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46화 (46/151)

046. 일루미션

35.

고병갑은 차에 올랐다. 그의 기럭지와 풍채를 감당하기에 소형차는 작았다. 시트를 뒤로 한껏 당겼음에도 다리가 굽어졌다.

그는 시동 거는 것을 잠시 미루고 못다 한 생각을 마저 했다.

‘신생 길드에서 유명세도 없는 나를 스카우트 하려고 한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딱 떠오르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사기꾼이거나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봤거나.

‘최대한 숨기긴 했다만······ 그래도 눈에 띄는 짓을 몇 번 하긴 했지.’

고병갑은 기본적으로 ‘고블린 로드’라는 능력을 남에게 감추었다.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완벽했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하위 헌터 딱지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몇 차례 노출한 적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대전에서 겪었던 던전 사건이 있다.

‘거기서 내 이름이 팔린 건가?’

던전에서 그와 함께 생사를 넘긴 4명의 헌터가 있다. 그들은 고병갑의 위용을 코앞에서 본 목격자들이었다.

‘그 인간들은 분명 프로스 길드 소속이었을 텐데? 왜 엉뚱한 곳에서 연락이 온 거람?’

설령 프로스와 일루미션 사이 접점이 있다 하더래도 일개 헌터인 고병갑으로선 알 도리가 없다.

그가 짧게 자란 턱수염을 매만졌다.

‘역시 사기꾼 놈들이려나?’

남 등쳐먹으려고 눈 시뻘게진 양아치야 널리고 널렸다. 심지어 그는 벌써 한 번 코가 베인 전적도 있었다.

‘교묘한 말장난으로 멀쩡한 사람 노예 만드는 쓰레기들.’

과거의 나쁜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고병갑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얼른 떨쳐냈다.

그리곤 무심한 태도로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사기꾼이건 뭐건 어차피 관계없는 일이지.’

그는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애저녁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싫어 프리 헌터를 고집하는 것 아니던가.

그리고······ 어찌 보면 그는 이미 길드에 소속된 몸이었다. 아스빌람이라는 길드에, 그것도 수장으로 말이다.

‘계약금으로 100억쯤 준다고 하면 생각해본다. 킥킥.’

그가 핸드폰을 뒷좌석에 던져버린 뒤 시동을 걸었다. 차 바퀴가 굴러갈 즈음 그의 머릿속엔 온통 딴 생각뿐이었다.

36.

자랑은 아니다만, 고병갑은 뉴스를 잘 보지 않았다.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소식이라 봤자 자신과 그다지 상관없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예 관련 토픽은 더더욱 그랬다.

그런 그도 뉴스를 읽을 때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로 오기 전까지 15분쯤 비는 시간. 멍하니 있자니 심심해서 핸드폰이나 만지작대는 시간.

핸드폰 액정을 쓱쓱 밀어내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눈은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빠르게 읽어 넘겼다.

-초생 길드 일루미션! 9대 명문 10대 명문으로 만드나?

-S급 박선호, 구연진, 서문수 일루미션에 추가 합류. 일류 헌터 빨아들이는 일루미션만의 비결은?

-신흥 길드 일루미션의 등장. 헌터 시장 떠들썩!

-C급 이하 헌터들 대거 영입하는 일루미션. 전례 없던 행보에 동종업계의 반응은?

‘일루미션?’

눈에 익은 이름이었다. 고병갑은 얼른 문자 기록을 뒤져보았다. 무려 닷새 전에 받은 한 통의 문자가 시선을 끌었다.

-안녕하십니까, 고병갑 헌터님. 길드 ‘일루미션’의 홍보팀 팀장 최지원입니다.

로 시작되는 장문의 문자.

이 일루미션이 기사에 나오는 일루미션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기꾼이 아니었다고?”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육성으로 탄식을 뱉어버렸다. 덕분에 식당 안의 시선이 잠시간 고병갑에게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병갑은 기사글에만 집중했다.

길드 일루미션의 행보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법한 유명 헌터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 헌터들이 기존 길드를 등지고 일루미션으로 이적한다는 소식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D~F급의 떨이 헌터들까지 길드원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일루미션이란 사업체가 등록된 지 고작 일주일 만에 몸집으로 대한민국 6등이 되었다고 한다.

가히 물 먹는 하마 급의 영업력이다. 물론 허수(하위 헌터)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임연지 얘는 대하문 소속 아니었나? 페이를 얼마나 세게 받았길래 대하문을 버리고 신생에 붙어? 진짜로 한 300억씩 주는가?”

“순대국밥 특 나왔습니다.”

“아, 네네. 감사합니다.”

고병갑이 혀를 내두르고 있자니 음식이 나왔다. 그는 순대국밥을 앞에 두고도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위 헌터는 왜 이렇게 모으는 거야? 많이 데리고 있어 봤자 별 쓸데도 없을 텐데.”

길드의 주 수입원은 당연히 상위 헌터다.

그중에서도 광대로 특출난 헌터들이 돈이 된다.

자기 밥값 굶으면서까지 관련 굿즈를 사주는 팬덤이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으니까.

이름만 길드지 연예 기획사나 다름없는 곳이 태반인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반면 하위 헌터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대개 쓸모가 없다. 그러니 많이 데리고 있어 봤자 100명을 넘기지 않는 거다.

하위 균열 뺑뺑이나 돌리다가 고장 나면 갈아 치우는 부품 같은 느낌이랄까?

“몸집 불리려고 작정을 했네. ······아, 그래서 나한테도 문자가 왔구만?”

고병갑은 그제야 자신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온 이유를 알게 됐다.

그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영입을 시도한 게 아니었다. 그저 문어발식으로 영업을 했던 것뿐.

‘그럼 그렇지. 나 같이 이름도 없는 놈을 어떻게 알아보고.’

뭔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핸드폰을 놓고 수저를 들었다.

아주 잠깐 ‘일루미션에 연락을 넣어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곧바로 기각시켰다.

길드니 팀이니 하는 곳에 들어가지 않겠노라는 신념은 여전히 굳건했다. 자고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무리 조건이 좋다고 한들, 자선단체가 아닌 이상 제들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고블린 로드의 일을 해내려면 지금처럼 자유의 몸이어야 했다.

‘얼른 먹고 가자.’

일루미션인지 만루홈런인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고병갑은 아스빌람에 해치워야 하는 일을 생각하며 서둘러 국밥을 들이켰다.

그는 저녁 식사를 끝내자마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이미 날이 어둑해진 뒤였다.

오늘 일이 좀 늦게 끝난 탓이다. B랭크 균열 하나, C랭크 균열 하나를 돌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몸은 피곤해도 두둑한 통장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금일 벌어들인 돈만 1천만 원이 넘었다.

고병갑은 대강 채비를 갖추고 아스빌람에 넘어갔다.

들판이 한적하다. 동굴로 가보았다.

고출력 랜턴이 밝히는 동굴 안. 고블린들은 거의 다 거기에 있었다.

「야, 뭐해? 해졌는데 왜 아직도 일하고 있어?」

「앗!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어, 고붕이. 왜 아직도 이러고 있어? 정리하고 밥이나 먹지.」

「그렇지 않아도. 정리하던. 중이었습니다.」

고붕이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고병갑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리하고 있었어? 그래. 조심히 정리하고 와라. 나 숙영지 쪽에 가 있으려니까.」

「예! 금방. 가겠습니다.」

고병갑은 유유히 걸어 숙영지로 갔다. 컴컴한 들판과 달리 그곳은 불빛이 가득했다.

횃불을 떼는 게 아니었다. 숙영지 곳곳에 가로등이 서 있었다.

전기도 없는 곳에 가로등이라고? 그런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이 가로등은 밖의 것들과 달랐다. 이것은 고대의 상점에서 구매한 기물이었다.

‘해를 품는 등이라니. 끝내주는구먼.’

개당 3,000 수정을 주고 구매한 물품.

모양은 기다린 기둥 끝에 커다란 유리구슬이 달려있다.

저 유리구슬이 낮 동안 햇빛을 빨아들였다가 밤에 모아놓은 빛을 뿜어낸다. 원리만 놓고 보면 발광 스티커랑 비슷했다.

끄고 켜는 것도 자유로워서 잠을 방해할 일도 없었다.

얼마 전에 큰맘 먹고 산 것인데,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즉 살 걸 그랬다.

「아! 로드! 오셨네요!」

「어, 방금 왔다.」

도란이 고병갑을 발견하곤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 소리를 듣고 곁에 있던 에아도 몸을 돌렸다.

「음? 오오. 당신 오셨군요? 나는 당신이―」

「―온 줄도 몰랐네요. 아휴, 당연히 몰랐겠지. 너 모르게 왔으니까. 그 말도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냐?」

「네? 왜죠? 나는 정말 당신이 온 줄 몰랐는걸요.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네가 옳다.」

고병갑은 왠지 초장부터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과 몇몇 고블린이 분주하게 저녁밥을 준비 중이었다. 밥을 먹고 왔음에도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냄새 좋네. 오늘 메뉴는 뭐야?」

「흐흥! 저녁 메뉴는 고기볶음에 으깬 감자를 곁들였어요. 냄새가 좋은 건 당신이 가져다준 허브 덕분이에요. 다 떨어져 가는데 더 가져다줄 수 있나요?」

「알겠어. 내일 가져다줄게. 그나저나 감자가 아직도 남아있어?」

「아직도라뇨. 너무 많이 남아서 처치 곤란일 정도인걸요. 다 먹기 전에 썩어버릴까 걱정이에요.」

「그 정도라고? 집에 갈 때 좀 싸 들고 가야겠네. 그래도 감자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로드! 로드!」

도란이 큼직한 주걱을 든 채 고병갑 앞으로 뛰어왔다. 주걱 끝에는 으깨진 감자가 잔뜩 묻어 있었다.

「오우 야. 주걱은 좀 놓고······.」

「나도 이제 할 수 있어요!」

「엥? 뭐를? 감자 으깰 수 있다고?」

「아뇨! 로드가 하는 거 말이에요!」

고병갑은 잠깐 벙쪄서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채 결론을 내기도 전에 도란이 그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잘 보세요!」

그녀가 주걱을 검처럼 쥐더니 자세를 잡았다. 그리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3초 후. 고병갑은 거의 기겁하게 됐다.

도란의 몸과 주걱으로 뜨거운 기운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랬다. 저것은 내력이었다.

「너··· 너 어떻게?」

고병갑에 비하면 형편없을 만큼 투박한 내력이었다. 아직 힘을 다루는 솜씨가 미숙한 탓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검술 교본도 익히지 않은 그녀가 내력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란이 힘을 가라앉히더니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헤헤······. 로드가 하는 거 보고 며칠간 연습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됐어요.」

「내가 하는 걸 보고 연습했다고? 혼자서?」

「네! 잘했죠?」

‘어케했노······.’

말문이 턱 막혔다.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신은 내력이란 힘을 얻으려 석 달 가까이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마저도 교본이 없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한데, 도란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터득했다. 이게 말이 되나?

「아,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너는 교본도 익히지 못했잖아?」

「네? 그냥 로드가 하는 거 보니까 저절로 알 것 같던데요? 되게 익숙한 기분이 들어서······. 혹시 내가 잘못한 거예요?」

고병갑이 당황하기만 하자 도란의 얼굴에 근심이 피어올랐다.

고병갑은 급히 그녀를 달랬다.

「아냐, 잘했어. 그냥 네가 너무 잘하니까 좀 놀라서 그래.」

「정말요! 헤헤!」

도란은 싱글벙글했다. 반대로 고병갑은 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 앳된 여아의 정체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진짜 호랑이 새끼라도 되는 것인가?

그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작업을 마친 고블린들이 숙영지로 몰려들었다.

도란의 일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에아.」

「네?」

고병갑은 에아가 더 바빠지기 전에 준비한 말을 늘어놓았다.

「내일 아침 식사가 끝나면 곧장 짐 옮길 준비 해놔. 식기는 따로 분류해놓고.」

「음······ 알겠어요. 그러도록 할게요. 그런데 왜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일 식당을 들일 거거든. 식기나 요리 도구도 새것으로 싹 바꿀 거고.」

「식당이요? 갑자기요?」

「응. 더 늦기 전에 하려고.」

고병갑은 숙영지를 전체적으로 훑었다.

짜임새 있게 구성되긴 했지만, 면밀하게 보면 허술한 부분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을 이루는 물건 대부분은 폐품이었다.

당연하지. 고물상이나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것들이니까.

현재만 놓고 보면 이 상태로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미래에도 괜찮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밖의 해가 짧아지니 이쪽의 해도 짧아지고 있어. 기온도 조금 서늘해졌고. 이곳에도 겨울이 올지 몰라.’

고블린들이 밥을 먹는 동안 고병갑은 아스빌람을 돌아다녔다.

캄캄한 아스빌람을 훑으며 어떻게 리워크 할지 머릿속으로 구상한다. 어째 꽤 멋진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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