살피는 거야.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무장부터 갖춰.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알겠어요!」

「일이 보병대. 너희는 앞으로 도란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 이해했지?」

「예! 이해했습니다!」

「그래. 주의사항이나 자세한 행동강령은 내일 따로 전파해주마. 고붕아.」

「아! 예!」

「내일 일어나면 작업 인원 150명만 꼽아서 식당 앞으로 대기시켜놔. 삽이랑 도끼 챙겨서.」

「옙! 알겠습니다.」

「좋아. 전파 끝! 다들 해산해!」

「고생하셨습니다!」

해산 명령에 고블린들이 흩어졌다.

고병갑은 그들 틈에서 에아를 찾아낸 뒤에 불렀다.

「에아.」

「음? 나를 불렀나요?」

「어. 나랑 얘기 좀 하자.」

「좋아요.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나 보죠?」

「뭔데요? 또 둘이서만 얘기하는 거예요? 나도 끼워줘요!」

「······그래, 도란. 너도 이리 와서 앉아 봐.」

에아와 도란이 다가왔다. 세 사람은 시계탑 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할 얘기라는 게 뭐죠? 당신 표정을 보니 나는 좀 불안해지네요. 나쁜 소식인가요?」

「에아.」

「네. 말하세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곧 고블린들을 이끌고 새로운 거점을 찾아 떠날 생각이야.」

「네. 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얼마 전 식당에서 말했잖아요. 나도 그 자리엔 있었고요.」

「그래서 말인데······.」

고병갑이 우물거리자 에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놀랄 준비를 하면 되나요? 당신답지 않게 뜸을 들이네요.」

「에아 넌 여기 있을래? 아니면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갈래?」

「네?」

에아의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 고병갑은 도란에게도 같은 것을 물었다.

「도란 너도 생각해 봐. 여기 있을래? 아니면 나와―」

「저는 로드 따라갈 거예요! 무조건이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란이 답했다. 고병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란이 팔에 엉겨 붙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나 두고 갈 거 아니죠? 나도 데려가 주세요!」

「걱정하지 마. 넌 원래부터 데려가려고 했으니까.」

「정말이죠? 휴우······.」

도란이 걸릴 것도 없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아 네 생각은 어때?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야.」

「음······.」

에아는 잠시간 고민에 잠겼다. 얼마 뒤 그녀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당신의 여정에 내가 필요한가요?」

「네 지식이 필요해. 안개 너머가 어떤지는 네가 제일 잘 알 테니까. 당연히 강요는 아니야. 네가 여기 있든 함께 가든 어느 쪽이라도 난 만족해.」

「내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겠어요?」

「알겠어. 대신 되도록 빨리 알려줘.」

「내일 중에는 말해 줄게요.」

「그래. 둘 다 이제 가봐.」

「로드. 안녕히 주무세요!」

「오냐. 너도 잘 자라.」

두 여인네도 떠나보낸다. 고병갑은 이래저래 심경이 복잡해 담배 한 대를 꼬나물었다.

23.

「모두 모였나?」

「예!」

고블린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삽과 도끼를 든 150명의 일꾼. 그 옆에는 창칼로 무장한 보병대와 공격대가 있었다.

「아까도 설명했지만, 속도가 중요하다. 다들 바짝 긴장하고 최대한 빨리 끝내자.」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란.」

「네, 로드!」

「혹여라도 그러글이란 괴물과 조우하면 절대 섣불리 공격하지 마라. 보고가 최우선이야. 명심해.」

「알겠어요! 맡겨만 두세요!」

「공격대. 너희들은 오늘 도란과 함께 움직이면서 보조해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르마가 대표로 말했다.

고병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점 창을 열었다.

‘고대의 상점’

[탐험자의 깃발]

-가격 : 500,000 수정

-설명 : 희대의 탐험가이자 대륙의 정복자인 랜드리올이 사용하던 깃발. 미개척지에 사용하면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드디어 사는구나. 탐험자의 깃발!’

그는 망설이지 않고 깃발을 사들였다. 허공에 빛이 일렁이더니 곧 웅장한 자태의 깃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수들이 들고 있을 법한, 크고 넓은 깃발이다. 삼각형 천에는 날개 달린 검이 그려져 있었다.

깃발을 손에 쥐자마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미개척지에 깃발을 꽂으십시오.]

‘나도 알아.’

고병갑이 두 손으로 깃발을 잡았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안개를 코앞에 두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불안감과 기대감이 뒤섞이며 요상한 기분을 만들어냈다.

그가 고블린들을 쓱 돌아보았다. 다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고병갑은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소리쳤다.

「가자! 신 아스빌람의 첫 진출이다!」

함성과 함께 안개에 깃발을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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