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의문의 여인
12.
「니피란 것은 뭐? 빨리 말해봐.」
고병갑이 도르마를 재촉했다.
도르마는 입술에 침을 몇 바른 뒤에야 대답했다.
「제 기억이 정확한지 불분명합니다만, 니피라는 것은 정령의 일종입니다.」
「정령? 정령이 뭔데?」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인 영계에서 사는 족속들입니다. 워낙 신출귀몰한지라 생전 목격할 일이 잘 없지요. 저도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고병갑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지상계는 뭐고 천상계는 또 뭐람?
「그런데 이상하군요. 정령이란 것들은 본디 저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본 적도 없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생겼는지는 어찌 알아?」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어떻게 생겼다고 들었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고 외형은 혼을 빼놓을 만큼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또 신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군요.」
「몸집이랑 생김새는 확실히 아니네. 신묘한 힘은 모르겠고.」
「로드시여. 여기. 있습니다.」
「어, 고맙다.」
고병갑이 턱을 긁적이고 있노라니 고붕이가 소쿠리에 담은 고기를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며 말했다.
「뭐, 같이 보러 가자.」
「그러시지요.」
「저는. 작업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해라.」
「예!」
고병갑과 도르마는 에아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주변에 있는 닭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팔다리가 멀쩡했다면 닭이 살아있을지 미지수였다.
「아!」
에아가 고병갑을 발견했다. 옆구리에 낀 소쿠리를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그리고 몇 초 뒤 다시 일그러졌다. 고병갑의 옆에 선 도르마를 보고 그런 것이었다.
「그는 누구죠? 그도 인간인가요?」
「얘는 고블린인데.」
「고블린? 맙소사.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요?」
고병갑은 에아의 말을 무시하고 지척에 앉았다. 그리고 고기 한 덩이를 입에 넣어주었다. 그녀는 새끼 새마냥 잘 받아먹었다.
「아으윽······.」
저작 운동을 하는 중간중간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몸이 만신창이라 고기를 씹는 것만 해도 고역인 듯했다.
「무슨 고기죠? 참 맛있네요.」
「······알려고 하지 마라. 그나저나 너 정령인가 뭔가 하는 거라며?」
「네, 맞아요. 알고 계시는군요.」
고병갑은 쓱 고개를 돌려 도르마를 보았다.
「그렇다는데?」
「흐음. 제가 뭘 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맘대로 해.」
도르마가 고병갑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아와 도르마가 잠시 눈싸움을 벌였다.
도르마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정령이 왜 지상계에 있는 것이오? 그리고 정령이라면서 어찌 된 도리로 그런 모습이오?」
에아는 입안의 고기를 전부 씹어 삼킨 뒤에야 간신히 대답했다.
「당신은 정령들의 생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보군요.」
「웬만큼은. 그래서 대답은?」
「왜 지상계에 있느냐고 물었나요? 더는 영계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죠. 왜 이런 모습이냐고요? 살아남기 위해서죠.」
「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만.」
「저것부터 먹고 하면 안 될까요? 나는 정말 오랫동안 굶었거든요.」
도르마가 고병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병갑은 고기 한 덩이를 던져 주었다.
「고마워요. 솔직히 말하면 너무 배가 고파서 내 다리라도 뜯어먹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죠. 그러글들을 피해서 도망치려면 다리는 꼭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팔을 뜯어 먹을까 고민을 했어요. 실제로 물어뜯기까지 했는데 너무 아파서······.」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받아먹기나 해.」
「알겠어요. 딱히 시끄럽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에아는 한동안 먹는 데만 집중했다. 소쿠리에 담긴 고기의 양이 꽤 됐는데 그걸 전부 먹어 치웠다. 배가 고프긴 고팠던 모양이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게 다인가요?」
「뭐? 그만큼이나 먹어놓고 아직도 부족하다는 거냐?」
「부끄럽네요. 그렇지만 나는 정말 오랫동안 굶었······.」
「염병! 그 소리 좀 그만해.」
고병갑이 질리는 눈초리로 에아를 쏘아보았다. 에아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고기는 이게 전부다. 이제 묻는 말에 대답할 시간이야.」
「알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면 전부 대답해드릴게요.」
「먼저 앞의 설명부터 들어야겠소만?」
「좋네요. 그럼 정령이 영계에서 쫓겨난 이야기부터 할까요? 사실 거창한 이유는 없답니다. 악마가 영계에 들어찼기 때문이죠.」
「악마? 하계에 서식하는 기생충을 말하는 것이오?」
「하계에 서식하는 기생충이라. 마음에 드는 표현이네요. 개인적으로 기생충보다는 개새끼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요.」
「······.」
도르마가 쩝 입맛을 다시더니 물었다.
「기생충이건 개새끼건, 그 나약한 것들이 무슨 재주로 정령들을 몰아내고 영계에 눌러앉는단 말이오?」
「나약한 것이라고 했나요? 오, 그렇지 않아요. 놈들은 강해요. 그것도 토악질 나올 만큼 강하죠. 그렇지 않고야 지상계와 영계를 넘어 천상계까지 제들 안방으로 만들 수 없었겠죠.」
도르마가 경악했다. 에아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악마들이 지상계를 쑥대밭으로 만들더니 영계를 침범했어요. 놈들은 우리 정령을 죽이거나 타락시켰죠. 살아남은 소수의 정령은 간신히 지상계로 도망쳤어요. 하지만 지상계는 이미 그러글들의 소굴이었죠.」
「도대체 그 그러글이란 게 뭐요?」
「식탐의 괴물이에요. 악마의 끄나풀이죠. 놈들은 뭐든 닥치는 대로 먹어요. 심지어는 자기들끼리도 잡아먹죠.」
「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구려.」
도르마가 조용히 탄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아는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정령은 지상계로 내려왔어요.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지상계는 정령이 살기 좋은 환경이 아녜요. 게다가 그때는 이미 지상의 모든 곳이 황폐화한 이후였죠. 우리는 정령으로선 병신이 돼버렸고, 살아남기 위해 여러모로 변해야 했어요. 그 결과가 이런 괴상한 모습이죠.」
에아가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아스빌람의 전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어요. 난 이곳이 죽음의 땅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이렇게 좋을 줄 알았더라면 진즉 올 걸 그랬네요. 무지는 이따금 죄일 수 있다더니,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 같네요.」
고병갑은 생각에 잠겼다. 도르마와 에아. 두 인물의 대화는 도통 알아먹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그 요지만큼은 명확히 전달되었다.
안개 밖이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 말이다.
「하나 물어보겠다. 그 그러글이란 놈들은 얼마나 위험하지?」
「개체마다 달라요. 어떤 놈들은 무지하게 강하고 또 어떤 놈들은 우리가 되려 잡아먹을 만큼 약하죠. 고기 맛은 형편없지만요.」
「왜 너 혼자지? 너 말고 다른 정령들은 어디 있어?」
고병갑이 묻자 에아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니피들이 모인 작은 부락에서 살았어요. 그 부락은 보름 전 그러글의 습격을 받고 풍비박산 났고요. 아마 저 빼고 다 죽었을 거예요.」
「그럼 네가 마지막 정령이란 건가?」
「오, 그런 이야기는 아녜요. 제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정령들이 살고 있겠죠. 듣기로는 그러글의 발길이 닿지 않은 먼 곳에 정령의 왕국이 있다고 해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고병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내용이다만 마냥 의심하고 볼 일도 아니었다.
애당초 그가 근래 겪은 대부분의 일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인간이 먼 옛날 멸종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인간뿐만이 아녜요. 과거 지상계에 살았던 모든 종족이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췄어요. 수백 년 전에 말이에요.」
「수백 년?」
「네. 난 여태껏 살면서 정령이나 그러글이 아닌 존재를 처음 봤어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도르마. 어떻게 생각해?」
「글······ 쎄요.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내용입니다.」
대화가 슬슬 마무리되려고 했다. 고병갑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에아가 그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뭐죠?」
「담배.」
「담배가 뭐죠? 먹는 건가요? 먹는 거라면 저도 좀 주시겠어요? 저는 아주 오랫동안 굶었어요. 아직도 배가 매우 고파요.」
「돌겠네.」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을 열어 뼈살이 경단을 하나 샀다. 그리곤 에아의 입에 넣어주었다.
에아는 마치 먹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열성적으로 받아먹었다.
그녀가 어여뻐서 준 것은 아니었다. 뼈살이 경단의 효능을 알아보고자 한 의중이었다.
「어떠냐? 통증이 좀 가라앉아?」
「네? ······음? 뭐죠? 갑자기 통증이 가셨어요!」
「도르마. 얘 팔에 부목 하나 풀어봐.」
「알겠습니다.」
도르마는 고병갑의 명령을 따라 에아의 팔에 덧댄 부목을 떼어냈다.
「팔 움직여 봐. 어때?」
에아는 팔을 휘휘 저어보았다. 그녀가 깜짝 놀랐다.
「안 아파요. 이건 정말 대단하네요!」
여세를 몰아 나머지 부목까지 모두 떼어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놀랍네. 이 정도 효능일 줄이야. 이 정도면 상급 포션에도 버금가겠는데?’
고병갑은 살살이 경단과 피살이 경단도 하나 사주었다. 에아는 넙죽 받아먹었고 잠시 후 온몸이 씻은 듯이 치료됐다.
물론 거죽밖에 없는 몸뚱이는 그대로였다.
「나를 치료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은 참 친절하군요? 나는 당신 같이 친절한 사람을 좋아해요.」
「공짜로 해준 게 아니야.」
「네?」
「네가 먹은 고기. 그리고 경단. 더해서 네가 앞으로 이곳에서 먹고 자려면 값을 치르는 게 당연하잖아.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거 아니야?」
「그, 그렇죠. 그렇지만 전 지금 가진 게 없는걸요.」
「가진 게 왜 없어? 몸뚱이가 있는데.」
고병갑이 에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에아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설마······?」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넌 앞으로 일을 해야 할 거다.」
「일이요?」
‘곡괭이 쥐여 줘봤자 하루 한 덩이 캘까 말까 하겠네.’
에아를 써먹을 데가 마땅치 않았다.
「너 뭐 할 줄 아는 재주 없냐? 네가 가치 있다는 걸 어필해봐. 아, 그래. 너 세계의 법칙 어쩌고를 무시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 맞아요. 하지만 그 능력은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뭐? 왜?」
「법칙을 무시할수록 내 수명이 줄어드니까요. 큰 법칙일수록 많은 수명이 깎여요.」
「그건 내 알 바가 아닌데.」
고병갑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에어가 또 식겁했다.
「농담이다, 농담. 하여간 겁은 많아서.」
고병갑이 혀를 찼다.
‘수명이 줄어든다고? 그럼 못 써먹겠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생명을 도구 사용하듯 하는 건 그의 성격상 맞지 않았다.
「너 요리는 좀 할 줄 아냐?」
「요리요? 그럼요!」
에아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좀 의외였다.
「모든 정령은 미식가에요. 맛없는 그러글 고기를 맛있게 요리하기 위해서 인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좋아. 그럼 넌 앞으로 고블린들의 끼니를 책임지고 마련해라. 그리고 고블린들이 작업하는 동안 그들의 거처를 청소하도록 해.」
「뭔진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나는 파렴치한이 아니에요. 은혜를 알고 책임을 알죠. 열심히 일할게요.」
에아가 의욕을 보였다.
고병갑은 도르마의 귓가로 입을 가져간 뒤 소곤대며 말했다.
「수상하거나 낌새를 보이거든 곧장 제압해버려. 위험할 것 같으면 죽여도 좋아.」
「예 알겠습니다.」
무슨 밀담이 오갔는지 에아로선 알 길이 없었다.
고병갑은 담배를 탁탁 털어 끄며 몸을 돌렸다.
「일단 저거 데리고 가서 해야 할 일을 알려줘. 고블린들에게 소개도 해주고. 난 이만 간다.」
「가시렵니까?」
「그래. 이따 저녁쯤에 다시 올게.」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
고병갑이 아스빌람을 빠져나왔다.
여름 볕을 받아 뜨겁게 달구어진 차가 그를 반겼다.
“안개 너머에 괴물이 있다라.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군.”
첫인상이야 어쨌든, 에아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안개 너머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고블린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전투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겠어.’
고병갑은 많은 생각을 하며 서울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