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고블린의 비애
13.
정령 에아가 아스빌람에 오고 사흘이 지났다. 고병갑, 그리고 그의 지령을 받은 몇몇 고블린은 에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위험의 소지가 보인다면 즉각 처단하기 위해서.
하지만.
「고블린 여러분 식사하세요! 저 에아가 맛있는 점심밥을 차려놓았답니다!」
에아는 특유의 친화력과 적응력으로 아스빌람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모두. 작업 중단. 밥 먹고. 하자!」
「핥핥! 밥. 먹자!」
작업반장 고붕이가 오전 작업을 중단시켰다. 수정동굴에 들어찬 고블린들은 일사불란하게 장비를 정리한 뒤 바깥으로 나왔다.
「에아. 오늘. 밥. 무엇?」
「오늘 점심은 국밥이에요!」
「국밥? 뭐야?」
「그쪽 로드가 알려준 거예요. 국물이 있는 요리죠. 나는 따뜻한 국물을 좋아해요. 당신들 입맛에도 맞았으면 좋겠네요.」
「냄새. 맛있다.」
「후후. 얼른 가요.」
에아가 폴짝폴짝 뛰며 고블린들을 이끌었다. 고병갑은 먼발치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 돌아가네.”
나무 아래 만든 정자. 고병갑은 거기에 앉아 평화로운 주말을 즐겼다.
‘뭐 딱히 수상한 낌새는 안 보이는구먼. 하기야 저 혼자서 뭘 할 수 있겠어.’
에아는 제 몫을 잘해주었다. 물론 그녀 혼자서 300명이 넘는 고블린의 끼니를 전부 감당할 수는 없었다. 하여 그녀를 도와줄 일꾼을 열 명 정도 붙여주었다.
그랬더니 의욕적으로 밥을 차리고, 뒷정리하고, 고블린들의 처소를 청소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작업의 능률이 올라갔다.
‘고대의 상점.’
[고대의 상점]
-건설
-기술
-잡화
-기타
[보유 수정 : 527,148]
‘벌써 50만 수정을 넘겼네.’
최근 들어 수정 수확량이 대폭 늘었다. 하루에 4만은 가뿐히 넘겼고, 어떨 때는 5만 수정을 채우기도 했다.
전 구성원의 정예화, 에아라는 허드렛일 담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꺼꾸댁!
뒤쪽에서 우렁찬 닭의 울음이 들려왔다. 고병갑은 헛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넓게 쳐진 울타리 안에 닭들이 모여있다.
‘고붕이 자식. 기어코 닭장을 만들어냈네.’
50마리. 아니 49마리의 닭들이 나무 울타리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솔직히 놈들의 점프력이면 저 정도 울타리쯤이야 가뿐히 넘을 수 있을 터다. 다만 닭들도 저곳이 썩 마음에 드는지 구태여 뛰쳐나오지 않았다. 혹여 밖으로 나오더라도 물만 먹고 제자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나저나 죄다 수탉이구먼. 암탉도 있어야 달걀이라도 꿔 먹고 새끼도 보고 그럴 텐데. 시장에서 씨암탉 몇 마리 사와야 하나?’
고병갑은 울타리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뻑뻑 피웠다. 닭들이 심히 거슬린다는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얀마 뭘 봐? 사람 담배 피우는 거 처음 봐?”
“······.”
“저놈 저거 눈깔 좀 봐라. 야 너 진짜 닭 맞냐? 매 아니야?”
-꺼꾸댁!
‘이거 어설프게 암탉 몇 마리 넣었다간 줄초상 치르겠는데? 그 여린 것들이 저 티라노들 혈기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그가 어깨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고병갑은 이내 고블린들의 숙영지로 걸음을 옮겼다.
가마솥 앞에 기다란 줄이 보였다. 고블린들이 손에 스댕 그릇을 하나씩 들고 배식받는 중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저 에아가 열심히 만들었어요!」
「고맙다!」
「천만에요. 부족하면 더 먹으러 와요. 나는 손이 무척 크거든요.」
「너. 손. 작다.」
「넉넉하게 만들어놨단 말이에요.」
노멀 고블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갔다.
다음 순번은 키리얀이었다.
에아는 지치지도 않는지 똑같은 말을 계속 뱉어냈다.
「맛있게 드세요!」
「당신은 먹지 않습니까?」
「오우, 나도 물론 먹을 거예요. 당신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나서요.」
키리얀이 뭔가를 끙 고민했다. 그러더니 배식을 받지 않고 줄에서 이탈했다.
「이따 받겠습니다. 같이 먹읍시다.」
「어······ 네! 좋아요.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건 즐거운 일이죠. 나는 두런두런 앉아서 밥 먹는 것을 좋아해요. 당신이 같이 먹자고 해주니 기쁜 마음이 드네요.」
「나는 키리얀입니다.」
「아. 당신은 이름이 있나요? 멋지네요. 나는 에아에요.」
키리얀과 짧게 잡담을 주고받았다. 키리얀이 빈 그릇을 들고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야, 이거 까딱하다 정분나는 거 아냐?’
고병갑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키리얀. 이리 와봐.」
「음? 앗 예! 로드시여 부르셨습니까?」
키리얀은 헐레벌떡 다가왔다. 고병갑은 떨떠름한 입맛을 다시며 키리얀을 빤히 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는 키리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키리얀.」
「예. 말씀하십시오.」
「너 에아 좋아하냐?」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키리얀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고병갑은 휘휘 손을 내저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아니, 힐난하려는 게 아니고. 그냥 허심탄회하게 남자 대 남자로 물어보는 거야. 너 에아 좋아해?」
「그······ 죄송하지만 무슨 의미로 여쭙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미고 자시고 없다니까? 그냥 이성으로서 에아를 좋아하냐고. 에아 앞에 서면 막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흐르고 잘 보이고 싶고 그래?」
키리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기 심장에 손을 가져갔다. 뒤이어선 이마를 쓱 훔쳤고, 그다음엔 에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 글쎄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로드가 제일 좋습니다. 그다음은 동족들이 좋고, 저 정령은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왜 같이 밥 먹자고 했어?」
「그거 말입니까?」
키리얀이 우물쭈물했다.
「······사실 저 정령이 조금 안쓰러워서 그랬습니다.」
「안쓰럽다니? 뭐가?」
「도르마에게 들었습니다. 저 에아라는 정령은 함께 살던 동족이 모두 죽어 외톨이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걸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 생각?」
「예. 저도 동족이 없는 곳에서 홀로 있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 맞아. 그랬었지.」
고병갑은 키리얀과 처음 만났을 당시를 상기시켰다. 키리얀은 고블린이 하나도 없는 균열에서 뇌전늑대들과 함께 있었다.
말도 안 통하는 짐승형 괴수들과 말이다.
「그래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키리얀이 불쑥 고개를 조아렸다. 고병갑이 당황하며 물었다.
「야야 고개 들어. 갑자기 뭐가 죄송해?」
「로드께서 저 정령을 감시하라 명하셨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니 제가 이런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로드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아이참······.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고병갑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리곤 키리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됐어, 인마. 벌은 무슨 벌이야. 아까도 말했잖아. 힐난하려는 게 아니라고.」
「저, 정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에아를 감시하는 일은 그만둬도 돼. 딱히 수상한 점은 없어 보이네.」
「아······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에아 잘 챙겨 줘. 이제 한 식구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고병갑은 키리얀을 떠나보냈다.
‘희한하네. 어떻게 저런 건전한 마음가짐일 수가 있지?’
그가 조용히 탄식했다.
그는 몇 초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도르마를 찾기 위해 사위를 훑었다. 이내 도르마를 발견하고 그리로 다가가려니 앉아서 식사하던 고블린들이 인사를 건넸다.
「로드. 밥. 먹었어?」
「얀마. 로드시여. 진지는 잡수셨습니까, 라고 해야지. 따라 해봐.」
「로드시여 진지는 잡수셨습니까.」
노멀 고블린은 고병갑의 말투까지 따라 했다.
「잘하네. 앞으로 그렇게 해라.」
「응. 알았어.」
「······.」
고병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야. 그냥 하던 대로 해. 내가 너희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앗! 로드시여. 식사는 하셨습니까?」
「어, 고붕고붕 고붕이.」
고붕이가 빈 그릇을 들고 인사했다.
「밥 다 먹은 거야? 아니면 이제 먹으려고?」
「한 그릇 먹고. 더 먹으러. 갑니다!」
「오. 입에 맞나 보네?」
「예! 너무. 맛있습니다.」
「맞다! 맛있다!」
「나. 국밥. 좋다!」
곁에 있던 고블린들까지 맛있다고 아우성쳤다. 고병갑은 괜히 흐뭇해서 씩 웃었다.
‘당연하지. 세계관 최강자의 음식인데.’
고병갑에게 국밥이란 음식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헌터 초창기. 돈은 없고 배는 고프고. 포션 살 돈도 없어 라면으로 세끼 때울 때.
집 앞 24시간 국밥집에서 큰맘 먹고 먹는 5천 원짜리 싸구려 국밥이 그의 유일한 힐링 수단이었다.
고작 국밥 가지고 유난을 떠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그 맛을 고블린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물론 에아가 끓여낸 것이 제대로 된 국밥은 아니었다.
kg당 만 원도 안 하는 사골 액기스 적당히 물에 풀고,
시장에서 떨이로 파는 부추랑 배추 좀 썰어 넣고,
몬스터 고기 뭉텅이로 잘라 넣은 뒤 소금으로 간을 한 게 전부다. 그래서 국밥보다는 고깃국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고블린들이 맛있게 먹어주니 기분이 좋았다.
「많이들 먹어라. 내가 국밥만큼은 배 터지도록 먹게 해주마.」
「예!」
고병갑은 고블린들을 지나쳐 도르마에게 다가갔다. 도르마는 한적한 자리에 홀로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오, 로드시여. 식사하셨습니까? 같이 드시지요.」
「아냐, 됐어. 나는 진즉 먹었지.」
「그렇습니까?」
「도르마.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예.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거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건 아니고······.」
고병갑이 말을 흐렸다.
이런 말을 해도 되나? 그것도 밥 먹고 있는 애한테?
선뜻 말하기 민망한 주제였다.
그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말을 꺼냈다.
「너희는 그 뭐냐······. 발정 같은 거 안 나냐?」
「예? 발정 말입니까?」
「너희도 성욕이 있을 거 아니야. 막 하고 싶고 그렇지 않아?」
「하고 싶다니. 무엇을 말입니까?」
「아, 거 참. 그거 있잖아. 그거!」
「혹시 성교 행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고병갑은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실토하자면 그는 숙맥이었다.
그는 괜스레 뻘쭘하여 말을 뱉어냈다.
「아니, 내가 오늘 닭장을 보는 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저 혈기 왕성한 장닭들 사이에 암탉 한 마리 넣어봐. 암탉이 걔들 혈기를 버텨내겠어? 근데 그게 아스빌람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더라고. 아 물론 너희가 닭이랑 같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도르마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로드께서 자결을 명하셔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 기분을 맞춰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에이,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해. 아무튼. 전부 덜렁이들밖에 없는데 여기 암컷 고블린을 한 명 놔두면 걔가 너무 피곤하겠지?」
「암컷 고블린을 사들일 요량이십니까?」
「어, 맞아. 원래는 돈 모이는 대로 안개 밖으로 나갈까 싶었는데, 에아 말을 들어보니까 좀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러시군요.」
도르마는 수저를 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병갑은 도르마가 입을 열길 차분하게 기다렸다.
「흠. 제 생각에는 로드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듯합니다.」
「왜?」
「말하자면 저희는 정신적인 고자기 때문이지요.」
「······.」
고병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도르마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고블린의 불우한 역사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알지. 네가 말해 줬잖아.」
「예. 저희는 주술로 탄생한 존재입니다. 선대도, 선대의 선대도 마찬가지지요. 고블린은 족히 수 세기간 그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왔습니다.」
「······.」
「쓰지 않는 근육은 쪼그라들기 마련이지요. 같은 맥락입니다. 저희에겐 번식을 위한 것들. 이를테면 성욕 같은 게 자연히 사라졌습니다.」
고병갑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서, 설마 너희 아랫도리에······.」
「아니요. 그건 문제없이 잘 달려 있습니다. 다만 그게 생리적으로 정상 작동을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도르마는 태연했다. 도리어 고병갑이 숙연해졌다.
왠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지 말자. 불난 집에 떡 돌려 봤자 뭐 하겠어.’
이내 관두었다. ‘야 괜찮아! 나도 못해봤어!’ 따위의 말을 해본들 하등 쓸모가 없을 테니까.
도르마는 국밥을 후루룩 마신 뒤 한마디 보탰다.
「뭐, 사실 말입니다. 설령 저희에게 기능적인 장애가 없더래도 그런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로드께서 ‘하지 말라.’ 한마디만 하시면 될 일이니까요.」
「에이.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후후. 로드께선 참 성군이신 것 같습니다.」
고병갑도 군대에 갔다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욕구의 통제라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물론 욕구를 제멋대로 방출하는 건 짐승이나 하는 짓이다. 또한 집단을 관리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욕구를 통제하는 게 맞고.
하지만 그게 똥 마려운 놈들 항문을 틀어막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저는 로드께서 뜻대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예.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암컷 고블린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기도 하군요.」
「흠.」
고병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념에 빠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얼마 뒤 그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아스빌람에 빅 이벤트 한 번 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