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39화 (39/151)

039. 상황종료

19.

‘젠장. 무슨 벽을 미는 기분이잖아?’

검을 맞댄 것만으로 상대의 묵직함이 전해졌다. 상위 이상의 존재들만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무게감이었다.

대형 몬스터인 사마나귀도 어렵지 않게 떨쳐냈던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쉽지 않았다.

‘쳇!’

고병갑이 뒤로 몸을 뺐다. 크러울은 즉시 따라붙으며 손날 비수를 찔러댔다.

‘이거 제대로 맞았다간 벌집이 되겠군. 그래도 못 피할 정도는 아니야.’

고병갑은 검술 교본에 나온 대로 보법을 밟았다. 그의 몸이 유연하게, 또 어떨 때는 대나무 결처럼 곧게 움직였다.

중간중간 검과 손날 비수가 부닥쳤다. 몸이 저절로 들썩였다.

‘역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타격을 줄 수 없어. 카르마를 실어서 때려야 해.’

그가 검에 카르마를 불어넣었다. 칼날에 은은한 푸른빛이 번졌다. 고병갑의 공격이 크러울에게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쏘아지는 비수를 피하며 옆구리에 한 방.

망치처럼 휘둘러지는 발차기를 피하며 허벅지에 한 방.

딱딱이는 주둥이를 피한 뒤 가슴팍에 크게 한 방.

“그르르르······.”

10분쯤 지났을 땐 크러울의 전신에 자상이 가득했다. 피가 줄줄 흘러 바닥을 붉게 적셨다.

그러나 고병갑은 만족할 수 없었다.

‘깊게 베지 못했다. 카르마 농도 차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가 온몸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결정타를 준비했다.

‘카르마 농도니, 뭐니. 힘으로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근육이 팽팽히 긴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근육이 상호작용을 이루며 어마어마한 추진력을 만들어냈다.

현대문물이나 카르마에 의존하지 않은 순수한 육체의 힘. 고병갑은 한 마리의 맹수가 되었다.

-파밧!

그가 십여 미터 거기를 단박에 주파했다. 범인의 눈이라면 포착하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빨랐다.

“!?”

크러울도 반 박자 뒤에야 반응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쏜다!’

검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목을 노린 공격이었다. 크러울은 간발의 차로 가드에 성공했다. 하지만.

-서걱!

팔이 속절없이 잘렸다. 고병갑은 멈추지 않고 목까지 단숨에 썰어버렸다.

푸쉬싯! 잘린 부위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크러울은 이내 허물어졌다.

“허억, 허억, 허억.”

고병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은 크러울을 내려보았다.

‘잡았다. 상위 몬스터를 단신으로 잡아냈어.’

하지만 자신 역시 정상의 상태는 아니었다. 힘이 쭉 빠지며 극심한 피로도가 몰려왔다.

육체 과부하에 따른 반동이 찾아온 것이다.

‘이래선 한두 마리가 고작인가······. 그래도 괜찮아.’

[현재 ‘고대 검술-하급’의 성취율 : 86.98%]

[현재 ‘고대 육체 단련술-하급’의 성취율 : 91.79%]

고병갑은 홀로그램을 들여보며 씩 웃었다.

‘중급까지 얼마 안 남았다. 아직 올라설 계단은 많아.’

그가 크러울의 가슴팍을 갈라냈다. 죽어 카르마가 쪽 빠진 육체는 여느 고깃덩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윽고 심장부에 자리 잡은 마석을 뜯어냈다. 상위 몬스터의 상징인 붉은 마석이었다.

“이건 기념으로 챙겨둬야겠어.”

고병갑은 마석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다시 몸을 움직였다.

20.

한 번 강한 적을 상대하면 그 아랫것들은 가소롭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드문드문 낯짝을 비추는 하위 몬스터들. 고병갑은 놈들에게서 어떠한 위화감도 찾을 수 없었다.

비약 조금 보태자면 움직이는 표적 정도였다.

“이 잡것들은 대체 어디서 유입되는 거야?”

주변에 널브러진 몬스터만 열은 됐다. 어째 점점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대로변으로 나가봐야겠어.’

고병갑은 빌라촌을 빠져나왔다. 얼마 뒤 큰길로 들어섰다.

“개판이구만.”

거리의 상황은 엉망 그 자체였다.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차들, 움푹 파인 도로, 부서진 전신주.

덧붙여 널브러진 몬스터의 시체.

인기척은 없었다. 도망쳤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여기가 격전지였나?’

혹시 있을지 모를 생존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건너편 빌딩 사이로 다량의 기척이 감지됐다. 고병갑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콰쾅! 쾅!

“키에에에에에엑!”

거대한 덩치의 몬스터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고병갑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눈앞의 생명체는 A급의 와이번이었다.

‘미친! 와이번이라고?’

그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와이번은 A급 초대형 몬스터다. 고병갑이 아무리 가파른 성장을 했더라도 지금으로선 대적하게는 게 불가능했다.

“끼에에에에엑! 끄에에엑!”

‘잠깐만?’

가만 보니 와이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용종(龍種)이 자랑하는 날개는 두 쪽 모두 잘렸고, 회색빛 피부는 온통 붉게 물들었다.

고병갑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브레스다! 뭉쳐!”

한 무리의 인간이 나타났다. 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방패를 앞세우며 외쳤다.

잠시 후. 그의 말대로 와이번이 홍염의 불꽃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아아압!”

사내가 카르마를 방출했다. 그러자 카르마가 거대한 방패 형상으로 변모하여 불꽃을 막아냈다.

와이번의 불길은 이내 꺼졌다.

방패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와이번을 노리기 시작했다.

자기 몸만 한 대망치를 들 청년이 훌쩍 뛰어올랐다. 망치에는 양질의 카르마가 잔뜩 엉겨있었다.

-콰드드득!

대망치가 와이번의 어깻죽지를 강타했다.

“끼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신음이 귓전을 울린다.

와이번이 신경질적으로 목을 휘둘렀다. 청년은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즉시 피신했다. 애꿎은 빌딩만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쿠와아아악!”

와이번이 다시금 입을 쩍 벌렸다. 불길을 뿜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녀석의 아가리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초능력? 초능력자가 있는 건가?’

카르마를 촉매 삼아 벌인 초능력이다. 저 인간들 사이에 초능력자가 끼어있는 모양이었다.

대망치 사내가 와이번의 주둥이를 올려 쳤다. 그러자 얼음이 와장창 깨지며 아가리가 통째로 날아갔다.

‘흠잡을 곳 없는 연계다.’

주둥이까지 잃어버린 와이번은 휘청거렸다. 생명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석한! 끝내자! 목이야!”

“확인!”

방패남 뒤에 숨어 있던 사내가 외쳤다. 그는 두 손을 뻗어 카르마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와이번의 목에 성에가 끼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대망치를 든 남자가 얼어붙은 부위를 정타격했다.

-카장창!

“컭!”

와이번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거대한 대가리가 바닥을 나뒹굴었고, 뒤이어선 몸통이 쓰러졌다.

“이야······.”

고병갑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저게 상위의 전투인가.’

그저 총탄만 쏴대는 하위 헌터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고병갑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세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으음? 이봐요! 돌아다니면 위험합니다! 얼른 자택으로 피신······. 잠깐. 헌터십니까?”

“아, 예. 헌터입니다.”

탱커 조우성은 고병갑을 위아래로 훑으며 생각했다.

‘C급 아니면 D급쯤이겠네. 근데 칼 들고 뭐 하는 거야?’

그 옆에 선 나석한과 차명진도 어딘가 인지 부조화를 느끼는 듯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고병갑이 하위 각성자라는 사실을.

고병갑은 의미심장한 눈초리에도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몬스터 웨이브입니다.”

조우성이 곧장 대답했다. 고병갑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몬스터 웨이브요?”

몬스터 웨이브란 균열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일컫는다.

당연히 실생활에서 쓸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정(假定)의 상황이고, 몬스터가 균열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학자나 안보 전문가들이 탁자에서나 떠드는 단어였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된 것이다.

조우성은 바로 이어 말했다.

“청룡산 인근에 S랭크 균열이 발생했고, 발생 30분 만에 터져버렸습니다.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죠.”

“에··· 에스 랭크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쪽은 지금 난리 났습니다. 민간인이 삼백 명도 넘게 죽었다고 하더군요.”

“종로 쪽에도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맞아요. 다행히 거긴 여기보다 상황이 낫죠. A랭크 균열이 터졌거든요.”

고병갑은 멍한 눈으로 봉천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기 어딘가에 S등급 몬스터가 있다는 거잖은가?

나석한이 대망치를 쿵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서울만 지랄인 게 아니에요. 듣자 하니 부산에도 난리랍디다.”

“부산도 말입니까? 허······ 완전히 난장판이 났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게 뭔 지랄인지 원.”

나석한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때 옆에 있던 차명진이 핸드폰을 들여보다가 번뜩 말했다.

“상황 거의 종료된 것 같은데? 보스 몬스터 잡았대.”

“당연히 잡아야지. S급 헌터들 죄다 그리로 갔는데 못 잡으면 그게 말이냐?”

“그럼 우린 슬슬 복귀해도 되는 건가?”

“아······ 잠시만. 확인해볼게.”

차명진이 핸드폰 액정을 쓱쓱 내렸다.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 떨이들은 좀 남은 모양이야. 우리 섹션에도 몇 마리 흘러들어온 것 같아. 한 바퀴 더 돌아야겠는데?”

“꼭 우리가 해야 돼? 아까 보니까 대하문 애들도 있는 것 같던데 걔들한테 맡기고 돌아가면 안 되냐?”

나석한이 표정을 구기며 투정 부렸다. 조우성은 쓴 입맛을 다시며 방패를 고쳐 잡았다.

“헌터가 몬스터 놔두고 어딜 가나. 자,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정리하자. 그쪽은 그만 귀가해보세요. 상황도 거의 끝났다니까요.”

“아, 예. 그래야겠네요.”

고병갑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거두었다.

세 헌터는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졌다.

고병갑은 떠나기 전 슬쩍 주변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주검들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방치돼있었다.

‘저 사람들 저대로 놔둬도 되는 건가.’

어차피 곧 사람들이 출동해서 사상자를 수거할 테지만, 그래도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번 둘러나 보자.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고병갑은 혹시 생존자가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하지만 10명을 살피면 10명 다 죽어있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몰골로 말이다.

“아주 엿 같이도 저질러 놨네. 개 같은 새끼들.”

고병갑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몬스터들의 가학성에 치가 떨렸다.

그는 관두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가 서늘해졌다.

그가 얼른 검을 뽑으며 몸을 돌렸다. 건물 사이사이에서 몬스터 떼거리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전부 다 D급 이하 조무래기였다.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잘 걸렸다. 이 개자식들.”

그가 호전적인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마침 몬스터를 베고 싶었는데 잘 됐구나 싶었다.

몬스터 떼와 고병갑이 격돌했다.

이윽고 절단된 사지가 하늘을 비산하고 피의 비가 내렸다.

21.

고층 빌딩의 옥상. 그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결여된 눈으로 아래쪽 상황을 쳐다보았다.

‘정리되었구나.’

-스릉! 철컥!

그녀가 반쯤 뽑았던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오늘 그녀의 칼날엔 피가 묻지 않았다.

‘결국 시작되고야 만 건가.’

여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죽어있던 눈에도 분노의 감정이 차올랐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앳된 목소리다. 말을 건 주체도 고작 열 대여섯은 됐을까 한 소녀였다.

소녀 옆으로 두 명의 소년이 서 있었다. 모두 제 몸집만 한 초대검을 들고 있었다.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 돌아가자꾸나.”

“네.”

“저기, 마스터.”

이번엔 소년이 입을 열었다. 동자승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소년이었다.

“말하렴.”

“이제 시작되는 건가요? 마스터께서 말씀하신······.”

“아니. 아직은 아니란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네 사람은 고층 빌딩을 타 넘으며 움직였다. 몬스터가 휩쓸고 지나간 서울은 그야말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온 사방에서 죽음의 향기가 그윽하게 전해졌다.

‘음?’

잘 나아가던 여인이 한순간 멈춰 섰다. 그녀를 따르던 세 아이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따라 섰다.

“왜 그러세요, 마스터?”

“······.”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아래를 주시했다. 그곳엔 한 남성이 몬스터 떼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

‘저자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몬스터를 썰어 넘기는 사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여인은 이내 기억의 한 켠에서 사내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마스터?”

“가자꾸나.”

여인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다시 날쌔게 움직였다. 아이들은 군말 없이 여인을 따라 움직였다.

‘내 예상이 맞았어.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녀의 눈가에 의욕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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