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50화 (50/151)

050. 수복 사업

44.

“······해서, 헌터분들을 모집 중이거든요.”

“아, 예.”

10여 분간 이어진 설명이 끝났다.

고병갑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책자를 내려보았다.

김슬기는 한바탕 말을 쏟아낸 터라 목이 아픈 듯했다. 그녀가 미지근한 녹차로 목을 축인 후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지원해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아뇨. 저는 딱히······. 관심이 생기지는 않네요.”

그녀의 권유. 고병갑은 곧바로 반대 의사를 전했다.

김슬기가 늘어놓은 말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협회와 여러 길드가 주도해서 북한 수복 사업을 벌이는데, 한 번 지원해볼 생각 없느냐?’

고병갑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가 거길 뭐하러 가?’

좋은 의도로 하는 사업인 것은 알겠다. 살면서 두 번 경험하기 힘든 일인 것도 알겠고.

다만, 자신과는 별로 관계없는 일이었다. 돈이라도 많이 주면 또 모르지. 보나 마나 푼돈 몇 푼 얹어주고 생색······.

“아, 관심 없으신가요? 아쉽네요. 보수나 조건이 꽤 괜찮은데 말이죠.”

“얼마나 주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1차 원정대는 3개월간 임무를 수행해요. 파견 만료 시 기본급으로 20억이 지급되고요, 각종 수당은 별도로―”

“이, 이십 억이요!?”

고병갑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2층 로비가 통째로 울릴 지경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쏠렸으나 고병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네네. 기본급만 20억이고요, 거기다 이런저런 수당까지 합하면 실제로는 더 될 거예요.”

“아, 아니······ 왜 그렇게 많이 줘요?”

“네?”

김슬기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고병갑은 차마 ‘짠돌이 협회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20억씩 주냐?’라고 물을 수 없었다.

그는 일단 심신을 좀 진정시켰다.

“3개월 보수치고는 좀 많지 않나 해서요.”

“아무래도 위험도가 높은 사업이니 그렇지 않을까요? 그리고 말씀마따나 예산안이 역대급으로 높게 편성되기도 했고요.”

“아아.”

고병갑은 갑자기 의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그마치 20억이다, 20억!

2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잖은가.

‘20억이면 빚 한방에 정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엄마 제일 좋은 치료 받게 해드릴 수도 있어.’

그의 마음은 벌써 기울었다.

“그거 지원만 하면 무조건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무조건 되는 건 아니랍니다. 고병갑 헌터님께선 D급이시라, 지원하시게 되면 짐꾼 역할로 빠지실 거예요. 짐꾼은 전국에서 단 150명만 뽑죠.”

“아······ 그럼 해봤자 안 될 가능성이 훨씬 크겠네요?”

“그런데 이게 실적 순이거든요. 고병갑 헌터님 실적이 상당히 좋으셔서 모를 일이에요. 아직 모집 초기이기도 하고요.”

실적이 좋다는 말에 고병갑은 괜히 으쓱해졌다. 죽자 살자 살아온 지난 3년을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만약 지원하면 짐꾼으로 빠진다고요?”

“네. 짐꾼은 하위 헌터들로만 차출하거든요. 공격대는 전부 상위 헌터들로 편성되고요.”

“그럼 보수도 차이 나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직 계획안이 완성된 게 아니라서 정확한 값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마 2배는 차이 날 거예요.”

‘두 배면 40억. 허······.’

40억이란 액수에 머리가 하얘졌다. 고병갑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일단 지원해볼게요. 바로 할 수 있나요?”

“그럼요. 물론이죠.”

김슬기가 지원 서류를 주섬주섬 꺼냈다. 고병갑은 그녀의 안내에 따라 지원서를 작성해나갔다.

대략 15분이 지난 후에야 모든 절차가 끝났다.

“네. 다 끝나셨네요.”

“결과는 언제 나오나요?”

“모집 마감이 수요일이고, 발표는 이번 주 금요일이에요. 기재하신 핸드폰 번호로 통보 문자가 갈 거고요.”

“되게 빨리 나오는군요.”

“바로 다음 주가 1차 원정이니까요. 혹시 1차에서 떨어지더라도 곧 2차 모집을 시행하니 그때도 한 번 지원해보세요.”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좋은 저녁 되십시오.”

고병갑이 협회를 빠져나왔다. 저녁 공기가 꽤 쌀쌀했다.

‘파견이라. 짐꾼으로 석 달에 20억이면 완전히 거저먹는 거지.’

20억이면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잖은가? 아주 괜찮은 일감이었다.

‘직접 공격대로 편성되면 보수가 더 좋을 테지만······ 나는 표면상 D급이니까.’

그의 등급은 D.

실제 실력은 B급에 상응하지만, 카르마 양과 농도로 판가름 나는 등급 체계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

등급 재검을 신청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잡았다.

이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어차피 혼자 일하는 그에게 표면상 등급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재검한다고 등급이 높게 나오리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오히려 그가 가진 미지의 힘 때문에 원치 않는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뽑히면 좋겠다.’

고병갑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에 몸을 실었다. 만약 원정대로 선발된다면 차도 좀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을 터다.

45.

혹자는 말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간다고.

그건 모로 보나 꽤 맞는 말이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처럼, 지구는 언제나 제 몸뚱이를 굴렸다.

고병갑의 일상은 대개 비슷한 양상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토벌을 돌고, 복귀해서는 아스빌람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용무를 보며 고블린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는 요즘 아스빌람에 이것저것 추가하는 재미로 살았다.

우선 작물을 하나 더 키우기로 했다.

물론 감자와 고구마만 하더라도 300명 인원 정도는 충분히 먹고 살 만큼 양이 나왔다. 성장의 묘약으로 수확 기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된 덕분이다.

그래도 식탁에 곡식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은가?

그래서 고른 게 쌀이었다.

「어, 그렇게 쭉 파면서 가면 돼.」

「알겠다!」

「아닌가? 야 잠깐 멈춰 봐.」

「아, 알았다!」

농사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련 지식과 경험이 전무한 그가 패기만 가지고 넘볼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껏해야 내려받은 동영상을 보며 흉내 내는 수준.

하지만 포기하거나 관두지 않는다. 실패를 거듭해야 성공 근처라도 갈 수 있을 테니까.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그렇지 않냐?」

「아······. 난. 잘. 모르겠다.」

감자밭 옆으로 논을 일구었다.

써레질하여 평평하게 만들고, 파놓은 수로와 잇는다. 계곡에서 유입된 물이 논으로 차올랐다. 넘치기 전에 재빨리 수문을 닫았다.

얼추 매스컴에서 보던 벼밭의 모양새가 나왔다. 이제 들여온 모종을 옮겨심기만 하면 됐다.

「자, 모내기하자! 전부 붙어!」

수요일은 고블린 수십이 달라붙어 모내기하였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고병갑은 닭장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새로운 가축을 들여올까? 어쩔까?’

현재 아스빌람의 가축은 닭뿐이었다.

그가 닭을 들여온 계기는 지극히 우연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니 참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우기도 쉽고 사룟값도 얼마 안 들고.’

닭은 그냥 방치해도 잘 자랐다.

가끔 수탉 두세 마리를 암탉 닭장에 넣으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번식하고 지지고 볶고 다 했다.

더욱이 달걀까지 준다. 이 정도면 가축계의 효자가 아닐 수 없다.

‘다른 가축은 어떠려나.’

가축의 종류는 다양하다.

소, 돼지, 말, 염소, 토끼 등등.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나 돼지쯤 되리라.

“쓰읍. 둘 다 만만치 않은데.”

소나 돼지는 일단 부피가 컸다. 한두 마리면 모를까. 수십 마리씩 키우려면 광활한 부지가 필요했다.

축사 만드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닐 터. 초기 자금은 또 어떻고?

먹이는 더욱더 골치다. 그 거대한 짐승들의 먹이를 감당하는 것부터가 부담이었다.

‘돼지야 잡식이니 대충 짬 던져주면 된다지만, 소는 여물을 먹여야 하니······.’

고병갑이 끙 앓았다.

‘일단은 닭에 집중해야겠어. 안개를 넘어간 뒤에는 돼지를 한 번 키워보자.’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마구잡이로 벌리는 것보다 하나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판단됐다.

그래서 목요일은 고붕이와 함께 닭장을 넓혔다.

어느새 금요일이 되었다.

이날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전날 탐색해놓은 B랭크 균열에 갔더니 이미 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잉······.”

씁쓸한 마음에 담배를 태우며 핸드폰을 들여보았다. 근처에 돌 만한 균열이 있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쯧. 죄다 E나 F랭크네.”

고병갑은 혀를 차다가 문득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좋다며 달려갔을 텐데, 지금은 C랭크 이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도 많이 발전했구나. 그나저나 마땅한 게 없네. 진짜 원주까지 내려가야 하나? 거기 가면 또 언제······ 음?”

-우우웅!

뜬금없이 핸드폰이 울었다. 문자가 온 것이었다.

뭐지? 고병갑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문자를 확인했다.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제1차 북한반도 원정단 응모에 합격하셨습니다.

오리엔테이션(필참!) 일시 : 2025년 09월 20일(토) 14시, 장소 : 서울 종로구 에이션트 빌딩 4층 대강당.

고병갑은 몇 초간 멍하니 핸드폰을 응시했다. 이게 뭐였더라?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시 몇 초가 지났을까? 그가 탄성을 질렀다.

“아! 이거!”

월요일 날 긴가민가하며 지원한 것이 정말로 합격했다. 고병갑은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와. 이게 진짜 되네. ······잠깐. 그러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고병갑은 즉시 짐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20억 일감이 눈앞에 떨어졌는데 오늘 하루 공치는 게 문제랴?

원정단이 언제 출발할지는 모르나, 3개월이나 떠나 있다면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고병갑은 차분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주변을 정리해나갔다.

그러려니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다시 이튿날이 밝았다.

고병갑은 점심을 간단히 챙겨 먹고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러 종로로 향했다.

‘지하철 타고 올걸. 무슨 차가 이렇게 막혀?’

괜히 차를 몰고 왔구나. 그래도 예정보다 일찍 나왔으니 지각하는 일은 없을 터다.

고병갑은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에이션트 빌딩을 찾아갔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대는데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야······ 슈퍼카 전시장이야 뭐야?”

수억을 가볍게 호가하는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것들 사이에서 고병갑의 빨간 경차는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스치면 20억 날아간다.’

혹여 긁기라도 할까 온 신경을 집중해 주차했다.

차를 주차한 뒤에는 곧장 위로 올라갔다.

1층 데스크에 가니 정장을 차려입은 말끔한 중년이 안내를 도와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곳 4층에서 열리는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러 왔습니다.”

“혹시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고병갑입니다.”

“신분증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아, 예.”

미중년은 고병갑의 신분증을 들여보며 뭔가를 검색했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명찰 하나를 건네주었다.

“예. 뒤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고생하십시오.”

명찰에는 그의 이름이 표기돼있었고 그 아래는 C-7이라는 알 수 없는 번호가 적혀있었다.

고병갑은 그것을 가슴에 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왜 버튼이 없냐? ······아. 이걸 인식시켜야 하는 건가? 오우, 신기하구먼.’

역시 고급 빌딩은 뭐가 다르긴 다르구나.

감탄의 연속이었다.

4층에 도착하니 넓은 복도가 앞으로 펼쳐졌다. 그 끝에는 커다란 아치형 문이 있었다.

저기구나 싶어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약간은 어두운 공간이 그를 반겼다.

-쏴아아!

문을 열자마자 엄청난 카르마 물결이 그를 덮쳤다. 전신의 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카르마의 급류는 먼저 온 사람들이 내뿜는 것이었다.

고병갑은 단번에 자각했다. 이곳에 얼마나 대단한 인간들이 와있는지를 말이다.

수백 개의 좌석 정면엔 넓은 단상이 있었다.

고병갑은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기 싫어 괜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가 적당히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직 1시 20분. 시작하려면 꽤 남았네.’

흘끔 시계를 들여다본 그가 눈동자를 굴렸다. 먼저 온 100명가량의 사람을 몰래몰래 관찰했다.

‘저 사람 우원태 아닌가? 쟤는 마시영이고. 이야, 구도원이 있잖아? 진짜 미쳤다! 내가 저런 사람들하고 함께 한다고?’

TV에서만 보던 S급 강자들이 코앞에 있다.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거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려니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음?”

말을 건 사람은 훤칠한 여인이었다.

어딘가 낯이 익다. 문제는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고병갑의 옆 자리에 착석했다.

“이렇게 보게될 줄은 몰랐네요, 반가워요. 병갑 씨도 원정단에 지원하셨군요?”

“아, 예예.”

“그간 잘 지내셨나요?”

“그냥저냥 지냈죠. 그쪽은······?”

고병갑이 어물거리자 저쪽에서 눈치채고 말했다.

“혹시 저를 잊으셨나요?”

“아뇨. 기억 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성함이 떠오르지가 않네요.”

“염정화에요.”

“아!”

그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랬다. 그녀는 대전에서 함께 던전을 돌았던 B급 헌터, 염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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