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빌드를 올리다!
54.
고병갑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앞에 선 다섯 고블린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고병갑 쪽을 겨누었던 무기가 슬그머니 내려갔다.
「로··· 로드?」
홉 고블린 한 마리가 간신히 입을 뗐다.
고병갑은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반갑다. 로드는 처음이지?」
「어, 어떻게?」
「글쎄. 어떻게 했을까?」
다섯 홉 고블린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치만 살폈다.
「너희 이리 와봐. 아니다. 내가 갈게.」
그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고블린들은 두려움 때문인지 경외심 때문인지 살짝 뒷걸음질 쳤다. 처음 마주치면 대개 저랬다.
고병갑은 한 고블린에게 어깨동무하며 친숙하게 물었다.
「이곳의 보스는 누구냐?」
「보, 보스?」
「너희를 이끄는 대장이 누구냐는 말이야. 고블린이야? 아니면 다른 괴물이야?」
「고, 고블린. 입니다.」
「하아. 오늘 로또를 샀어야 했나.」
고블린은 그저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
「자, 가자. 너희 대장한테 안내해.」
「우으······.」
망설임이 느껴졌다. 이럴 때는 특효약이 있다.
「너희 아스빌람에 가고 싶지 않냐?」
「아, 아스빌람!」
「가고. 싶습니다!」
「내가 보내줄 테니까 얼른 안내나 해.」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의 태도가 종이 뒤집듯 반전됐다. 그들은 신나서 앞장섰다.
이면 세계를 나아가는 동안 더 많은 고블린이 나타났다.
‘운이 좋았어. 순수하게 고블린 군체로 이루어진 균열을 만나다니.’
고병갑이 이끄는 고블린 무리가 점점 불어났다. 거의 다 홉 고블린이었다. 이면 세계 깊숙이부터는 자이언트 고블린과 새 얼굴도 등장했다.
‘비스트 고블린?’
비스트 고블린. D급에 등재된 몬스터다.
기본적인 생김새는 홉 고블린과 흡사하나, 체모가 많고 이목구비가 늑대를 닮았다. 놈들은 변이를 할 수 있는데, 변이할 시 이름처럼 짐승 형상이 된다.
‘괜찮네. 여러 종류의 고블린이 있으면 그만큼 활용도도 늘어나겠지.’
「아직 멀었어?」
「거의 다. 왔습니다.」
밭을 빠져나와 민가 인근까지 내려왔을 무렵. 드디어 기대하고 고대하던 보스가 나타났다.
갖가지 장신구로 치장한 주술사 고블린.
그렇다. 고블린 샤먼이었다.
녀석은 자이언트 고블린으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이끌고 고병갑 앞에 등장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한 듯했다.
고병갑을 마주한 이후엔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이··· 이게 당최 무슨······.」
「보아하니 네가 이곳의 우두머리구나. 그래. 이름이 뭐냐?」
「······도르마입니다.」
「반갑다, 도르마야. 나는 고블린 로드 고병갑이다.」
고병갑이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그러자 도르마가 이마를 턱 짚었다.
「허······. 맙소사. 진짜 고블린 로드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음?」
도르마는 다른 고블린과 반응이 달랐다. 기쁨보다는 혼란이 커 보였다.
고병갑은 의아함을 느꼈다. 당장 절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연히 문제가 있지요!」
「뭐라고?」
확실히 이제까지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도르마는 뜸 들이다가 이어 말했다.
「그대는 우리와 같은 종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병갑은 어깨를 으쓱였다.
「보시다시피 그렇지.」
「그런데 어찌 된 도리로 로드의 정수를 지니고 있는 겁니까?」
「거기엔 나름의 사정이 있어. 아니, 그것보다 종이 다른 게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시발 그러니까······! 아. 욕한 건 미안하고. 아무튼 설명해달란 말이야.」
「아이고. 아이고.」
도르마가 풀썩 주저앉았다.
마치 나라 잃은 독립투사 같았다. 그가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종의 사활이 다른 종족의 손에 달렸는데 웃으며 좋아하라는 말입니까?」
「······.」
고병갑은 도르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쉽다. 인류 유일의 지도자가 고블린이라고 생각하면 답 나오지 않는가?
도르마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무시 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병갑은 자신이 여느 고블린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얀마! 내가 고블린이 아닌 게 뭐 어때서? 일만 잘하면 됐지. 인간이고 고블린이고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왜 없겠습니까······. 상관이······.」
「야!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 죽상으로 우는 소리만 늘어놓지 말고!」
고병갑이 잔뜩 성이 나서 고함쳤다. 그는 저렇게 앉아서 칭얼대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곁에 있던 고블린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고블린 샤먼, 도르마는 한참 땅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미천한 몸이 로드께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대는 우리 종족에 애정이 있으십니까?」
「······뭐?」
「우리 고블린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으십니까?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실 수 있으십니까?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까?」
「야야 잠깐······.」
「만약 그대의 종족과 우리 고블린이 투쟁하게 되면 망설임 없이 이쪽 편을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고병갑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빈말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영락없는 쓰레기 짓이니까.
고병갑이 즉답하지 못하자 도르마가 애달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십시오. 그게 그대와 우리의 차이······.」
「조용!」
고병갑은 버럭 소리쳤다.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이면 세계가 통째로 울리는 듯했다.
그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장 불을 붙이고 필터를 깊게 빨아들였다.
스읍. 하아.
「씨팔! 뭔 사족이 그렇게 길어! 전부 들어라!」
그는 몸을 돌리며 모든 고블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랑이니 뭐니 그딴 거는 모르겠고 난 너희에게 단 두 가지만 약속해주겠다. 아스빌람의 재건! 그리고 고블린의 번영!」
고블린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그들의 버팀목이 돼줄 수 있는지,
절대 고블린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지,
인간과 고블린 사이에서 무조건 고블린의 편을 들 수 있는지.
솔직히 고병갑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
고블린의 번영과 아스빌람의 재건은 곧 자신의 이익과 직결된다.
그리고 고병갑은 그 이익을 등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고병갑은 도르마 앞에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닿을 만큼 얼굴을 들이민 후에 포효하듯 말을 쏟아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멸망한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다! 거기에 동조하는 놈만 붙어라! 날 못 믿는 것들은 여기서 배나 긁으며 시간 축내다가 뒤져버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고!」
「지··· 진심이십니까? 진심으로 아스빌람을 일으켜 세울 생각입니까?」
「새꺄! 무슨 혓바닥이 그렇게 길어? 더 이상의 질문은 용납하지 않겠다. 내게 붙을 놈들은 고개를 조아리고 충성을 맹세해!」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고성이 지난 자리에는 마법 같은 고요함만이 남았다.
그리고 1초 뒤.
「로드시여!」
「로드시여!」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이면 세계의 모든 고블린이 고개를 조아렸다.
[홉 고블린(81), 자이언트 고블린(29), 비스트 고블린(23), 고블린 샤먼(1)가 아스빌람에 귀속되었습니다.]
「식구가 된 걸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 자식들아.」
55.
「그럼 고붕아. 부탁한다.」
「옙! 걱정. 마십시오!」
고붕이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외쳤다.
「모두. 나를. 따라와!」
고붕이는 새로 들인 134마리의 고블린을 이끌고 아스빌람으로 돌아갔다.
고병갑은 빈손으로 균열을 빠져나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균열이 빠르게 닫히기 시작했다. 안쪽에 살아있는 생명이 없으면 균열은 곧장 소멸해버린다.
균열이 사라지자 포도밭 주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주 환희에 차 있었다.
"오마나 세상에! 들어간 지 30분도 안 돼서 벌써 끝내버린 것이유?"
고병갑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슬그머니 숨겼다.
"예. 끝났으니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이고 총각 고마워유! 아이고!"
포도밭 아주머니는 고병갑의 팔에 엉겨서 폴짝폴짝 뛰었다. 고병갑은 잠시 목석처럼 서 있어야 했다.
"참말로 은인이어유! 잠깐만 기다려 보셔유!"
중년 여인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차를 끌고 나타났다. 트럭 화물칸에는 포도즙이 3상자나 실려 있었다.
"우리가 가진 게 없어서 줄 건 마땅찮고 이거라도 가져가서 먹어유."
"예. 잘 먹겠습니다."
"살펴 가셔유! 고마워유!"
고병갑은 차를 타고 포도밭을 나섰다.
시목리 마을을 빠져나오는 내내 고병갑은 담배를 피웠다. 요새 너무 많이 피우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도통 입에서 뗄 수가 없었다.
-그대는 우리 종족에 애정이 있으십니까?
도르마가 한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마치 여름철 밤의 모기처럼.
“염병하겠네. 하다 하다 이젠 사랑까지 나오냐.”
마냥 생뚱맞은 물음은 아니었다.
개 한 마리를 키워도 사랑으로 보살펴야 하는 마당이다. 하물며 수백, 수천, 수만을 이끌어야 하는 ‘로드’에겐 사랑이 필수 덕목일지도 모른다.
고병갑은 자신이 고블린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단순히 그네들의 생김새가 추하고, 종이 다르다는 까닭이 아니었다.
현재 그는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긴커녕 엄마 걱정, 돈 걱정만 하더라도 감정선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테레사 수녀님이 들으면 환장할 말이지만, 사랑도 결국 부유한 자들의 전유물이다. 적어도 고병갑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원하게 칼질하고 싶어지는 날이네.”
출가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기분은 싱숭생숭했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며 몬스터를 썰고 싶어졌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음?”
그건 재난 알림 문자가 왔을 때 신호였다. 고병갑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문자를 확인했다.
[긴급재난문자]
-대전시 동구 영전동, 영전대한아파트 건널목 상가에서 균열 발생. 영전동 주민 접근 자제 밑 2차 피해 주의 요망.
어느새 대전시 관할구역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고병갑은 서둘러 헌터넷에 접속했다. 깨끗한 지도의 한 부분에 옥에 티처럼 빨간 점이 찍혀 있었다.
정말로 아파트 단지 바로 건널목에 균열이 발생해있었다. 다행히도 랭크는 고작 D급이었다.
‘대전이면 프로스 길드가 꽉 잡고 있었던가.’
각 광역시. 넓게 잡으면 각 도를 주름잡는 대형 길드가 하나씩은 있다.
서울의 경우 일명 7대 명문이라 불리는 초대형 길드가 지역구를 나누어서 관리한다.
펠릭스, 이니치움, 샤크라, 솜니옴 등등······.
아무튼, 그런 길드들이 도심에 발생하는 균열을 24시간 감시하고 관리한다.
‘어떻게 꼽사리 한 번 껴볼까?’
잘만 하면 발만 담그고 돈 백만 원 벌 수도 있다. 마침 몬스터를 썰어 넘기고 싶기도 했고.
고병갑은 서둘러 핸들을 꺾었다.
균열의 발생 지점까지는 금방이었다.
도착하니 이미 통제선이 처져 있고 협회 관계자들이 잔뜩이었다.
더불어 균열 앞에는 헌터로 보이는 인물이 넷가량 서 있었다.
고병갑은 장비를 챙긴 뒤 그리로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협회 직원이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헌터입니다. 긴급 토벌에 참여하고 싶어 왔습니다.”
“헌터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고병갑은 즉시 헌터증을 건넸다.
협회 직원, 김태용은 헌터증을 잠시 들여보다가 말했다.
“D급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흠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김태용은 뒤쪽에서 업무를 보던 상관에게 가서 소곤거렸다.
“박과장님 토벌 참여하겠다고 새로 인원이 왔는데 어떡합니까? 받습니까?”
“뭘 그딴 걸 물어? 받아.”
“저, 그게······”
“또 뭐? 뭐가 문젠데?”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D급이라서요.”
“그게 왜?”
“저기 좀 보세요.”
김태용이 고병갑을 가리켰다.
“칼 한 자루 달랑 들고 왔어요.”
“에라 썅. 피빨이 새끼였어?”
박과장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피빨이, 혹은 모기.
긴급 토벌에서 몬스터 사냥은 남에게 맡기고 돈만 받아 가는 얌체를 일컫는 말이었다.
박과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던지듯 말했다.
“그냥 대충 받아. 어차피 우리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거 아니잖아.”
“아,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런 새끼들 피빨이짓 하다가 팔다리 병신 돼봐야 해. 그래야 정신 차리지. 쯧!”
김태용은 다시 고병갑에게 돌아온 뒤 매뉴얼대로 일을 처리했다.
고병갑은 문서에 서명을 마치고 균열로 다가갔다.
이미 4명의 헌터가 투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옆에는 매니저도 있었다.
보아하니 전부 길드에 소속된 헌터인 듯했다.
그중 셋은 총기를 주무장으로 삼았고, 다른 한 명은 기다란 환도를 장비했다.
그들은 고병갑을 흘긋 볼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상 없습니다.”
“저도 이상 없어요.”
“이하동문.”
헌터들이 줄줄이 말했다. 매니저로 보이는 여인은 뭔가를 기록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꼴랑 D짜린데 몸조심은 무슨.”
헌터들이 균열로 들어섰다.
고병갑은 얼떨결에 따라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나도 가볼까.’
그가 균열에 다리를 집어넣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병갑은 범상치 않은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싱크홀에 몸을 빠뜨리는 기분이었다.
‘균열이 몸을 빨아들이고 있어!’
고병갑은 위험을 직감하고 얼른 몸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마치 개미지옥처럼, 한 번 발을 담그면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했다.
좆됐다.
지금 심경을 대변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그는 균열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기 전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씨발! 이거 던······!”
그의 외침은 거기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