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신년맞이
17.
“하······ 하하.”
은행 본점을 빠져나오는 고병갑. 그의 입은 쉴 새 없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새어 나오는 것을 막으려 해도 영 신통치 않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오늘만큼은 나사 두어 개쯤 풀린 사람처럼 보여도 괜찮았다.
“다 갚았어. 다 갚았다고! 으아아아! 내가 해냈다!”
“엄마 저 아저씨 왜 저래?”
“쉿! 쳐다보지 마!”
길 한복판에서 만세를 부르짖는 고병갑. 행인들이 슬금슬금 피한다. 그는 개의치 않고 깍지낀 손을 이마 높이로 들어 올려 부르르 떨었다.
‘평생 시달릴 줄 알았는데. 장하다, 병갑아!’
원정대 정산이 완료됐다. 그가 지급받은 돈은 21억에 달했다. 세금 떼고 실제 통장에 찍힌 액수가 21억이란 소리다.
고병갑은 돈을 지급받자마자 지긋지긋한 채무를 청산했다. 그래도 19억이 넘게 남았다.
‘이 돈으로 뭐하지?’
돈 들어오니 쓸 궁리부터 한다. 그런데 고기도 먹어본 놈이 썰 줄 안다고, 갑자기 큰돈이 들어오니 어떻게 손대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가 조금 더 똑똑하고 외견이 넓었다면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재테크를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방면에 관해선 지식도 경험도 전무했다.
‘기분 낸다고 흥청망청 써버리면 패가망신할지 몰라. 꼭 필요한 것부터 차근차근 바꿔 나가자.’
그날부로 고병갑은 바빠졌다.
우선은 이사부터 준비했다. 2년간 살아온 6평짜리 원룸 자취방을 정리하고, 부동산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물색했다.
‘엄마도 있고 하니 서울엔 계속 있어야 하는데 괜찮은 매물은 너무 비싸네. ······안 되겠다. 일단 전세로 가자. 괜찮아. 난 아직 젊고 돈 벌 날도 많으니까.’
고병갑은 용산구에 있는 모 오피스텔과 전세 계약을 맺었다. 전세금은 4억 6천만 원 정도. 처자식이 딸린 것도 아니니 구태여 아파트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아유. 병갑 총각 간다니까 너무 아쉽네.”
정들었던(?) 신림동 빌라촌을 떠나는 날. 한창 이삿짐을 옮기려니 집주인 아줌마가 찾아왔다.
고병갑이 떠나는 게 아쉬운 걸까 아니면 세입자가 떠나는 게 아쉬운 걸까? 글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가서도 잘 살아요.”
“네. 사모님도 건강하세요.”
이삿짐센터 차를 얻어타고 새집으로 향한다. 오피스텔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신축이라 건물도 깔끔하고 주변 인프라도 좋았다. 무엇보다 엄마 병원이 도보 10분 거리에 있었다.
다만 허한 공실이었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채워 넣는 재미가 있었다.
주문해놓은 가구를 들이고 짐 정리를 마치니 어느덧 밤이었다. 환한 서울 야경을 내려보는데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쩝. 이사를 해도 집들이해주는 친구 하나 없네.”
자랑은 아니다만 그의 인간관계는 무척 협소했다. 그가 특별히 모난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주변 상황이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군대 전역하고는 돈 벌고 빚 갚는다고 정신없었으니까. 인제 와서 뻔뻔히 연락 돌리기도 뭐하네.’
고등학생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2년간 동고동락한 군대 동기들.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딱히 막 기쁘지도 않네. 이렇게 좋은 집을 얻었는데.”
휑한 집을 보며 독백한다. 말마따나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전세긴 해도 어쨌든 내 집 마련을 했는데 말이다.
차라리 아스빌람에 첫 천막을 세웠을 때가 더 기뻤다. 그렇다면 이곳과 그곳의 차이가 뭘까?
“날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느냐 없느냐 차이겠지.”
그가 맥주를 홀짝이며 피식 웃었다. 세상에 이런 감상에 젖는 날이 오다니!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하긴 이제 며칠 뒤면 스물여섯이 아니던가.
어쨌건 새집에서 첫날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다음날. 고병갑은 새 차를 뽑으려 매장을 방문했다.
자고로 차는 남자의 로망이다. 더불어 헌터에겐 없어서 안 될 넘버원 아이템이고.
고병갑은 정선경이 몰던 멋들어진 외제 SUV를 떠올렸다. 솔직히 그런 걸 사고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치였다.
그래서 적당히 국산 차로 합의를 보았다.
“요즘 국산도 잘 나와요. 국산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바보죠.”
매장 딜러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신토불이 신봉자인가?
아무튼 벌써 눈도장 찍어둔 차가 있었기에 계약은 금방 끝났다.
국산 대형 SUV로 계약을 맺는다. 풀옵션 5,600만 원을 일시불로 긁으니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출고는 빠르면 한 달 길면 두세 달 정도 걸릴 겁니다!”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려요.”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고병갑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매장을 빠져나왔다. 그를 기다리는 건 여전히 소형 경차였다. 이 귀염둥이를 몰 날도 얼마 안 남았구나.
하도 낡아서 되팔 수도 없는 녀석이다. 높은 확률로 폐차장에 갈 운명이리라.
자취방 비울 때는 별생각 안 들었는데, 이놈을 폐차시키려니 꽤 슬플 것 같았다.
“잠깐. 굳이 폐차할 필요는 없잖아. 아스빌람으로 가지고 가서 끌고 다니면 되지.”
그의 머릿속으로 재밌는 그림이 그려졌다.
18.
“오, 사, 삼, 이, 일. ······허. 진짜 2026년이 와버렸네.”
2026년 1월 1일. 고병갑은 아스빌람에서 신년을 맞이했다.
사실 신년이라고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뜬금없이 세상이 뒤집힐 리도 없고.
흔들의자에 앉아서 별을 세노라니 팔에 닭살이 돋았다. 밤공기가 서늘하다.
“쌀쌀하네.”
예상대로 아스빌람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하지만 한국의 겨울처럼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 것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늦가을쯤 날씨. 아무래도 이곳은 1년 내내 온난한 기후인 모양이다.
“해(年) 넘어가는 것도 봤으니 자야겠구먼.”
고병갑은 아스빌람에 마련된 거처로 가서 잠을 청했다.
요새는 집보다 이곳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았다. 원정에서 복귀한 이후 토벌을 쉬고 있기도 했고.
요샌 밥도 잠도 거의 이곳에서 해결했다.
날이 밝았다.
고블린들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일과를 준비했다. 고병갑도 오늘만큼은 새벽 일찍 깨어났다. 고블린들에게 손수 해주고 싶은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 어머?」
「좋은 아침이야, 에아.」
「네. 좋은 새벽녘이네요. 그나저나 이렇게 이른 시각에 어쩐 일이에요? 난 당신이 식당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오랜만에 요리 좀 하려고. 애들한테 만들어주고 싶은 음식이 있어서.」
「당신이요? 당신 요리도 할 줄 아나요?」
「얘가 사람을 뭐로 보고. 이래 봬도 방구석 미슐랭 쉐프거든?」
「미슐랭? 쉐프? ······나는 가끔 당신이 하는 말이 어려울 때가 있어요. 지금도 딱 그렇고요.」
「그냥 대단한 것이구나 생각하면 돼.」
「그런가요? 명쾌하네요.」
실제로 고병갑은 꽤 괜찮은 요리 솜씨를 가졌다. 귀찮아서 안 할 뿐이지.
그런 그도 꼭 팬을 잡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의 생일과 새해였다. 미역국과 떡국을 누가 챙겨주지 않으니 해 먹는 수밖에.
「그나저나 도란은?」
「아직 자고 있어요. 그녀가 아침잠이 많다는 걸 몰랐군요? 도란은 상당한 잠꾸러기예요.」
「깨우지 그랬어.」
에아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녀가 푹 자는 게 좋아요. 식사 준비야 나와 고블린분들이 하면 되는 거니까요.」
「너도 참 별나다.」
「에아 안녕. 엥?」
「로드다!」
「로드. 왜 여깄어?」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던가. 식사 준비를 돕는 쪼꼬미들이 몰려왔다.
고병갑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에아가 입을 열었다.
「오늘 당신들 로드가 맛있는 아침밥을 만들어준대요! 기대되지 않나요?」
「오오!」
「기대된다!」
「에이, 호들갑 떨지 마. 대단한 거 아니니까.」
「어머. 아까는 대단하다고 하더니 이번엔 아니라고요? 그럼 나는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죠?」
「······.」
하여간 얘는 사람 말문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고병갑은 그렇게 구시렁대며 팔을 걷어붙였다.
「자, 지금부터 임무를 주겠다. 너희 둘은 어제 내가 들고 온 거 이리로 가지고 와. 너희는 물 떠온 뒤에 큰 솥에 불 올리고.」
「응!」
「알았다!」
「에아는 남은 애들 데리고 가서 달걀 좀 가져와 줘.」
「좋아요! 얼마나 필요하죠?」
「한 오륙십 개정도면 될 거야.」
「맡겨둬요!」
고병갑의 지시에 따라 척척 움직이는 인원들. 곧 본격적으로 요리가 시작됐다.
예상했겠지만 그가 만들려는 음식은 떡국이었다.
‘떡국이 뭐 대수냐? 다 때려 넣고 끓이면 되지.’
사골 육수와 물을 적당히 배합해 베이스를 만든다. 거기에 파, 떡, 고기, 달걀 등을 몽땅 투하하고 소금과 간장, 조미료로 간을 맞추면 끝.
살짝 간을 보는데 딱 좋았다. 냄새도 기가 막혔다.
슬슬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식당으로 도란이 들어섰다. 에아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인사를 건넸다.
「아! 도란 어서 와요. 잠은 잘 잘나요?」
「응 잘 잤어. 그런데 로드는 여기서 뭐해요?」
「도란 놀라지 말아요. 당신 로드가 글쎄 손수 아침밥을 해주겠다고 새벽 일찍부터 일어났지 뭐예요?」
「진짜? 그럼 지금 만들고 있는 것도 로드가 한 거야?」
「맞아요. 냄새가 참 좋지 않나요?」
「응응!」
「어휴 참······. 이게 무슨 유난이라고.」
고병갑은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어깨가 으쓱거렸다. 그래! 내가 바로 이렇게 세심히 잘 챙겨주는 로드다! 세상에 손수 밥해주는 군주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고병갑은 떡이 눌어붙지 않게 젓다가 번뜩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도란. 너도 가끔은 일찍 일어나서 에아 좀 도와줘라. 저 빼빼 마른 애가 새벽부터 얼마나 고생하냐?」
「네? 아··· 아니 그게······.」
도란이 어물거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에아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에아! 내가 깨워달라고 했잖아! 왜 안 깨웠어!」
「네? 도란이 언제―」
「시끄러 바보야! 난 분명 말했어!」
「미, 미안해요. 내가 못 들었나 봐요. 그리고 나는 도란이 푹 자는 게 좋아서······.」
「진짜 짜증나!」
도란이 획 몸을 돌리더니 뛰쳐나갔다.
「이야······ 쟤는 진짜 도사견이다, 도사견. 어찌 저리 사나울꼬.」
고병갑은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반면 에아는 풀죽은 얼굴로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그녀에게 왜 그런 말을 했어요. 나는 정말 괜찮은데······. 도란에게 미움을 사버린 거면 어쩌죠?」
「냅둬. 좀 있으면 풀리겠지.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기 쪼꼬미들. 가서 애들보고 슬슬 밥 먹으라고 해.」
「응. 알았다.」
쪼꼬미들을 보내자 곧 고블린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각자 그릇을 들고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다. 고병갑은 손수 떡국을 퍼주며 자기가 만들었음을 어필했다.
감사하다는 말로 귀에 딱지가 앉을 무렵 드디어 배식이 끝났다. 고병갑은 자기 몫을 퍼서 빈자리에 앉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로드. 맛있게 먹어!」
「오냐. 너희도 맛있게 먹어라.」
고병갑은 흘끗 옆을 보았다. 마침 옆자리에 새 식구인 바몬드가 앉아 있었다.
녀석은 아직 수저로 음식을 퍼먹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다. 고병갑은 떡을 으적으적 씹으며 슬쩍 말했다.
「어이, 바몬드.」
「아! 아, 예예 로드시여. 말씀하십시오.」
「뭐야. 뭘 그렇게 놀래?」
「아하하······.」
「다른 건 아니고. 어때? 음식은 입에 맞냐?」
그가 기대 만발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몬드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맛있습니다.」
「······그게 다야? 좀 약한데.」
「예?」
「고붕아!」
「옙!」
다섯 자리쯤 옆에 앉은 고붕이가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가히 놀라운 반응속도다.
「먹을 만하냐?」
「예! 너무 맛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봅니다!」
「으음 좋아좋아. 아주 바람직해.」
고병갑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바몬드를 보았다. 바몬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봤지? 앞으론 저렇게 하면 돼.」
「무··· 무슨 말씀이신지.」
「됐어. 농담이니까 밥이나 먹어.」
「어······ 예 알겠습니다. 저, 저도 무척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오냐.」
‘얘는 고블린답지 않게 성격이 무던하네. 낯도 좀 가리는 것 같고.’
바몬드는 여느 고블린들과는 사뭇 달랐다. 뭐,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도르마만 하더라도 다른 녀석들과 달리 진중한 분위기이지 않은가.
그리고 아스빌람의 모든 고블린이 꺄르륵대기만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 아픈 일이리라.
‘흠. 이쯤에서 말할까?’
고병갑은 식당을 한 바퀴 쓱 훑었다.
아스빌람의 모든 고블린이 모여 있으니 따로 집합시킬 필요가 없으리라.
「애들아. 잠깐 집중해봐.」
「응?」
고병갑이 큰 소리로 말했다. 고블린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주의를 기울였다.
「너희에게 공지할 게 있어.」
「공지?」
「무엇입니까? 혹시 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도르마가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병갑은 한 박자 쉬고 선포하듯이 말했다.
「모두 잘 들어. 앞으로 한 달 내에 안개를 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