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의문의 여인
11.
고병갑은 능숙하게 부목을 덧댔다. 밖으로 붕대를 말아 환부를 단단히 고정했다. 가슴뼈도 몇 대 나가긴 했는데 당장 조치할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뭔 짓을 당한 거야?’
멍석말이라도 당한 건가? 사지가 아주 박살이 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목뼈와 척추가 성하다는 것이었다.
‘최하급 포션으론 어림도 없겠는데. 이 정도 골절이면 못해도 중급 포션은 있어야겠어.’
응급조치가 끝난 뒤에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을 둘러보았다. 이 상황에 적합한 상품을 본 기억이 있었다.
‘찾았다.’
[피살이 경단]
-가격 : 1,300 수정
-설명 : 피를 재생시켜주는 경단. 부족한 혈액을 보충할 수 있다. 과복용 시 부작용이 따른다.
[살살이 경단]
-가격 : 1,300 수정
-설명 : 살을 재생시켜주는 경단. 새 살을 싹틔울 수 있다. 과복용 시 부작용이 따른다.
[뼈살이 경단]
-가격 : 1,300 수정
-설명 : 뼈를 재생시켜주는 경단. 부러지거나 소실된 뼈를 재생시킬 수 있다. 과복용 시 부작용이 따른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물건이다만 대충 효용은 알 것 같았다. 고병갑은 뼈살이 경단을 하나 사려다가 멈칫했다.
‘지금 당장 먹일 필요는 없겠지.’
아직 괴여인의 정체조차 모른다. 만약 그녀가 적대적인 존재라면 좋은 거 사서 먹일 이유가 없다.
고병갑은 상점 창을 꺼버리고 괴여인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가서 앉았다.
그 뒤 괴여인을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인간은 아니다. 고블린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몬스터도 아니야.’
괴여인의 생김새는 참 애매했다.
신장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대략 160cm 정도일까? 피부색은 몹시 하얬다. 물론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창백한 색이었다. 흑발의 머리카락은 어찌나 긴지 엉덩이를 가뿐히 넘겼다.
문제는 이목구비다.
괴여인은 그야말로 거대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 전반을 차지할 만큼 거대했다. 그것은 흰자위가 전혀 없이 검기만 하여 마치 벌의 눈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반면 다른 이목구비는 오목조목했다. 그러다 보니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또한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털이 하나도 없었다. 눈썹도, 겨드랑이털도 뭣도 없이 반들댔다.
얼핏 보면 신비로운 느낌을 주지만, 보면 볼수록 불쾌한 골짜기가 연상됐다.
「저자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도르마가 슬그머니 물었다.
「글쎄다. 나야 모르는 일이지. 너희가 밥도 못 먹고 생고생하는 이유기도 하고.」
「그나저나 참 기괴하게 생긴 생명체로군요. 혹시 로드께서 전에 말씀하신 안개 밖의 존재가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고병갑은 안개 너머로 보았던 거뭇한 실루엣을 떠올렸다. 그것의 체구도 딱 저만했다.
「도르마. 너도 처음 보는 거냐? 네 과거 기억에 없어?」
「애석하게도 잘 모르겠습니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군요.」
「골치 아프구먼.」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으니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고병갑은 괴여인이 생닭은 잔인하게 뜯어먹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온순한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하기야. 팔다리가 저 지랄 났으니 네 말마따나 위험하지는 않겠다.」
「말이 통할까요?」
「안 통하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죽이실 겁니까?」
「밥 먹이고 재워줄 필요는 없잖아. 하는 거 봐서 생각해 보자.」
「예.」
고병갑은 괴여인이 정신을 차리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시간이 꽤 흘렀다. 정찰을 나섰던 고블린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고붕이가 대표로 보고했다.
「로드시여. 밖으로. 통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 저렇게 생긴 것도 더 없고?」
「예.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없었습니다.」
고병갑이 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생들 했다. 어서 밥들 먹어라.」
「옙!」
「도르마. 너도 가서 밥 먹어.」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불러주십시오.」
고블린들이 모두 떠나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아 괴여인의 곁을 지켰다. 괴여인의 가슴께가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웬 이상한 게 나타나서 집에도 못 가고 있을까. 그런 푸념을 하던 순간이었다.
“쿨럭!”
괴여인이 기침을 토해냈다. 이윽고 부목으로 둘둘 감긴 팔다리를 꿈틀거렸다. 깨어나려는 징조였다.
고병갑은 얼른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이번엔 칼도 제대로 차고 있었다.
“으으으······.”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가녀린 신음. 고병갑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괴여인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곧 그녀의 두 눈꺼풀이 뜨였다. 칠흑색 눈동자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우으?”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팔다리에 덧댄 부목 때문에 뒤집힌 거북이 꼴이었다.
괴여인은 자신의 몸을 내려보고는 기겁하는 얼굴이 되었다.
「정신이 드나?」
고병갑이 고블린의 언어로 물었다. 물론 저쪽에서 알아들을지는 미지수였다. 적어도 한국어보다는 알아들을 가능성이 높을 터다.
괴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입을 어물거리긴 하는데 뭔가를 내뱉지는 못했다.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몸을 꿈틀거렸다. 그 몸짓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겁에 질려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아으! 아으아······!”
그러다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당연한 일이다. 팔다리가 다 부러졌는데 저렇게 과격하게 몸을 놀리니 아플 수밖에.
「억지로 움직이지 마라. 어차피 그 상태로는 움직이지도 못할 테니까.」
「흐윽!」
「내 말을 알아듣겠나?」
「아으으! 아으으!」
「염병. 정신이 나간 거야? 아니면 못 알아듣는 거야?」
괴여인은 공황 상태였다.
고병갑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었다. 괴여인이 제풀에 꺾여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괴여인은 잠시도 못 가서 축 늘어졌다. 고병갑은 재차 물었다.
「내 말을 알아듣나?」
「······.」
괴여인이 두려움으로 점철된 눈을 하고 고병갑을 올려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는다고? 방금 알아들었다고 한 거냐?」
괴여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히 짐승은 아닌 모양이다.
그때 닭 한 마리가 그들 옆을 유유히 지나갔다. 고병갑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괴여인은 달랐다. 그녀가 눈에 불을 켜고 닭의 행보를 쫓았다.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배가 고픈 건가?’
그런 유추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장 처음 마주쳤을 때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저 여인은 상당히 굶주린 상태였다.
고병갑은 대뜸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고블린들의 식사 장소였다.
고블린들이 밥 먹다 말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고병갑은 인사를 대충 받아주며 한 노멀 고블린에게 말했다.
「야. 그거 한 덩이만 줘봐.」
「뭐? 이거?」
「그래, 그거. 한 덩이만 줘.」
「아, 알았다. 여기.」
불에 잘 구워진 몬스터 고기를 건네받았다.
「로드. 먹게?」
「내가 이걸 왜 먹냐. 밥이나 마저 먹어라.」
「알았다. 잘 가.」
고병갑은 다시 괴여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코앞에 고기를 들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눈이 회까닥하며 입을 들이밀었다.
고병갑은 얼른 손을 거두었다.
「하악, 하악, 하악!」
「먹고 싶은가 보지?」
끄덕끄덕.
괴여인은 가히 열성적인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주마.」
「무··· 슨······?」
‘오우.’
고병갑은 숨을 집어삼켰다. 괴여인의 육성을 듣고 놀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끝내줬다. 마치 최고급 하프의 운율 같았다. 물론 그는 하프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쨌건 생김새와는 딴판이었다.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너는 누구냐?」
「······나는 에아에요.」
「네 이름을 물은 게 아니야. 네 정체가 뭐냐고 물은 거다.」
「정체? 종족을 말하는 거라면 니피족이에요.」
「니피?」
「그래요, 니피.」
고병갑은 니피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몬스터 도감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러는 당신은 정체가 뭐죠? 그러글은 아닌 것 같은데.」
에아가 대뜸 질문했다.
고병갑은 언짢은 기색으로 반문했다.
「염병하겠네. 그러글은 또 뭐야?」
「식탐의 괴물들이요. 나는 그것들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왔어요.」
「말 잘했다. 너 저 안개를 뚫고 들어온 거냐?」
「맞아요.」
「어떻게 했지? 안개를 넘나들 수 없을 텐데.」
「그건······.」
에아가 뜸을 들였다. 고병갑이 거머쥔 고기가 점점 식어갔다.
「난 어물거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빠릿빠릿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전에 말해줘요. 당신은 정체가 뭐죠?」
「나? 나는 인간이다.」
「인간!?」
에아가 기겁하며 놀랐다.
「당신이 정말 인간인가요? 인간은 멸종한 게 아니었나요?」
「제길. 이래서는 끝이 없겠군.」
질문이 질문을 낳으면 이야기가 한없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쳇바퀴 도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이제부터 질문은 용납하지 않겠어.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너 어떻게 안개를 넘어서 이곳에 올 수 있었지?」
「······날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말해줄게요.」
「착각하지 마라. 너는 뭘 요구할 위치가 아니야.」
「난 당신을 죽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게요. 그러니 당신도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날 죽일 수 있다고? 그 몸뚱이로?」
「네.」
고병갑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건 내게도 해가 되는 일이니까요.」
「허풍을 떨어서 겁을 줄 심산인 것 같은데, 협박할 상대를 잘못 골랐어.」
「허풍이 아녜요. 나는 정말 그럴 능력이 있어요.」
에아의 어조는 단호했다. 눈빛은 한없이 흔들렸지만, 허풍을 떠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병갑은 본능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냐.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얼른 불기나 해.」
「나는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안개를 넘어 올 수 있었어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자세히 설명해봐.」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자연의 법칙이지만, 나는 물을 아래에서 위로 흐르게 할 수 있어요.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거죠.」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수풀 너머의 안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능력으로 출입을 거부하는 안개를 뚫고 들어올 수 있었어요. 물론 대가가 따르긴 했지만.」
‘세상에 그딴 능력이 있다고?’
각성자 중에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을 지닌 이도 있다. 하지만 세계의 법칙을 거스른다는 능력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곳에 온 건 너 혼자인가?」
「그래요.」
「여기엔 왜 왔지?」
「말하지 않았나요? 그러글을 피해서 여기까지 도망쳐 왔다고요. 놈들을 떨쳐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그러글인가 하는 놈들은 널 왜 쫓았는데?」
에아는 뭘 그런 것을 묻냐는 얼굴로 고병갑을 쳐다보았다.
「날 잡아먹기 위해서겠죠. 그 녀석들은 뭐든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니까요.」
고병갑은 칼자루에서 손을 거두었다.
이 에아라는 정체불명의 괴인이 안개 밖에서 온 것은 확실해졌다. 또한 별달리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죽일 이유가 없다. 이놈에게 정보를 뽑아내야 했다.
「······그나저나 그걸 내게 주지 않을래요?」
에아가 고병갑의 손에 들린 고깃덩이를 보며 애원했다. 더 없을 만큼 애처로운 음성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굶주렸어요. 부탁드릴게요. 배가 너무 고파요.」
「그래서 내 닭을 물어뜯은 거냐?」
에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눈길을 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줘요.」
「어휴.」
고병갑은 고깃덩이를 에아의 입에 물려주었다. 에아는 걸신들린 것처럼 턱을 움직였다. 주먹만 한 고깃덩이가 없어지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염치없지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걸로는 부족해요.」
「기다려봐.」
그는 고블린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기 몇 덩이를 더 얻을 심산이었다.
식사 시간은 이미 끝나있었다. 고블린들은 의기투합해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고붕아.」
「음? 아앗! 로드시여. 부르셨습니까?」
「어. 고기 남는 거 없냐? 다 먹었어?」
「좀 남았습니다!」
「다행이네. 남은 거 몇 덩이 접시에 담아서 줘봐.」
「아, 예!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고붕이가 부랴부랴 남은 고기를 옮겨 담았다. 그 사이 도르마가 다가왔다.
「로드시여. 그자가 깨어난 겁니까?」
「어. 일어났어. 잘됐네. 너도 같이 보러 가자.」
「알겠습니다.」
「걔가 자기 보고 니피라고 하더라. 너 니피가 뭔지 아냐?」
고병갑은 별생각 없이 물었다. 시선은 고붕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르마의 표정이 변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방금 니피라고 하셨습니까?」
「음? 왜? 아는 이름이야?」
고병갑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도르마는 이마를 짚은 채 뭔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 니피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