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40화 (40/151)

040. 아스빌람은 여전히 평화롭다.

22.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몬스터 웨이브 사건. 그 일이 있고 닷새가 지났다.

고병갑은 냉수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군인들이 돌아다니네.”

길가에 무장한 군인들이 대열을 이루어 순찰 중이다.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다. 온 도심에 무장한 군인들이 깔렸다.

어디 군인뿐이랴? 길드에서는 자체적으로 방범대를 꾸려 24시간 도심을 사수했다.

협회에서는 프리 헌터들에게 자율 방범대에 지원하지 않겠느냐고 협조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보수는 형편없었다. 고병갑은 가뿐하게 거절했다.

“보통 난리가 아니구만.”

이번 난리는 대한민국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뒤늦게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전 세계 57개국이 몬스터 웨이브를 겪었다. 한국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그 날 그 시에 말이다.

피해 정도에는 국가마다 달랐다. 제일 심각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 LA에서만 S랭크 균열이 무려 2개나 터졌다.

인명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수조 원 가량의 재산피해가 야기됐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부산 두 도시에 도합 5개의 균열이 터졌다. 집계된 총 인명피해는 사망 1,477명, 부상 918명, 실종 7명이었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재산피해를 동반했다. 서울에 무너진 빌딩만 3채라고 한다.

온 세계에 비상이 걸렸다. 분위기만 놓고 보면 28년 전 딥 임팩트가 발생했을 당시보다 더욱 삼엄했다.

“나도 식량을 좀 사놔야 하는데.”

국민들이 식자재 마트를 급습했다. 라면이니 쌀이니 할 거 없이 모든 품목이 품귀현상을 일으켰다.

암거래상들은 이때다 싶어 불법 무기들을 유통했고, 이틀 전에는 민간에서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하여간 이래저래 나라가 개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날 이후 한 번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민중의 불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또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구진들은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경위와 차후 재발 우려에 대해 연구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뚜렷하게 밝혀낸 게 없었다.

“쩝.”

고병갑은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서울 한복판에 전차와 장갑차가 주차돼있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군인들밖에 없구먼.’

온통 군인이었다. 사복을 차려입은 사람도 간혹 보였는데 아마 헌터일 것이다.

지금 나라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휴교령은 물론, 직장인들의 출근 거부로 인해 기업들은 반강제적로 휴업 결정을 했다.

자영업자들 피눈물 흘리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조만간 경제 대공황이 재림할지도 몰랐다.

정부에선 국민들을 진정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글쎄. 안심하고 일상 생활하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는 바글바글하구만.”

고병갑은 집 근처 식자재 마트 앞에 멈춰 섰다. 거리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곳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비켜! 비키라고!”

“라면은 인당 2묶음까지만 사실 수 있으십니다! 질서를 지켜주세요!”

“아니, 내 돈 주고 내가 사겠다는데 왜 못 사게 하는 건데!”

“아줌마 방금 내 카트에서 물건 가져갔지!”

“어머! 지금 누구를 도둑으로 몰아욧! 그리고 아줌마라니!”

지랄판도 이런 개지랄판이 없었다. 고병갑은 멍하니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오늘은 뭘 좀 건질 수 있을까 싶었는데 택도 없었다.

‘왜들 저리 호들갑 떠는 거야?’

고병갑은 사람들이 유난 떤다고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있나 싶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고병갑이 헌터라서 가질 수 있는 마인드였다.

고병갑이야 헌터 노릇을 한 지 벌써 3년이나 됐고, 온갖 별난 상황을 다 겪었다. 사후세계 문짝도 여러 번 두들기고 왔다. 당장 얼마 전만 해도 팔자에 없는 던전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하루건너 하루 보는 게 몬스터인지라 이제 이젠 놈들이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즉 극한의 상황에서도 초연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일반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아포칼립스 상황. 일반인들이 혼돈에 빠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뭐가 됐건 고병갑은 이런 혼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여 이런저런 사회적 문제로 인해 어머니의 치료에 제동이 걸릴까 걱정됐다.

다행히도 병원 측에서 별다른 통보가 없었다. 아직 까지는 말이다.

“돌아가야겠다.”

고병갑은 오늘도 빈손이었다.

집은 황량했다. 그의 집엔 이렇다 할 식량 물자가 없었다.

기껏해야 쌀과 생수 조금. 라면 두 봉지와 말라비틀어진 짠지가 전부였다.

집에서 해 먹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그렇다. 지금이야 별문제 없다. 하지만 민간에서 우려하는 ‘아포칼립스 상황’이 정말로 터진다면 곤란해질 수도······.

음. 아니려나?

‘여차하면 아스빌람 가서 감자랑 고구마 캐 먹으면 되지 뭐.’

아스빌람에 깨끗한 물과 식량이 있었다. 혹여 정말로 전란의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고병갑은 별로 걱정이 없었다.

아스빌람으로 피신하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대비는 해둬야지.’

고병갑은 인터넷을 뒤적였다. 전화도 몇 통 걸었다. 거의 연결이 되지 않았는데 십수 번의 시도 만에 하나 얻어걸렸다.

-여보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씨암탉 판매하시는 분이시죠?”

23.

고병갑은 4시간이나 차를 몰아 경상북도에 있는 한 양계장을 찾았다.

“어이구. 서울에서 오셨다고요? 거기 아주 난리라면서요?”

“예, 뭐. 그렇죠. 여기는 어때요?”

“서울보다는 낫겠지요. 워낙 촌이니까요.”

지방은 아무래도 서울보다 상황이 나았다. 그곳 역시 군인들과 헌터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모양새가 나왔다.

“햇병아리 사신다고요?”

“아, 네네. 맞아요.”

“몇 마리나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한 100마리 정도요. 가능할까요?”

“돈만 주시면 안 될 거 없지요. 그런데 싣고 가시겠어요?”

“그냥 상자에 담아 주세요. 뒷좌석에 싣고 가면 되니까요. 가격은 얼마라고 하셨죠?”

“이게 백봉오골계라고 품종이 좋은 거예요. 마리당 삼천 원 해서 30만 원 되겠네요.”

고병갑은 현찰로 30만 원을 주고 암평아리 100마리를 분양받았다.

양계장 사장은 고병갑에게 ‘병아리 잘 키우는 100가지 방법’을 전수해주고 싶어 했으만, 고병갑이 정중하게 사양했다.

병아리 잘 키우는 방법이야 그도 알고 있었다. 성장의 묘약을 먹이면 된다.

물론 병아리가 칠면조가 돼버리는 부작용이 있지만······.

고병갑은 차에 병아리 100마리를 싣고 양계장을 빠져나왔다. 병아리 짹짹이는 소리 때문에 두어 번 정도 사고가 날 뻔했다.

그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아스빌람으로 건너갔다.

그가 고붕이에게 암평아리 100마리를 양도했다. 성장의 묘약 2병과 함께 말이다.

「살려라.」

「옙!」

「그리고 고붕아. 울타리 하나 더 만들어야겠다. 이번엔 좀 높고 조밀하게 만들어야 해. 수탉들이랑 못 들어가게 해야 하거든.」

「아! 알겠습니다! 한 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아냐. 나 몇 시간 뒤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 같이 만들자.」

「옙! 좋습니다!」

차로 되돌아온 고병갑이 부지런히 운전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고병갑은 얼른 채비를 갖추어 아스빌람에 넘어갔다.

고블린들은 아직 작업이 한창이었다.

「고붕아. 나랑 놀자.」

「앗!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어, 방금 왔다. 나랑 울타리 만들자. 작업 그만하고 나와.」

「옙! 바로. 나가겠습니다!」

고병갑은 동굴 내부를 쓱 돌아보았다. 지구는 난리가 났어도 여긴 여전히 평화로웠다.

그는 고붕이를 데리고 숙영지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베어놓은 나무가 가득 쌓여있었다.

강으로 향하는 길을 닦는다고 패놓은 것이다. 이만하면 자재는 문제없었다.

「음? 당신 오셨군요? 언제 오셨나요? 난 당신이 온 줄도 몰랐네요.」

「로드. 안녕.」

재료로 쓸 나무를 훑어보자니 에아와 도란이 나타났다. 고병갑은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너흰 여기서 뭐해?」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 해서요. 장작으로 쓸 나무좀 가지러 왔어요.」

「그래?」

고병갑은 도란을 빤히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마침 잘됐네. 에아, 잠깐 나 좀 보자.」

「내게 또 할 말이 있나 보죠? 어쨌든 좋아요.」

「둘이 만날 무슨 얘기 하는 거예요? 나만 빼놓고. 나도 알려주면 안 돼요?」

「넌 여기 있어.」

「치······.」

도란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토라졌다.

고병갑은 에아만 데리고 한적한 숲으로 갔다.

에아는 뒷짐을 지고 폴짝폴짝 뛰어왔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요. 내가 한 번 맞혀 볼까요? 나는 이런 걸 잘 맞추거든요.」

「맞춰 보든가.」

「도란이 잘 지내냐고 물으려는 거죠?」

「······알고 있네.」

「당신은 원래도 그렇게 걱정이 많았나요? 어쩜 하루걸러 하루 그녀의 안부를 물어보죠?」

에아는 다 안다는 어투로 말했다. 고병갑은 작게 한숨 쉬며 대꾸했다.

「그래서. 걔 어떤 것 같아?」

「내가 매번 말하지 않나요? 도란은 잘 지내요. 고블린분들과도 잘 어울리고 투정 부리는 일도 없죠. 아! 그녀는 호기심이 정말 많아요. 뭐든지 해보려고 하죠. 이따금 덜렁거리기도 하지만 처음에는 누구나 그런 거 아니겠어요?」

「잘 지낸단 말이지. 알겠어.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고병갑은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에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난 당신이 채소나 좀 갖다줬으면 좋겠어요. 며칠째 고기에 소금만 뿌려서 구워 먹고 있단 말이에요. 고블린분들이 국밥을 먹고 싶어 해요.」

「미안. 그런데 지금 밖의 상황이 안 좋아. 채소나 그런 거 구하기가 힘들거든. 며칠만 더 참아줘.」

「음? 밖의 상황이 안 좋다니요. 당신이 사는 곳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별로 심각한 건 아니야.」

「오우, 내가 그만 말실수를 해버렸네요. 그런 거라면 무리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채소를 갖다주길 원치 않아요.」

「됐어.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요.」

고병갑과 에아는 다시 나무를 쌓아놓은 곳에 돌아왔다.

도란은 에아를 발견하자마자 달려가서 소곤거렸다.

「로드랑 무슨 얘기 했어?」

「오, 미안해요, 도란. 내가 그걸 말하면 저 사람 기분이 상할 거예요.」

「몰래 말하면 되잖아! 아아, 말해줘. 말해줘.」

에아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병갑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고병갑은 별 관심이 없었다.

「고붕아 가자.」

「예!」

고병갑과 고붕이는 나무를 한 아름 짊어지고 떠났다. 근력이 보통 수준이 아니다 보니 한 번에 옮기는 양도 대단했다.

「무슨 얘기 했는데! 왜 나한테만 안 가르쳐주는 건데?」

도란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에아는 자칫하다가 자신의 옷이 찢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허풍이 아닌 게, 도란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그녀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말해줄게요. 그러니 제발 옷 잡아당기지 말아줘요. 찢어진단 말이에요!」

「말해준다고? 진짜지?」

도란이 순순히 놔주었다. 에아는 고병갑이 떠나간 자리를 흘끗 본 뒤에 대답했다.

「당신의 로드가 당신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엥? 아닌데. 로드는 나를 안 좋아해. 나한테 말도 잘 안 건단 말이야.」

「글쎄요. 어쩌면 쑥스러워서 그럴지도 모르죠. 그는 매일 도란의 안부를 물어요. 잠은 잘 자는지, 밥은 잘 먹는지. 좋아하지 않으면 그런 걸 물어보지 않겠죠.」

「아······.」

도란이 큰 눈을 끔뻑거렸다. 에아는 그 모습이 우스워 조금 웃었다.

「저··· 저기 에아.」

「네. 말해요.」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네? 무얼 말인가요?」

「로드가 나를 좋아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냐구.」

에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애정과 관심을 받는다는 건 고마운 일이에요. 그러니 보답을 하는 게 참된 도리가 아닐까요?」

「어떻게 보답하는데?」

「그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하는 거예요.」

「로드가 좋아할 만한 일? 그게 뭔데?」

「나야 모르죠. 도란이 직접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때요?」

「아······. 알겠어.」

두 여인은 장작을 몇 덩어리 들고 숙영지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도란은 생각했다. 로드가 좋아하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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