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고블린을 구하라
8.
고르곤의 덩치는 웬만한 코뿔소를 가볍게 아우른다. 쇠뿔 역시 질릴 만큼 거대하다.
저 덩치에 저 뿔, 저 속력. 그야말로 브레이크가 고장 난 덤프트럭이다. 보통은 스치기만 해도 요단강 직행열차 타고 풀 패키지 저승 여행하는 거다.
그렇지만 아스빌람산 고블린은 어느 각도로 봐도 보통과는 거리가 멀다. 저 우람한 이두박근과 전완근을 보라. 저들은 지옥의 곡괭이질······ 아니, 교본으로 단련된 견고한 전사다.
「찔러!」
「찌르자!」
「우와아아아아!」
고병갑이 선창하면 고붕이가 복창했다. 제1 보병대가 구령에 맞춰 일제히 창을 쑤셨다. 혼 가브리의 뼈와 투구충의 뿔을 조합해 만든 장창은 대단한 위력을 뽐냈다.
“꿰에엑!”
고르곤 때가 앞 라인부터 허물어졌다. 고블린들은 뒤로 조금 밀려날지언정 쓸려나가지 않았다.
「빠져!」
고병갑이 냉큼 소리쳤다. 제1 보병대는 신속하게 후위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했다. 고병갑과 공격대가 그들의 공백을 채웠다.
이제 중급 교본을 익히기 시작한 공격대원들. 그들이 발산하는 내력은 고병갑의 것에 비하면 초라하고 투박했다.
하나, 그게 나약하단 뜻은 아니다. 적어도 하위 몬스터에 한해선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꿱!”
“꾸이이익!”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이승과 작별하는 고르곤들. 죽는 유형도 각양각색이다. 머리가 떨어져 죽는 놈, 몸통이 갈라져 죽는 놈, 으깨져 죽는 놈, 타 죽는 놈, 터져 죽는 놈······.
죽음이 풍년이로다. 진혼곡을 울려라!
「찔러라!」
「가즈아!」
제1 보병대가 재차 진격했다. 그 기세가 성문을 부수는 충차와 같다. 고병갑과 공격대가 빠진 틈 사이로 뾰족한 창이 쏘아졌다.
“쿠워어어어!”
놈들도 순순히 당해주지만은 않았다. 쇄도하는 창을 비집고 한 마리가 침투했다. 놈은 이마로 홉 고블린을 들이받았다.
「께엑!」
얻어맞은 홉 고블린이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뿔에 직접 찔리진 않았다. 하지만 충격이 꽤 큰 듯 보였다.
“쿠워어어어!”
고르곤이 껑충 뛰어올랐다. 제1 보병대는 전부 창병이었기에 진영 한가운데로 침투한 적에 대해서는 대응력이 낮았다.
‘위험하다!’
고르곤이 엎어진 홉 고블린 위로 뚝 떨어졌다. 고병갑은 즉시 그리로 뛰었으나 간발의 차로 늦을 듯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소리 없는 검이 날아들어 고르곤의 목을 무질렀다. 덕분에 홉 고블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누구지?’
고병갑이 놀란 눈을 치떴다.
「도란?」
사나운 검세의 주인은 도란이었다. 그녀는 검신이 무척 긴 양손 검으로 땅을 받친 채 의기양양하게 섰다.
「로드! 나도 싸울래요!」
「오냐, 마침 잘 왔다! 가세해!」
「네! 멍충아, 얼른 일어나.」
「끄으······ 아, 알았다.」
도란이 참전했다. 그녀는 비록 교본은 익히지 못했으나 충분히 믿을만한 검사다. 그녀의 무력 수준은 공격대와 비견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그러니 고블린들의 검술 교관을 도맡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
「돌격!」
「돌겨어어억!」
창과 뿔이 교차한다. 한쪽에선 검이 뻗치고 전격과 주술이 빗발친다. 사방 곳곳에서 스산한 신음이 흘러나와 땅을 적셨다.
장창이 고르곤의 외눈을 파고들어 뇌를 관통한다. 피와 뇌수가 섞인 걸쭉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잘 벼려진 날붙이는 적의 살점을 탐하고 뼈를 갈랐다. 키리얀과 도르마가 쏟아내는 각종 주술 공격은 적의 진영을 가차 없이 붕괴시켰다.
적의 주검이 쌓여 산을 이루면 그것을 타고 넘어 잔당을 소탕한다.
전투는 빠르게 갈무리됐다. 고병갑과 고블린 군세는 예정된 승리를 만끽했다.
「우리 승리다!」
「우와아아아!」
「로드! 로드! 로드!」
신 아스빌람 군의 첫 출전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9.
「얘들아, 시간이 별로 없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빨리 움직이자.」
「옙!」
전투가 예상보다 빠르게, 또 압도적으로 끝났다. 시간이 남는 김에 고기를 거둬들이기로 했다. 외눈박이긴 해도 소이지 않은가.
‘부상자가 적어서 다행이야.’
격렬한 전투는 어떤 형태로든 전흔을 남긴다. 단지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고블린들이 입은 피해는 사소했다.
‘아스빌람에 각종 약이 배치돼있으니 치료는 문제없을 거야.’
원정을 떠나기 전 갖춰둔 포션. 고대의 상점에서 구매한 삼종 치유 경단. 그것들만 있어도 어지간한 외상은 씻은 듯 회복할 수 있다.
건물 2층에 앓아누워있던 고블린들의 운반은 진즉 끝났다. 고기 수거 작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료됐다.
「자, 인원 점검하자! 다들 모여!」
「모여라!」
「고붕이 기준.」
「기준!」
「뒤로 번호 시작.」
고붕이를 시작으로 빠르게 번호들이 지나갔다. 한 명도 비지 않았다.
「좋아. 다들 신속하게 아스빌람으로 돌아가. 새로 온 애들 잘 치료해주고.」
「옙!」
「되는 대로 아스빌람에 갈게. 그때까지 부디 아무 탈 없이 있어라.」
고블린들이 아스빌람으로 돌아갔다. 투지로 후끈했던 이 일대엔 싸늘한 피 내음만 남았다.
“꾸물거릴 때가 아니지.”
고병갑은 온 사력을 다해 다리를 놀렸다. 제시간 안에 야영지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됐다.
“괜히 조원들 깨우고 그러면 골치 아파지는데. ······서두르자.”
달리는 와중에 몸에 묻은 오물도 좀 떨쳐냈다. 어디서 쌈박질하고 온 티를 내봤자 좋을 게 없다.
‘아슬아슬했네.’
오전 0시 57분. 고병갑은 야영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김대엽이 호들갑 떠는 일은 없었다. 조원들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늦으셨네요. 뭐가 잘못됐나 싶어 걱정했어요.”
“아하하······ 길을 좀 헷갈려서요.”
“음?”
김대엽이 코를 킁킁거렸다. ‘피 냄새?’ 그가 중얼거렸다. 이어선 고병갑을 위아래로 훑었다.
“병갑 씨, 혹시 어디서 싸우고―”
“아이고!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서 주무세요. 인수인계할 사항 없죠? 어, 얼른 들어가세요. 하하하.”
“······괜찮은 거 맞으시죠?”
“그럼요. 뭐, 별일이 어딨겠어요? 잠깐 산책하고 온 건데.”
고병갑은 떠밀 듯 김대엽을 텐트로 밀어 넣었다. 그 뒤 접이식 의자에 앉아 노곤한 몸을 앉혔다.
‘지치네.’
그는 쏟아지는 졸음과 2차 전투를 벌여야 했다.
시간은 늘상 그렇듯 덧없이 흘렀다. 밤이 가고 낮이 밝았다. C조는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 전파해드린 대로 오늘 25지점까지 밀어버리겠습니다.”
“근데 그게 되겠심꺼? 암만 생각해도 빠듯할 것 같은데예.”
“식사시간 줄이고 연장작업 해야죠. 다른 조랑 진행률 맞추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마······ 그라믄 퍼뜩 가입시다.”
C조는 다른 특임대에 비하면 진행 속도가 더뎠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정선경이 조광헌을 직접 인계하느라 이틀간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조광헌, 그 사이코의 재판도 지금쯤이면 슬슬 마무리됐을 테지.
C조는 대략 15분간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즉시 임무에 투입됐다.
24-5지점을 마무리 지은 것은 오전 10시 반 무렵이었다. 헌터들은 정말이지 쥐잡듯 몬스터를 잡았다.
‘이제까지 설렁설렁한 거란 말이야?’
능력이 출중한 자들이 전력을 다하면 이만큼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듯했다.
짐꾼들은 헌터들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렸다. 고병갑이야 이미 하위의 범주를 넘어섰으니 괜찮았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죽상이었다.
곧장 25번 작전지역에 돌입한 C조.
“점심을 조금 일찍 먹겠습니다. 점심 먹고 중간 휴식 없이 원테이크로 25번 지점 정리할 겁니다. 다들 숙지해두세요.”
세 짐꾼은 서둘러 점심을 준비했다.
식사까지 전투적으로 할 줄 알았건만, 그렇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은 조용하게 진행됐다.
산채비빔밥보다는 좀 나은 소고기 볶음밥을 묵묵히 퍼먹는 조원들. 그때 뜬금없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대박이네 이거.”
“음?”
말은 꺼낸 이는 의외의 인물, 심승섭이었다.
조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쏠렸다. 심승섭은 자기 애인들과 통화할 때가 아니면 말을 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와예?”
“와······ 이거 실화인가?”
심승섭은 핸드폰을 응시하며 탄식만 흘렸다. 한창훈은 호기심이 이는지 고개를 쭉 빼며 핸드폰을 보려 애썼다.
심승섭은 친절하게도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보라는 듯이.
“음? 뉴스 보고 계셨심꺼? 와예? 누구 연애설이라도 터졌······ 음? 어어!?”
한창훈도 기겁했다. 그쯤 되니 세상만사에 흥미가 없을 것처럼 보였던 부영건마저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뭔데요? 아아, 나도 좀 보여줘 봐요.”
“무슨 일이 있나요?”
세 사람이 한창훈의 등 뒤로 몰려들었다. 짐꾼들은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뭔 소리예요 이게?”
“헐. 이거 진짜인가요?”
“찌라시 올리는 신문사는 아닙니다. 진짜인 것 같은데요.”
“여기가 어디예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데.”
“아프리카에 있는 거 아닌가요?”
조원들이 질겁했다. 다들 사색이 짙은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쯤 되니 고병갑도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기사를 봤길래 저런 반응이란 말이야?
“아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뭐, 큰일이라도 난 겁니까?”
“야 병갑아. 너 시에라리온이 어디 붙어있는지 아냐?”
“시에······ 뭐?”
정선경이 핸드폰을 빼앗아 들고 고병갑에게 쫄래쫄래 다가왔다. 심승섭은 ‘아··· 내 핸드폰.’이라고 작게 읊조렸다.
정선경이 고병갑에게 핸드폰을 보였다. 곁에 있던 다른 짐꾼들도 액정에 시선을 모았다.
“시에라리온이란 데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대. 근데 규모가 미쳤어.”
“잠깐만. 내가 읽어볼게.”
고병갑은 빠르게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무던했던 그의 표정도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을 기준으로 하면 오늘 새벽 2시경. 딱 고병갑이 불침번 근무를 서고 있을 때였다.
그 무렵 시에라리온이란 나라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다. 최초 발생지는 시에라리온 한 군데였지만, 현재는 서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 중이라고 한다.
현재 초토화된 면적만 해도 한국 국토 수 개 분은 된다. 균열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는 추산 백만 마리가 넘었다.
규모만 따지면 A랭크 균열 4,000개가 동시에 터진 격이다.
몬스터들은 특유의 기동성으로 아프리카 곳곳을 누볐다. 즉각적 진압에 나섰으나 턱도 없는 실정이었다.
시에라리온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워낙 빈곤했기 때문이다.
벌써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이 무참히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초단위로 죽어나가는 중이고.
하긴. 몬스터가 자그마치 100만 마리다. 어지간히 강한 헌터라도 그 폭풍 속에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터다.
‘만약 저 난리가 한국에서 벌어졌으면······.’
그날로 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요?”
정선경이 담배를 꼬나물며 물었다. 딱히 누구를 겨냥해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흠. 좀 야속한 말이긴 한데, 딱히 저희랑은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이웃 나라도 아니고.”
“네? 사람이 벌써 삼백만이 넘게 죽었다잖아요!”
“그건 물론 슬픈 일이죠. 그런데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아이고, 마. 뭔 일이 나기는 날라는 갑다. 이게 뭔 지랄이고?”
“······자자, 얼추 식사 끝난 것 같으니 이동할 준비 합시다.”
부영건은 어수룩한 분위기를 다잡았다. 정선경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작전이 문제에요? 이 정도면 본부에 연락 취해봐야 하는 거 아녜요?”
“문제가 있었으면 본부에서 먼저 연락을 해왔겠죠. 저희는 그냥 저희 일을 하면 됩니다. 일하러 왔으면 일해야죠.”
부영건은 매정하다고 생각될 만큼 단호했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역사상 최악의 난리가 났다고 해도 바다 건너 일이고, 당장 한국에 물리적인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왈가왈부 떠들어 봤자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리고.”
부영건이 몸을 일으키며 이어 말했다.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듯하니, 그 때문이라도 하루빨리 이번 원정을 끝내야죠.”
“뭔 말이래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아프리카겠죠.”
정선경은 당연하단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부영건의 말에 담긴 뼈를 찾아냈다.
비슷한 시기에 고병갑도 그의 의중을 꿰뚫었다.
‘가장 위험한 나라는······.’
가장 위험한 곳은 현재 난리 난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가 아니다.
그럼 어딜까? 아직도 인간끼리 분쟁을 끝내지 못해 허구한 날 전쟁을 벌이는 중동의 모 국가들?
아니. 그것도 아니다.
고병갑은 고개를 쓱 돌리며 주변 경관을 훑었다. 산의 능선, 들판, 무너진 건물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 위로 걸터앉은 수많은 균열도 보였다.
“아.”
그가 조용히 탄식했다.
그렇다. 가장 위험한 나라는 다름 아닌 한국이었다. 머리 위에 수십만 개의 균열을 이고 있는 좁디좁은 나라, 한국.
“자, 움직입시다.”
부영건이 조원들을 독려했다. 그 누구도 그에게 토 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