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분기점
62.
“으으······.”
프로스 길드 소속, B급 헌터 염정화.
블라인드 너머로 내리쬐는 햇살을 느끼며 그녀가 눈을 떴다.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키니 가벼운 두통이 찾아왔다.
‘여기는······ 병원이구나.’
그녀가 사위를 훑었다. 침상, 링거, 환자복 등등. 이곳이 병원이란 사실을 알려주는 지표는 많았다.
1인실인지라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건······ 병갑 씨가 해냈다는 건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괴물.
빗발치는 소음.
거대한 고치.
그리고 최후의 돌격······.
A랭크 균열도 들어 가본 적 있는 그녀였지만,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여간 인생을 통틀어 최악의 토벌이었음은 분명했다.
‘······그건 대체 뭐였지?’
염정화는 기억의 편린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기절과 깨어남을 반복하는 와중에 어렴풋이 본 장면이었다.
고병갑의 주위에 있던 세 인영(人影).
그들은 고병갑과 힘을 합쳐 싸웠다.
아주 짧은 순간 본 것이고, 몸도 정신도 정상이 아니었기에 기억은 안개처럼 뿌옜다.
단순히 헛것을 본 것일까? 아니면 함께 던전에 들어갔던 C급 헌터들인 걸까?
-드르륵!
그때 문을 열고 간호사가 들어섰다.
간호사는 의식을 차린 염정화를 보자 눈이 커졌다.
“어머어머. 깨어나셨네요?”
“아······ 네.”
“후후. 잠시만요. 확인 좀 할게요.”
간호사가 능숙하게 의료장비를 만졌다. 큰일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고 잠깐 점검하러 온 듯했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죠?”
“으음. 하루가 좀 안 됐죠? 어제 정오 무렵에 실려 오셨으니까요.”
염정화는 반사적으로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 16분이었다.
“환자분께선 큰 상처는 없으셨어요. 과로랑 탈진 증상이 좀 심하긴 했는데, 함께 실려 오신 분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죠.”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죠? 전부 살아있나요?”
염정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다들 생명에 지장은 없으시거든요. 다만, 한 분은 은퇴하실 수도······ 어어? 환자분 그러시면 안 돼요!”
염정화가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잡아 뜯었다. 간호사는 화들짝 놀라며 즉각 만류했지만, 이미 뽑힌 바늘이었다.
“병실이 어디예요? 알려 주세요!”
“아이참······.”
간호사가 다른 사람들이 묵고 있는 호실을 알려주었다. 염정화는 서둘러 그리로 가보았다.
4인실 병동. 염정화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후우.”
심호흡하고 벌컥 문을 연다. 정갈하게 정리된 병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4개의 침상. 그런데 사람은 셋뿐이었다.
“음? 오오, B급 양반. 깨어나셨구먼.”
문 옆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마시던 박수태가 인사를 건넸다. 몸 군데군데 붕대를 바른 상태다. 그런데 외형이 어딘가 어색했다.
팔이 한 짝뿐이었다.
“수, 수태 씨 팔이······?”
“아, 이거?”
박수태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오른쪽 어깨를 들썩였다.
“웬 그지발싸개 같은 잡종 새끼가 가져갔지 뭐요. 재수도 더럽게 없지. 하필 잘라도 오른 팔을 자르나? 지미 썅.”
박수태는 그렇게 말하며 오렌지 쥬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유감이에요.”
“됐수다. 팔 한 짝 내주고 목숨 벌었으면 남는 장사지, 뭐.”
“다른 분들은 괜찮으신가요?”
염정화가 조영훈과 최민영을 보며 물었다.
조영훈은 폐를 다쳐 당분간 재활을 해야 한다고 했다. 최민영은 팔과 목에 큰 골절상을 입었지만, 치료만 받으면 재기엔 영향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D급 형씨는 아침에 나갔수.”
“아, 아침에 나갔다고요? 퇴원했단 말인가요?”
“그렇수다. 참 희한한 게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더라고.”
염정화는 말을 잊었다.
“길드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우리들 짊어지고 나온 게 그 형씨라고 하더이다. 완전 도깨비야, 도깨비.”
“저,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엥? 나한테 말이요?”
“여기 계신 모두에게요.”
세 사람의 이목이 염정화에게 쏠렸다.
“혹시 병갑 씨와 함께 보스 몬스터를 해치운 게 여러분인가요?”
사람들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건 또 무슨 귀신 도시락 까먹는 소리요?”
“보스 몬스터요? 저, 저는 그 전에 기절해서 보스 몬스터는 보지도 못했는데요······.”
“던전의 보스는 그쪽이 쓰러뜨린 거 아닙니까?”
박수태도, 최민영도, 조영훈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염정화가 짧게 한숨쉬며 대답했다.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린 건 제가 아니에요. 저도 중간에 기절했거든요.”
“으이? B급 양반도 기절했다고? 그럼 그 형씨가 보스 몬스터까지 잡아냈단 말이요? 허어. 이거 정말 도깨비가 아닌지 모르겠구먼.”
“그, 그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였을까요? 정말로 D급이 맞기는 한 걸까요?”
최민영이 몸을 떨었다. 그의 기억 속 고병갑은 공포의 존재였다.
조영훈이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등급을 속인 거겠죠. 다들 봤지 않습니까. 그게 어디 D급의 힘이었나요?”
“그렇지만 카르마는 우리와 비슷했잖아요?”
“은닉에 능한 사람이겠죠. 암살자 계열의 헌터라면 카르마를 숨기는 것쯤 일도 아닐 테니까요.”
“여, 역시 그런 걸까요?”
“하긴. 등급은 속인 게 아니라면 D급이 그런 힘을 갖는 게 말이 안 되지. 거의 B급 양반이랑 견줄 정도였으니까.”
박수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최민영은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왜 등급을 속였을까요?”
“글쎄요. 저야 모릅니다만······ 어쩌면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르죠.”
“재미요?”
“하급인 척하면서 우리 같은 진짜 하급을 놀리면 꽤 재밌지 않겠습니까?”
“아······.”
C급 3인에게는 ‘고병갑이 등급을 속였을 것이다.’쯤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아니야.’
염정화는 자신할 수 있었다. 고병갑은 D급이 맞다.
물론 조영훈의 말마따나 카르마를 숨기는 데 능통한 헌터들이 있긴 하다. 그리고 그들이라면 겉으로 드러나는 등급쯤 얼마든지 낮춰 보일 수 있겠지.
하나, 염정화는 똑똑히 본 것이다.
고병갑이 칼날에 두른 하늘색 카르마를.
그건 영락없는 ‘하위’의 색이었고 더없이 빈약했다. 게다가 아무리 암살자 계열이라도 격렬한 전투 중에는 카르마를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애당초 그 사람은 전투 중에 카르마를 사용하지도 않았어.’
미스터리.
고병갑은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다.
그를 찾아 나서 볼까?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지만.
‘아냐.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그럼 쉬십시오. 부디 쾌차하시길 기도할게요.”
“B급 양반도 쉬쇼. 나중에 길 가다 마주치면 인사라도 합시다. 하마터면 같이 요단강 건널 뻔한 사이인데.”
“네, 좋아요.”
염정화는 그길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자기 병실로 돌아간 그녀는 모든 잡념을 떨쳐내고 죽은 듯이 잠을 청했다.
63.
“음. 제대로 들어왔네.”
고병갑은 가상 계좌를 들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 헌터 협회
입금 : 4,500,000₩
긴급 토벌 사례금으로 사백오십만 원이 입금됐다. 당초 예정됐던 백오십만 원보다 삼백만 원이나 높게 책정된 액수였다.
다만, 해당 균열이 던전임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나온 보상금은 없었다. 협회 측에서 자신들의 실수라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변종이었기에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다. 관측값에는 착오가 없다’고 항변했다.
애저녁 협회는 짠돌이다.
긴급 토벌에 참여하기 전 작성을 요구하는 서류에는, 철저히 자기네를 변호하는 글귀가 항목별로 명시되어 있다.
‘망할 놈들아! D랭크 균열이라며? 빌어먹을 B랭크 던전이잖아!’
라고 항의해봤자 소용없다는 소리다.
거슬리긴 했지만, 그냥 넘기기로 했다.
이 문제로 법정까지 가봤자 그 커다란 단체를 이길 리도 만무했고, 뭐가 됐건 사지 성하게 돌아왔으니 그걸로 된 거다.
“어우. 링거 한 대 맞았더니 개운하네.”
입원비는 프로스 길드에서 내주었다.
이참에 한 며칠 병원에서 요양했어도 됐으리라. 그렇지만 고병갑은 그냥 빨리 퇴원해버렸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병원 밥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는 병원을 나서자마자 국밥 한 그릇 시원하게 때렸다.
식사를 마친 뒤엔 식당에 딸린 흡연장에서 담배를 뻑뻑 피웠다. 담배 맛이 미쳤다.
“후우우.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겠네.”
고블린 300마리를 모은다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나와 있을 이유가 없다.
사례금으로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 잡고 임도 보고 뽕또 딴 셈이다.
담배 연기가 허공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고병갑은 담배 연기가 퀸 아나크네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괴물 새끼가 만전의 상태였다면, 아마 이길 수 없었겠지.’
그가 퀸 아나크네를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여러 복합적인 변수가 있었고, 고블린들의 도움도 받지 않았던가?
B급 하나 어찌어찌 잡았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안 된다.
‘해이해지지 말자. 아직 상위에 닿은 게 아니야.’
고병갑은 다짐을 여러 번 돼내었다.
그는 차를 대놓은 곳으로 갔다.
아파트단지 한편에 고병갑의 애마가 주차돼있었다.
여름 열기를 얻어맞아 차 내부가 후끈했다. 고병갑은 4쪽의 창문을 활짝 열고 차를 달렸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런대로 괜찮은 풍미를 주었다.
2시간 30분가량 달려 도착한 서울.
그의 양손이 무겁다. 라면, 과자, 돼지고기 따위가 산더미처럼 들려있었다.
모두 고블린들 주려고 산 것이었다.
‘이제 300명도 넘으니까 회식도 자주 못 하겠네.’
100마리쯤 있었을 때는 기분 내서 돼지고기 뒷다리라도 한 번씩 사주고 그랬다.
다음날 술 깨면 주머니가 쓸쓸하긴 해도, 감당 못 할 액수는 아니었으니까.
한데, 300마리가 넘어가니 감당이 안 됐다. 회식 한 번을 하려면 돈 백만 원은 깨졌으니 말이다.
전처럼 자주 했다간 꼼짝없이 알거지 진세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하도록 노력해보자.’
언젠가 소고기 회식을 할 수도 있겠지.
고병갑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짐을 풀고, 노곤한 몸을 씻는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엔 사 들고 온 품목을 바리바리 들고 아스빌람에 넘어갔다.
‘여긴 여전히 평화롭구먼.’
「음? 로, 로드? 로드!」
「로드야!」
「뭐여?」
「로드시여!」
들판에서 일을 보던 고블린들이 고병갑을 발견하곤 헐레벌떡 뛰어왔다. 부르짖는 목소리에 애잔함이 묻어 있었다.
「로드시여! 몸은! 괜찮으십니까?」
「로드! 왜! 어제! 안 왔어!」
「안 오셔서. 걱정했습니다!」
「아니, 어제 병원에서 링거 맞는다고······.」
「로드님이시다! 로드가 오셨다!」
별안간 동굴 쪽에서도 외침이 들렸다.
잠시 후 고블린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무슨 댐에서 방류하는 듯하다.
「로드시여!」
「어. 고붕고붕 고붕이. 하루만이네.」
「몸은. 괜찮으십니까?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끄떡없어 인마. 왜? 걱정했냐?」
「당연! 합니다!」
「참나.」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건 꽤 흐뭇한 일이다.
「로드시여. 소인 도르마 인사드리옵니다.」
「오, 도르마. 잠은 잘 잤냐?」
「예.」
「어, 그래. 아스빌람에 와보니 어때? 아니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자자, 주목! 전부 조용히 해봐!」
한순간 북적이던 아스빌람이 고요해졌다.
「고붕아. 너희 밥 먹었냐?」
「안 먹었습니다!」
고병갑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좋아. 오늘 작업은 끝이다! 새 식구들 들어왔으니 잔치나 벌이자!」
「······.」
「야, 이것들아. 이 타이밍엔 함성을 질러야 할 것 아니야? 조용히 하란다고 끝까지 조용히 하냐?」
「아앗! 모, 몰랐습니다.」
「하여간 얘들은 센스가 없어요. 흠흠. 다시 할 테니까 제대로 반응해라.」
고병갑이 호흡을 가다듬고 재차 외쳤다.
「새 식구 들어왔으니까 잔치나 벌이자!」
「와아아아아아!」
「쪼끄만 것들은 가서 솥에 물 올려! 오늘 너희에게 MSG라는 걸 전파해주마.」
「에, 엠에스?」
「아마 눈이 번쩍 뜨일 거다. 킥킥.」
고블린은 작업을 중단하고 잔치를 준비했다.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이고, 과자와 음료수 따위를 늘어놓는다.
잔치상 치고 부실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뭐 어떤가? 당사자들만 좋으면 그만이다.
「뜨거우니까 손으로 집어 먹지 마라.」
「예!」
「오냐. 많이들 먹어라.」
「잘 먹겠습니다!」
고블린들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웠다.
「너, 너무! 맛있다!」
「핥! 맛있어! 이거. 뭐야?」
「콜록! 매, 맵다! 그런데. 맛있다!」
「체한다. 천천히들 먹어라.」
고병갑은 고블린들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건 아니고,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다.
그는 맥주를 홀짝이며 도르마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도르마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됐어, 됐어. 밥 먹어.」
「같이 식사하지 않으십니까?」
「어. 나는 먹고 왔거든. 어째 음식은 입에 맞나?」
「예. 제 생을 통틀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입니다.」
「다행이네.」
고병갑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그래. 아스빌람에 와보니까 어때? 이제 나를 좀 믿을 수 있겠어?」
「······.」
도르마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그가 불쑥 고개를 조아렸다.
「지난날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시옵소서!」
「야야! 밥 먹다가 갑자기 왜 그래? 얼른 고개 들어.」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로드께선 제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거, 참.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구먼.」
고병갑은 무안함에 맥주만 마셨다.
도르마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그가 고블린들을 쓱 훑었다.
「동족들이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냐?」
「예. 저희는 살아남기 위해 언제나 분노해야 했으니까요. 웃음이란 사치인 줄만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웃을 일이 더 많을 거야.」
고병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어 말했다.
「네 말을 듣고 나도 생각 많이 했어. 고블리도 아닌 내가 로드가 된다는 게, 너희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더라고.」
「그 말은 잊어주십시오. 소인의 실언입니다.」
「아냐. 틀린 말이 아니야.」
「······.」
「맞아. 나는 많은 것을 약속해줄 수 없고, 많은 것을 해줄 수도 없어. 그래도 이 정도. 적어도 굶지 않고, 다치지 않고, 따뜻한 곳에 등대고 잘 수 있게 해줄 순 있다. 부족한 게 많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내 최선이야.」
「흑! 흐윽!」
도르마가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고병갑은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사내자식이 왜 울고 그러냐.」
「추태를······. 죄송··· 죄송합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다 보면 언젠가 아스빌람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겠지. 나도 더 노력하마.」
「로드께선 이미 충분히 저희를 사랑하고 계시는군요.」
「됐어, 인마. 입발린 소리 들어 봤자 낯만 간지러워.」
고병갑은 기어코 맥주 한 캔을 비워냈다. 간에 기별도 안 갔다.
소주를 마셔야겠다.
「어쨌건 아스빌람에 온 걸 환영한다. 앞으로 네가 해줄 일이 많다.」
「몸이 부서지라 일하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먹고 즐겨라. 침울했던 과거는 다 털어버려.」
「예, 로드.」
장작불이 타오른다.
일렁이는 불꽃은 매 순간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그렇다. 무릇 삶이란 불꽃 같은 것이다.
모두가 다른 모양으로 타오르지만, 결국엔 다 같은 재가 돼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멋진 모양으로 타오르냐가 아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후회 없이 자신을 태우느냐이다.
고병갑과 324마리의 고블린은 이날 같은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
한 점 후회 없이 타오르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