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59화 (59/151)

059. 구르미 데이

14.

고병갑이 조금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상점 창을 응시했다. 그의 주의를 끈 것은 ‘영혼’ 계열의 상품들이었다.

‘트로바틴? 하슘블란트? 가라모스?’

개당 70만 수정으로 판매되는 누군가의 영혼. 거기 달린 주석이 꽤 흥미를 돋운다.

[트로바틴의 영혼]

-가격 : 700,000 수정

-설명 : 아스빌람의 12영웅 중 제1 기사 트로바틴의 영혼. 사용 시 생전 그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생전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고병갑이 집중한 것은 위의 대목이었다.

그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손을 가져갔다. 검지는 창(窓)에 닫기 직전에야 멈추었다.

‘이게 뭔지 알고?’

선뜻 구매하기 망설여졌다.

이 요물이 현 상황을 타개해주리란 보장이 없잖은가. 한두 푼짜리면 몰라. 자그마치 70만 수정이다, 70만 수정!

‘······미친. 이런 상황에서도 돈 걱정 한다는 거냐?’

고병갑은 자신의 구두쇠 기질에 그만 질려버렸다.

‘바보 같긴. 죽으면 다 끝인데 뭘 따지고 있어?’

검지가 상점 창에 닿았다. 곧 구매 의사를 묻는 홀로그램이 나타났고, 그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70만 수정이 차감되며 허공에 무언가 떠올랐다. 그건 흡사 도깨비불처럼 생긴 발광체였다.

‘이게 영혼이라고?’

둥그렇고 크기는 주먹만 하다. 은은한 푸른색 빛을 스스로 뿜어냈다.

아이들 장난감으론 썩 좋아 보였으나 믿을 만한 외견은 아니었다.

‘이게 뭐길래 70만 수정이나 하는 거야? ······몰라. 비싼 만큼 돈값은 하겠지! 그나저나 어떻게 사용하는 거람?’

그가 트로바틴의 영혼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묘약이나 경단처럼 직관적인 사용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혼 결정을 심장과 접합시키십시오.]

“오, 친절하네. 고맙다.”

고병갑은 홀로그램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영혼을 손에 쥐고 심장에 가져다 댄다. 왠지 가슴이 시큰거렸다.

[트로바틴의 영혼과 동화하시겠습니까?]

‘어.’

[동화를 시작합니다. 1%, 2%, 3%······.]

[오류! 영혼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영육(靈肉)이 아닙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신체 강도가 기준점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트로바틴의 영혼과 동화를 완료했습니다. 동화율 : 53.21%]

“어억!”

그는 자신의 몸에 이변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몸에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막혔다. 머리는 터질 듯 지끈거렸고 가슴은 미친 고양이처럼 날뛰었다.

“하악!”

눈가로 잔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트로바틴이란 자의 기억이었다.

-몰아라!

-우리가 돌아갈 곳은 없다! 우리는 이 전장에 뼈를 묻을 것이야!

-아스빌람을 위해! 랜드리올을 위해!

‘이··· 이게 무슨?’

드넓은 초원을 달리는 수천 마리의 군마. 그리고 군마에 타서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

트로바틴은 그들의 선두에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도 생생했기에 마치 전장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뭐지······?」

한국어와 아스빌람의 언어가 번갈아 나왔다.

하나,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고병갑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으윽!” 「씨발!」“그만해!”

자신의 기억과 트로바틴의 기억이 한데 뒤섞여 머리를 어지럽혔다. 온갖 이명과 허상이 그를 괴롭혔다.

가능만 하다면 뇌를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야! 나는 뭐지? 나는 살아있는 건가? 나는 뭘 하고 있었지?’

「아스빌람······. 아스빌람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아스빌람으로 돌아가야만 해. 가서 랜드리올을 지켜야만······.」

고병갑은 홀린 듯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문에 발을 들이려는 순간. 그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나는······ 나는 고병갑이다. 나는 망령 따위가 아니라고!’

그가 발치의 돌멩이를 주웠다. 그리곤 미친 듯이 제 머리를 때려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고병갑은 돌멩이가 가루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하아, 하아······. 시발.”

좀 전까지 눈과 귀를 어지럽히던 잔상이 싹 가셨다. 정신도 맑아졌다.

고병갑은 자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뱉어냈다.

“엄마. 고붕이. 키리얀. 도르마. 에아. 도란. 그리고 쪼꼬미들. 선경이 누나.”

그가 허공에서 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발록 이 씨발새끼. 넌 뒤졌다.”

고병갑이 바닥을 찼다. 그는 한 줄기의 섬광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15.

“그만해라 이 괴물 새끼야.”

고병갑은 발록을 죽을 듯이 노려보다가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벼······ 벼가······.”

정선경은 만신창이였다. 온몸의 뼈란 뼈는 다 부러진 듯했다. 대체 얼마나 심한 짓을 당한 건지······.

얼른 조치하지 않으면 숨이 넘어가리라.

“크롸라라라!”

발록은 경고를 가볍게 무시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고병갑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그가 발록을 쳐다보지도 않고 검을 그었다. 검이 지나간 자리로 황금빛 잔상이 남았다.

“쿠아아악!”

가공할 검풍을 동반한 일격. 발록의 두 팔이 속절없이 절단됐다.

고병갑은 쉬지 않고 돌려차기를 날렸다.

“쿠핡!”

발록은 차인 방향으로 일백 미터도 넘게 날아갔다.

고병갑이 땅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러자 금빛 기운이 휘몰아치며 주변으로 보호막을 구성했다.

‘군단의 심장 트로바틴’의 고유 기술이었다.

“병······ 가······.”

“억지로 말하지 마.”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에서 경단을 잔뜩 사들였다. 허공에 떠오른 정체불명의 창을 보고 정선경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거 씹어 먹지도 못하겠는데?’

고병갑은 잠깐 고민하다가 자기 입에 경단을 털어 넣었다. 으적으적 씹어 침과 잘 섞은 다음에 도로 꺼낸다.

그것을 정선경의 입가로 가져갔다.

“가만히 있어.”

“으으!”

“먹어! 먹어야 산다고!”

“아으으······.”

끝내 정선경은 경단을 받아먹었다. 고통에 일그러졌던 그녀의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

-쾅!

그때 보호막이 들썩였다. 어느새 돌아온 발록이 뿔로 들이받은 것이다.

-쾅! 쾅! 쾅!

“등신 같은 놈. 죽여달라고 제 발로 찾아오는구나.”

혹 놈이 도망이라도 치면 귀찮아질 수 있었는데 잘 됐다.

고병갑은 정선경을 바로 눕혔다.

“야··· 병갑. 너······.”

“됐어.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고병갑은 멋있게 말한 뒤 몸을 일으켰다.

“야 병갑!”

“나도 알아. 이 상황이 이상한 거. 그래도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지.”

“자··· 잠깐만! 기다려!”

“걱정할 거 없어. 잘은 몰라도 저 괴물 새끼한테 질 거 같지 않으니까.”

“아니······ 야!”

정선경이 애타게 고병갑을 불렀다. 고병갑은 그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정선경이 혼신을 담아 외쳤다.

“야 이 망할 자식아! 담배 있으면 한 대만 달라고!”

“······뭐?”

“아까부터 뭔 헛소리야? 콜록! 담배 있냐? 있으면 한 까치 줘봐.”

정선경은 각혈하면서도 담배를 찾았다.

고병갑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더듬거렸다. 담배가 있던가? 아마 없을 텐데?

“있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잔뜩 뭉개진 담뱃갑을 발견했다. 다행히 한 개비는 살아있었다.

라이터도 온전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정선경의 입에 물려주었다.

정선경은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뒤에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아. 이제 좀 살겠다. 이거 못 피고 죽을까 봐 식겁했잖아. ”

“······.”

“이제 가봐.”

“어?”

“얼른 가서 저 괴물 새끼 죽여버리라고.”

“······그래.”

고병갑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정선경은 희미하게 웃으며 등에다 대고 말했다.

“병갑아 죽지 마.”

“죽기는.”

고병갑이 검을 잡았다. 그러자 금빛 기운이 몰려들며 보호막이 걷혔다.

“크롸라라라!”

발록의 아가리에 어마어마한 열기가 모여들었다. 넘실대는 불꽃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했다.

“덩치도 산만 한 놈이 무슨 불장난을!”

그가 검에 내력을 실었다. 금빛 내력이 휘몰아치며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 순간 발록이 불을 내뿜었다. 고병갑은 담담히 검을 휘둘러 받아쳤다.

화염과 검기 폭풍이 충돌을 일으켰다.

“쿠아아아악!”

화염이 속절없이 소멸했다. 그야말로 상대가 안 됐다. 검기에 얻어맞은 발록은 피와 살점을 쏟아내며 나자빠졌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녀석이다. 한 방에 끝내자.’

고병갑은 그렇게 다짐하며 재차 내력을 모았다. 이번엔 트로바틴의 기억에서 엿본 기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교본을 각인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다. 비유하자면 교본은 오픈북 테스트요, 지금은 대리 시험이었다.

칼날에 금빛 내력이 잔뜩 실렸다. 그것은 스스로 형태를 잡더니 원뿔 모양의 창을 만들어냈다.

길이만 3m에 이르는 거대한 병기. 트로바틴이 생전 애용하던 무기다.

“크롸라······.”

발록이 걸레짝이 된 몸을 일으켰다. 고병갑은 녀석에게 더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팽팽하게 부푼 다리가 땅을 박찼다. 그는 한 줄기의 섬광처럼 들판을 가로질렀다.

만다라 기사단의 비술.

여덟 무예 중 세 번째 형식.

「분쇄.」

고병갑. 그는 한 자루의 창이 되었다.

발록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부리나케 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며 놈을 붙잡았다.

궁지에 몰린 쥐 신세가 된 발록. 고병갑은 가차 없이 녀석의 심부를 찔렀다.

거대한 장창이 살점을 파고들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창에서 방출되는 내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놈의 살점을 갉아먹었다.

분쇄. 그야말로 분쇄였다.

“꺼―껅!”

발록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자지러졌다.

놈의 최후는 그토록 허무했다.

‘끝났다.’

하늘에 먹구름이 걷힌다. 이윽고 세찬 빛줄기가 쏟아졌다.

15.

“끄으으······ 끄아아아악! 끄아악!”

“야야! 좀 진정해 봐! 왜 그래!?”

“제발! 제발 그만―끄아아아악!”

고병갑이 죽을 듯한 비명을 토해냈다. 이 악물고 참으려 해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았다. 팔다리는 제멋대로 비틀렸고 몸이 배배 꼬였다.

정선경을 비롯한 C조 인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고병갑이 속으로 탄식했다.

사건은 대략 10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전투가 끝난 후. 고병갑은 쓰러진 조원들을 모아 그들을 치료했다.

천만다행으로 모두 숨은 붙어 있었고, 경단을 먹이니 어찌어찌 살아나긴 했다. 부영건의 잘린 팔도 원상복구 시켜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동화율이 낮아 트로바틴의 영혼을 붙잡아둘 수 없습니다.]

[동화가 해지됩니다.]

[트로바틴의 영혼이 소멸합니다.]

불현듯 트로바틴의 영혼이 소멸한다는 홀로그램이 떴다.

몸을 감싸던 힘이 사라진 순간, 고병갑은 엄청난 반동에 시달리게 됐다.

마치 압착기 속으로 던져진 듯 무시무시한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죽을 듯한 후유증은 10분 넘게 이어졌지만 도통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야야! 소리만 지르지 말고 너도 이것 좀 먹어봐!”

정선경이 남은 경단을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고병갑은 간신히 입을 벌리고 먹여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어련히 알아듣고 경단을 먹여주었다.

“으으으······ 흐으윽!”

경단을 먹었음에도 통증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피 섞인 눈물만 줄줄 흘러내렸다.

고병갑은 너무 아픈 나머지 아이처럼 울기까지 했다.

“안 되겠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본부로 옮겨야겠어요! 다들 움직일 수 있습니까?”

부영건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고마 지는 움직일 만합니더.”

“나도요.”

“저도 문제없어요.”

“좋습니다.”

다들 부상의 정도가 심했고, 경단만으로 완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걷거나 뛸 정도로는 되었다.

“갑시다.”

C조는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고병갑은 부영건의 등에 업혀 끙끙 앓다가 이내 기절했다.

C조는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다 해가 넘어갈 무렵에야 지원을 나오던 조와 마주쳤다.

C조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본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기절한 고병갑은 줄곧 의식불명 상태였다. 이따금 의식을 차리긴 했으나, 고통에 버둥거리다가 다시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가 온전하게 깨어난 것은 1차 원정 종료되고 하루나 더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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