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48화 (48/151)

048. 리워크

39.

척척척!

허허벌판이던 아스빌람에 각종 건물이 들어섰다. 부지 마련을 위해 나무도 베어내고, 땅에 박힌 돌도 뽑아내느라 고블린들은 바삐 움직였다.

그러다가 한 건물의 설치가 끝나면 짐을 옮기고 내부를 정리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건만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창고 한 채를 놓는다 쳐도 이곳에 놓는 게 적절할지, 혹여 길을 막지는 않을지 등등 고려해야 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녁이 찾아오기 전에는 모든 공사가 완료됐다. 폐천막만 즐비했던 아스빌람은 이제 없다. 정갈한 모양새의 건물이 줄지어 들어선 주택촌만이 있었다.

‘괜찮은데?’

해품등(해를 품는 등)이 밝히는 주거지는 현대인의 미적 관점으로 봐도 꽤 출중했다.

빌딩 숲이 울창한 지구 도시에 비하면 확실히 세련됨이 부족하긴 하다. 하지만 특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는 오직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총 541,900 수정을 썼네.’

손에 들린 작은 수첩에는 숫자가 가득했다. 건물 한 채를 들일 때마다 가격을 기록한 것이었다.

전부 합해 52채의 건물을 들였고, 50만 수정 조금 넘는 재화를 소모했다.

‘도란 한 명 들여온 돈이랑 비슷하네. 그렇게 생각하면 싸게 먹힌 거지, 뭐.’

고병갑은 수첩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주거지를 한 바퀴 돌았다.

숲과 마주 닿은 곳엔 식당 건물이 있다. 현재 아스빌람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식당 남쪽으로는 물자를 보관할 창고와 도란과 에아가 지낼 집이 있다.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고블린들만을 위한 24채의 숙소가 있었다.

‘애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고블린들의 숙소는 고병갑이 가장 고심해서 공사한 것이었다. 건물 한 채당 18~20명 정도의 고블린을 넉넉하게 수용할 수 있다.

물론 자이언트 고블린처럼 몸집이 큰 녀석들은 10명 정도가 한계일 테지만.

어쨌건 이제 좁디좁은 천막에서 50~60명씩 부대끼지 않아도 될 터다.

‘내일은 침구류도 사들여야겠네.’

당연한 말이다마는, 고대의 상점에서 구매한 건물은 그냥 건물만 있었다.

자동차로 치자면 풀옵션이 아니라 그냥 깡통만 있다는 얘기다.

침구류나 가구 같은 건 재량껏 구비 해야 했다. 326명 치 침구류를 사들이려면 만만치 않은 돈이 깨질 테지만······ 이미 쓰자고 마음먹은 돈이니 괘념치 않기로 했다.

아무튼. 식당의 동쪽에는 갖은 용도의 건물이 들어섰다.

주택촌 북쪽에는 고병갑을 위한 공방이 있다. 연금술 장치를 그리로 옮겨 이것저것 만들기 수월하게 해두었다. 그 옆에는 고병갑만을 위한 작은 집이 마련돼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아스빌람에서 이루는구먼. 허, 참.”

고병갑이 실소를 흘렸다. 밖에서는 월세살이 신세인데, 아스빌람에는 집도 있고 심지어 개인 공방까지 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잠깐. 내 집 마련뿐이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땅 전부 내 거 아니야? 땅 부자를 넘어서 거의 땅 황제네. 기분 죽이는구먼.”

실없는 소리를 뱉으며 주택촌을 조금 벗어났다. 휑하던 들판에 높은 시계탑이 하나 서 있었다.

사실 저건 그냥 기분 나라고 세워놓은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아예 관상용인 것은 아니다.

‘애들 집합 장소로 써도 되고, 시간도 알려주고, 여차하면 올라가서 담배 한 대 피우지 뭐.’

시계탑 뒤로는 넓은 밭이 있다. 남쪽으로 좀 걸으니 닭을 가둬놓은 울타리가 보였다.

닭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닭장 옆에는 창고를 하나 놔둬서 축산에 필요한 물자를 쟁여놓았다.

이만하면 정말 그럴듯한 영지(領地)가 아닌가? 자기가 봐도 멋졌다.

「우와아아!」

「진짜. 아스빌람은. 전설이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채굴 작업을 마치고 복귀한 고블린들은 새로운 숙영지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입을 쩍 벌린 채 막 전입해 온 이등병처럼 눈알을 굴려댔다.

「도르마, 어떠냐? 꽤 괜찮지? 그치?」

「로드시여······.」

도르마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전의 아스빌람만 해도 굉장히 멋졌는데······ 작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면 시라도 한 편 써야 할 것 같군요.」

「에이, 뭘 또 오버하고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역시 로드는 굉장하시군요. 기적이라도 부리시는 것 같습니다.」

「야야, 애들이 고생해줬으니까 가능했던 거야. 나 혼자였으면 이걸 시도할 엄두나 냈겠냐? 에아도 많이 도와줬고.」

「후후후. 그렇군요. 그런데 저희가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뭘 그런 소릴 해? 이거 다 너희가 캐낸 수정으로 산 건데.」

고병갑은 담배를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직도 멀었어. 나중에 내가 없어도 애들이 알아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려면 여러 가지로 손봐야 할 게 많아.」

말을 들은 도르마가 깜짝 놀랐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로, 로드가 없다니. 어디 떠나시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나는 언젠가 안개 밖으로 나갈 거 아니야. 그때가 되면 내가 이곳을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대비해놓겠다는 거지.」

「아아, 그런 말씀이시군요.」

「참고로 바위산을 떠날 땐 너도 데리고 갈 거다, 도르마.」

바위산 일꾼으로 남겨놓기에 도르마는 너무도 고급 인력이다.

도르마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언제까지고 로드를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슬슬 가서 밥이나―」

「고블린 여러분! 식사하세요!」

「바보들아, 밥 먹어!」

때마침 에아와 도란이 머리 위로 국자를 휘적이며 소리쳤다.

「밥이나 먹자.」

「같이 가시지요?」

「그래. 가자.」

고병갑과 도르마가 식당으로 향했다.

고블린들이 깨끗한 식기에 음식을 배식받아 먹고 있었다. 맨바닥에 앉아서 말이다.

고병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식탁부터 들여야겠네. 이래서는 식당 건물을 차린 의미가 없잖아.’

그는 내일 당장 식탁을 들여오자고 마음먹었다.

40.

이튿날.

고병갑은 아침부터 1t 트럭을 타고 도로를 내달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양평군에 위치한 어느 폐공장 부지였다.

저번에 토벌하느라 한 번 가본 곳이다. 인적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휑한 공장건물만 덩그러니 있다.

그런 곳에 일부러 찾아간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주문한 물건을 받기 위해서다.

배달 업자보다 먼저 가 있어야 하니 속도를 냈다.

정오 무렵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폐공장이 훤한 것을 보니 아직 아무도 안 온 모양이었다.

고병갑은 잠깐 여유로 담배를 태웠다.

“땅 주인이 알면 까무러치겠구먼.”

아스빌람으로 물건을 들이는 일.

갖고 들어가는 물건이 얼마 안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침구나 가구처럼 부피가 커다란 물건을 다량으로 들고 가려면 문제가 생긴다.

“어디 쌓아놓을 데가 없으니까.”

그가 개인용 창고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잖은가. 그렇다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물건을 아스빌람에 넘겨 보내는 기행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널찍한 땅을 잠시 빌리기로 했다. 물론 주인 모르게.

얼마가 지났을까? 주문했던 물건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배달 업자들은 ‘여기 폐공장 아닌가? 잘못 왔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고병갑이 얼른 그들을 이끌었다.

“여깁니다, 여기. 여기 놔주십시오.”

“아······ 예예.”

폐공장 안으로 물건들이 쌓여갔다.

침구 350세트. 학교나 군대 등에서 사용하는 다인용 식탁. 덧붙여 이런저런 생필품까지.

오늘 지출한 돈만 천만 원이 넘었다.

‘각오하긴 했다만, 이러다가 진짜 등허리 휘어지겠네. 어지간한 건 내가 만들어야겠어.’

고병갑은 기다란 식탁을 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연금술 성취율도 올랐겠다. 저 정도는 자기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흣짜!”

“아이고, 디스크야.”

배달 업체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물건을 날랐다. 고병갑도 그사이에 껴서 일을 도와주었다.

남들 여럿이 달라붙어 하나를 옮길 때 고병갑은 혼자서 여러 개를 옮겼다.

그의 기행을 보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모든 물건을 폐공장 안에 들여놓았다. 고병갑은 혹시 누락된 게 있을까 싶어 꼼꼼하게 살폈다.

이윽고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제없네요.”

“예. 여기 싸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고생하십시오.”

배달 업체 직원들을 전부 떠나보냈다.

“어휴, 이거 또 언제 옮기냐. 쩝. 부지런히 해야지.”

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을 전부 아스빌람에 옮겨 보냈다.

사실 그 일은 금방 끝났다.

고병갑은 아스빌람에 잠시 들러 들여온 물건을 정리하게 한 후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렌트 업체에 트럭을 반납하고 집으로 가려니 문득 옷가게가 눈에 밟혔다.

‘그러고 보면 에아랑 도란 옷 좀 사줘야 하려나.’

도란과 에아는 아스빌람에 둘밖에 없는 여자다.

고블린들이야 워낙 야성적이니 벌거벗고도 잘 살 것 같다만, 에아와 도란은 아무래도 좀 연한 구석이 있었다.

하다못해 속옷이라도 사줘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속옷은 그렇다 치고. 생리대 같은 것도 사줘야 하려나? 지금까지는 별 탈 없었는데.’

고블린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고병갑 역시 여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매달 며칠씩 ‘어떤 마법’을 치른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고블린이랑 정령도 사람이랑 똑같나? 괜히 신경 쓰이네. 어디 물어볼 곳도 없고.’

직접 물어보자니 민망하고.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하자니 그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다.

그는 길가에 바보처럼 서서 몇 분간 고민했다. 얼마 뒤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고병갑은 민망함을 무릎 쓰고 여성용 의류 매장으로 들어섰다. 1층은 언더웨어, 즉 속옷 매장이었다.

눈 둘 곳이 없어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자니 직원이 붙었다.

“어머, 선물하시려나 봐요?”

“아, 네네.” “여자친구요? 아니면 어머님?”

“어······.”

“선물하시려는 분 나이대가 어떻게 되세요? 사이즈는 알고 있으신가요? 취향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이쪽 라인은 좀 화려한 거고, 저쪽은 무난한 스타일이에요.”

“······.”

“제가 천천히 안내해드릴게요. 후후!”

고병갑은 직원에게 끌려다니며 여성 속옷에 관한 지식을 강제 주입받았다. 당연한 말이다마는 헌터 일에는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A컵? B컵? 둘 다 그렇게 커 보이진 않았는데······ 그냥 대충 A컵 사면 되나? 85A는 뭐가 75A는 또 뭐야? 환장하겠네, 진짜.’

그가 바구니에 여성 속옷을 대략 15세트 정도 담았다. 직원이 자신을 미친 변태로 보지 않을까 걱정됐다.

속옷 쇼핑을 마친 후에는 평상복 위주로 쓸어 담았다. 그는 도망치듯이 계산대로 향했다.

“다 합해서 113만 9천 원 나왔습니다.”

“예!? 얼마요?”

고병갑이 기겁했다. 속옷이랑 옷 몇 쪼가리 담았다고 100만 원을 넘기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결국 그는 113만 원을 결제했다. 돌아오는 길엔 마트에 들러서 생리대도 두 박스나 샀다.

‘아스빌람에 여성 인력을 늘리는 건 생각을 좀 해야겠어.’

고병갑은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키로 했다. 2명도 벅찬데 더 늘리면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온 고병갑.

그는 민망한 것들을 한가득 들고 아스빌람에 방문했다.

얼른 에아를 찾아가 던지듯이 줘버렸다.

「그거 네가 알아서 도란이랑 나눠 입어. 충분히 샀으니까 모자라진 않을 거야.」

「네? 이게 뭔······ 어머! 이건 옷이군요! 정말로 우리 주는 거예요?」

「그래. 그리고 저건 생―」

「음? 둘이 뭐해요?」

「도란 이것 좀 봐요! 당신 로드가 우리 줄 옷을 가지고 왔어요!」

「진짜로? 우와. 로드가 입고 있는 거랑 비슷한 모양이네?」

두 사람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옷을 뒤적였다.

그러던 중 도란이 팬티 한 장을 집어 눈가에 펼쳐 들었다.

「근데 이건 뭐예요? 이것도 옷이에요? 이거 입어 봤자 맨살이 다 드러나겠는데?」

「도란. 그건 속옷이라는 거예요.」

「속옷? 그게 뭔데?」

「속옷이란 건 말이죠. 겉옷 안에다 받쳐 입는······, 음? 도란. 당신 로드가 어디 갔죠?」

「어? 뭐야? 방금까지 여기 계셨는데 어디 가셨지?」

「가버렸나 봐요. 난 그가 가는 줄도 몰랐네요. 말이라도 하고 가지.」

수십의 몬스터를 앞두고도 물러나는 법이 없던 고병갑.

그는 실로 오랜만에 후퇴의 쓴맛을 맛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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