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31화 (31/151)

031. 공격대

5.

여섯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녀석들은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팟!

자이언트 러그가 끝이 잘린 혓바닥을 쏘았다. 투르카가 방패를 앞세우며 고병갑의 앞을 지켰다. 혓바닥 공격은 맥없이 막혔다.

「케륵!」

창식이와 태식이가 번개처럼 돌진해 클로를 휘둘렀다. 자이언트 러그의 혓바닥 살점이 뭉텅이째로 살려 나갔다.

당황한 괴물 개구리가 몸을 빼려는 찰나, 전격의 창이 쏘아져 놈의 아가리를 꿰뚫었다.

“끄라라라라락―껅!”

바로 연달아 암흑 구체가 쇄도해 폭발을 일으켰다. 적중한 왼쪽 어깻죽지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육중한 몸뚱이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연계다.

고병갑은 손뼉이라도 치고픈 심정이었으나 소란을 감지하고 몬스터 떼가 몰려들었다. 작금의 기쁨은 잠시 유보키로 했다.

‘자이언트 러그랑······ 리저드인가.’

뉴 페이스의 등장. D급의 리저드다.

카르마 미달로 D급에 등재되긴 했지만, 위험한 녀석이다. 리저드 계열의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전투 감각이 뛰어났다.

「창식이 태식이 내 뒤에 붙어. 나머지도 자리 잡아.」

「예!」

「긴장해라. 강한 놈들이다.」

“갸아악!”

「가자!」

7인의 공격대와 열다섯 마리 남짓의 몬스터가 격돌했다.

고병갑은 달려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날아오는 창을 쳐내고 한달음에 거리를 좁혔다. 곧장 검을 찌르니 정면에 있던 리저드의 목이 댕강 잘렸다.

시체가 무너져내리자마자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높이 도약한 자이언트 러그가 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파지직!

“꾸얽!”

하나, 쩍 벌린 아가리가 고병갑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키리얀이 적당한 시기에 놈을 요격했다.

“갸아아악!”

리저드가 창을 휘저으며 다가왔다. 고병갑은 슬쩍 피한 뒤 온몸을 써서 칼을 넓게 휘둘렀다. 창 자루와 함께 리저드의 몸통이 갈라졌다.

흘끗 옆을 보았다. 창식이가 자이언트 러그의 머리에 올라타 뇌를 쑤시고 있었다. 다른 쪽에선 태식이가 리저드맨과 일기토를 벌였다. 당연히 태식이가 가볍게 압도했다.

‘고블린이라기보다 거의 늑대구먼.’

비스트 고블린은 전투에 돌입하면 외관이 바뀐다.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갈색빛 체모가 덥수룩이 자란다. 그 모양새가 흡사 늑대 같았다.

“갸악!”

“흠.”

리저드의 창이 관자놀이로 뻗어왔다. 고병갑은 상체만 뒤로 빼며 가볍게 피했고, 노는 손으로 창 자루를 확 잡아당겼다. 리저드가 꼼짝없이 딸려왔다.

곧바로 검을 올려 긋는다. 리저드는 몸이 사선으로 갈라지며 죽었다.

-파직!

-콰쾅!

곳곳에서 폭음이 번졌다. 그럴 때면 터지거나 지져진 살점이 허공에 튀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키리얀과 도르마의 원거리 공격을 버터 낼 몬스터가 없었다.

자이언트 러그의 뒷다리를 두부 가르듯 도려낸 고병갑. 그의 시야에 리저드 떼가 잡혔다. 그네들은 키리얀과 도르마가 있는 방향으로 몰려갔다. 원거리 공격수를 우선 퇴치할 요량인 듯하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우워어어어어!」

투르카와 오르카가 포효를 지르며 놈들의 앞을 막아섰다. 거대한 방패 두 개가 가로막으니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었다.

투르카는 아예 방패를 내질러 리저드 한 마리를 으깨버리기까지 했다. 갈피를 잃은 리저드들이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둘렀으나, 공격은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곧 날아드는 원거리 공격에 맞아 고깃덩이가 돼버렸다.

‘남은 건 한 놈.’

이제 자이언트 러그 한 마리뿐 남지 않았다. 녀석은 이판사판인지 황소처럼 돌진했다. 창식과 태식이 고병갑을 보조하려 다가왔다.

「됐어! 내가 마무리한다!」

고병갑은 그렇게 일갈한 뒤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일순 그의 팔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꾸르르를륵!”

고병갑은 지난날 염정화가 보여주었던 참격을 떠올렸다. 그녀는 체내 카르마를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추진력을 얻었다.

고병갑에게 그 방법은 무리였다. 보유 카르마라고 해봤자 코딱지만큼 있을 뿐이니까.

대신 근육을 한계치까지 수축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무는 것이다.

“흐아아아!”

자이언트 러그가 적정거리로 들어왔을 때 그가 기합을 지르며 검을 뿌렸다. 잔뜩 수축했던 근육이 한 번에 이완하며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자아냈다.

-서걱!

“끄······ 얽!”

자이언트 러그의 거구가 양 갈래로 갈라졌다. 쪼개진 몸뚱이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넘어갔다. 피가 쏟아져 내리며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후우.”

고병갑이 팔을 털며 씩 웃었다. D급 대형 몬스터를 일격에 양단할 정도면 그의 참격도 꽤 나쁘지 않았다.

그가 너저분히 깔린 몬스터 사체를 내려보다가 고블린들을 향해 물었다.

「다들 다친 곳은 없냐?」

「예! 멀쩡합니다.」

「저희도. 문제. 없습니다!」

「로드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그럼. 나도 멀쩡하지.」

「다행입니다.」

사상자는 없었다.

‘다들 C급은 가뿐히 넘어서겠구먼.’

성장의 묘약과 교본으로 단련된 고블린들은 C급을 가볍게 상회했다.

물론 C급을 넘어섰다고 해서 B급에 근접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두 등급 사이에는 까마득한 벽이 세워져 있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균열 내에 고병갑 공격대에 대항할 적수는 없으리라.

고병갑은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곧 고블린들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그들은 부지런히 몬스터 사체를 날랐다.

고병갑이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무렵에는 모든 정리가 끝났다. 그는 꽁초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자, 마저 진행하자. 오늘은 한탕만 뛰고 돌아가서 쉬자고.」

「예! 좋습니다!」

공격대는 거침없었다. 그들이 퍼붓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 몬스터 떼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C랭크 균열은 확실히 몬스터가 많았다.

D랭크 균열은 많아 봐야 백 이삼십 마리지만, 이곳은 기본이 150마리였다.

예전 같았으면 몬스터가 끝없이 쏟아진다고 생각했을 터다. 밀려드는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질려버렸을 수도 있고.

그러나.

‘생각보다 무난하네.’

고병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얼마 전 던전을 갔다 온 뒤로 웬만한 물량이 아니면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몬스터가 쏟아지는 던전에서조차 살아남았지 않았던가?

그때 비하면 지금은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아까 그 캠핑장이구먼.’

이면 세계를 진행하다 보니 어느덧 계곡의 하류까지 도달했다. 휴양객이 설치했을 텐트도 드문드문 쳐져 있었다.

다만 눈에 보이는 텐트는 과거의 텐트다. 균열이 생성됐을 당시의, 다시 말해 3일 전에나 존재했던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 보니 마치 별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눈으로 관측하는 별은 과거의 모습이지 않은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려니 도르마가 질문을 던졌다.

「이곳은 부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인가 보군요.」

「엥?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인간들은 원래 벽돌 건물에서 살지 않습니까? 강가에 천막을 쳐놓은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닙니까?」

「에이, 아니야. 여긴 그냥 물놀이 하러 오는 곳이야.」

「물놀이······ 말입니까?」

「어. 여름에 덥잖아. 그러니까 강가에 휴양하러 오는 거야. 여기서 고기도 구워 먹고 술도 마시고 그래.」

「오. 알 것 같습니다.」

도르마가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앙지로 치면 아스빌람이 최고긴 하지.’

아스빌람은 막 덥지도 않고, 물도 깨끗하며 경치는 끝내준다. 만약 아스빌람에 캠핑장을 열면 자릿세만 받아도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꿈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고블린이 득실대는 휴양지에 찾아오려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아, 얘들아. 그러고 보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고병갑은 잠깐 턱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너희가 균열에 있을 때 말이야.」

「예.」

「왜 그 밖으로 나가지 않은 거냐?」

고병갑의 물음은 사실 전 인류가 가진 의문이었다.

28년 전 딥 임팩트가 일어난 후 세계 각지에 균열이 열렸다. 균열 안에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괴생명체가 득실거렸고.

하지만 몬스터들은 균열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최초의 균열이 나타난 이래 28년간 균열을 탈출한 몬스터가 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다.

도대체 왜?

과학자들은 그 답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것을 밝혀내야만 ‘언젠가 괴물이 균열 밖으로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된 연구 끝에 몇 가지 가설이 나왔다.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부적합 환경설’이었다.

부적합 환경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고등어와 사슴의 거주지는 결코 겹칠 수 없다.’이다.

고등어가 뭍에서 살지 못하고 사슴이 물에서 살지 못하듯,

평범한 인간은 균열 내부에서 살 수 없고 평범한 몬스터는 균열 외부에서 살 수 없다.

부적합 환경설은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실험도 탄탄했다.

그래도 고병갑은 몬스터의 입장도 들어보고 싶었다.

「으음······.」

고블린들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키리얀이었다.

「저는 그냥 불길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불길한 기운?」

「예. 저곳을 넘어가면 안 된다,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르마가 이어 말했다. 그가 주변을 훑었다.

「로드께서 저희를 처음 불러내신 위치보다 이렇듯 깊숙한 곳이 더욱 편안한 기분을 줍니다. 하여 바깥으로 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조차 않았습니다.」

「탈출 포탈 근처는 편안하지 않단 말이야?」

「그렇습니다. 로드께서 탈출 포탈이라 칭하시는 곳에선 왠지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듭니다. 뭐······ 심한 정도는 아닙니다만, 조금 불쾌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고블린들도 공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호. 그건 또 몰랐네.」

고병갑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별안간 괴성이 들려왔다.

“꾸르륵! 꾸르륵!”

「그럼 저 새끼들도 가장 쾌적한 곳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거겠네?」

「아마 그렇겠지요.」

고병갑은 씩 웃으며 앞을 보았다. 그곳에 몬스터 군락이 있었다.

그 가운데엔 볼케이노 러그도 있었다. 이 균열의 보스다.

볼케이노 러그.

자이언트 러그보단 몸집이 작고 전신에 분화구처럼 생긴 돌출물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뜨거운 증기가 쉴 새 없이 뿜어졌다.

저런 놈들은 원거리에서 상대하는 게 정석이다.

「키리얀 도르마. 저 빨간 개구리는 너희가 맡아라.」

「알겠습니다.」

「맡겨두십시오!」

「투르카랑 오르카는 쟤들 옆에 딱 붙어 있고. 창식이 태식이는 나를 따라와.」

「옙!」

고병갑과 창식, 태식이 계곡을 질주했다. 몬스터들의 주의가 자연히 그리로 끌렸다.

“꾸륵! 꾸르―커헑!”

볼케이노 러그가 고병갑을 좇으려 고개를 돌린 순간, 전격 창이 놈에게 적중했다.

놈이 잔뜩 성을 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얼마 올라가지 못하고 암흑 구체에 맞아 추락했다.

도르마가 연달아 주술을 부렸다. 일순 바닥에서 검은 사슬이 솟구치더니 볼케이노 러그를 단단히 속박했다.

「잘했다. 그놈 잘 붙잡고 있어.」

고병갑은 몬스터들 사이를 질주하며 검을 휘둘러댔다.

검술과 육체 단련술의 성취율이 눈에 띄게 올랐음이 느껴졌다. 이제 리저드 따위는 칼질 한두 번에 척살할 수 있었다.

「케륵!」

「우워어어어!」

고블린들도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투르카와 오르카의 발치엔 으깨진 시체가 쌓여갔다. 창식과 태식이 휩쓸고 간 자리엔 목과 머리에 바람구멍이 난 몬스터로 너저분했다.

졸개들은 잠시도 안 돼 전부 정리됐다.

「이제 그놈도 죽여버려.」

「예. 알겠습니다.」

고병갑의 명령을 받아 도르마가 볼케이노 러그를 끝장냈다.

균열의 보스는 저항다운 저항을 해보지도 못하고 고깃덩이가 돼버렸다.

C랭크 균열 토벌이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6.

“어머 병갑 씨 오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어머니 보러 오셨나 봐요?”

“그렇죠.”

병원 데스크를 지키는 이지연 간호사는 고병갑을 볼 때면 항상 ‘어머니 보러 오셨나 봐요?’라고 물었다.

그럼 고병갑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올라가 보셔요. 호호.”

“고생하세요.”

고병갑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병실로 올라갔다.

“어머어머, 이쌤! 저 사람 그 사람 맞죠? 403호실 아주머니 아들!”

김유비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이지연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저번에도 봤잖아.”

“허얼. 저 사람 원래 덩치가 저렇게 좋았어요? 전에 봤을 때는 약간 호리호리한 느낌이었는데.”

“확실히 그러네. 병갑 씨 원래 저렇게 풍채 좋진 않았잖아.”

고참 간호사인 서한숙도 김유비의 말에 동조했다.

“맞죠맞죠? 서쌤도 그렇게 생각하죠?”

“운동이라도 하는가 보지. 웬 호들갑이야?”

이지연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자 김유비가 그녀의 팔에 엉겨 붙었다.

“이쌤! 이쌤! 저분 잘 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뭐 하는 사람인 줄 알겠네요?”

“알긴 아는데 왜?”

“뭐 하는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왜?”

김유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아이 뭐 그냥~ 친해지면 좋겠다 싶어서 그렇죠. 제가 또 덩치 큰 사람이 취향이거든요. 얼굴도 저 정도면 나쁘지 않고. 후후후.”

“에휴 쯔쯔쯧!”

이지연은 오만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네가 정말로 맛이 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환자 보호자 분께 꼬리 치고 싶니?”

“아이참, 이쌤도? 꼬리를 치다뇨오오! 그냥 친해지고 싶다는 건데. 그리고 저 정도면 어디 가서 꿇리지 않잖아요? 제 꼬리에 맞는 것도 아무나 못 해요.”

김유비가 도도하게 말했다.

이지연은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고 서한숙은 그저 웃기만 했다.

“서쌤. 어떻게 생각해?”

“글쎄.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간이 너무 오버하네.”

“네에에? 오버 아니거든요!”

“그럼 좀 있다가 말이라도 붙여 보든가.”

“아유, 서쌤! 무슨 그런 말을 해? 얘 진짜로 하면 어쩌려고!”

“뭐 어때? 김간이랑 병갑 씨랑 사귀면 좋지. 김간이 병갑 씨 어머니 병원비도 대신 내드리고.”

김유비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아하하하하······. 저는 그런 깊은 관계는 원치 않고 그냥 엔조이 느낌으로······.”

“아휴. 진짜 간호사 망신은 얘가 다 시킨다니까. 지조 좀 지켜.”

“지조가 밥 먹여 주나요. 뭐.”

데스크에 모여 앉은 세 간호사의 수다는 한동안 이어졌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났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고병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저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요!”

“뭐? 갑자기 가긴 어딜 간다고······.”

이지연이 말릴 틈도 없이 김유비가 데스크를 뛰쳐나갔다.

이지연은 김유비가 향하는 곳을 보고 경악했다. 저 미친 것이 기어코!

“서쌤, 어떡해! 쟤 진짜 미쳤나 봐!”

“왜? 재밌기만 한데.”

김유비는 고병갑에게 다가가더니 무어라 말을 붙였다.

이지연과 서한숙은 데스크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지연은 속이 조마조마한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 초조한 거지?

대략 3분쯤 지난 후. 김유비가 몸을 돌려 데스크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서한숙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얼레? 표정 보니까 잘 안 된 모양이네? 왜? 여자친구 있대?”

“허! 참! 어이가 없어서!”

김유비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지연이 다급히 물었다.

“왜?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

“아니 글쎄. 제가 언제 한 번 밥이나 같이 먹자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뭐라던데?”

“바쁘데요!”

“······”

데스크에 정적이 깔렸다.

“그게 다야?”

“네! 그 말만 하고 획 돌아서 가버리지 뭐예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김유비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 듯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자기가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밥 먹을 시간도 없는 게 말이 돼요?”

“풉! 푸흡!”

“아아! 이쌤 웃지 마세요! 저 지금 프라이드에 굉장히 큰 상처 입었거든요?”

“아 미안미안.”

이지연이 간신히 웃음기를 거두어들였다.

‘아, 다행이다.’

그녀는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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