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일루미션
33.
「후방으로 물러서! 창식이 태식이 뒤쪽에 붙어라!」
「예!」
고병갑의 명령에 두 비스트 고블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키리얀, 도르마. 알고 있겠지? 부하 몬스터를 요격해라.」
「알겠습니다!」
「문제없습니다!」
「투르카랑 오르카는 긴장을 놓지 마라. 보스놈 기동성이 보통이 아니다. 어, 하는 순간 거리를 내줄지 몰라.」
「명심하겠습니다!」
공격대가 발 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했다. 최적의 위치에 자리 잡은 원거리 공격수. 두 딜러를 엄호하는 굳건한 탱커.
창식과 태식은 그 주위를 돌며 부하 몬스터의 주의를 끌었다.
‘이번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군.’
고병갑은 검을 꽉 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 한 순간도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센타우로라. 몬스터 백과에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보기 드문 몬스터인데.’
센타우로.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마, 켄타우로스가 연상되는 몬스터다. 머리엔 철갑 투구를 썼으며 양수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다. 현재 좌수는 넉 자짜리 검, 우수는 징이 박힌 철퇴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구우우우······.
센타우로가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곧이어 놈을 보좌하던 마흔 가량의 부하 몬스터가 일제히 산개했다. 부하의 등급은 C~D가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하위 몬스터는 이제 고병갑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신형이 일순 흐릿해졌다. 고병갑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센타우로에게 접근했다.
“키에에엑!”
“카르륵!”
부하 몬스터가 고병갑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하나, 그의 다리는 멈출 줄 몰랐다. 공격대의 보조를 믿는 덕분이다.
그의 신뢰에 보답이라도 하듯 전격의 화살과 암흑 구체가 날아들어 장애물을 때려 맞추었다. 고병갑은 허물어진 몬스터를 밟고 넘으며 검을 쳐들었다.
내력이 잔뜩 스며든 검이 센타우로에게 뚝 떨어졌다. 바위도 단숨에 양단할 만큼 매서운 검격이다.
“그르르······.”
“흡!”
센타우로가 오른쪽 팔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검과 철퇴가 상충하며 사방으로 충격파를 발산했다. 거대한 충격이 검을 타고 팔로 전해진다. 고병갑은 재빨리 내력을 뿜어 그것들을 상쇄시켰다. 덕분에 몸이 밀려나는 일은 없었다.
‘센타우로는 B급 중에서도 중위권 이상의 강자. 역시 어중간하게 위험한 것들이랑은 궤가 달라.’
단 한 번 부닥쳤을 뿐인데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매번 새롭구먼.’
상위라는 이름의 벽. 고병갑은 이미 그 벽을 수차례나 넘었음에도 다시 넘으려고 하면 태산의 초입에 선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세상만사라는 건 결국 마음먹기 따라 달라지는 거다. 그는 마음속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냈다.
지금은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해야 했다.
‘출력을 최대로 뿜는다!’
검에 실려있던 내력이 삽시간에 불어났다. 그는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 내력을 날카롭게 벼렸다.
칼날이 센타우로의 육신을 덮은 카르마 배리어를 깎아내며 파고 들어갔다.
“크륵!”
센타우로도 가만있지 않았다. 놈은 절단되기 전에 얼른 팔을 수거하며 반대편 검을 찔러넣었다. 눈으로 좇기 힘들 만큼 빠른 동작이었다.
고병갑은 육감과 보법에 의존해 회피를 시도했다. 거의 완벽한 몸놀림이었음에도 오른쪽 어깨가 얕게 베였다.
왁자지껄한 이면 세계에서 고병갑과 센타우로의 시간만 멈춘 듯했다. 그들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채 살기를 교환했다.
“취익!”
그때 고병갑의 등 뒤로 수인형 괴물 하나가 덮치고 들어왔다. 이미 기척으로 감지하고 있던 기습이었다. 고병갑은 침착하게 몸을 회전하며 검을 그었다.
몬스터의 오체가 깨진 유리처럼 흩뿌려졌다.
‘제길. 좋지 않은데.’
기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상황은 나빴다. 그가 등을 보인 짧은 틈을 노리고 센타우로가 달려든 것이다.
찰나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반응하기엔 늦다. 그렇다면!’
그가 내력의 순환을 순간적으로 증폭시켰다. 그러자 피부와 근육의 조직이 변화하며 단단한 방패막을 형성했다.
상위 각성자들의 카르마 배리어를 흉내 내어 만든 그만의 독자적인 기술이었다.
“큿!”
아쉽게도 성능은 카르마 배리어를 따라잡지 못했다. 카르마 배리어는 말 그대로 보호막이기에 임계치 이하의 충격은 그대로 흡수해버린다. 반면 그의 방어술은 신체 조직을 경화시키는 것에 불과한지라 충격을 어느 정도 감소시켜주는 역할뿐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한 번뿐이던 기회를 두 번으로 늘려줬으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친다!’
센타우로의 좌수가 고병갑의 옆구리를 조금 파고들었다. 고병갑은 고통을 삼키며 검을 뿌렸다. 내력이 잔뜩 실린 칼날이 센타우로의 목을 향해 똑바로 뻗어나갔다.
센타우로는 얼른 몸을 빼며 회피를 시도했지만,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만큼 고병갑은 무르지 않았다.
‘어딜 튀려고!’
그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그 때문에 옆구리의 상처가 벌어졌지만 그게 멈출 이유는 되지 못했다.
“하아압!”
“칽!”
잠시 뒤 칼날이 센타우로의 목에 적중했다. 회심의 일격. 놈의 목이 반쯤 떨어져 나갔다.
“쿠악!”
괴물은 괴물이다. 센타우로는 목의 절반이 날아갔음에도 비틀거리면서 중심을 잡았다. 어느새 인간의 것처럼 변모한 팔이 목을 붙잡아 출혈을 저지했다.
‘회복하게 두지 않는다!’
고병갑의 팔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찌르고 베고 다시 찌르고 벤다. 무지막지한 공세가 센타우로에게 퍼부어졌다.
“크라롹!”
목의 치명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센타우로는 카르마 베리어를 정상적으로 유지하지 못했다.
놈의 몸이 속속들이 파괴되었다. 검의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뒤, 녀석은 절대로 정상적인 상태라 칭할 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끄······ 으어······.”
마침내 센타우로가 허물어졌다. 분쇄된 부위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생명의 기운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병갑이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는 동안 나머지 공격대도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바닥이 죽은 몬스터로 너저분했다.
숨이 붙어 있는 건 고작 세 놈이었다. 그마저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
「케륵!」
때마침 창식이 몬스터의 골통에 바람구멍을 내놓았다. 그러자마자 다른 한편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다발의 전격 화살이 다른 놈을 새까맣게 구워삶은 차였다.
-빠직!
마지막은 투르카의 몫이었다. 녀석은 모기라도 때려잡듯 거대한 방패로 몬스터를 압사시켰다. 짓뭉개진 살점 사이로 피가 꿀렁꿀렁 터져 나왔다.
「우워어어어어!」
투르카의 함성이 전투 종료를 알렸다.
‘아이고, 지친다.’
고병갑은 푸념을 늘어놓으며 아스빌람과 통하는 문을 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들이 잽싸게 튀어나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공격대가 고병갑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녀석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들 로드의 안위를 살폈다.
「심하게 다치신 거 아닙니까?」
「됐어. 별거 아니야.」
고병갑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운기조식을 취했다. 옆구리에 벌어졌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다행히 내장이 상하지는 않았어. 포션을 쓸 필요까진 없겠네.’
[현재 ’고대 운기조식-하급‘의 성취율 : 94.77%]
고대 운기조식의 완성도도 상당히 높아졌다. 이제 어지간한 외상은 거의 다 자가회복할 수 있다.
요즘은 포션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너희는 다친 데 없냐?」
「염려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도. 괜찮습니다.」
「거, 다행이네. 누차 말하지만 안 다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옙!」
고병갑은 공격대의 상태를 살폈다. 자잘한 상처는 있었으나, 특별히 조치가 필요한 인원은 없었다.
고병갑은 옆쪽에서 작업하는 쪼꼬미들을 쓱 훑어본 뒤 말했다.
「오늘은 나 좀 늦을 거야. 엄마 병원 가는 날이거든.」
「아, 그렇습니까? 왕대비(王大妃)께서는 요즘 어떠십니까? 빨리 호전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도르마가 위로하는 말투로 물었다. 고병갑은 씁쓸하게 웃으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똑같지 뭐. ······그래도 얼마 전부터 더 좋은 치료 받고 계시니까 차차 나아지시겠지.」
「왕대비께서 완쾌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냐 고맙다.」
‘이젠 얘들한테 위로까지 받네.’
고병갑은 속으로 좀 웃었다. 고블린들과 처음 만났을 때는 불신과 적대감뿐이었는데, 이제 사사로운 개인사까지 털어놓을 만큼 가까워졌다.
“스으읍. 후우우.”
그가 연기를 깊게 뿜으며 붕괴하는 이면 세계를 멍하니 응시했다.
‘이 정도면 B랭크 균열도 안정권이라고 할 수 있겠어.’
하위 균열만 토벌해오다가 상위 균열로 발을 담근 지 어언 2주였다. 처음에는 비약적으로 많아진 물량과 보스 몬스터의 강함에 고전했으나, 어느새 몸이 적응했다.
E, F랭크의 최하급 균열만 상대하던 게 불과 3개월 전이었다. 그의 성장 속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급박했다.
’물론 A랭크나 S랭크는 아직 멀었지만‘
A랭크 균열부터는 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부하 몬스터들 마저 대부분 상위급이기 때문이다.
「로드. 끝났어!」
「어, 고생했다. 다들 아스빌람으로 돌아가. 공격대 너희는 몇 시간이라도 푹 쉬고 작업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을 아스빌람으로 돌려보낸 후, 고병갑은 붕괴하는 이면 세계를 빠져나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한껏 선선해진 바람이 그를 맞이했다.
’벌써 가을이구먼.‘
한여름 더위도 모르는 사이 가버렸다. 벌써 9월이 아닌가. 좀 있으면 단풍이 피어오를 것이다.
고병갑은 짐을 차에 싣고, 아스빌람에 가서 몸을 씻은 뒤 서울로 돌아갔다.
34.
“다 합해서 996만 원 정산해드리겠습니다.”
어머니의 병원에 들렀다가 협회에 가니 벌써 저녁이었다. 여름이 자취를 감추니 해도 짧아져 바깥은 진즉부터 어두컴컴했다.
“경매로 부치신 상품들은 낙찰되는 대로 수수료 10%를 제한 금액이 입금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상담원 김슬기는 매뉴얼대로 인사했다.
그녀는 떠나가는 고병갑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남자 정체가 뭐람?’
상담원 일을 오래 하다 보면 해당 지부를 찾는 헌터들의 얼굴을 대강 익히게 된다.
고병갑은 김슬기가 근무하는 영등포 지부의 주 이용객이었다.
‘저 사람 분명 D급 헌터일 텐데. 요새 가지고 오는 마석이나 전리품은 죄다 중품질 이상이네?’
그녀가 기억하는 고병갑은 매번 하품질 마석을 들고 와서 60~80만 원을 정산받던 남자였다. 그런데 최근 수익이 기하급수적으로 뛰었다.
어디 좋은 팀이라도 들어간 걸까? 그런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에휴. 나랑 뭔 상관이람. 빨리 결산하고 퇴근해야지.”
그녀의 호기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세상 별난 일은 전부 모아놓은 게 이 바닥이 아니던가.
그 무렵 고병갑은 협회 건물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집에 들르기 전 간단하게 밥이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려니 대뜸 핸드폰이 울렸다.
-우웅!
‘입금됐다고 알림 온 건가?’
고병갑은 어림짐작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한데 그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안녕하십니까, 고병갑 헌터님. 길드 ‘일루미션’의 홍보팀 팀장 최지원입니다.
―로 시작하는 장문의 문자.
고병갑은 계단에 잠시 멈춰선 채 빠르게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문자의 요지를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길드 영입 문자라고? 나한테?’
협회는 헌터의 정보를 길드와 공유한다. 그러니 생뚱맞은 번호로 연락 오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헌터로 일하는 3년간 자신을 영입하려던 길드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웬만해선 혼자 활동했고, 그러다 보면 이름이 팔릴 일도 자연스레 사라진다.
애당초 길드에서 하위 헌터에게 스카우트 문자를 보낸 것 자체가 수상쩍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아닌가?
‘하위 헌터가 나 좀 받아주십쇼, 하는 경우는 봤어도 길드에서 이리 와주십쇼, 하는 건 또 처음 보네.’
고병갑은 떨떠름함을 느끼며 문자를 다시 한번 읽었다.
‘일루미션? 이건 또 무슨 길드야?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길드인데?’
수도권에 자리 잡은 길드는 고병갑도 웬만한 것은 다 알고 있었다. 길드라고 해봐야 몇 개 없기도 하니까.
하지만 일루미션이란 길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타지역 길드인가? 타지역 길드면 더더욱 나한테 보낼 이유가 없는데. 뭔가 착오나 있는 것이려나?’
호기심을 느낀 그가 인터넷에 일루미션이란 길드를 검색했다.
시선은 핸드폰에 둔 채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고병갑.
그가 고작 몇 계단을 남기고 다시 멈춰 섰다.
고병갑은 핸드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왜 아무것도 안 나와? ······신생 길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