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37화 (37/151)

037. 이변

14.

「호오. 그건 참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에아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얀은 신나서 계속 말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 위쪽에 있는 밭도 로드께서 가꾸신 겁니다. 울타리의 닭들 역시 로드께서 들여오신 거고요.」

「당신들의 로드는 무척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요? 당신 말에 따르면 그자는 완전 만능 해결사네요.」

「당연합니다. 저희에겐 은혜나 다름없으신 분이지요.」

「당신네가 그렇게나 좋아하고 따르는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믿음직한 지도자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이죠.」

에아와 키리얀이 나란히 앉아 국밥을 들이켰다. 밥 먹는 와중에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여유로운 점심시간도 거의 끝물이었다. 식사를 마친 고블린들은 하나둘 작업을 준비했다.

그때 고붕이가 고블린들을 향해 외쳤다.

「식사 마친 고블린은. 들판에. 모여라! 로드의. 명령이시다!」

에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얼른 가봐야겠습니다.」

키리얀이 남은 국밥을 모조리 해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나도 구경 가도 될까요? 난 고블린은 아니지만요.」

「음. 로드께 한 번 여쭈어보십시오.」

「그게 좋겠네요. 오늘 같이 밥 먹어줘서 고마웠어요, 키리얀.」

「별말씀을. 이따 저녁에도 같이 먹읍시다.」

「네 좋아요. 당신과 조금 친해진 기분이 드네요.」

키리얀은 고개를 꾸벅인 뒤 들판으로 향했다. 다른 고블린들도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에아는 느지막하게 식사를 끝냈다. 그녀가 들판에 갔을 때는 벌써 모든 고블린이 모여있었다.

그 중앙에 고병갑이 서 있었다.

「다 모였나? 고붕아 확인해 봐.」

「예! 알겠습니다!」

「천천히 해도 돼.」

고붕이가 능숙하게 머릿수를 헤아렸다.

에아는 그 틈을 타 고병갑의 뒤로 슬쩍 다가갔다.

「저기요.」

「아잇! 놀래라!」

「뭘 하는 거예요?」

고병갑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뭐 좀 할 게 있어서. 왜?」

「나도 구경해도 될까요? 당신들이 모여서 뭘 하는지 궁금해요.」

「흠······.」

고병갑은 잠깐 생각하다가 흔쾌히 허락했다.

「맘대로 해. 어차피 너 도와줄 애들도 여기 있으니까.」

「얏호! 고마워요! 나는 호기심이 많아요. 정령들은 대개 그런 편이죠.」

「넌 쓸데없는 사족이 너무 많아.」

「그랬나요? 그렇지만 나는 말하는 것을 무척 좋아해요. 반대로 생각나는 것을 말하지 못하면 가슴이 답답―」

「됐으니까 저리로 가기나 해.」

「헤헤. 알겠어요.」

에아는 고블린들이 모여 앉은 곳에 살포시 끼었다.

「로드시여. 전부. 왔습니다.」

「오케이. 고붕이 너도 저기 가서 앉아.」

「예.」

고블린들이 열을 맞춰서 앉았다. 고병갑은 그들 앞에 서서 목을 가다듬었다.

「밥은 잘 먹었냐?」

「예! 잘 먹었습니다!」

「엄마!」

고블린들이 입을 맞춰 대답하니 아스빌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에아가 깜짝 놀라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너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오늘 아스빌람에 새 식구가 들어올 거야. 그걸 알려주려고 불렀어.」

「새로운. 식구?」

영문을 모르는 고블린들이 웅성거렸다. 고병갑이 능숙하게 그들을 달랬다.

「자자, 모두 조용하고 집중해. 지금부터 신 아스빌람 사상 첫 여성 고블린이 탄생할 테니까.」

적막이 감도는 들판. 고병갑은 떨리는 마음으로 고대의 상점을 열었다.

원하는 상품을 찾으려 손가락을 몇 번 놀렸다.

‘여깄다.’

[암컷 고블린]

-가격 : 500,000 수정

-설명 : 저주로 멸종한 암컷 고블린. 번식 기능이 있으며, 암컷을 낳을 수 있다.

고병갑은 2~3초간 뜸을 들이다가 눌렀다.

[‘암컷 고블린’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어.’

[구매하실 ‘암컷 고블린’을 선택하여주십시오.]

[헨렐, 마리아, 칸나, 아리오나, 수잔, 델로시, 그란시아······.]

‘뭐야 이건?’

고병갑은 홀로그램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족히 수만 가지가 넘는 이름이 좌르르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 읽으려면 며칠 밤은 지새야 할 성싶었다.

‘이 중에 선택하라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인지라 선뜻 정하기 어려워졌다.

‘괜히 고민되네.’

고병갑이 끙 앓았다. 무릇 보기가 여러 개면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일 텐데 뭐.’

결심을 굳힌 그가 구매 버튼을 눌렀다. 고병갑이 정한 이름은 ‘도란’이었다.

잠시 후 50만 수정만큼 금액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빛의 응어리가 뭉치기 시작했다.

「오오!」

고블린들이 탄성을 흘렸다. 고병갑도 멍한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빛의 응어리는 빠르게 형태를 잡아갔다. 처음엔 머리를 만들었고 차츰 몸통과 팔다리의 형태가 나왔다.

마침내 발끝까지 형성이 끝났을 때. 반짝거리던 빛이 사그라지며 한 명의 여인이 드러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여인이.

그리고 그건 고블린이 아니었다.

적어도 고병갑이 보기에는 그랬다.

‘뭔데 이게?’

「······어?」

「저거. 무엇?」

「로, 로드시여? 이게 무슨?」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비단결처럼 고운 흑발에 깨끗한 구릿빛 피부를 가졌다.

이목구비는 매우 또렷하고 아래로 쳐진 귀는 끝이 뾰족했다.

신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략 160cm 정도. 고병갑의 가슴팍까지 오는 수준이었다.

액면가만 따져보면 16~17세 정도였다.

‘아니, 시발. 지금 액면가가 문제가 아니잖아.’

고병갑은 멍한 정신을 달래고 사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암컷’은 맞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가 ‘고블린’이란 말인가?

그녀의 어디에서도 고블린이란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인간과 비슷하다. 다만 그마저도 완벽히 똑같지는 않았다. 분명한 이질감이 존재했다.

「······.」

정체불명의 소녀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고병갑을 올려보았다. 고병갑은 초록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으려니 빨려 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이윽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백 개의 눈. 그녀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너 뭐야?」

고병갑이 간신히 말했다. 소녀는 눈을 끔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말을 못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한순간.

「앙? 이게 뭐야?」

소녀가 인상을 확 구기며 육성을 뱉어냈다.

고병갑은 에아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가히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고병갑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15.

「그것도 모르겠는데요.」

「그럴 것 같더라.」

정체불명의 소녀, 도란은 고병갑이 준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대충 대답했다.

‘골치 아프네.’

고병갑은 그의 전용 천막에서 도란과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대화보다는 취조에 가까웠다. 고병갑이 묻고 도란이 대답하는 형식이었으니.

문제는 딱히 성과랄 게 없었다.

고병갑은 마흔 개 정도의 질문을 했고, 도란은 전부 모른다고 답했으니까.

그래도 두 가지 사실은 밝혀낼 수 있었다.

‘얘.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싸가지가 없어.’

도란은 아는 게 없었다. 마치 흰 도화지 같았다. 때가 좀 묻어있으면 좋으련만 지나칠 만큼 깨끗했다.

그리고 싹수가 노랬다. 지금도 소파에 대충 걸터앉아 꼰 다리를 떨어댔다.

고병갑은 이 이상 캐묻는 것은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됐다. 이쯤 하자.」

「저기요, 로드. 아! 로드라고 부르면 되죠?」

「어 그렇게 부르면 돼. 근데 왜?」

「물어볼 게 있어서요. 나는 앞으로 어떻게 돼요?」

「너는······ 앞으로 여기서 지내게 될 거다. 다른 고블린들과 함께.」

「오, 그래요? 재밌겠네.」

「······.」

털털한 건지, 그냥 생각이 없는 건지.

도란은 딱히 투정 부리지 않았다. 고병갑은 담배를 입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도란이 표정을 찡그리며 몸을 뒤로 뺐다.

「으으. 나 그거 냄새 싫은데.」

「끝났으니까 이만 가봐.」

「어디로요?」

「저기 천막 쳐놓은 거 보이지?」

그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천막이 뭔데요? 아 저거요?」

「그래. 거기 가면 에아라는 애가 있을 거야. 오늘은 걔 옆에 붙어있어.」

「알았어요. 그럴게요. 흐흐흥. 에아, 에아, 에아가 누굴까나~」

도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유히 떠나갔다. 그녀는 에아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발랄했다.

“골치 아프네.”

고병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연기를 뿜어냈다. 연기는 이내 흩어져버렸다.

‘저건······ 퇴화하기 전의 고블린인 건가.’

도란과의 대화에선 딱히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추리는 가능했다. 그리고 나름의 추론을 거듭한 결과 아래와 같은 결론이 나왔다.

‘암컷 고블린은 아스빌람이 멸망하기도 전에 멸종했다. 그러니 종족의 퇴화를 겪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저 모습은 쇠락하기 전 고블린의 모습일 가능성이 커.’

애당초 고대의 상점이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고블린을 사들였는데 생뚱맞은 게 나올 리가 없다.

‘기가 막히는구먼. 저게 고블린의 본 모습일 수도 있다니.’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란, 그리고 나머지 고블린들. 둘 사이 괴리감이 너무도 컸다. 슬플 만큼 말이다.

‘대체 얼마나 못된 짓을 했길래 그 지경이 된 거냐, 얘들아.’

고병갑은 한동안 담배를 피웠다.

얼마 뒤 그는 에아를 찾아갔다. 에아는 고블린들, 그리고 도란과 함께 강 하류에서 있었다. 설거지 중인 모양이다.

고병갑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잠시간 그들을 훔쳐보았다.

「그거 나도 해봐도 돼?」

「음? 그건 도와준다는 뜻인가요? 당신이 도와준다면 저 에아는 참 기쁠 것 같아요. 나는 도움 받는 걸 좋아해요.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좋아하죠.」

「그럼 도와줄게. 재밌어 보이는데.」

도란이 그들 사이에 껴서 엉성한 몸짓으로 설거지를 도왔다.

고병갑이 한숨을 내쉰 뒤 에아를 불렀다.

「에아.」

「음? 아! 언제 왔어요? 나는 당신이 내 뒤에 서 있는 줄도 몰랐네요.」

「잠깐 나 좀 봐.」

「아 좋아요.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나 보죠?」

고병갑은 에아를 이끌고 한적한 곳에 갔다.

「내게 할 말이 무엇인가요?」

「한동안은 네가 도란을 좀 돌봐줘야겠어.」

「저 소녀의 이름이 도란인가요? 예쁜 이름이군요. 아무튼 알겠어요. 내게 맡겨요.」

「그럼 부탁 좀 할게. 쟤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쳐 줘. 잘 때도 데리고 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바로 가져다줄 테니까.」

아무래도 다른 고블린보다는 에아와 붙여놓는 게 나을 듯했다.

에아도 흔쾌히 승낙했다.

「알겠어요. 새 친구를 사귀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죠. 왠지 도란과 나는 말이 잘 통할 것 같아요. 방금 그런 예감이 들었거든요. 나는 촉이 좋은 편이에요.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알겠어. 알겠으니까 가서 설거지나 마저 해.」

「음 알겠어요.」

고병갑은 에아를 돌려보냈다. 하여간 저 정령과 대화를 하면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길로 아스빌람을 빠져나왔다. 눈이라도 좀 붙일 생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머리 아플 때는 잠드는 게 최고였다.

“샤워 때리고 오랜만에 낮잠이나 푹 자자.”

그가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졌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잖은가.

마지막으로 팬티를 벗기 위해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쾅! 쾅!

“씨, 씨발 뭐야!?”

굉음과 함께 건물이 진동했다.

찰나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뭐지? 전쟁 났나? 미사일이라도 떨어진 거야? 아니면 지진? 싱크홀? 뭐야? 뭔데?’

고병갑은 팬티를 반 정도 걸친 채 창문으로 달려갔다. 굳게 쳐진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오, 맙소사.

“이게 뭔······.”

말문이 턱 막혔다.

미사일, 지진, 싱크홀. 그따위 것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일이 그의 자취방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몬스터가 왜 길거리에 있는 건데?’

“으아아악! 씨발! 씨발! 오지마!”

귓가에 서늘한 비명. 고병갑은 목을 쭉 빼고 소리 난 곳을 바라보았다.

한 남성에게 몬스터가 접근하고 있었다.

남성은 다리가 풀렸는지 주저앉아 버렸고, 몬스터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그의 몸을 쪼개버렸다.

피가 오물이 건물 외벽에 쫙 튀었다.

“크르르르······.”

몬스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4층 빌라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고병갑과 눈을 맞추었다.

‘씨발!’

고병갑은 미친 사람처럼.

아니, 반쯤 미쳐서 벗어두었던 옷을 다시 걸쳤다. 장검을 챙긴 뒤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에도.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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