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32화 (32/151)

032. 나아갈 준비

7.

고블린 로드가 되기 전과 후.

고병갑의 일상은 많은 부분이 변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토벌에 나서고, 수확물을 협회에 팔아넘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까지는 똑같다.

하지만 그 이후가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피로에 찌든 몸을 아무렇게나 누이고 핸드폰이나 들여보며 애먼 시간을 죽였을 것이다.

반면 지금은 제2의 일과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중품질 마석 18.4kg. 276만 원 책정해드리겠습니다. 계좌로 이체해드리면 될까요?”

“······.”

“저기요? 고병갑 고객님?”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276만 원 책정되셨고, 계좌로 이체해드리면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네네. 그렇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저쪽 말을 듣지 못한 것이다.

상담원 김슬기는 개의치 않아 하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녀가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지정 계좌로 금일 내에 입금될 것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다음 104번 고객님!”

고병갑은 짐을 챙기고 자리를 나섰다.

그는 협회를 빠져나오며 못다 한 생각을 마저 했다.

‘오늘은 뭘 하지.’

딱히 대단한 것을 고민하던 건 아니었다. 그저 오늘은 아스빌람에서 무엇을 할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들릴 곳도 없으니 곧장 집으로 향했다.

“음?”

한 초등학교를 지날 무렵이었다. 고병갑은 무언가 발견하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가 곧장 그리로 다가갔다.

“엄마아! 나 이거 살래! 사줘어어!”

“얘가 정말! 엄마가 안 된다고 했지!”

한 여인이 아들내미의 손목을 움켜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

두 모자가 고병갑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 병아리! 병아리 키우고 싶단 말이야!”

“쟤들 병든 애들이라서 어차피 금방 죽어! 그리고 너 뽀삐 산책도 안 시켜 주면서 병아리는 무슨 병아리야!”

“아아! 뽀삐 산책 잘 시킬 테니까 병아리 사달라고오오!”

“시끄러! 한 번만 더 찡얼거리면 놓고 갈 줄 알아!”

‘고 아줌마 성깔 좀 있으시네.’

고병갑은 모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보따리상을 보았다.

‘요즘에도 병아리 떼와서 파는 사람이 있네. 나 초등학생 때나 있던 건데.’

종이박스에 병아리 수십 마리가 짹짹대고 있었다.

저걸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그도 왕년엔 병아리깨나 키워 봤다. 전부 무지개다리 건너보내긴 했지만.

보따리상 앞에서 초등학생 두세 명이 쪼그려 앉아 병아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허허. 꼬맹이들아. 안 살 거면 썩 가버리렴. 허허허.”

“아저씨. 이거 진짜 병아리 맞아요?”

“네 눈에는 꿩으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허허허. 엄마한테 가서 안경이나 맞춰 달라고 하렴. 허허허허.”

“아조씨, 아조씨! 얘들 정말로 병들었어요? 좀 있으면 다 죽어요?”

“허허허. 남의 장사 초 치려고 아주 작정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소금을 챙겨 왔을 텐데. 허허허허.”

초등학교 앞답게 화목한 분위기다.

“한 마리 얼마예요?”

고병갑이 불쑥 물었다. 보따리상은 그제야 고병갑을 발견하곤 고개를 들었다.

“마리당 500원입니다.”

“전부 몇 마리예요?”

“쉰 마리입니다.”

고병갑이 지갑을 열어보았다. 마침 딱 2만 5천 원이 있었다.

고병갑이 지갑을 꺼내자 보따리상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이구, 사시려고요?”

“그거 박스째로 주세요.”

고병갑이 돈을 건넸다. 보따리상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병아리 박스를 넘겨주었다.

“우와! 아저씨 치킨집 해요?”

“아조씨. 병아리 왜 이렇게 많이 사요?”

아이들이라 그런지 참 붙임성이 좋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질문했다.

“아조씨, 아조씨. 그 병아리 가지고 뭐 할 거예요?”

“야 너 바보냐? 당연히 키우―”

“응. 다 잡아먹을 거야.”

“흡!?”

고병갑은 아이들을 뒤로한 채 차로 돌아갔다. 뒷좌석에 박스를 싣고 차를 몰았다. 집에 가기 전 마트에 들러 닭모이를 샀다.

고병갑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마침 주변을 지나던 고블린들이 다가왔다.

「앗!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어, 고붕이. 어째 너는 내가 올 때마다 보이냐.」

「헤헤.」

고붕이가 멋쩍은 듯 뒷덜미를 긁적였다.

「애들 안 보이네? 다들 동굴에 있나 보지?」

「예! 수정을. 캐고 있습니다.」

「혹시 공격대 애들도 일하고 있냐?」

「예. 아까 보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자식들이 쉬라니까······. 그나저나 너희는 뭐 하고 있었어?」

「장작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숙영지에 장작이. 다 떨어졌습니다.」

「캬아. 역시 작업반장이야. 알아서 척척 잘해.」

「로드. 그거. 뭐야?」

그때 한 노멀 고블린이 물었다. 녀석은 품 안에 장작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고병갑은 어깨를 으쓱이며 박스를 내려놓았다. 박스 안 노란 물결을 보고 고블린들이 눈을 크게 떴다.

고병갑은 씩 웃으며 고붕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고붕아.」

「아! 옙!」

「너에게 특명을 하나 내려야겠다.」

「트, 특명. 말입니까?」

고붕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무, 무엇입니까?」

「이 병아리들 보이지?」

「예. 보입니다.」

「얘들이 참 불쌍한 애들이야. 몸이 병약하거든. 한 사나흘 있으면 픽픽 죽어 나갈지도 몰라.」

「아······. 그, 그렇습니까?」

「응. 그러니까 네가 좀 살려.」

「······예?」

고붕이가 눈을 끔벅거렸다.

고병갑은 뭐가 문제냐는 말투로 말했다.

「살리라고. 이 가엾은 병아리들에게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것을 알려줘.」

「그, 그게. 무슨······.」

「얘들 50마리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서 닭으로 만들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이거 닭 모이니까 알아서 먹이고.」

고붕이는 얼떨결에 모이까지 받아들었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병아리 죽으면 내 마음이 참 아플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

「그럼 잘 좀 부탁해. 거기 쪼꼬미 둘은 나 따라와라. 닭장 만들러 가자.」

「아, 알았다!」

고병갑은 노멀 고블린 둘을 데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고붕이는 우두커니 서서 떠나가는 고병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샛노란 병아리들은 고붕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쉴 새 없이 지저귀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고.

고병갑이 대충 닭장 비슷한 것을 완성했을 무렵 해가 저물었다.

그가 완성품을 보며 이마를 훔쳤다.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키야. 어떠냐? 너희가 봐도 잘 만들지 않았냐?」

「응! 멋있다!」

「근데 이거. 로드. 집?」

「얀마. 닭장이라고, 닭장. 한 500번 말했겠다.」

「아. 맞다. 이제. 기억났다.」

「아휴. 정리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응!」

고병갑은 둘을 이끌고 숙영지로 돌아갔다.

작업을 마친 고블린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메뉴는 저번에 잡아 온 자이언트 러그였다.

고병갑은 불에 구워진 자이언트 러그 고기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이야. 냄새는 진짜 그럴듯하네.’

개구리 고기는 닭고기와 맛이 비슷하다고 한다. 고병갑은 한 번 맛이나 볼까 싶은 생각을 했다가 이내 털어버렸다.

모르고 먹으면 모를까. 뻔히 몬스터 고기라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입에 대겠는가?

「로드시여. 언제 오셨습니까?」

전격 능력으로 모닥불을 지피던 키리얀이 고병갑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오, 키리얀. 나 온 지 한참 됐어. 동굴에 있느라 못 봤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야. 너희는 사냥 끝나고 오면 좀 쉬라니까. 그러다 골병 난다.」

「문제없습니다. 아스빌람의 재건을 위해서라면 땀 흘려 일하는 것도 즐거울 따름입니다.」

「나, 참.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너희들 중에 누구라도 하나 빠지면 타격이 크니까.」

「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하겠습니다.」

어느덧 고블린들이 두런두런 모여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고병갑은 잠시 집으로 돌아가 식사를 했다. 다시 아스빌람으로 돌아오니 고블린들의 식사도 슬슬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는 고블린들을 한 번 쓱 훑은 뒤에 소리 높여 말했다.

「자자, 잠깐 집중해 봐.」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소란스럽던 숙영지가 금세 쥐죽은 듯 정숙해졌다.

고병갑은 흡족한 얼굴로 말을 늘어놓았다.

「자리 정리하고 한 녀석도 빠짐없이 여기로 다시 모여.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은 왜 그러느냐고 묻는 법이 없었다. 고병갑은 적당히 솟은 돌부리에 걸터앉아 일을 시작했다.

‘고대의 상점.’

[고대의 상점]

-건설

-기술

-잡화

-기타

[보유 수정 : 441,746]

고병갑은 능숙하게 상점 창을 조작했다. 그리고 곧 원하는 물품을 찾아냈다.

[성장의 묘약]

-가격 : 500 수정

-설명 : 모든 신체 능력을 영구히 상승시켜주는 묘약

[고대 육체 단련술 교본-하급]

-가격 : 320 수정

-설명 : 고대의 기술 중 ‘육체 단련술-하급’을 다룬 교본. 고대 기사단의 육체 단련술이 담겨 있다.

고병갑은 죽치고 앉아 성장의 묘약과 교본을 사들였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다. 묘약은 324병을, 교본은 316권을 샀다.

[보유 수정 : 178,626]

한 번에 263,120 수정이 빠져나갔다. 신(新) 아스빌람 건국 이래 최대 지출이다.

수정이든 현찰이든 재화가 빠져나가는 것은 언제나 씁쓸했다. 그래도 이건 분명 의미 있는 지출이었다.

‘전 인원 정예화를 위한 초석이니까.’

고병갑은 아스빌람의 모든 고블린에게 묘약을 먹이고 교본을 익히게 할 작정이었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가 작업 능률 때문이었다.

‘힘과 체력이 좋아지면 자연히 작업 능력도 올라가겠지.’

힘 좋은 놈이 일 잘하는 건 당연한 섭리다.

물론 지금도 고블린들은 잘해주고 있다. 게으름 피우지도, 늑장 부리지도 않는다.

그런 성실한 일꾼에게 묘약을 먹이고 교본까지 익히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갑절이 아니라 곱절의 상승효과를 볼 수 있을 터다.

두 번째 이유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슬슬 안개 너머로 나아갈 준비도 해야지.’

안개 너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비도 안 된 고블린을 끌고 나갈 수야 없는 법이다.

적어도 제 몸 하나 지킬 수준은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것도 늦은 거야. 진즉 해야 했는데.’

고블린 정예화는 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었다. 다만, 계속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이참에 질러버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로드시여. 다 모였습니다.」

「그래? 고붕아. 도우미로 쓸 애들 한 열 명만 꼽아 와봐.」

「열 명.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고붕이는 곧장 고블린 10명을 이끌고 왔다.

고병갑은 그들에게 할 일을 알려주었다.

「고블린 하나당 묘약 하나, 교본 한 권씩 나누어 줘.」

「예. 알겠습니다!」

녀석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전 인원에게 묘약과 교본을 나누어주었다.

교병갑은 고블린들 앞에 가서 섰다.

「자, 빠진 놈 없이 다 모였나?」

「예! 그렇습니다!」

고블린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니 아스빌람이 쩌렁쩌렁 울렸다.

고병갑은 기분 좋은 떨림을 느꼈다.

「좋다. 오늘 너희는 다시 태어나는 거다. 다들 앞에 놓인 유리병 들어라.」

척척척.

고블린들이 절도있게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고병갑도 내친김에 묘약 한 병을 사서 손에 들었다.

그가 성장의 묘약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마셔라! 아스빌람의 재건을 위하여!」

「위하여!」

고병갑이 먼저 묘약을 들이켰다. 고블린들도 그를 따라 묘약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아스빌람이 한 단계 성장하는 순간이었다.

8.

-꼬꾸댁! 꼬꾸대애애액!

「야 살다 보니 참 별걸 다 본다, 그치? 아니, 그나저나 닭을 만들어 놓으랬더니 웬 타조를 만들어 놨어?」

「······.」

고병갑은 균열 토벌을 일찍 끝내고 아스빌람을 방문했다. 그리곤 허탈하게 웃으며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쉰 마리의 닭이 아스빌람 들판을 뛰어다니는 광경을 말이다.

그게 보통 닭이었으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도 않으리라.

‘저게 닭이야 거위야.’

닭의 자태가 남달랐다. 과장 조금 보태면 거의 칠면조 크기였다.

고병갑의 옆에 선 고붕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제 내가 준 묘약을 몰래 숨겨놨다가 병아리에게 먹였는데 저렇게 됐단 말이지?」

「죄, 죄송합니다. 저는. 병아리가 죽을까 봐······.」

고붕이의 얼굴에 죄책감이 묻어났다.

고병갑은 웃겨서 화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이고, 됐다, 됐어. 덕분에 좋은 거 알았네. 그나저나 닭들이 한 번에 커버렸으니 어제 똥꼬 빠지게 만들어 놨던 닭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져 버렸네.」

「제, 제가. 하나 더. 만들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방목해서 키우자. 여기 살쾡이나 족제비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아니다. 쟤들 정도면 살모사도 쪼아서 먹으려나?」

고병갑은 거대한 닭들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그러면서 흘끗 옆을 보았다. 고붕이는 아직도 시무룩해 있었다. 자기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 아는 모양이다.

고병갑은 고붕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얀마. 너 잘못한 거 없어. 왜 그리 울상이야?」

「요,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애당초 잘못한 게 없는데 용서하고 자시고 할 일이 뭐 있냐?」

고병갑은 곧장 이어 말했다.

「이야! 하여간 내가 작업반장 하나는 잘 뽑았다니까. 50마리나 되는 병아리를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키워내다니. 그것도 하루만에! 잘했다, 고붕아. 역시 네가 최고다!」

잘했다. 그 한마디에 고붕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녀석이 활짝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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