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던전
56.
고병갑은 아주 짧은 시간 정신을 잃었다.
5~6초 후. 캄캄했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씨발······.”
이곳은 어두컴컴한 지하 미궁이었다. 듬성듬성 자리 잡은 횃불이 미약한 불빛을 비추었다. 전후방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통로가 뚫려있었다.
어느 각도로 봐도 평범한 이면 세계는 아니었다.
‘던전······.’
그렇다. 이곳은 던전이라 불리는 특수 균열이었다.
‘제기랄!’
고병갑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옥 같았던 기억의 편린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탈출 포탈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던전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스 몬스터를 제거하는 것이니까.
고병갑보다 먼저 들어온 헌터들도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눈동자엔 불안이 깃들었고, 무기를 쥔 손은 애처롭게 떨렸다.
“쉿!”
환도를 장비한 여인이 고병갑의 어깨를 잡으며 신호했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였다.
그녀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마세요.”
끄덕.
고병갑은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여인은 손짓하며 사람들을 모았다.
다섯 사람이 머리를 맞댔다. 말을 하면 입김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던전입니다.”
“지미럴거. 알고 있수다.”
여인의 음색은 차분했다. 반대로 턱수염을 늘어뜨린 중년 남성은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더, 던전이요?”
앳된 인상의 청년이 당황하며 질문했다.
고병갑은 곁눈질하며 청년을 살폈다. 착용한 장비들은 길이 덜 들어 짱짱했다. 눈빛은 흐리멍덩하니 독기가 서리려면 아직 멀었다.
‘신삥이군.’
딱 견적이 나왔다.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인간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변종 균열의 일종입니다. 보통 던전이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검은 균열이라 부르기도 하죠.”
“검은 균열?”
“여느 균열과 달리 검게 보이기에 그렇게 이름 붙은 겁니다.”
“하, 하지만 검지 않았잖아요? 분명 푸른색의······.”
“아직 덜 여물었다는 의미겠죠.”
고병갑이 청년의 말을 잘랐다.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럽게 쏠렸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균열이 발생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투입됐습니다. 겉으로 표나려면 빨라도 두세 시간은 있어야 할 겁니다.”
“저분의 설명이 맞아요. 던전은 발생 초기엔 여느 균열과 생김새가 똑같아요. 그래서 더욱 위험하죠.”
“어, 얼마나 위험한 건데요? 많이 위험한 건가요?”
여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던전은 평범한 균열과 규모가 다릅니다. 몬스터가 얼마나 포진해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천 마리가 될지 이천 마리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처, 처처, 천!?”
앳된 청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데 이상하잖수? 나는 생전 D짜리 던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수다. 던전이라 하면 통상 B랭크 이상 상위 균열에서 나타나는 현상 아니오?”
턱수염 중년의 지적은 지당했다.
던전이라 이름 붙은 특수 균열은 상위 랭크에서만 발현되는 현상이었다. 하위 랭크 균열에서 던전이 나온 전례는 이제껏 없었다.
“맞습니다. 하위 랭크에선 던전이 발생하지 않아요.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그렇습니다.”
“아니. 그럼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그건······.”
여인이 심란한 얼굴로 말을 삼켰다.
고병갑을 제외한 나머지 헌터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여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보슈!”
턱수염 중년이 재촉했다.
그때 고병갑이 여인을 대신하여 말했다.
“가능성은 두 개입니다.”
“뭐요?”
“협회에서 균열의 랭크를 잘못 측정했거나, 던전의 변이가 아직 진행 중이거나.”
고병갑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하지만 피우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자살행위였기 때문이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쉰 후 이어 말했다.
“협회에서 랭크를 잘못 측정한 사례가 몇 있긴 하다만 그편은 희박할 겁니다. 아마 균열이 아직 변이 중인 거겠죠.”
“그게 무슨 말이오?”
“말했지 않습니까. 균열이 덜 여물었다고. 쉽게 말해 이 던전은 미완성작입니다. 이 순간에도 랭크가 점점 올라가고 있을 거예요.”
“지미! 완성이고 미완성이고 던전이란 건 변함이 없지 않수?”
“그렇긴 하죠. 그나마 다행인 건, 몇 시간 내로 바깥에서도 이상징후를 감지할 거라는 겁니다.”
“와아!”
앳된 청년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그, 그럼 몇 시간만 버티면 구조대가 오겠네요!”
“······.”
청년의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 턱수염 중년, 그리고 차가운 인상의 마른 사내까지. 모두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청년은 곧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다, 다들 왜 그러세요? 누, 누구라도 말 좀 해보세요!”
“하아.”
고병갑은 짙은 한숨을 내쉰 후에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적어도 이삼일은 여기 갇혀있어야 할 겁니다.”
“뭐라고요? 아, 아까는 몇 시간이라고 했잖아요?”
“던전의 시간은 바깥보다 24배 느리게 흐릅니다. 아니,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릅니까?”
청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믿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바깥의 한 시간이 여기에선 하루예요. 저쪽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A급 이상 상위 헌터들을 투입하는 데 빨라도 두세 시간은 소요될 겁니다. 저기서 두세 시간이니 여기선 사오십 시간쯤 되겠군요.”
“사, 사오십 시간?”
“사오십 시간도 상황이 잘 풀릴 때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닷새 이상 표류해야 할 수도 있어요.”
“아··· 아아······.”
청년이 비틀거리더니 결국엔 주저앉아버렸다.
날카로운 인상의 마른 사내는 잠자코 있다가 여인에게 물었다.
“어찌할 생각입니까. 당신이 우리 리더이니 결정을 하십시오.”
“음······.”
여인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청년은 좌절에 빠졌고, 턱수염 중년은 털을 곤두세우며 통로 쪽을 조준하고 있다.
고병갑은 한 발짝 물러선 곳에서 네 사람을 한눈에 담았다.
‘저들을 데리고 아스빌람으로 피신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아스빌람에 가면 당장 죽을 걱정은 없다. 더욱이 그곳의 시간은 바깥과 같으니 단 몇 시간만 버티면 될 테고.
‘문제는······.’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과연 아스빌람의 존재를 타인에게 알려도 되는 걸까?
고병갑은 되도록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소유욕과 독점욕 같은 유치한 감정의 영향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전에 걱정이 앞섰다.
아스빌람, 고블린 로드, 고대의 상점.
만약 정부 같은 거대한 조직이 위의 것들을 인지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용하려 들 것이다.
비약을 좀 섞자면, 고병갑을 잡아다가 인체 실험 따위를 할지도 모른다.
저 인간들이 입단속을 철저히 해줄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적어도 내 한 몸 지킬 수 있을 때까지는 비밀을 엄수해야 해.’
혹 거대한 조직에서 고병갑의 능력을 알고 접근하더라도 철저히 갑의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적어도 A등급······. 아니, S등급 이상의 힘은 지니고 있어야 할 터.
‘아스빌람으로 피신하는 건 최후의 수다. 지금은 다른 방도를 찾자.’
고병갑은 결심을 굳혔다. 여차하면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피신하면 된다.
“다들 모여주세요.”
여인이 사람을 모았다.
앳된 청년은 동아줄이라도 내려온 듯 헐레벌떡 반응했다. 턱수염 중년은 먼 곳을 빤히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걸어왔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좋겠군요. B급 헌터 염정화입니다.”
“C급 박수태요.”
“최, 최민영이에요. 등급은 C입니다.”
“조영훈. C급입니다.”
‘같은 길드인 것 같은데 서로 초면인 건가?’
네 사람은 딱히 친분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네 분 모두 같은 길드 소속입니까?”
“맞아요. 전부 프로스 길드 소속이에요.”
‘흠. 대형 길드면 그럴 수 있지.’
대형 길드는 보유한 헌터의 수가 수백 명을 넘기기도 한다. 서로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
고병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D급 헌터 고병갑입니다.”
“무장은 그게 다입니까?”
조영훈이 곧바로 질문했다. 인상이 차갑다 보니 어조도 딱딱하게 느껴졌다.
고병갑은 조영훈의 의중을 단번에 파악했다. 하위 헌터가 총 한 자루 없이 균열에 들어왔느냐고 묻는 것이다.
“네. 이게 답니다.”
“······.”
“지미럴. 피빨이였나······.”
박수태가 조용히 구시렁거렸다.
고병갑은 그 말을 들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구태여 감정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B급 양반. 어쩔 셈이쇼?”
“일단 이동하겠습니다. 제가 선두에 서고······.”
“이동하겠다고요!?”
최민영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정화는 다급히 최민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조용히 하세요. 큰 소리 내지 말란 말이에요.”
“읍! 으읍!”
최민영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정화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단 은엄폐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해요. 농성을 벌여도 그곳에서 벌여야 합니다. 이런 장소는 포위되기 십상이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현재 위치는 길쭉한 통로의 중심부였다. 앞뒤로 뻥 뚫려있으니 양쪽에서 밀고 들어오면 답도 없다.
“수태 씨와 영훈 씨가 제 뒤에서 엄호해주세요. 병갑 씨와 민영 씨는 후위에 서서 후방 경계를 부탁해요.”
그녀가 검을 뽑은 뒤 당부하듯 덧붙였다.
“정말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총을 쏘지 마세요. 어지간한 건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열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저를 따라오세요.”
염정화는 비장한 기세로 앞장섰다.
57.
“캬아아아아아악!”
“케기기긱! 케기기기긱!”
“염병!”
냉혹한 현실이란 말이 있다. 그건 문법적으로 잘못됐다.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다. 그러니 ‘냉혹한 현실은’ 동의의 중복사용인 셈이다.
“아으으··· 아으으!”
-타다다다다당!
최민영이 총을 난사했다. 이미 눈이 풀려있었다.
“총 쏘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고병갑은 화가 나서 최민영의 복부를 걷어차 버렸다.
최민영은 바닥에 고꾸라져 배를 얼싸쥐었다.
“커헉! 콜록! 콜록! 꺼허헉!”
“제기랄! 어디서 이런 덜떨어진 새끼가 굴러들어온 거야?”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염정화를 필두로 한 토벌대는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깊숙한 통로를 지나는 동안 몬스터 몇 마리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염정화가 소리소문없이 해치워버렸다.
아주 순조로웠다.
통로를 지나자 넓고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마치 지하에 건설된 궁전 같았다.
토벌대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이동했다. 그러다가 한 무리의 몬스터와 접전을 벌이게 됐다.
그리 많은 몬스터도 아니었다. 염정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다른 인원들을 멈춰 세운 뒤 조용히 몬스터를 처리했다.
한데 염정화가 대열에서 이탈한 상황에서 후면 기습이 들어왔다.
고병갑은 즉시 반응하여 검을 휘둘렀다.
-가만히 있으세요! 제가 처리합니다!
그렇게 일러두기까지 했다. 그랬건만······.
겁에 질린 최민영이 그만 총을 쏘아버렸다.
그것도 한 발이 아니라 열댓 발을!
총성을 듣고 몬스터 떼가 몰려들었다.
대략 50~60마리였다.
박수태와 조영훈은 보조 무장으로 어떻게든 괴물을 상대했다.
염정화나 고병갑만큼은 아니더라도 제한 몸 지킬 수준은 됐다.
고병갑은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며 몰려드는 괴물을 썰었다. 수가 많긴 해도 F~D급인지라 감당할 수 있었다.
‘저 남자 등급을 속인 건가?’
‘저, 저게 D급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영훈과 박수태는 고병갑의 검무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염정화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니. 파괴력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몸놀림만 따지자면 염정화보다 더 나았다.
염정화도 괴물을 상대하는 중간중간 고병갑을 보며 감탄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카르마는 별 볼 일 없었는데?’
호기심은 들었지만 일단 보류키로 했다. 앞서 처리해야 할 적이 산더미였다.
최민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고군분투하며 몬스터와 싸웠다. 얼마 뒤엔 모든 몬스터를 잡아냈다.
물론 염정화와 고병갑의 지분이 90%가 넘었다.
“크흑! 지미럴!”
박수태가 피칠갑한 팔을 얼싸쥐며 신음했다. 조영훈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염정화는 배낭에서 포션을 꺼내 두 사람을 치료해주었다.
반대로 최민영의 몸은 깨끗했다. 잔뜩 웅크린 채 뒤에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저 개자식이!’
고병갑은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뒤질 거면 너 혼자 혀 깨물고 뒤질 것이지! 감히 다른 사람을 사지로 내몰아?”
“흑! 흐으윽!”
최민영은 눈물만 줄줄 짜냈다.
염정화가 얼른 달려와 만류했다.
“병갑 씨. 참으세요. 이 사람. 이미 패닉에 빠졌어요.”
“젠장!”
고병갑은 신경질적으로 최민영의 멱살을 놓았다. 저딴 겁쟁이한테도 헌터 자격증을 내주다니. 하여간 기막힌 나라다.
“병갑 씨도 어서 치료를······.”
“전 됐습니다.”
고병갑의 몸은 깨끗했다. 운기조식을 통해 진작 회복한 덕분이었다.
그의 몸을 살피던 염정화의 눈이 한층 커졌다.
‘그 많은 몬스터를 상대하고 상처 하나 없다고? 역시 하위 각성자가 아닌 건가?’
고병갑은 신경을 집중한 채 주위를 둘렀다. 당장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격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졌다.
몬스터들이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여기 가만히 있다간 또 몬스터가 쏟아져 나올 거야. 이미 이 미궁 안의 모든 몬스터가 움직이고 있을 테고.’
고병갑은 칼에 묻은 피를 떨치며 말했다.
“자빠져있을 시간 없습니다. 다들 일어서세요.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잡으러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