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리워크
37.
이른 아침 고병갑이 부스스 눈을 떴다. 오늘은 토벌을 나가지 않기로 한 날이다. 그러나 다른 할 일이 있었기에 늑장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찬물로 샤워를 싹 하고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나갈 채비를 마쳤을 때는 오전 7시 경이었다.
오늘 그의 애마 1호는 잠시 쉴 것이다. 고병갑은 굉장히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차량 렌트 업체였다.
“전화 주셨던 고객님 맞으시죠? 이름이······.”
“고병갑입니다.”
“아, 맞네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한 차량 앞으로 향했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깔끔한 1t 트럭이 그를 맞이했다.
흔히 용달차라고 부르는 것이다. 화물칸에는 호루가 쳐져 있어 짐 옮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사라도 가시나 봐요?”
렌트 업체 직원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고병갑은 대충 그렇다고 둘러댔다. 오늘 그가 하려는 일은 이사와 하등 관계없지만,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니까.
“잘 쓰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예. 안전운전하세요.”
1t 트럭을 몰고 도로로 나온다. 스틱 운전은 실로 오랜만이었으나, 그는 꽤 뛰어난 드라이버였다. 금방 적응을 마치고 능숙하게 기어를 조작했다.
지금부터 갈 곳은 대형 가구 매장이었다. 거기서 가구와 생활 소품을 구매할 작정이었다.
얼마간 차를 몰았을까. 그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매장에 도착했다. 직육면체 모양의 창고형 건물이었는데, 언뜻 보면 통조림 햄을 수천 배 키워놓은 것 같기도 했다.
“야······ 무슨 차가 이렇게 많아? 일부러 평일에 왔더니만, 헛수고였네.”
까무러칠 만큼 넓은 주차장을 보며 고병갑이 탄식했다. 평일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이 차고 넘쳤다.
뭐가 됐건 건물로 입장했다. 초입부터 은은한 나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고병갑은 그 향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우와······.”
살면서 이렇게 큰 매장은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평소에 살 것이 생기면 ‘다이쏘’ 로 달려가던 그였으니까.
눈을 사로잡는 각양각색의 가구들. 정갈하게 전시된 생활 소품들. 하나같이 예쁘게 생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 매장을 통째로 아스빌람에 옮겨버리고 싶었다.
넓디넓은 매장은 천천히 거닐며 눈요기를 즐긴다.
‘에아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고병갑이 쩝 입맛을 다셨다.
가능하다면 에아를 데리고 와서 이곳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본인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부분에서는 에아가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 많은 정령이 이곳을 본다면, 분명 입이 귀에 걸려서 쉴 새 없이 떠들어댈 것이다.
‘어떻게 잘 가리면 에아도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평상복을 입히고 선글라스 따위로 눈만 잘 가리면 어찌어찌 사람같이 보일 터다.
······물론 그녀의 눈을 전부 가릴 수 있는 선글라스가 존재하느냐가 문제지만.
‘도란은 귀만 어떻게 하면 외국인이라고 대충 둘러댈 수 있을 텐데. 에아는 아무래도 힘들려나?’
고병갑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본격적인 쇼핑에 들어갔다.
일단 오늘 사들일 품목은 주방 관련 물품들이었다.
현재 아스빌람에서 사용하고 있는 식기는 전부 재활용한 것들이었다.
요리 도구며 그릇이며 하다못해 수저 하나까지 어디서 주워온 것이란 말이다.
하여간 머리 검은 짐승은 간사하다.
자기가 사용할 물건이면 고물상에서 주워다 쓸 생각이나 했을까?
‘진즉 사줬어야 하는 건데······ 조금 미안하네.’
이제까지는 여윳돈도 없고 당장 빚 돌려막기 급급해서 모른 척 외면했었다. 어차피 고블린들은 불평 따위 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 좋다고 따르는 녀석들 언제까지고 푸대접할 수는 없지.’
아스빌람 재건하겠다고 밤낮으로 곡괭이질 하는 고블린들. 세상 둘도 없는 로드라고 불평불만 없이 따르는 고블린들.
그 애틋함이 가상해서라도 제대로 된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오늘 한 천만 원 써버리자. 플렉슨지 뭔지 나도 해보자 이거야!’
지갑은 두둑했다. 토벌 대상을 B랭크 균열로 올리면서 수익이 급격히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내년 중으로 예상하던 빚 청산도 한참 앞당겨졌다. 요즘 무리하면서까지 하루 2탕을 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잘만 하면 다음 달 안에 전부 해치울 수 있으리라.
아무튼 고병갑은 아주 닥치는 대로 물건을 사들였다. 수저 하나를 사도 350개씩 사버리니 직원들 눈이 아주 휘둥그레졌다.
저 남자 뭐지? 식당 차리나?
뭐, 대충 그런 표정이었다.
쇼핑은 3시간 넘게 이어졌다.
수저, 포크, 그릇 같은 식기부터 식칼, 도마, 냄비 같은 요리 도구까지.
그 양이 너무 많아서 주차장까지 십수 번이나 왕복해야 했다.
기분 같아서는 테이블이며 의자며 전부 사고 싶었다. 그뿐이랴? 이참에 아스빌람에 침대 300세트 정도 들이고 싶었다.
문제는 그걸 운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1t 트럭으로는 택도 없다. 화물 트레일러 정도는 끌고 와야 엄두나 한번 내보리라.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네.’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쇼핑이 끝났다. 지출은 딱 예상 범주였다.
“800만 원 정도 썼나.”
고병갑은 영수증을 쓱 훑고는 그냥 구겨버렸다. 자고로 남자라면 지나간 일에 미련을 남겨두지 않는다.
그가 한적한 장소를 찾아 차를 몰았다.
38.
고병갑이 아스빌람에 방문했을 때는 거의 정오였다.
에아는 전날 고병갑이 말한 대로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말끔하게 짐을 정리해놓았다. 덕분에 점심 준비는 되지 않고 있었다.
고병갑은 밖에서 산 빵과 음료수를 급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부실하더라도 한 끼는 이걸로 때우자.」
「핥!」
걱정과 달리 고블린들의 반응은 좋았다. 하기야 아무리 에아의 음식 솜씨가 좋아도 가공품에 비할 바는 아닐 터.
「고붕아.」
「아, 예!」
「그거 먹고 나랑 같이 작업할 애들 50명만 뽑아 놔. 너 포함해서.」
「저까지 해서.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 여기 싹 갈아엎으려고. 천막 다 걷고 자질구레한 것들은 갖다 버릴 거야.」
「싸, 싹. 말입니까?」
고붕이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럼 저희는?」
「야야. 걱정하지 마. 더 좋은 집 지어주려고 그런 거니까. 내가 정신이 헤까닥 해서 멀쩡한 걸 때려 부수겠냐?」
「아아······.」
「언제까지고 다 쓰러져가는 천막에서 살 수는 없잖아. 저번에 비 왔을 때 잊었어? 줄줄 새고 난리가 났잖냐.」
「맞습니다.」
약 보름 전. 아스빌람에 첫 비가 내렸다. 그리 많은 강우량이 아니었음에도 천막 틈새로 빗방울이 스며들었다.
「너희 고생하는 데 이런 데서 계속 재우기도 뭐하잖아. 그래도 내가 명색이 로드인데 너희 챙겨줘야 하지 않겠냐?」
「로드시여······.」
고붕이가 우수에 젖은 눈망울로 고병갑을 올려보았다. 감동한 모양이다.
고병갑은 그게 웃겨서 피식 웃었다.
「아무튼 일 잘하는 애들로 골라놔.」
「옙!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걸음을 옮겨 천막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애틋한 눈빛으로 천막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기억의 편린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것들 줍겠다고 온 동네를 쏘다녔던 기억. 처음 천막 세우고 뿌듯함에 젖어 술잔을 기울였던 기억.
‘그동안 잘해줬다.’
고병갑은 천막에다 대고 속으로 말했다.
기껏해야 찢어진 천 조각이라지만 한때 안락한 보금자리가 돼주었던 친구다.
‘싹 치워버리려니 좀 섭섭하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좀 섭섭하긴 해도 향후 발전을 위해서라면 이곳을 갈아엎어야 했다.
‘설령 안개를 넘어가더라도 이곳을 비울 수는 없으니까.’
과거, 고병갑은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안개 지대를 넘으면 이곳엔 더 볼 일이 없다고. 잠시 머물러 가는 곳이니 구태여 수정을 투자해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안개 너머에도 수정이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왜 그 점을 왜 간과했을까?’
이곳 바위산은 귀중한 수정을 제공해준다. 그런 효자 같은 곳을 일회성으로 사용하는 건 바보짓이다.
‘여길 완전히 요새화시켜야 해. 그래야 안전하게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어.’
안개를 걷어내면 그러글이란 괴물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수정 수급에 차질이 생기리라.
돈줄이 끊기면 곤란하다. 그러니 이곳 바위산은 반드시 난공불락의 요새여야 했다.
게임으로 치면 자원이 있는 본진인 셈이다.
식사는 금방 끝났다.
고붕이는 고병갑이 시킨 대로 일꾼 50명을 모았다. 선별되지 않은 인원은 언제나처럼 동굴로 향했다.
「로드시여. 준비됐습니다.」
「좋아! 일단 여기 있는 것들 싹 걷어서 들판에 잘 쌓아놔.」
「옙!」
고블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근 석 달간 고블린들의 집이 돼주었던 천막은 순식간에 형태를 잃었다.
몇몇 고블린이 아쉬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함부로 건물을 놓았다간 뒤처리가 힘들겠지. 구성을 잘 짜야 해.’
고병갑은 집에서 챙겨온 커다란 도화지를 펼쳤다. 이미 조금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스빌람의 대략적인 지형을 그려놓은 것이었다. 고병갑은 그 위에 추가로 건물을 그려 넣었다.
일종의 도시 조감도인 셈이다.
어느 정도 구도가 잡혀갈 무렵 천막 해체 작업이 끝났다.
‘좋았어.’
고병갑은 도화지를 펼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대의 상점을 열었다.
[고대의 상점]
-건설
-기술
-잡화
-기타
[보유 수정 : 1,367,420]
근래 사용한 수정이라 봤자 ‘해를 품는 등’을 산다고 3만 수정 정도 사용한 게 다였다.
모으다 보니 어느덧 수정이 130만 개를 넘겼다.
고병갑은 굉장히 오랜만에 ‘건설’ 카테고리에 들어갔다.
‘기왕이면 좋은 거로 사고 싶지만, 최고급으로만 사들이면 재화가 남아나질 않겠어. 중급 내지 고급으로 적당히 타협을 보자.’
전시된 상품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합리적인 가격에 쓰임새가 좋아 보이는 것들로 몇 가지를 꼽는다.
‘고급 물건부터는 한 가지 상품이라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네. 이거 좋구먼.’
같은 ‘고급 벽돌 건물’이라도 ㄴ자형 ㄷ자형 일자형 등등 종류가 여러 가지였다.
일단은 식당부터 놓기로 했다.
[고급 다목적 홀 I형]
-가격 : 18,000 수정
-설명 : 여러 가지로 활용 가능한 다목적 건물.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에 적합하다. 고급 소재로 이루어져 내구성이 뛰어나다.
「다들 물러서. 건물 들어선다!」
고병갑은 그렇게 소리치며 고블린들을 물러나게 했다.
「우와······.」
「멋지다.」
이윽고 허공에 푸르고 반투명한 건물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웅장한 자태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고병갑은 잘 정리된 부지에 건물을 놓았다.
[해당 위치에 ‘고급 다목적 홀 l형’을 설치하시겠습니까?]
[설치를 시작합니다.]
[소요 시간 약 120분]
‘큰 건물이라 그런지 시간도 오래 걸리네.’
「우와. 진짜 멋져요! 난 이제껏 살면서 이렇게 멋진 건물은 처음 봤어요. 진심으로요! 그래서 이건 어디에 쓰는 건물인가요?」
에아가 별이 쏟아지는 눈빛을 띤 채 물었다. 고병갑은 괜히 뿌듯해서 허리가 꼿꼿해졌다.
「여기가 식당이야.」
「네? 식당이라고요? 이렇게 멋진 곳이요?」
「그래. 앞으로 저기서 밥하면 돼. 요리 도구도 새것으로 전부 교체했으니까 요리하기 한결 수월할 거야.」
「와아! 고마워요!」
그녀는 어찌나 좋은지 폴짝폴짝 뛰었다. 요리를 전담하는 그녀로선 자기 집이 생긴 것처럼 기쁘리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고병갑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에아. 기뻐하는 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 나 좀 도와줘야겠다.」
「도와달라고요? 알겠어요. 뭐든 말해요!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테니까요! 내가 뭘 하면 되죠?」
「건물 놓는 것 좀 도와줘. 아무래도 네가 안목이 좋은 것 같으니까.」
「당신은 나를 제대로 봤군요? 맞아요. 나는 안목이 좋아요. 눈썰미도 제법 좋죠. 내가 당신을 돕는다면 이곳을 예쁘게 꾸밀 수 있을 거예요!」
고병갑은 에아와 합을 맞추어 건물을 놓기 시작했다. 투박하던 아스빌람이 차츰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