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22화 (22/151)

022. 빌드를 올리다!

50.

“어우······. 어제 몇 병이나 마신 거야······.”

목에 가뭄이 들었다. 고병갑은 1.5L짜리 생수 한 통을 모조리 비워내고 나서야 갈증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지난 밤을 회상했다. 병나발 불며 고블린들과 어깨춤 추던 게 떠올랐다. 하여간 이놈의 술이 문제다.

“아이고 두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술병으로 골골댈 수야 없다. 그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대 운기조식.’

고대 운기조식 교본에 기술된 호흡법을 실행했다. 이윽고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샘솟아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쓰린 속이 상쾌해지고 두통이 멎었다. 고병갑은 금세 최상의 컨디션이 되었다.

‘끝내주는구만.’

이렇게 좋은 기술들이 있는데 고대 왕국은 왜 멸망한 걸까?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신’의 노여움을 산 거지?

고병갑은 한 몇 초 정도 상념에 잠겼다가 몸을 일으켰다. 신경 쓰이긴 하다만 지금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준비나 하자.”

고병갑은 앞으로 사나흘 간 집을 비울 예정이었다. 어쩌면 일주일 넘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여 준비할 것들도 많았다.

세면 바구니부터 꾸렸다. 뭐, 거창한 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치약, 칫솔, 비누. 자고로 남자는 저 세 가지만 있으면 된다.

옷 가방에는 여벌의 속옷과 평상복, 작업복을 고루고루 담았다. 수건도 몇 장 챙겼다.

그 뒤엔 커다란 봉지에 컵라면과 생수, 즉석밥 등을 담았다. 족히 일주일은 먹을 양은 됐다.

“흠······. 이쯤이면 되겠지?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그때 사면 되니까.”

고병갑은 한데 모아놓은 짐들을 모조리 챙겨서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고요한 바위산에선 아침이슬 내음이 물씬 풍겼다. 풀들은 촉촉이 젖어있고 숲 너머로 잔잔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짹! 짹!

거기다 새 지저귀는 소리도······.

‘음? 새라고?’

고병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그만 새 몇 마리가 하늘을 낮게 날고 있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자니 이내 바위산 너머로 사라졌다.

새가 하늘을 나는 거야 당연한 일이긴 한데,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 나랑 고블린들 말고도 생명이 사는구나. 그러고 보면 강에 물고기도 살았잖아?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니었네. 그건 그렇고 저 암벽 너머에 뭐가 있는 건가? 나중에 한 번 올라가 봐야겠네.’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어. 고붕고붕 고붕이. 일찍 일어났네?」

「저희는. 해가. 뜨면. 일어납니다.」

「그러냐.」

고블린들은 일찍부터 작업을 준비했다. 부지런함으로 치면 10점 만점에 100점이다.

「로드시여.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로드를. 뵙습니다.」

「로드. 안녕.」

「어. 그래그래. 아침부터 고생한다.」

동굴로 향하던 고블린들이 고병갑을 보곤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오늘. 일찍. 나오셨습니다?」

「잠깐 들른 거야. 짐도 가져다 놔야 하고, 볼 일도 있어서.」

「짐. 말입니까?」

「그래. 나도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거든.」

어제 숙영지를 조성할 때 고병갑이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었다. 바로 본인 전용 천막이었다.

소파 2개를 이어붙여 침대도 만들고, 다리 한 짝 부러진 책상도 들여놨다. 참고로 책상은 관상용이었다.

「고붕아.」

「예. 로드.」

「가서 투르카랑 키리얀 좀 불러와.」

「투르카. 키리얀.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고붕이가 동굴 방면으로 향했다. 투르카도 키리얀도 모두 동굴에 있는 모양이었다.

고병갑은 고붕이에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내 전용 천막 알지? 거기 가 있을 테니까 그리로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짐을 몽땅 들고 전용 천막으로 갔다.

그의 전용 천막은 고블린들 숙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숲 한 가운데였는데 강이 바로 보였다. 조경을 고려하여 위치선정 한 거라 경치가 죽여줬다.

고병갑은 천막 안에 짐들을 풀어놓고 바깥에 놔둔 흔들의자에 몸을 앉혔다.

‘고대의 상점’

[고대의 상점]

-건설

-기술

-잡화

-기타

[보유 수정 : 5,998]

‘거의 육천 개네. 캐는 속도가 꽤 빠르잖아?’

하기야. 고블린 인력 대부분은 수정동굴에 투입된다. 두당 20개씩만 캔다고 쳐도 하루면 2,840개가 아니던가.

더구나 요 며칠은 이런저런 잡일을 한다고 수정 채굴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생산량은 더욱더 많아질 터다.

‘30명 데리고 낑낑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고병갑의 목표는 안개 지대를 뚫고 나가기 전 고블린 500마리를 채우는 것이었다.

짧은 감상에 젖어있던 그가 상점 창에 집중했다.

‘이거 사고, 저것도 사고······.’

그는 고대의 상점에서 이런저런 아이템을 사들였다.

그가 사들인 품목은 이러했다.

고대 무투술 교본-하급 1개.

고대 주술 교본-하급 1개.

고대 운기조식 교본-하급 2개.

고대 육체 단련술-하급 교본 3개.

성장의 물약 3개.

그리고 고대 검술 교본-중급 1개.

전부 합해 5,930 수정 어치였다.

[보유 수정 : 68]

‘순식간에 개털이 돼버렸네.’

6,000 수정 가까운 금액을 한탕에 써버렸으니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너무 개의치 않기로 했다. 어차피 써야 할 수정이고, 다시 모일 수정이었다.

고병갑은 사들인 품목을 발치에 놔두고, 한 권의 교본만을 집어 들었다.

고대 검술 교본-중급이이었다. 자그마치 1,500 수정이나 하는 비싼 상품이다.

‘하급 교본만 하더라도 대단했는데 중급을 습득하면 얼마나 강해질까?’

그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교본을 펼쳤다. 그의 눈앞으로 곧장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고대 검술 교본-중급’을 각인하시겠습니까?]

‘당근 빠따지.’

당연하고말고!

고병갑은 얼른 속으로 승낙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교본이 그에게 흡수되지 않은 것이다.

[현재 ‘고대 검술 교본-하급’의 성취율이 낮아 ‘고대 검술 교본-중급’의 각인에 실패하였습니다.]

[현재 ‘고대 검술 고본-하급’의 성취율 : 2.21%]

“뭐라고?”

고병갑은 육성까지 터뜨리며 탄식했다.

홀로그램의 지적은 지당했다.

하급에서 중급으로 넘어가기에 내공이 부족하다는 내용. 여기에 토 달 부분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긴 해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상황인지라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긴. 검 한 번 휘둘러 본다고 교본을 전부 익히는 건 너무 사기겠지.’

고병갑은 실망했지만, 반대로 설렘도 얻었다.

지금까지 성취가 고작 2.21%라는 것은, 앞으로 97.79%만큼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가 씁쓸히 미소를 지으며 교본을 천막 안 책상에 고이 모셔두었다.

「로드시여. 데리고. 왔습니다.」

그 사이 고붕이가 투르카와 키리얀을 데리고 왔다. 고병갑은 우선 성장의 묘약부터 하나씩 건넸다.

「자. 하나씩 잡고 원샷해.」

「로드시여?」

「마시란 말입니까?」

「어. 쭉 마셔.」

세 고블린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저희가 이걸 마셔도 되는 겁니까?」

키리얀이 대표해서 물었다. 고병갑은 팔짱을 낀 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키리얀과 투르카는 전문 전투 요원으로 나와 함께 사냥 다닐 거야.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아······.」

「고붕이는 작업반장인 데다가, 내가 이것저것 많이 시키니까 남들보다 체력이 더 필요할 거고. 그러니까 얼른 마셔.」

고블린들이 입을 뻐끔거렸다. 고병갑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뭘 멀뚱멀뚱하고 있어? 얼른 마시라니까?」

「아, 알겠습니다!」

고붕이부터 성장의 묘약을 마셨다. 키리얀과 투르카도 곧장 뒤를 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고병갑은 피식 웃었다.

「조금 힘들 거다.」

「끄으으으······!」

「으윽!」

효과는 곧바로 찾아왔다.

세 고블린이 심장을 얼싸쥐고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자고로 격동적인 변화는 고통을 동반하는 법이다.

고병갑은 그들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5분이 흐르고, 10분이 지나갈 때쯤. 세 고블린이 정상의 상태가 되었다.

「어때?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아?」

「노··· 놀랍습니다.」

「기운이! 넘칩니다!」

고블린들의 몸에 근육이 붙고 덩치가 커졌다. 자이언트 고블린인 투르카는 그 변화가 특히 두드러졌다.

‘어깨에 머리통 세 개쯤 더 얹어도 문제없겠구만’

고병갑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는 쟁여둔 교본을 각각 나누어주었다.

고붕이에게는 육체 단련술 교본만.

키리얀에겐 주술, 육체 단련술, 운기조식 교본을.

투르카에겐 무투술, 육체 단련술, 운기조식 교본을 주었다.

「자, 다들 손에 든 교본을 펼쳐 봐.」

「아, 알겠습니다.」

「눈앞에 뭐 뜨지?」

「그렇습니다.」

「어. 그거 승낙해.」

고병갑은 교본을 각인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고블린들은 시키는 대로 곧잘 따랐다.

잠시 후. 각각의 교본이 고블린들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우으······! 로드시여! 머, 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걱정마 인마. 안 죽어.」

「우윽!」

물론 힘겨워하긴 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전부 해냈다.

대략 10여 분이 지났을 때, 고블린들은 마지막 교본까지 습득 완료했다. 녹초가 되어 축 늘어지긴 했지만.

‘좋아. 아스빌람 첫 정예 병력 탄생이다.’

불과 몇십 분 전과는 풍기는 아우라부터 달랐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고병갑의 최종 목표는 모든 고블린의 정예화였다.

「너희는 오전 동안 충분히 쉬어둬. 특히 키리얀이랑 투르카는 내가 부르면 언제든 나올 수 있게 대비해두고.」

「예, 옙! 알겠습니다!」

「오냐. 그럼 이따 보자.」

「벌써. 가십니까?」

「그래. 일해야지. 놀면 뭐 하겠냐.」

고병갑은 세 고블린의 배웅을 받으며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장비를 챙겼다. 그 뒤엔 집을 빠져나와 현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한 며칠 여행 간다는 셈 치지 뭐.’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51.

-맴! 맴! 맴!

아직 7월 초입이건만 벌써 매미가 극성을 부렸다. 고병갑은 코인 세탁방에 앉아 구슬픈 구애의 노래를 감상했다.

“나도 저렇게 울기라도 해야 하려나.”

25년간 변변찮은 연애 한 번 못해본 게 통탄할 따름이었다. 생각해보면 좋은 사람은 늘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 역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는 게 문제지만.

-띠링!

건조기가 완료됐다는 신호를 뱉었다. 고병갑은 옷가지를 주섬주섬 꺼내 비닐봉지에 담고 코인 세탁소를 빠져나왔다.

그는 차에 타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핸드폰 액정이 전국 균열 현황 지도를 띄웠다.

“청주시 이목리에 D급 하나. 한 30분 걸리겠네.”

타겟을 정한 고병갑이 곧장 차를 몰았다.

‘벌써 3일째구먼.’

그가 집을 나온 지 3일이 지났다.

지난 3일간 고병갑이 한 일은 고블린 탐색이었다.

하루에 최소 서너 군데. 많게는 대여섯 개의 균열을 돌아다니며 고블린의 자취를 쫓았다. 그러다 밤이 깊으면 아무 곳이나 차를 세워놓고 아스빌람으로 가 잠을 청했다.

토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균열에 들어가 보고 고블린이 없으면 도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거나 이번 여정의 목적은 사냥이 아닌 고블린을 포획이니 말이다.

단기 목표는 아스빌람에 고블린을 300마리까지 채워 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했던가. 지난 3일간의 수확이라 해 봤자 노멀 고블린 47마리, 홉 고블린 1마리가 전부였다.

‘탐색 범위를 C랭크까지 올려 볼까. 어차피 둘러보기만 하는 거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을 텐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목표로 삼았던 균열에 도착했다.

선점자는 없는 듯했다. 고병갑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균열에 몸을 담갔다.

-꽝이요!

“지미럴. 또 가브리야?”

나오라는 고블린은 안 나오고······.

아가리가 네 갈래로 찢어진 말들이 그를 반겼다.

그냥 나갈까 싶던 차. 고병갑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애들 고기 떨어졌다고 했었나? 간만에 몸 좀 풀자.’

그가 장검을 뽑았다. 갈퀴늑대의 꼬리로 만든 칼날이 서슬퍼런 빛을 뿜었다.

「키리얀! 투르카! 나와!」

그가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소리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두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 로드!」

「고기 떨어졌다고 했지? 오늘은 저녁은 말고기다.」

「좋습니다!」

“히이이이잉!”

가브리 떼가 투지를 불사르며 달려들었다.

「먹어달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만. 투르카. 키리얀. 실력 좀 보여줘라.」

「옙!」

「우워어어어어!」

투르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쳐나갔다.

녀석은 순식간에 카브리 두 마리를 낚아챘다. 목을 잡고 바닥에 메다꽂으니 목이 꺾여 죽어버렸다.

「하앗!」

키리얀이 작살에 전류를 모았다. 곧 다섯 발의 전격 화살이 쏘아졌다.

화살 한 발당 가브리 하나의 골통이 깨졌다.

‘나도 숙련도 좀 쌓아 볼까.’

고병갑은 피우던 담배를 탁탁 털어 끄고 자세를 잡았다. 세 마리의 가브리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고병갑을 노렸다.

‘좌측 놈부터!’

고병갑이 땅을 박찼다. 거의 동시에 가브리 한 마리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바로 이어서 참격을 날리니 가운데 있던 녀석은 아예 동강 나버렸다.

“히이이잉―깕!”

마지막 가브리는 쩍 벌린 아가리에 칼날을 꽂아주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죽어서도 사지를 허우적거렸다.

‘이제 E급 짜리 몬스터는 문제도 아니네. C도 도전해볼 만하겠어.’

그는 살벌하게 미소지으며 나머지 가브리들도 모조리 도륙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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