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연결고리
1.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둘이면 둘이지 셋이겠느냐. 셋이면 셋이지······.」
한국 노래를 고블린 언어로 개사하여 부르며 고병갑은 아스빌람을 거닐었다. 300평가량의 농지를 쓱 훑는데 어느새 싹이 한 뼘 길이만큼 자라 올랐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광경이다.
「감자면 감자지 고구마겠느냐. 고구마면 고구마지 고블린이겠느냐.」
「응?」
「······뭐 인마.」
「로드. 뭐라고. 했어?」
「뭘 뭐라고 해? 너 바보라고 했다, 어쩔래?」
감자밭에 물을 주던 노멀 고블린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치······.」
「어허. 입술 집어넣어라. 싹둑 잘라버리기 전에.」
「히익!」
노멀 고블린이 다급히 입술을 말아 넣었다. 그 모습이 웃겨 조금 웃었다. 고병갑은 뒷짐을 지고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이번엔 동굴로 갔다.
-깡! 깡! 깡! 깡!
「앗!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어, 붕가붕가 고붕이.」
「부, 붕가?」
고붕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 일하는 데 특이사항은 없고?」
「예! 아무 일도. 없습니다!」
「오냐. 바깥 아이스박스에 음료수 놔뒀으니까 꺼내 먹어라.」
「옙!」
고붕이는 고개를 꾸벅하고 곡괭이질을 재개했다. 고병갑은 순찰 나온 감사처럼 동굴 이곳저곳을 훑었다.
‘설마하니 동굴 깊은 곳에 이런 널찍한 공간이 있을 줄이야.’
그가 드높은 천장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3주 전.
아스빌람의 식구가 324명이 되었다. 일꾼이 늘어난 건 좋은 일이었지만 고병갑은 한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300마리가 넘는 고블린을 수용하기엔 동굴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었다.
백 수십 마리까지는 어떻게 감당됐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다른 업무에 투입하자니 한 명 하는 일을 열 명에게 시키는 꼴이 돼버렸다.
아스빌람에 취업난이 오다니. 하여간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남아도는 백수 무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골머리를 앓던 중 ‘그 일’이 일어났다.
-로, 로드시여! 도, 동굴이!
-동굴이 왜? 뭐?
-동굴이! 무너졌습니다!
-뭐!?
정말이지 아직도 당시를 회상하면 심장이 철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내달려 동굴로 향했다. 어떤 끔찍한 광경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됐다. 그런데 현장의 모습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뭔······.
동굴의 한쪽 벽면이 허물어진 것은 맞았다. 파편도 쏟아져 고블린 몇몇이 사소하게 다치기도 했고. 하지만 ‘재난’이라 부를 만한 대참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호재였다. 동굴 벽이 허물어지며 상상을 초월하는 광활한 공간이 드러난 것이다. 천장은 수십 미터에 이르렀고, 면적은 웬만한 축구장에 버금갔다.
300명이 무어냐. 1,000명도 수용 가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곳엔 붉은 수정 외에도 백옥색 수정이 있었다.
한 덩이에 ‘10 수정’의 가치를 지니는 백옥색 수정이!
「로드시여. 좀 지나가겠습니다.」
「어, 그래그래. 고생한다, 야.」
「아닙니다.」
홉 고블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녀석은 백옥 수정과 붉은 수정이 반반 섞인 수레를 끌고 바깥으로 향했다.
‘나중에 선로나 하나 깔아볼까?’
고병갑은 아스빌람을 어떻게 꾸밀지 구상하며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전용 천막으로 간 고병갑. 소파에 앉아 물소리와 바람 소리를 즐겼다. 이건 뭐,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고대의 상점.’
[고대의 상점]
-건설
-기술
-잡화
-기타
[보유 수정 : 370,496]
“이야······.”
삼십 칠만. 무려 삼십 칠만 개다.
3주간 한 푼도 안 쓰고 모은 것이었다.
“천만 개 모으는 것도 마냥 못 할 일은 아니겠구먼.”
채굴 인원이 300명이 넘으니 벌이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고블린 한 마리가 하루 동안 캐내는 수정의 양은 대략 스무 개. 그중 백옥 수정의 비율이 반쯤 되니 실적용 값은 100개를 넘겼다.
날마다 다르긴 하지만 하루 수확량이 대충 27,000~33,000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나저나 이걸 어디에 쓰면 좋담.”
수정은 넘칠 만큼 있었다. 그런데 막상 쓰자니 어쩐지 좀 망설여졌다. 3주간 안 쓰고 모은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조금만 더 모으면 탐험자의 깃발이나 암컷 고블린을 살 수도 있겠는데.”
탐험자의 깃발과 암컷 고블린은 각각 50만 수정이다. 한 사나흘 더 모으면 저 중 하나는 살 수 있으리라.
“근데 참 애매하네.”
탐험자의 깃발도 암컷 고블린도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다. 결국에는 사야 할 품목이란 말이다. 다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탐험자의 깃발? 안개 너머로 나서기엔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암컷 고블린? 지금 1마리를 사들여 봤자 쓸 데가 없다.
“그래. 돈 생겼다고 흥청망청 쓸 생각 말고 아끼자. 아껴야 잘 살지.”
훗날 성벽 세우고, 건물 세우고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터다. 생각 없이 수정을 소모했다간 막상 필요할 때 곤란을 겪을지 모른다.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에서 성장의 묘약만 한 병 사서 마셨다. 요즘 보약 챙겨 먹듯 하루에 하나씩 마시고 있다.
물론 이쯤 되니 몸으로 느껴지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 10에서 100이 되는 기분이었다면 요새는 100에서 100.5가 되는 기분이었다.
약효가 잘 안 드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2.
고병갑은 턱을 괴고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불씨가 꺼져가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마른 장작 하나를 집고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대충 정리되는 기분이네.」
「충분히 도움 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야. 덕분에 많이 알았어.」
고병갑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인다.
그 뒤 이제껏 들은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었다.
‘기구한 이야기네.’
어둠이 내리 앉은 아스빌람.
고병갑은 전용 천막에 도르마를 불러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는 명확했다. 고블린이란 종족과 아스빌람에 대한 것이었다.
고블린 샤먼, 도르마가 들려준 얘기는 이러했다.
우선 그들의 기원에 관한 것부터 시작한다.
-균열이라. 로드께선 그곳을 균열이라 칭하시는군요. 저희에겐 그곳을 일컫는 명칭이 따로 없습니다. 뭐, 로드의 말씀마따나 명칭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요. 균열에 있기 전에 어디서 뭘 했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애석하게도 답변드릴 말이 없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르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현상은 꿈과 유사하다고 한다.
전날 꾼 꿈이 다음 날 아침에 금방 잊히듯, 균열에 오기 전 기억이 아주 빠르게 잊혔다.
기껏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은 아주 단편적인 기억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편린들마저 마치 수백 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뭐라도 생각나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더니 도르마는 이렇게 답변했다.
-제 마지막 기억은······. 저는. 아니, 저희는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뭐에 쫓기고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를 쫓는 것은 더 없을 만큼 두렵고 절망적인 존재였습니다.
-두렵고 절망적인 존재? 뭐 괴물 같은 거라도 쫓아왔다는 말이야?
-글쎄요······. 그게 실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저희가 겁에 질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껏 떠오르는 게 도망치던 기억이라니.
고병갑은 더 깊은 내용을 원했으나 그 이상의 이야기는 건져낼 수 없었다.
이어서는 아스빌람과 고블린 로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도 과거의 기억은 삭제됐을지언정 지식은 남아 있었다. 덕분에 전보다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스빌람은 진즉 멸망했습니다. 저의 선조의 선조 때부터 이미 멸망한 상태였지요. 그랬기에 저희 세대에게 아스빌람이란 일종의 전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동족들은 언제나 아스빌람으로 돌아가길 꿈꿨지요. 이실직고하자면 저는 아스빌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순간 느낄 수 있었죠.
-여기가 아스빌람이라는 것을?
-그렇습니다. 저는 고향에 돌아온 기분을 느꼈습니다. 가본 적도 없는 고향에 말입니다.
-고블린 로드라는 건?
-고블린 로드도 아스빌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전설, 미신, 신화······. 저희에게 로드란 그런 존재였습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고블린 로드는 저희 세대에도 존재했다는 것이겠지요.
-나 이외의 로드가 있었단 말이야?
-물론입니다. 저에게도 어렴풋이 전대 로드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도 수 세기 만에 등장한 고블린 로드였지요. 하지만 그는 병약했습니다. 막강한 권능도, 동족을 이끌 덕목도 없었더랬죠. 그는 제가 아주 미숙할 때 명을 달리했는데, 그 뒤로 수십 년간 로드의 자리는 공석이었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엔 다시는 로드를 못 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로드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내가 고블린 로드가 될 수 있었던 건 오드딕이란 이름의 고블린 주술사 덕분이야. 혹시 그를 알아?
-오드딕? 오드딕······.
도르마는 오드딕이란 이름을 한참 되뇌었다. 결국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모르겠습니다. 동족들은 아스빌람이 멸망한 이후 대륙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거든요. 동족들의 생김새가 가지각색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지내는 환경에 적응한 결과물이지요.
고병갑은 바로 이해했다. 당장 이곳에만 해도 자이언트 고블린, 알비노 고블린, 비스트 고블린 등등이 있으니까.
긴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됐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기구하다, 기구해.’
담배가 어느새 다 타들어 갔다. 고병갑은 꽁초를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슬슬 자리를 정리할까 싶던 차에 무언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아, 그리고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하나 더 있어. 왜 너희에겐 여성이 없는 거야?」
「그건 고블린에게 내려진 저주 때문입니다」
도르마는 즉시 대답했다.
‘저주?’
고병갑은 저주라는 단어가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그는 즉시 고대의 상점을 열고 ‘암컷 고블린’에 관한 항목을 읽어내려갔다.
[암컷 고블린]
-가격 : 500,000 수정
-설명 : 저주로 멸종한 암컷 고블린. 번식 기능이 있으며, 암컷을 낳을 수 있다.
‘맞아. 그랬었지. 저주로 멸종했다고 했었어.’
그가 상점 창을 닫으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저주가 내려졌길래 암컷이 다 멸종해?」
「무슨 저주가 왜 내렸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암컷 고블린이 자취를 감춘 이후 아스빌람이 급격히 쇠락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왔지요.」
「아스빌람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암컷 고블린은 없었다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그럼 대체······ 너희는 어떻게 태어난 거야?」
고병갑은 이런 걸 물어도 되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도르마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희는 선대 주술사님의 주술로 탄생했습니다.」
「주술?」
「예. 늙은 고블린이 죽으면 주술로써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아니, 그게 가능하다고? 굉장하잖아! 그럼 암컷이 굳이 없어도 되는 거 아니야? 너도 할 수 있어?」
도르마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그건 굉장한 일이 아닙니다.」
「왜? 굉장하구만.」
「주술로 탄생한 고블린은 대를 거듭할수록 열등해집니다.」
고병갑은 도르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1초 후. 그가 경악 섞인 탄성을 질렀다.
「서, 설마?」
「예.」
도르마가 애달픈 눈빛으로 숙영지 쪽을 바라보았다.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저 가엾은 아이들을요.」
「······.」
「저희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열등해지고 있습니다. 몸집은 점점 더 작아지고, 권능은 점점 더 나약해지지요. 생김새는 추악해지고, 본성은 간악해졌습니다. 그 변화가 두드러진 동족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고병갑은 말을 삼켰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시발······.’
그는 이제껏 노멀 고블린을 보며 귀여운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설픈 말투, 작은 몸집,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하지만 그건 끔찍한 저주의 산물이었다.
퇴화.
진화의 역행.
지성체에서 짐승으로······.
세상에 그보다 끔찍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비유하자면, 노멀 고블린은 중증 치매 환자인 셈이다.
「그리고 저에게 그 주술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아니요. 저는 하지 못합니다. 종족이 열등해지면서 기술 역시 열등해졌으니까요.」
「그랬······ 구나.」
「예. 그렇습니다.」
고병갑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감전된 양 척추가 시큰해졌다.
‘고, 고대의 상점!’
그는 홀린 사람처럼 상점 창을 열었다.
‘그렇게 된 거였어!’
정신이 번쩍 뜨였다.
그는 ‘기타’ 카테고리에 있는 ‘계몽의 씨앗’을 들여보았다.
[계몽의 씨앗]
-가격 : 100,000,000 수정
-설명 :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씨앗. 신의 노여움을 사 끝내 지혜를 잃은 어느 종족의 얼이 담겨 있다. 세계수가 싹을 틔우면 종족의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다.
‘신의 노여움을 사 끝내 지혜를 잃었다!’
이제야 연결고리가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신의 저주. 그로 인한 암컷 고블린의 멸종.
주술의 힘을 빌어 어찌어찌 멸족(滅族)만은 면했으나, 그 대가는 지혜였다.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어 괜찮아. 도르마. 너도 인제 그만 가서 쉬어. 오늘 이야기한다고 고생 많았다.」
「알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도르마가 떠났다.
고병갑은 담배를 입에 물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밤하늘엔 별이 무수했다.
“후우.”
담배 연기가 맑은 하늘을 흩뿌려졌다.
“저주받은 종족을 구원하라니. 단순히 건물 몇 개 올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