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던전
58.
“방금 뭐라고 했수? 보스 몬스터를 잡으러 가자고 말한 거요?”
박수태가 바로 반응했다.
고병갑은 자기 배낭에 포션이 몇 병이나 들었는지 확인하며 대답했다.
“바로 들으셨습니다. 더 늦기 전에 보스 몬스터를 해치워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아니, 졸병들 상대하는 것도 벅찬데 대장을 무슨 수로 잡겠다는 말이요?”
“지금이니까 벅찬 정도로 끝나는 겁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아예 불가능해질 겁니다.”
고병갑은 배낭의 지퍼를 잠갔다. 최하급 포션이 2병이다. 다른 헌터들이 소지한 것까지 합치면 고비 몇 번쯤은 넘길 수 있을 듯했다.
박수태가 설명을 요구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고병갑은 순순히 응해주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던전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닙니다. 부하 몬스터를 보니 확실해졌어요. 현재 이곳은 D랭크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체적인 난도가 더 올라갈 겁니다.”
“몬스터가 더 강해질 거란 말이요?”
“그런 셈이죠. D에서 C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C에서 B로 승급하는 순간 끝이에요.”
“그쪽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 숨어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영훈이 끼어들었다. 고병갑의 위용을 목격한 이후론 말투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고병갑은 대답하는 대신 염정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르마 감지에 능한 정화 씨라면 느낄 수 있겠죠. 이 던전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염정화는 입술이 타는지 침을 발랐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온 사방에서 카르마가 요동치고 있어요. 병갑 씨도 눈치채고 계셨군요.”
고병갑은 카르마 감지에 그리 능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야생동물만큼이나 발달한 감각이 위험 신호를 보내주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곧 침입자를 찾으러 몬스터 떼가 들이닥칠 거고요. 어떤 덜떨어진 인간 때문에 이 사달이 나버린 거죠.”
고병갑은 그렇게 말하며 최민영을 째려보았다. 최민영은 울상을 지으며 바닥만 내려보았다.
“그놈들 안방에서 술래잡기해본들 결과는 뻔합니다. 괜히 버티고 있어 봤자 몬스터들에게 성장할 시간을 주는 것밖에 되지 않고요.”
“······.”
“그러니까 지금 해야 합니다. 던전이 최약체일 때 허를 찌르는 것. 그것이 솟아날 유일한 구멍이에요.”
사람들은 말없이 고민했다.
정적을 깨고 고병갑이 입을 열었다.
“고민하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제 의견을 따르기 싫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대신 여기서부턴 따로 행동하게 될 겁니다. 괜히 모여 다녀봤자 눈길만 끌 테니.”
고병갑이 엄포하듯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저 사람 말이 맞아. 숨어 버틴다는 선택지는 이미 물 건너갔어.’
염정화가 결심을 세웠다.
“병갑 씨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으로선 맞서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에요.”
“······B급 양반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찬성하겠수다. 뭐, 다른 수도 없어 보이고.”
“저도 따르겠습니다.”
박수태와 조영훈도 고병갑에게 동조했다.
최민영은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주뼛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지금부터 주의사항을 말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총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십시오.”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라고? 우리는 형씨처럼 싸우지 못한단 말이오.”
박수태가 기겁했다. 고병갑은 즉시 설명에 들어갔다.
“전투는 저와 염정화 씨가 전담할 겁니다. 여러분은 전투가 시작되면 멀찍한 곳에 피해 계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해도 튀는 몬스터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는 알아서 호신하세요. 보호받으려고 균열에 발 담근 거 아니지 않습니까?”
“······알겠수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 누굴 챙겨줄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섭섭하게 생각 안 하니까 신경 쓸 거 없수다. 맞는 말이지 뭐.”
박수태가 쩝 입맛을 다셨다.
고병갑은 시선을 돌려 최민영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을 가만 놔뒀다간 또 총을 쏴댈 것 같았다.
“어이, 너.”
“네, 네?”
“탄알집 제거하고 착검해.”
“타, 탄창을 빼라고요?”
“왜? 싫어?”
“시, 싫은 게 아니라······.”
“아니면 이렇게 할까? 내 귀로 총성이 들리면 그날로 너는 뒤지는 거야. 어때?”
“빼, 뺄게요!”
고병갑이 겁박하자 최민영은 벌벌 떨며 탄알집을 제거했다.
염정화가 측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아무리 그래도 사방이 몬스터인데······.”
“저 인간 때문에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개죽음이나 당하자고 균열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고병갑은 일행을 훑었다. 움직일 채비는 다 갖춰진 듯했다.
“염정화 씨. 보스 몬스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상위 각성자들은 기본적으로 카르마 감지에 능하다. 그 감각이 뛰어난 몇몇 이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스 몬스터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염정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주변에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어려워요. 더 가까이 다가가야 가능할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움직이죠.”
다섯 이는 다시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59.
딥 임팩트가 발발한 지 28년이 지났건만, 인류가 밝혀낸 것은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균열과 이면 세계에 대한 탐사만 하더라도 미진한데, 던전은 오죽할까.
하나, 과학자들이 골머리를 앓는 것과 별개로 헌터들은 몇 가지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연구와 추론이 아닌, 오롯이 경험을 통해 얻어낸 값진 것들이었다.
피땀 내음 자욱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던전은 더럽게 넓다. 도무지 끝을 알 수가 없다.
둘째. 던전에는 몬스터가 더럽게 많다. 기록에 따르면 2만 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나온 던전도 있었다.
셋째. 던전에선 시간이 더럽게 천천히 흐른다. 안쪽의 시간은 바깥의 24분의 1이다.
고병갑은 저 투박한 산물들을 여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더럽게 넓고, 더럽게 많고, 더럽게 느리다.
-삐빅.
‘염병. 벌써 열 시간 째야.’
그는 던전에 들어온 순간부터 스톱워치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방금 던전에 진입한 지 10시간이 경과 됐다.
‘제기랄. 이제 열 시간이라고?’
하지만 바깥을 기준으로 하면 고작 25분쯤 흘렀을 뿐이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은 사태 파악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어쩌면 핸드폰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 한 채!
아마 50~60분 정도.
그러니까 던전을 기준으로 하면 20~24시간은 더 지나야 슬슬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B급 헌터가 투입됐는데 왜 이리 늦지? 이런 사소한 의아함을.
“후욱, 후욱!”
조영훈이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의 복부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스켈레톤이 내지른 검에 깊게 베인 탓이었다.
그 옆에선 박수태가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그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거듭된 전투로 많이 지쳐있었다.
“내, 내장은 상하지 않았어요. 천만다행이에요.”
최민영이 손을 벌벌 떨며 조영훈을 치료했다.
고병갑은 최민영이 또 병신 짓을 할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최민영은 시간이 흐를수록 평정심을 찾아갔다.
‘죽음을 체념한 거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처음에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혼란을 넘어서면 놀랍도록 차분해진다.
그런 과정을 몇 번 겪다 보면 죽음 앞에서도 초연해질 수 있다.
만약 최민영이 무사히 살아 돌아간다면, 헌터로서 한층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후우······.”
고병갑도 잠깐 숨을 고르며 옆을 보았다. 염정화가 눈을 감은 채 허공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고병갑은 곧장 물었다.
“찾았습니까?”
염정화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방향은 맞아요. 그런데 구체적인 위치는 못 잡아내겠어요. 주변에 방해 요소가 너무 많아서······.”
“그렇군요.”
“잠시 쉬도록 해요. 몬스터의 활동이 잠잠해졌어요. 얼마 간은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도록 하죠.”
고병갑은 잠시 쉬기로 했다.
지난 10시간 동안 30분에 한 번꼴로 전투가 벌어졌다. 그와 염정화가 해치운 몬스터만 거진 오륙백 마리였다.
아무리 고병갑이라도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병갑은 벽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그 옆으로 염정화도 따라 앉았다.
“하아.”
염정화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한숨 쉬었다.
그녀는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가장 깨끗했다. 카르마 베리어로 모든 공격을 상쇄시킨 덕분이다.
그러나 그게 무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카르마를 소모했고, 그럴수록 몰골은 수척해졌다. 당장 눈그늘만 봐도 대단히 피곤하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대뜸 질문했다.
“지금에야 묻는 거지만······ 병갑 씨는 정체가 뭐죠?”
“무슨 의미입니까?”
“아시면서 뭘 모르는 척하세요? 병갑 씨의 강함. 분명 하위 각성자의 것은 아니잖아요.”
“······.”
고병갑은 가만히 말을 삼켰다.
“처음에는 단순히 등급을 속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병갑 씨의 카르마는 분명 하위의 것이었죠. 그래서 혹시 증강 능력자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어요. 그런 분들이 간혹 있으니까요.”
증강 능력자.
일시적으로 카르마를 증폭시키는 각성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고병갑은 그 단어를 참 오랜만에 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애당초 병갑 씨는 전투 중에 카르마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야 당신처럼 카르마가 넘쳐나지 않으니까.’
고병갑은 구태여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염정화가 고병갑을 빤히 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등급을 속인 것도, 그렇다고 증강 능력자도 아니면 병갑 씨는 대체 뭐죠? 인조인간이라도 되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그럼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게 억지로 말하게 할 권리는 없으니까요.”
염정화는 순순히 포기했다. 고병갑의 말마따나 이 상황에선 그다지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말 나온 김에 저도 하나 묻지요. 정화 씨는 왜 우리를 버리지 않은 겁니까?”
“네?”
“정화 씨는 우리들과 다릅니다. 상위 헌터니까요. 만약 혼자였더라면 어떻게든 숨어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굳이 혹을 주렁주렁 달고 가길 택한 겁니까?”
고병갑의 질문에 염정화가 쓰게 웃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저 살 거면 같이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러는 병갑 씨도 혼자 내빼지 않았잖아요?”
“저는 정화 씨 옆에 붙어있어야 살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럼 만약 살 확률이 낮아지면 저희를 버리겠군요?”
“버린다는 표현은 좀 그렇군요. 그냥 제 살길 찾아가는 겁니다. 누구 밥그릇 챙겨줄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염정화는 어렴풋이 웃으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병갑도 잠시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들지 않게 정신을 잘 잡아야 했다.
몇 분 정도 고요함이 지속됐다. 정말이지 꿀 같은 정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헉!”
“흡!”
염정화와 고병갑이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두 사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스에요!”
염정화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고병갑은 얼른 무장을 챙겼다.
“몹시 가까워요! 이, 이상해! 좀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뭐가 됐건 상관없습니다. 다들 일어서십시오!”
고병갑은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을 얼른 일으켜 세웠다.
“지금부터 총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보이는 것들 전부 쏴 버리세요.”
“지미럴. 드디어 방아쇠 한 번 당겨보겠구먼.”
“저, 저도 총 쏴도 되나요?”
“귓구멍 막혔냐! 보이는 족족 갈겨버리라고!”
“아, 알겠어요!”
그들은 얼른 채비를 갖추었다. 얼굴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이쪽이에요! 절 따라오세요!”
염정화가 칼을 앞세우며 뛰어갔다.
고병갑과 나머지 사람들은 부리나케 그 뒤를 쫓았다.
드디어 고지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