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23화 (23/151)

023. 빌드를 올리다!

52.

「자, 퍼뜩퍼뜩 옮기자.」

「예!」

바닥에 널브러진 수십 마리의 가브리.

고블린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가브리의 시체를 운반했다.

‘사나흘은 식량 걱정 없겠군.’

잠시 짬이 나자 고병갑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붙을 붙인 순간, 투르카가 말했다.

「로드시여. 놈들이. 더. 몰려옵니다.」

저 멀리 가브리 20~30개체가 포착됐다. 정황상 저 안에 보스 몬스터도 섞여 있을 터다.

「염병! 하필 담배 피울 때 몰려오냐.」

「로드시여.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됐다. 내가 맡을 거야. 키리얀, 투르카. 너희는 여기서 애들 보호해줘. 일하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고병갑이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뽑았다.

연기를 두세 차례 뿜어내던 그가 별안간 튀어 나갔다.

세상이 선이 되어 주변시로 스쳐 지나갔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고병갑은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가브리 떼 중심에 여느 가브리보다 몸집이 1.5배 이상 큰 녀석이 있었다. 이면 세계의 보스 몬스터 혼 가브리다.

“히이이이잉!”

선두에 있던 가브리가 훌쩍 뛰어올라 머리를 덮쳤다.

‘한 방에 하나!’

고병갑은 위의 문구를 가슴에 새기며 돌진했다. 높여 든 검이 가브리의 뱃가죽을 훑고 지나갔다. 내장과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카핡!”

‘하나.’

“히이이잉!”

좌측으로 네 갈래 아가리가 쇄도했다. 이빨이 닿기 전 검을 휘두른다. 가브리의 목이 통째로 썰려 나갔다.

‘둘.’

눈동자가 상하좌우 신속히 움직였다. 머리는 그것보다 더욱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찌르고, 회전하며 베고, 한 바퀴 굴러서 사선으로 그어라.

‘찌르고 회전하며 베고 한 바퀴 구른 다음에 사선으로 벤다!’

고병갑은 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그의 몸이 절도 있게 움직이며 칼날을 뿌렸다. 칼날 비에 맞은 가브리는 피로 흠뻑 젖어 쓰러졌다.

“히이이이잉!”

“흡!”

혼 가브리가 나섰다. 녀석은 뼈 투구로 무장한 대가리로 고병갑을 들이받았다.

고병갑은 재빨리 방어했으나 몸이 조금 밀려났다. 역시 준중형 D급 괴수의 완력이란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넌 좀 기다려라!”

아직은 보스 몬스터를 처리할 때가 아니었다. 고병갑은 재빨리 칼을 휘둘러 혼 가브리의 발목에 깊은 자상을 내놓았다.

혼 가브리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목숨은 붙어 있었다.

‘열하나! 열둘! 열셋!’

그가 쉼 없이 몸을 움직였다.

목, 대가리, 몸통, 다시 목 그다음엔 뒷다리. 그가 겨냥한 표적은 예외 없이 잘려 나갔다.

“히이이잉!”

“크악!”

스물한 마리째 베어 넘겼을 때 등을 내주었다. 가브리가 뒷다리로 때려버린 것이다.

고병갑은 거의 차에 치인 양 날아갔다. 몇 바퀴 구른 뒤 서둘러 일어섰으나, 오만상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젠장. 무슨 대포에 맞은 받은 기분이네.’

등허리가 욱신거렸다. 그나마 육체가 강해졌으니 버틸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각혈하고 난리가 났으리라.

「몇 마리 간다! 처리해!」

「옙! 걱정 마십시오!」

가브리 몇 마리가 고블린들 쪽으로 달려갔다. 고병갑이 신호를 주자 투르카와 키리얀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곳에 남아있는 가브리는 총 일곱.

고병갑은 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적을 노려보는 눈빛이 매섭다.

“히이이이잉!!!”

가브리들은 지독했다. 아군이 죽어도 동요하지 않고 투지를 불사르지 않는가.

그러나 지독하기로 따지면 고병갑도 밀리지 않았다.

“흐아아아압!”

대관절 내지르는 참격에 가브리 둘의 모가지가 날아갔다. 멈추지 않고 칼을 찌르고 올려 긋고 내리찍는다. 그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앞으로 셋.

앞으로 둘.

앞으로 하나!

“카핡!”

들이닥치는 아가리를 팔로 받아낸 뒤 목젖을 쑤셨다. 가브리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고병갑을 더럽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털어 육중한 고깃덩이를 떨쳐냈다.

다른 한편. 투르카와 키리얀도 깔끔하게 몬스터를 처리한 상태였다. 이제 숨이 붙어 있는 것은 발목이 잘린 채 엎어진 혼 가브리뿐이다.

“후우······. 쉽지 않네.”

고병갑은 널브러진 가브리 시체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운기조식하며 뻐근한 손목을 풀었다.

‘이래선 안 돼. 고작 E급 몬스터 서른 마리에 쩔쩔매서는······.’

며칠 전 함께 했던 S등급 헌터 4인을 떠올렸다. B급 몬스터 오륙십 마리를 개미 죽이듯 썰어버린 인간들 말이다.

그 압도적인 무력을 상기시키며 정신을 재각성했다. 느릴지언정 발전을 멈춰선 안 된다.

[고대 검술 교본-하급 성취율 : 18.71%]

[고대 육체 단련술 교본-하급 성취율 : 32.25%]

[고대 운기조식 교본-하급 성취율 : 9.2%]

‘아직 갈 길이 멀다. 더 많은 적을 썰고, 더 많이 얻어맞아야 해.’

「로드시여! 이쪽 작업이 끝났습니다.」

「어, 그래.」

고병갑은 키리얀의 말을 듣자마자 혼 가브리의 숨을 끊었다. 곧 이면 세계의 붕괴가 시작됐다.

「자자! 이놈들도 어서 옮기고 돌아가자!」

53.

아스빌람의 식구가 190명이 되었다.

노멀 고블린 150명.

홉 고블린 38명.

자이언트 고블린 1명.

알비노 고블린 1명.

바위산은 언제 그랬던 적이 있냐는 듯이 북적였다.

고블린들은 낯을 가리지도 않았고, 텃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갓 들어온 고블린도 원래부터 있던 가족인 양 살갑게 반겨주었다.

친화력과 적응력. 그것은 고블린이란 종족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건 인간들의 사회에선 보기 드문 것이다.

‘홉 고블린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는데.’

고병갑은 세면도구를 챙겨 강가로 향하며 생각했다. 노멀 고블린도 시키는 대로 일을 잘하긴 한다만, 아무래도 홉 고블린 쪽 능률이 더 우수했다. 일단 덩치부터 차이 나지 않는가?

뭐, 힘 좋은 것으로만 따지면 자이언트 고블린이 최고긴 하다.

‘자이언트 고블린 150쯤 되면 식량 감당하기 벅차겠네.’

실없는 생각을 하노라니 강가에 도착했다.

고병갑은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강물에 몸을 담갔다.

“아으! 차다!”

물은 아주 깨끗했다. 따지자면 1급수 중에서도 상 1급수다.

낮에 가브리의 피를 흠씬 뒤집어쓴 터라 몸에 피 내음이 잔뜩 배여 있었다. 그는 거의 강박증 수준으로 비누칠을 했다.

“······괜히 신경 쓰이네.”

고병갑은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안개 지대 방향이었다. 지금은 밤이 늦어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누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이후 강에만 오면 그랬다.

참지 못한 그가 가지고 온 랜턴을 켜 안개 쪽을 비추었다. 그러나 전에 봤던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그건 도대체 뭐야?’

아스빌람에 처음 천막을 세웠던 날. 고병갑은 분명히 보았다. 안개 너머에서 이쪽을 훔쳐보던 ‘무언가’를.

문제는 그 무언가가 뭔지 알 도리가 없다는 부분이었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사람 같았는데······. 고블린일까? 아니면 제3의 무엇일까?

“골치 아프네.”

안개 너머에 정말로 무언가 있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긴다.

안개 너머 ‘그놈’들이 호의적인지 위협적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호의적이라면 당연히 좋겠지만, 만에하나 위협적이라면 전쟁을 불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고블린 샤먼, 오드딕이 그리워졌다.

고병갑은 고블린 샤먼의 지식이 필요했다.

제 손으로 죽여놓고 후회해봤자 이미 떠난 버스지만······.

“에휴, 모르겠다. 탐험자의 깃발인지 뭔지 살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뭘.”

고병갑은 잡념을 떨쳐낸 뒤 목욕이나 마저 했다.

목욕이 끝나고 개인 천막으로 돌아온 고병갑.

그가 소파 2개를 이어붙여 만든 침대에 몸을 누였다. 동네 이불 가게에서 산 싸구려 담요까지 덮으니 꽤 훌륭했다.

“내일은 C랭크 균열에 한 번 가보자.”

아스빌람에서 보내는 세 번째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튿날이 밝았다.

고병갑은 눈을 뜨자마자 농지를 방문했다. 고블린들과 함께 감자와 고구마를 심은 게 엊그제였다.

물론 아직 싹이 나지는 않았다.

“부디 무럭무럭 자라라. 그래야 감자전도 해 먹고 고구마 맛탕도 해 먹지.”

고병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을 주었다.

그 뒤엔 동굴을 들렸다. 눈에 띄게 넓어진 동굴에선 고블린들이 부지런히 곡괭이질하고 있었다.

「앗!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입구 쪽에서 채굴하던 고붕이가 고병갑의 존재를 알아챘다. 하여간 기척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느끼는 녀석이다.

「아냐아냐 나오지 마.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

「아! 알겠습니다!」

「그래. 일하는데 특이사항은 없고?」

「예!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라. 가끔 나와서 맑은 공기도 마시고.」

「옙!」

「고생해라.」

그가 개인 천막으로 걸음을 돌렸다.

가던 길에 한 무리의 고블린이 보였다. 그들은 어제 들여온 가브리 시체를 손질하고 있었다.

‘오늘 일 마치면 연금술 연습도 좀 해야겠어.’

고병갑은 쌓여 있는 가브리 가죽을 보며 생각했다.

-쩍! 쩍! 쩍! 쩍!

숙영지 인근에선 도끼질이 한창이었다.

숙영지와 강 사이로 길을 내려 공사 중이기 때문이다.

양손에 도끼를 쥐고 나무를 패는 투르카. 고병갑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노는 인력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 아주 좋아.’

현재 아스빌람은 잘 짜인 톱니바퀴 같았다. 헛도는 바퀴 없이 제대로 맞물려 돌아간다.

‘나도 슬슬 준비해볼까?’

고블린들만 고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병갑은 서둘러 일과를 준비했다. 오늘은 어제 계획한 대로 C랭크 균열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가 아스빌람을 빠져나왔다.

산기슭에 주차해놓은 차는 어제 그대로였다. 이곳이 어디냐면 청주에서 대전으로 넘어가는 국도다.

“자, 또 어디에 거지 같은 균열이 발생했을까.”

그가 진중한 자세로 균열 지도를 둘렀다.

근처에 균열이 몇 개 있긴 했다. 다만, 아쉽게도 미공략 11~12일째를 넘기는 것들이었다.

벌집은 건들지 않는 게 상책이다.

고병갑은 비교적 신규로 생성된 균열 위주로 다시 훑었다.

“오. 이거 괜찮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땅한 것을 발견했다. 발생 3일짜리 C랭크 균열이었다.

발생 지점은 시목리라는 마을이었다. 대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해있다.

고병갑은 서둘러 차를 몰았다.

고작 15분 거리였다. 고병갑은 금세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목리는 여느 시골 마을이 그러하듯 넓은 논밭이 주를 이었다. 균열이 발생한 곳은 민가와 떨어진 외딴 포도밭이었다.

고병갑은 밭 인근에 차를 세우고 장비를 점검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왔다.

밀짚모자를 쓴 50대 중년 여성이었다.

“아이고 총각! 아이고 총각! 혹시 그 뭐시냐? 허, 헌터 맞슈?”

중년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얼굴은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돼있었다.

“아, 예. 그렇습니다. 왜 그러시죠?”

“아이고 총각. 제발 저것 좀 어떻게 해주셔유. 참말로 속상해 죽겠다니까!”

중년 여인은 거의 울려고 했다.

“곧 있음 수확철인디 저 지랄 같은 것땜시 나무가 다 병들었단 말이어유. 참말로 올해 농사는 저것땜시 다 망했다니까!”

“아······ 예. 그나저나 아주머니 이 근처로 안 오시는 게 좋습니다. 균열의 역장에 노출되면······.”

“아니어유! 내가 여기만 오면 시름시름 하지만서도! 저 지랄 맞은 게 내 밭에 떡 자리 잡고 있는 거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니까유!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이리론 안 오시는 게 좋습니다.”

“아이고 총각.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제발 저 지랄 맞은 것 좀 어떻게 해주셔유. 아! 잠깐만 있어 보셔유!”

중년 여인이 부리나케 뛰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는 뭔가를 바리바리 들고 있었다.

빵, 음료수. 뭐 그런 것들이었다.

“이게 우리 밭 포도로 짠 즙인디 이것 드시고 제발 저 지랄 맞은 것 좀 어떻게 해주셔유. 여기 빵도 드시고.”

그녀가 요깃거리를 잔뜩 내밀었다. 밭일하다 새참으로 먹으려고 쟁여둔 것이리라.

고병갑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고병갑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아······.’

그는 토벌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균열에 고블린이 있나 둘러보러 온 것뿐이다.

한데 이 아주머니는 고병갑에게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만약 고병갑이 그냥 돌아가 버리면 그녀가 얼마나 속상해할까?

물론 고병갑이 중년 여인의 근심 걱정을 덜어줄 의무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람 사이 관계라는 게 언제나 논리와 이성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제발 부탁혀유. 제발!”

“······일단 자택으로 돌아가세요.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합니다.”

고병갑은 그렇게 말해두고 균열 지척까지 다가갔다.

포도밭 한가운데 발생한 균열. 나무는 이미 시들시들해졌다. 아직 덜 여문 포도 열매들 역시 바싹 쪼그라든 상태였다.

고병갑은 중년 여인의 심정을 대충 알 것 같았다.

“후······ 씨발.”

고병갑은 균열 앞에 서서 담배를 연신 태웠다. 흘끔 돌아보니 중년 여인은 먼발치에 여전히 서 있었다.

‘아니, 저 아줌마 왜 안 가고 서 있는 거야?’

뒤통수가 따갑다 못해 아플 지경이다.

‘C랭크 균열이라······. 고블린들이랑 함께라면 가능할까?’

고병갑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았다.

아마 가능은 할 것이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마 고블린 십수 마리는 죽겠지.

고병갑은 냉혈한은 아니었지만, 정의감으로 무장한 영웅도 아니었다.

두 개비째 담배를 꼬나문 그가 결심을 굳혔다.

‘됐어. 신경 쓰지 마. 아줌마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저 아줌마가 나 먹여 살릴 것도 아니고.’

고병갑이 찝찝함을 뒤로한 채 균열로 몸을 던졌다.

세상이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우중충하고 무거운 이면 세계가 그를 반겼다.

고병갑이 바짝 긴장한 상태로 이면 세계를 둘렀다. 그의 눈이 상하좌우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1초 뒤.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하······ 하하······.”

고병갑은 거의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정말로 주저앉았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존나 고맙다 얘들아. 진짜 존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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