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내력
31.
2025년 8월 15일, 금요일.
광복절이기도 하고, 동시에 황금연휴의 시작일이기도 한 날. 서울의 거리는 예년보다 조용했다.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려서일까? 뭐, 어쩌면 그런 이유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여드레 전인 8월 7일에 벌어졌던 몬스터 웨이브 사건. 그 충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엔 여전히 삼엄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일반인은 알지도, 접근할 수도 없는 최고 보안 시설에서 급히 비밀회의가 이루어졌다.
대통령 및 각 부처의 장관이 모두 소집될 만큼 엄중한 사안이었다.
국가정보원장 이용수는 직접 단상에 올라 사건의 경위를 브리핑했다.
“어제인 8월 14일. 19시 27분경 함경북도 어랑군 일대서 최초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그리고 이게 위성으로 관측한 현장 사진입니다.”
이용수 뒤의 스크린에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허허벌판이 된 산기슭에 거뭇한 점들이 마구 찍혀있었다.
“저 까만 것들이 전부 괴물 떼거리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대통령 박태석이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물었다.
“구체적인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천 마리 안팎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놈들의 동태는?”
“현재로선 특별한 움직임은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몬스터들은 발생 지점에서 반경 2~3km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저번 사태와는 양상이 다르군요. 왜 북상하거나 남하하지 않는 겁니까.”
“그건······.”
정보원장 이용수가 말끝을 흐렸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파악하겠습니다.”
“추가로 균열을 빠져나오는 몬스터는 없는 겁니까?”
“현재까지는 관측되지 않고 있습니다.”
“흠······. 이 같은 일이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겁니까?”
“그것도 조사 중에 있습니다만, 현재까지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대통령 박태석이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뜰 때까지 회의장엔 침묵만이 맴돌았다.
“이 일이 민간에 새어나가선 안 됩니다. 다들 제 말이 무슨 뜻인 줄은 알고 있을 겁니다.”
얼마 뒤 눈을 뜬 그가 말했다. 각 장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통령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어투로 물었다.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건지. 다들 생각을 말해 보십시오.”
회의는 오래도록 진행됐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2차 몬스터 웨이브 사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 희끗희끗한 원로들이 머리를 맞댔다.
융단폭격을 퍼부어 해당 지역을 초토화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주변국과 협조해 일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둥, 헌터들을 시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둥, 현 사태를 대외적으로 밝히고 국가 계엄을 선포하여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둥.
갖가지 의견이 나왔다.
“이치곤 협회장. 협회장은 의견 없습니까?”
문득 대통령이 물었다. 말을 건 대상은 헌터 협회의 협회장을 맡은 이치곤이었다.
일순 회의장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협회장이니만큼 할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 그······.”
이치곤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대통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됐습니다. 그자와의 연락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자’가 언급되자 장관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치곤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시도하고 있다는 말은,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다방면으로 접촉할 방법을 강구 중입니다.”
“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자의 힘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그를 포섭해야 할 겁니다.”
대통령의 어조엔 높낮이가 없었지만, 누가 봐도 협박이었다.
“협회라고 하나 있는 게 하는 일이 없구먼. 쯔쯧.”
“협회장이란 작자가 대책 하나 없다고? 나 원.”
“하는 일도 없으면서 인원 통제 하나 똑바로 못한다니. 저런 인간도 장관이라고.”
구석진 자리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바로 옆 사람도 못 알아들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치곤 만큼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유일한 각성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고건룡. 서시희······.’
그는 속으로 두 SS급 헌터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들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서시희는 13년 전에 행방불명 돼서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벌써 20년째 협회에 몸담은 이치곤으로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서시희는 절대 죽을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고건룡······.
그는 2011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대한민국의 두 번째 SS급 헌터였다.
동시에 전 세계 68명의 SS급 헌터 중에서도 가히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 남자이기도 했다.
단신으로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수도 있다는 그. 하지만 그 역시 현재 소재지가 불분명했다.
서시희와는 달리 자신의 대리자를 통해 지속해서 안부를 보내오고, 세계 각지에서 그의 목격담이 들려오기는 했다.
그러나 필요할 때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일단 외국에 나가 있는 S급 헌터들에게 즉시 귀국할 것을 명령하십시오. 여차하면 450명의 S급 헌터를 전부 소집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까?”
“노력해보겠습니다.”
“협회장.”
“예, 각하.”
“알겠냐고 물었습니다.”
대통령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이치곤은 아랫입술을 질끈 씹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지요.”
대통령 박태석이 회의의 끝을 알렸다.
장관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치곤은 구역질을 참으며 얼른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자마자 담배를 피웠다. 그리곤 닥치는 대로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늙다리 새끼들!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뭐? S급 헌터들을 다 귀국시키라고? 길드에 가서 말할 일이지 왜 나한테 지랄이야! 돈 받고 원정 뛰러 간 애들을 무슨 수로 불러들이냐고!”
그가 울분을 터뜨렸다.
사실 협회장은 허울뿐인 자리였다. 뭐, 대단한 권력도 뭣도 없다는 뜻이다.
그저 서류가 올라오면 도장이나 찍어주는 게 그가 할 일이었다. 5년째 협회장 일을 역임하고 있긴 하다만, 정치권의 압력이 아니었다면 진즉 때려치웠을 것이다.
“씨팔. 대체 헌터들을 어떻게 통제하라는 거야? 걔네가 군인이야? 공무원이야? 어? 멀쩡한 길드 놔두고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그리고 몬스터 웨이브 일어난 게 나 때문인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와서 대책을 내놓으라 마라야? 이 뱀 같은 영감탱이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하여간 싹 쳐 죽여버려야 나라가 제대로 굴러―”
-우우웅!
고급 수제 담배를 연거푸 피우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업무용이 아닌 개인용 핸드폰이었다. 이 전화로는 어지간해선 연락 올 일이 없었다.
‘모르는 번혼데?’
발신자도 수상했다. 이치곤은 얼마간 뜸을 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십니까?”
-오랜만입니다, 협회장님.
대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이치곤은 상대방의 목소리가 귀에 익지 않았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누구십니까? 어떻게 알고 이리로 전화했습니까?”
-접니다.-
“이보세요! 접니다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접니다, 고건룡.“
“흡!?”
이치곤은 급히 숨을 집어삼켰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벌벌 떨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머리가 혼잡해지는 와중에 고건룡이 말을 걸었다.
-좀 만나 뵙고 싶군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32
[‘고대 검술 교본-하급’을 완전습득하였습니다.]
[‘고대 육체 단련술 교본-하급’을 완전습득하였습니다.]
‘드디어.’
고병갑은 흡족하게 웃으며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지난날의 고행.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때려잡고, 매일 같이 고블린들과 목검을 겨룬 보람이 있었다.
그가 땅에 검을 박아넣고 말했다.
「잠깐 쉬고 있어라.」
「옙!」
6인의 공격대가 일제히 대답했다.
참고로 도란은 공격대로 편성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다.
첫째로 왜인지 도란은 묘약도, 교본도 들어먹질 않았다. 그 까닭은 끝내 밝혀낼 수 없었다.
둘째로 공격대는 지금만 해도 충분히 강력했다. 구태여 딜러를 한 명 추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고병갑과 나머지 인원들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전력을 필요 이상으로 올리지 않는 게 좋았다.
하여 고병갑이 도란에게 부여한 임무는 고블린들의 훈련 교관이었다.
도란은 고병갑과 공격대가 토벌에 나선 동안 다른 고블린들의 훈련을 도맡는다.
도란 본인도 그 일에 흥미를 느끼고 만족해했다. 그녀의 가차 없는 교육(?) 덕택에 고블린들의 실력이 나날이 늘기도 했고.
「금방 갔다 올게.」
고병갑은 문을 넘어 아스빌람으로 들어갔다.
넓은 아스빌람엔 모두가 각자 할 일을 정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고병갑은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살금살금 움직였다.
곧 전용 천막에 도착한 그가 두 권의 교본을 꺼내 들었다. 전에 사놓은 것이다.
고대 검술 교본-중급.
고대 육체 단련술 교본-중급.
그는 곧장 교본을 각인했다.
[‘고대 검술 교본-중급’을 각인하시겠습니까?]
[‘고대 육체 단련술 교본-중급’을 각인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이윽고 각인이 시작됐다.
하급 교본을 각인할 때와 똑같은 과정의 반복. 방대한 정보가 뇌리에 스며들며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이 감각은 도통 익숙해 지지가 않네.’
고병갑은 어지럼증이 가실 때까지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러면서 교본의 지식을 음미했다.
‘와······ 뭐야? 그련 게 가능하다고?’
중급 교본에는 하급 교본에 없는 기막힌 것들이 많았다. 당장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대략 3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다시 이면 세계로 넘어갔다.
「으음? 벌써 오셨습니까?」
「잠깐 갔다 온 건데, 뭘. 고기도 거의 다 옮겼네.」
「예.」
일꾼으로 온 고블린들이 몬스터 시체를 분주하게 옮기고 있다. 작업은 거의 끝물이었다.
「로드. 다 했다!」
「어 잘했어. 고기 들고 아스빌람으로 넘어가. 좀 있다가 다시 부를 테니까 대기 잘하고 있고.」
「응. 알겠다.」
일꾼들이 전부 돌아갔다.
「다시 진행하자.」
「예. 이제 슬슬 대장 녀석이 나오겠군요.」
고병갑은 땅에 박아두었던 칼을 뽑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얼마나 진행했을까. 몬스터가 혐오스러운 상판을 들이밀었다. 도르마의 예상대로 보스 몬스터도 함께였다.
“꾸륵! 꾸륵!”
“아우우우욱!”
D급의 오크 전사가 서른 마리쯤.
그리고 그들의 호위를 받는 기간트 오크.
‘기간트 오크라. 대충 예상은 했다만.’
덩치가 8척에 이르는 거대한 오크다. 비대할 정도로 큰 상체가 특징인데, 팔 둘레가 여느 성인 남성의 네다섯 배를 아울렀다.
놈은 들기조차 버거워 보이는 전투 도끼로 무장하고 있었다.
「보스는 내가 맡는다. 너희는 졸병들을 상대해.」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짧게 심호흡하며 새로 각인한 교본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곧 그의 몸이 후끈 달아오르며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게 내력(內力)이라는 건가?’
내력.
교본에서 엿본 지식에 의하면, 내력이란 극한까지 단련한 육체가 자아내는 뜨거운 기운이다.
그것은 다방면으로 이용할 수 있었는데, 활용 방법만 놓고 보면 카르마와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역시 처음이라 잘 안 되네. 하지만!’
고병갑이 내력을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그가 스스로도 믿기 힘들 속도로 뻗어나갔다.
“우어어어어!”
뒤늦게 반응한 기간트 오크가 도끼를 내리찍었다. 고병갑의 눈에는 굼벵이가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슬쩍 피한 뒤 검을 뻗었다. 그러자······.
펑!
가격당한 기간트 오크의 오른팔이 통째로 터져나갔다.
한순간에 팔을 잃어 먹은 오크는 물론이거니, 고병갑도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미친! 이게 뭐야?’
그가 의도한 파괴력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두부를 썰다가 도마까지 썰어버린 기분이랄까?
기간트 오크는 고병갑이 주춤한 틈을 타서 반대편 주먹을 내질렀다. 가히 집요한 투지였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고병갑은 손을 뻗어 주먹을 가뿐히 막아냈다. 기간트 오크의 주먹은 벽에 가로막힌 듯 1mm도 전진하지 못했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힘이라.”
고병갑은 중얼거리며 담담히 칼을 그었다.
까드드드득!
“우어어어억!”
기간트 오크의 가슴팍이 터져나갔다. 피와 살점이 수류탄 파편처럼 퍼졌다.
세상에 누가 저 상처를 보고 칼에 베였다고 생각할까? 마치 거대한 괭이가 훑고 지나간 듯했다.
“우······ 우얽!”
기간트 오크는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물론 고병갑은 그딴 사소한 일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롯이 ‘내력’이라는 힘에 쏠려 있었다.
‘이건 너무 위험한데? 어서 익숙해지지 않으면 내 다리라도 잘라 먹겠어.’
정말로 위험한 힘이었다. 그야말로 길들이지 않은 흉기 같은 힘이다.
고병갑은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살벌함이 상위의 세계에서 통할까?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