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55화 (55/151)

055. 고블린을 구하라

6.

“······예, 이상으로 전파사항은 끝이고요. 내일 작전 시각은 평시와 동일합니다. 음··· 특이사항이나 질문사항 없으시죠?”

조장 부영건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앞에 둘러앉은 조원들은 입술을 뗄 생각이 없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놓은 모양이다.

“그럼 오늘 점호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합니다. 침낭 잘 덮고 주무세요.”

어느덧 원정 46일째 밤이다. 포근하던 가을은 어디 가고 겨울이 드문드문 낯짝을 비추었다.

‘절반 좀 넘게 왔구나. 온 만큼만 버티면 집에 갈 수 있다.’

문득 본 전자시계는 11월 7일이라는 날짜를 띄웠다. 이북 땅에서 10월을 맞이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11월도 벌써 한 주가 지났다니. 하여간 기막힌 노릇이다.

“병갑 씨. 오늘도 둘번 하실 거죠?”

“네. 그렇게 해주세요.”

짐꾼 김대엽이 물었다. 불침번 순서를 짜는 것이다.

짐꾼들은 밤 10시부터 오전 7시까지 불침번을 선다. 한 사람당 3시간씩. 고병갑은 항상 2번째 순서를 고집했다.

“매일 둘번초로 서시는데 안 피곤하세요? 오늘은 제가 둘번 할까요?”

“아녜요. 괜찮으니 둘번으로 해주세요.”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불침번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초번과 말번이 가장 좋다. 중간에 깨어났다 다시 잠드는 중간 근무자는 다음날 내내 피곤하기 마련이다.

고병갑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도 마음 같아서는 초번이나 말번을 서고 싶었다.

다만 마땅한 이유가 있었기에 둘번초를 고집했다.

“병갑아. 나 생수 한 통만 꺼내 주라.”

“음? 생수는 뭐하게?”

“양치 좀 하려고.”

“아까 저녁에 세면세족 하라고 나눠준 거 있잖아. 그거는 어쩌고?”

고병갑의 물음에 정선경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 실수로 쏟아서.”

“아이고.”

“아잉. 쪼잔하게 굴지 말고 한 통만 꺼내 줘. 양치 안 하고 자면 찝찝하단 말이야.”

“새벽에 불쑥 일어나서 줄담배 피우는 양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고병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생수 한 통을 꺼내 주었다. 어차피 사흘 뒤면 보급일이라서 여유가 있었다.

“땡큐!”

고병갑은 정선경을 보내고 바로 자신의 텐트로 갔다. 새벽에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기에 얼른 잠들 필요가 있었다.

“아으 차가워라.”

침낭이 차게 식어있었다. 고병갑은 핫팩 두어 개를 터뜨린 후 침낭 안으로 파고들었다. 곧 열기가 퍼지자 노곤함이 몸을 감쌌다.

그는 말릴 틈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7.

-삐비비빅! 삐비비빅!

“으으······.”

전자시계가 8비트짜리 알림음을 뱉어냈다. 고병갑은 자신의 팔자를 애달프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주변은 죽은 듯 고요했다.

현재 시각은 23시 15분. 그의 근무가 새벽 1시부터 시작인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이른 기상이다.

투덜댈 시간이 없다. 고병갑은 얼른 복장을 갖추어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야영지 중앙에는 작은 모닥불이 지펴져 있었다. 초번 근무자 김대엽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또 나갔다 오시게요?”

“하하. 뭐, 그렇죠.”

“조심히 갔다 오세요.”

김대엽은 익숙하단 듯이 말했다. 이제는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고병갑은 야영지를 빠져나왔다. 이후 내력을 한껏 내뿜으며 빠르게 달렸다.

그의 두 눈은 고양잇과 맹수의 것처럼 빛났다. 자욱한 어둠은 그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대략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얼마간 내달리던 그의 다리가 멈추었다.

다 쓰러진 초가 사이로 드문드문 까만 덩어리가 널브러져 있다. 그것은 전부 몬스터의 사체였다. 다른 말로 하면 고블린들 밥이다.

“이게 가장의 고충이라는 건가. 결혼도 안 했는데 딸린 자식이 삼백이라니······. 하여간 내 팔자도 보통은 아니란 말이야.”

고병갑은 투덜거리면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땅에 널브러진 몬스터의 육신을 하나씩 집어 아스빌람에 보낸다.

고블린들을 시키면 한층 수월하겠지만, 지금은 그들도 자고 있을 시간이다. 고병갑은 자는 녀석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덩어리가 큰 놈들이라서 좋네.’

30~40분 꼬박 수거하면 고블린들 몇 끼 식사 분량은 나온다. 사실 현재 아스빌람에 쌓여있는 고기만 해도 양이 꽤 됐다.

하나, 고병갑은 보급일을 제외하면 이 일을 거르지 않았다. 혹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며칠간 고기 공급을 못 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마석도 삥땅 치고 말이다.

“애들은 잘살고 있으려나. 근근이 살펴봐야 하는데.”

아스빌람에 못 간지도 벌써 나흘째였다. 원정 일로 바쁘다 보니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 잘살고 있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한창 고기를 줍던 고병갑이 슬쩍 시계를 보았다. 23시 55분이었다.

‘슬쩍 둘러보고만 올까?’

가서 애들 자는 거나 보고 올까? 고병갑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혔다.

그가 아스빌람으로 넘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그가 번뜩 몸을 돌리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지근거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아스빌람으로 넘어가는 대신 검을 뽑아냈다.

‘몬스터가 남아있었나? 아니면 그냥 짐승?’

고병갑은 밝은 눈으로 폐허 이곳저곳을 훑었다. 만약 몬스터. 그것도 꽤 큰 규모의 군체가 있다면 당장 야영지로 달려가서 보고해야 한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길 몇 초. 고병갑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 기척은?’

어딘가 상당히 친근한 기운이었다.

「케륵?」

등 뒤로 소리가 들려왔다. 고병갑은 얼른 몸을 돌려 그곳을 보았다.

거기엔 웬 노멀 고블린 한 마리가 앙증맞은 손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 반대편 손에는 괴물 고기가 한 덩이 들려있다.

녀석은 멀뚱멀뚱 이쪽을 올려보고 있었다.

「아이 깜짝이야! 너 안자고 뭐해? 아니, 그것보다 언제 넘어온 거야? 나오는 거 못 봤는데?」

「로, 로드?」

「아휴, 간 떨어질 뻔했네! 쯧! 빨리 도로 넘어가. 그리고 내가 부를 때 아니면 함부로 나오지 마. 이게 겁도 없이.」

「가? 어디로?」

「어디긴, 인마. 아스빌람이지.」

「아, 아스빌람!?」

노멀 고블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스빌람. 가고 싶다!」

「······.」

고병갑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눈앞의 노멀 고블린. 자세히 보니 녀석의 행색은 더없이 초라했다. 팔다리는 비쩍 말랐고 몰골은 노숙자 못지않았다.

아스빌람에는 저렇게 초라한 고블린이 없다. 다들 잘 먹고 잘 자서 때깔이 좋으니까.

‘몬스터 웨이브로 튀어나온 놈인가? ······당연히 그런 거겠지.’

고병갑은 칼을 거두고 고블린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겁먹었는지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야, 쪼꼬미.」

「쪼꼬?」

「너 혼자야? 다른 애들 어딨어?」

녀석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지 반응이 느렸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더 있다.」

「몇이나 있어? 머릿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어··· 어어······.」

노멀 고블린이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세기 시작했다. 고병갑은 괜한 것을 물어봤다고 자책하며 놈을 옆구리에 꼈다.

「이쪽이라고?」

「어어. 맞다.」

「가만히 있어라.」

「흐힉!」

고병갑이 빠르게 내달렸다. 노멀 고블린은 덜덜 떨며 고병갑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좋지 않은데. 이 방향이면 다른 조 담당 구역이야.’

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향하는 곳이 야영지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할 구역도 아니다.

아직 정리됐는지 안 됐는지도 알 수 없다. 고블린이 안 죽고 남아있는 것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너는 이 먼 곳까지 뭐하러 온 거냐?」

「고기. 가지러. ······배고프다.」

「올 거면 다 같이 오지 왜 혼자 왔어?」

「고블린들. 아프다. 난. 안 아프다.」

「아프다고? 왜?」

「괴물들이. 잡아먹는다. 우리.」

「뭐?」

잘 달리던 고병갑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되물었다.

「잡아먹는다고? 어떤 새끼가?」

「큰 괴물. 강한 괴물. ······우린. 못 이긴다.」

「젠장. 빨리 가자!」

고병갑은 더욱 속력을 냈다. 부풀어 오른 다리 근육이 어마어마한 추진력을 냈다.

단시간에 엄청난 거리를 주파한다. 잠시 후 그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쯤 무너진 건물이었다.

답지 않게 커다란 건물이다. 북한이 멸망하기 전 관공서 따위로 쓰였던 것이리라. 2층 건물 안에서 다량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기야?」

「응응.」

고병갑은 얼른 건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내와 비릿한 피 내음이 건물 전체에 자욱했다.

「윽!」

건물 초입부터 고병갑을 맞이한 건 말라비틀어진 고블린 시체였다. 상태를 보니 죽은 지 열흘은 족히 된 듯했다.

울컥한 마음을 참고 허리춤의 랜턴을 뽑아 켰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고블린 시체가 발에 챘다.

「살아있는 동족. 위에 있다.」

「······그래. 그리로 가자.」

2층으로 올라간 고병갑. 복도를 조금 지나자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어둠이 내리 앉은 그곳에 랜턴을 비추자······.

「케르륵······.」

「아으······.」

족히 일백은 넘을 고블린들이 앓아누워 있었다. 사방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자 울분이 차올랐다.

느닷없는 불빛에 시선이 몰렸다. 고블린들은 고병갑을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 로드!?」

「헉!」

‘이거 애들 불러야겠군.’

남은 시각은 대략 45분. 혼자 수습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제,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겁니까? 그대는 로드십니까?」

그때였다. 비교적 상태가 좋은 고블린이 다가오며 물었다. 고병갑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고블린 프리스트?’

녀석의 정체는 그 구경하기 힘들다는 고블린 프리스트였다. 애저녁 치유능력을 가진 몬스터는 극히 소수다. 그중에서도 고블린 프리스트는 독보적으로 개체수가 적었다.

등급은 B지만 전투 능력은 거의 없는 녀석이다.

묻고 싶은 게 여러 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일의 우선순위를 따져야 했다.

「오냐. 느꼈다시피 내가 너희 로드다. 네가 이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냐?」

「그,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게 전부냐? 아니면 더 있는 거냐? 시간이 없다. 빨리 대답해라.」

「이곳에 있는 게 전부입니다.」

「모두 들어라!」

고병갑이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며 소리쳤다.

「이곳을 넘으면 아스빌람에 닿을 수 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은 당장 넘어가!」

「아, 아스빌람?」

「시간이 없―뭣!?」

고병갑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차는 것은 벽뿐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더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상당한 양의 기척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상당히 가까운 곳이다!

고블린 프리스트도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그놈들입니다!」

「그놈들?」

「저희를 잡아먹는 괴물들입니다. 놈들에게 동족 수십을 잃었습니다! 필사적으로 맞섰으나 저희로선 역부족이었습니다.」

녀석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왜 같은 몬스터끼리 잡아먹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나중에 묻기로 했다.

「일단 서둘러! 빨리 넘어가!」

고병갑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고블린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고병갑도 곧장 아스빌람에 넘어갔다.

그는 아스빌람에 발을 딛자마자 숙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목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다들 일어나라! 모두 일어나! 비상이다!」

「······.」

「전부 일어나라고! 제길. 다 자고있는 건가.」

아스빌람에 자욱이 깔린 정적.

그 정적은 쉽사리 걷히지 않을 것 같······.

「음? 로드 목소리?」

「로드의 목소리다!」

「일어나라! 로드께서 부르신다!」

아니. 너무도 쉽게 걷혔다.

고작 5초나 지났을까? 아스빌람 곳곳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내 온 사방에서 고블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로드시여!」

「언제 오셨습니까?」

고블린들이 그리움에 젖은 얼굴로 몰려들었다. 그들과 밀린 담소를 나누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다. 다만 지금은 다른 사안이 너무도 시급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집중해라! 집중!」

「집! 중!」

「공격대와 제1 보병대는 무기를 챙겨서 문을 넘어라! 큰 싸움이 있을 거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2 보병대는 무기를 챙기지 말고 넘어와. 나머지는 대기해라. 곧 다친 고블린들이 몰려올 테니 녀석들을 치료해줘. 전부 이해했나?」

「문제없습니다!」

「그럼 당장 움직여!」

고병갑은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멀리서 느껴지던 다량의 기척이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머릿수는 많아. 하지만 감당 못 할 만큼 강한 놈들은 아니다!’

「헉! 로드시여. 이들은?」

따라 나온 고블린들이 질겁하며 물었다.

거동도 못 할 만큼 심각하게 다친 고블린이 지금도 백 수십은 됐다.

「제2 보병대. 너희는 여기 부상자들을 아스빌람으로 옮겨라. 전부 옮기면 곧바로 보고해. 최대한 빠르게 해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공격대랑 제1 보병대는 나를 따라와!」

6인의 공격대. 그리고 그들을 제외하면 교본 성취도가 가장 높은 제1 보병대 서른.

고병갑까지 총 37명의 투사가 1층으로 내려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저 먼 곳에서 자욱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땅을 진동케 하는 몬스터 떼거리의 정체는 거대한 소 형상의 괴물이었다.

‘고르곤인가!’

뿔 길이만 60cm에 이르는 외눈박이 괴물 소. 그런 놈들이 족히 150은 있었다.

다행히 고르곤의 등급은 C다. 머릿수가 차이 나긴 해도 충분히 비벼볼 만했다.

「한 놈도 건물로 들여선 안 된다. 모두 전투 준비!」

「하아압!」

「우어어어!」

수십 자루의 장창이 앞을 겨누었다. 고병갑도 검을 뽑으며 내력을 방출했다.

두 집단의 충돌이 임박했다.

초겨울 밤 공기가 뜨겁게 달구어진 순간, 고병갑이 선두로 달려 나가며 외쳤다.

「가자! 동족의 복수를 하는 거다!」

「케르르륵!」

「놈들에게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해줘라!」

달이 높은 밤.

밝은 월광 아래서 무지막지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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