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60화 (60/151)

060. 원정 끝!

16.

“으으······.”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속눈썹이 벌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눈이 뜨였다.

“······.”

고병갑은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상황 파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에 익은 실내 구조. 은은한 소독약 냄새. 무엇보다 팔에 꽂힌 링거 바늘. 이곳은 병원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다가 문득 통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지막 기억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까무러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트로바틴의 영혼과 동화가 풀리자마자 시작된 반동. 기절하고 깨어나고, 다시 기절하고 깨어나길 수없이 반복했다. 어쩌면 3~4번 쯤은 죽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며칠이지? 고병갑은 번뜩 고개를 쳐들며 시계나 달력을 찾았다. 침대 옆 테이블에 본인의 핸드폰이 있었다.

-12월 24일

-11:26 AM

“뭐!?”

발록과의 전투는 12월 20일이었다. 핸드폰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면 나흘이나 기절했단 소리.

고병갑은 링거를 뽑아낸 후 옷걸이에 걸린 옷을 집어 들었다. 잘 세탁된 상태였다. 얼른 갈아입는다. 그러다 스치듯 창밖을 보는데 커다란 트리가 보였다.

“벌써 크리스마스이브구나. ······이럴 때가 아니지.”

고블린들이 걱정됐다. 무려 열흘 넘게 아스빌람을 들르지 못했다. 녀석들은 목이 빠지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짐을 챙기고 병실 문을 여는데 누군가 서 있었다. 사복 차림의 정선경이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고병갑을 올려보았다.

“너··· 너 언제 깨어났어? 아니, 그것보다 몸은 괜찮은 거야?”

그녀가 고병갑의 몸을 더듬거렸다. 고병갑은 그녀의 손길을 덜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야 진짜 너 죽는 줄 알고 식겁했잖아.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꽈배기가 되느냐고.”

고병갑은 꽈배기란 말이 우스워 작게 웃었다.

“다른 조원들은?”

“그 인간들? 전부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마.”

“휴. 다행이네.”

“네 덕분이지.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단체로 신과 함께 찍고 있었을걸.”

장난스레 대답하는 정선경. 그녀의 반응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원정도 잘 끝났어. 그나저나 너 어딜 가려고?”

“어딜 가긴. 집에 가야지.”

“뭐? 얘가 진짜 미쳤나! 방금 깨어난 애가 집은 무슨 집이야. 얼른 도로 가서 누워!”

정선경이 고병갑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누나 이거 왜 이래!? 나 멀쩡하다니까!”

“지랄하고 있네! 어제까지만 해도 피 토하고 난리였는데 멀쩡은 뭔 놈의 멀쩡이야!”

“아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정말 문제없대도?”

“네가 허준이냐? 진짜 죽을래?”

고병갑은 몇 시간이나 더 병원에 잡혀있어야 했다. 정선경의 강압에 못 이겨 각종 정밀검사까지 받았다.

몸에 별 이상이 없다는 검진표를 얻어낸 뒤에야 그녀의 기세가 좀 누그러졌다.

“며칠간 더 입원해 계시는 걸 추천해 드리지만······ 뭐, 원하시면 퇴원하셔도 무관합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멀쩡하다니까.”

“아니, 의사 선생님. 얘 진짜 멀쩡한 거 맞아요? 어제까지만 해도 피 토하고 난리 났어요.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아무래도 각성자분들은 일반인과 체질 자체가 다르니까요. 이런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

고병갑은 오후 4시 무렵 병원을 빠져나왔다. 사근사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모양이다.

“내가 볼 때 그 인간 돌팔이야.”

“아직도 그 소리야? 그리고 누나는 왜 따라 나와?”

“뭐래. 나는 진즉 퇴원했어.”

“······나보다는 누나가 더 입원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심하게 당했는데.”

“됐어, 짜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기가 막히네.”

고병갑은 그녀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전달받았다.

1차 원정대가 전면 철수하자마자 2차 원정대가 투입됐다는 것. 원정대의 복귀를 축하하는 연회가 다음 주 월요일에 열린다는 것.

그리고 S급 몬스터를 무사 퇴치한 C조에게 1.5억가량의 추가 수당이 지급된다는 것 등등.

“아, 맞아. 너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함구하기로 했어. 본인도 아닌데 멋대로 떠들고 다니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물론 네 공을 가로채겠다는 뜻은 아니야. 병갑이 너만 원한다면 우리가 증인을 서줄 수 있어.”

“흠.”

“라고 부영건 그 인간이 전해달래.”

고병갑이 턱을 긁적였다. 지저분히 자란 수염의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왜 힘을 숨기고 활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신으로 발록을 잡은 게 알려지면 여러 저명한 길드에서 섭외가 들어올 거야. 너 항상 말했잖아, 궁핍하게 살고 있다고. 이참에 인생 역전해봐. 아니면 우리 길드에 들어와도 좋고. 내가 좋게 말해줄 수 있어.”

“언더문에?”

“5대 명문은 아니지만 언더문 정도면 꽤 괜찮은 길드거든.”

고병갑은 얼마간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선경은 ‘그럴 것 같더라.’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밀로 해줘. 난 지금 상태가 제일 편해.”

“네 뜻이 그렇다면야 하는 수 없지.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너 정말 정체가 뭐야?”

“정체? 무슨 정체? 내가 사람이 아니라 고블린으로 보이기라도 하는가 보지?”

“네가 사용하는 요상한 힘이랑 능력 말하는 거야. 난 그런 게 있다는 말조차 못 들어봤어.”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능청 떨었다.

“내 정보는 그렇게 따는 게 아닌데.”

“이게······ 까부네?”

“좀 더 노력해봐.”

“뭐 노력? 하! 이게 나를 뭐로 보고!”

걷다 보니 병원에 딸린 커다란 공용 주차장까지 다다랐다. 정선경은 2억을 가볍게 호가하는 고급 SUV 앞에 섰다.

그녀가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타. 오늘 밤새도록 노력해줄 테니까.”

고병갑은 몸속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걸 보고 ‘각이 섰다.’라고 하는가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나 오늘은 집에 가야 해.”

“······왜? 피곤해?”

“그런 것도 있고······ 아무튼 집에 가야 해. 할 일이 있거든.”

“치. 집에 신줏단지라도 모셔뒀냐? 아니면 널 애타게 기다리는 우렁각시라도 있나 보지?”

“아쉽게도 우렁각시는 아닌데, 뭐 비슷하긴 하지.”

“허!”

정선경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진짜 정선경 31년 인생 최대 굴욕이다. ······타, 바보야.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그럼 사양 않고.”

고병갑은 정선경의 차에 얻어타고 집까지 향했다.

“아, 맞다. 나 시장 들려야 해.”

“시장? 시장은 왜?”

“고기 좀 사야 해서. 이 근처에 적당히 내려줘. 내가 알아서 갈게.”

“참나. 됐어, 같이 가.”

두 사람은 집 근처 재래시장을 찾았다. 시장은 평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고병갑은 평소 가던 정육점을 방문했다.

“이야 이런 시장 진짜 오랜만에 와본다. 한 10년도 넘은 것 같아.”

“그럼 장은 어디서 봐? 마트에서?”

“장을 왜 보냐? 사 먹거나 시켜 먹으면 되지. 그나저나 무슨 고기를 얼마나 사려고? 내가 사줄게.”

“진짜? 많이 살 건데 괜찮겠어?”

“야······ 너 나를 얼마나 무시하는 거야?”

고병갑은 땡잡았다고 생각하고 신나게 말했다.

“사장님. 삼겹살 얼마나 있어요? 한 300근 정도 있어요?”

“사, 삼백 근이요?”

“야 잠깐만! 무슨 300근이야!? 너 장난치지 마!”

정선경이 기겁했다. 정육점 사장도 황당하단 반응을 보였다.

“장난치는 거 아닌데.”

“저 고객님. 혹시 몇 명이나 잡수시려고요?”

“400명 좀 넘어요.”

“아니 그러면 차라리 공판장에 가시지.”

“사백······ 명이라고?”

400명이 넘는다는 말에 정선경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야 병갑아. 너 혹시.”

“응?”

정선경이 뜸을 들이더니 쩝 입맛을 다셨다.

“아무것도 아니야. 너 좋은 일 많이 하나 보네.”

그녀는 뭔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병갑으로선 그녀가 뭘 유추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손님. 식수 인원이 그 정도면 차라리 통돼지를 서너 마리 사시죠?”

“그럼 그럴까요?”

“예. 그편이 값도 저렴하고 더 낫죠.”

“그럼 그렇게 주세요. 누나 고기는 그냥 내가 살게.”

“야야. 아니야, 내가 사줄게. 사장님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정선경은 좀전과 달리 선뜻 카드를 내밀었다. 그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이 먹을지 어르신들이 잡수실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내가 사는 거라고 꼭 말해라.”

정육점에선 비닐랩에 둘둘 말린 통돼지를 4마리나 건네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고 가는 것조차 힘에 부칠 테지만, 고병갑은 문제가 없었다.

“허이구야. 남자친구분께서 힘이 장사시네요.”

“그렇죠? 밤에는 더해요. 호호호!”

“허허허! 아이고 못 당하겠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맛있게 잡수세요!”

“많이 파세요~”

두 사람은 정육점을 벗어나 다시 차로 갔다. 정선경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내 귀염둥이에 그런 흉측한 걸 실어야 한다니. 음? 뭐, 뭐야?”

고병갑은 4마리의 통돼지를 아스빌람에 보내버렸다. 본래 남 앞에선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게 철칙이나, 정선경이라면 문제가 없었다. 이미 더한 것도 보여줬고 말이다.

정선경은 입을 헤 벌리며 감탄했다.

‘얘 역시 아공간 계열 능력자인 건가? 그러고 보면 전에 봤던 것도 그런 느낌이었지. ······그 인간 말고도 아공간계 능력자가 있었다니.’

“널 보고 있으면 내가 지난 31년간 쌓아온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야.”

“칭찬으로 들을게.”

두 사람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고병갑은 구태여 집 구경하겠다는 정선경을 간신히 말리고, 같이 담배 피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치사하긴. 아무튼 맛있게 먹어. 내가 산 거라고 꼭 말하고.”

“고마워 잘 먹을게.”

“응. 모쪼록 고생했다, 병갑아.”

“어. 누나도 고생 많았어.”

“나중에 C조 사람들 모아서 자리 한 번 갖자. 누구누구 씨는 안 나올 것 같지만. 킥킥.”

“좋지. 나는 무조건 나갈게.”

“좋아. 그나저나 너 기회 한 번 날렸다. 이제 한 번 남았어.”

“기회? 무슨 기회?”

“알아서 생각해 바보야.”

정선경은 끝내 대답해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고병갑은 그녀를 배웅한 뒤 집으로 올라갔다.

석 달 만에 돌아온 집. 사실 그를 반겨주는 거라고 해 봤자 차게 식은 적막뿐이었다.

고병갑은 6평짜리 원룸을 쓱 훑어보았다. 원정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딱 그 모습이다.

“반갑긴 하네.”

자취방도 반가웠지만, 그가 고대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얼른 짐을 정리하고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망설임 없이 문을 넘는다.

‘음?’

고병갑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스빌람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시야를 가득 채운 고블린들이었다.

머릿수를 보니 아스빌람의 모든 고블린이 집결한 듯했다. 당연히 에아와 도란도 있었고.

「······너희 뭐하냐? 일 안 하고.」

「흑!」

「흐윽!」

「뭐, 뭐야? 왜 그래?」

「흐아아앙!」

고블린들이 고병갑에게 들러붙었다. 고병갑은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로드 바보다! 왜! 이제 오냐!」

「로드시여!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걱정했습니다!」

「로드시여! 흐엉엉!」

사방에서 고블린들의 그리움이 터져 나았다. 고블린 로드인 고병갑은 그들의 감정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로드.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나 걱정했단 말이에요!」

「맞아요! 나도 당신이 잘못된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요. 여기 있는 모두가 당신을 걱정했어요. 당신이 위험한 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 참. 일하다 보면 늦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하여간 유난들은.」

도란과 에아도 가세해서 원성을 토했다.

고병갑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미안해. 그러니까 좀 떨어져 봐.」

그제야 고블린들이 고병갑을 놔주었다.

그가 바닥에 널브러진 통돼지를 어깨에 짊어지며 말했다.

「너희 밥 안 먹었지? 얼른 밥 먹자. 나 배고파 죽겠다.」

「좋아요!」

「로드께서! 배 고프시다! 식사를! 준비하자!」

이날은 로드 고병갑이 돌아온 기념으로 아스빌람에 작은 잔치가 열렸다.

고병갑은 맥주를 홀짝이며 바비큐를 먹고, 고블린들의 재롱을 보며 웃고 떠들었다.

‘길드에 들어가서 인생 역전하는 것도 좋지. 그런데 나는 이게 더 좋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닥불이 감성을 자극한다. 고병갑은 생각했다. 역시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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