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21화 (21/151)

021. 빌드를 올리다!

47.

“아이구. 감사합니다, 사장님.”

“예. 많이 파세요.”

감자 종자 50kg.

고구마 모종 30단.

전부 합해서 30만 원 조금 안 됐다. 작물 종자라는 게 은근히 비쌌다. 그래도 좋은 종자를 써야 나중에 다시 심었을 때 좋은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고병갑은 구매한 것을 차에 싣고 담배 한 대를 꼬나물었다. 시간이 꽤 됐건만 아직 밝았다. 여름이 오긴 오려는 모양이다.

‘내일은 고물상에 들렸다가 주문해놓은 장비 받아야겠네. 또 할 일이 뭐 있더라? 글피부터는 바빠질 테니까 전부 처리해놔야 할 텐데.’

그가 차를 몰며 농장을 빠져나왔다.

한적한 시골 마을은 조용하고 느긋했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미지근한 공기엔 약간의 거름 냄새가 배어있었다. 고병갑은 그 내음이 싫지 않았다.

차를 타고 언덕 몇 개를 지나올 즈음이었다. 고병갑은 뭔가를 발견하고 차를 멈춰 세웠다.

“이거 다 버리는 건가?”

차로 옆 자그만 공터에 폐비닐이 가득 쌓여있었다. 폐비닐뿐만이 아니다. 농가에서 나온 듯한 각종 쓰레기로 즐비했다. 족히 몇 년은 이 상태로 방치된 듯했다.

“이건 쓸 만해 보이는데······. 좀 주워가도 되겠지?”

주둥이가 부서진 물뿌리게, 손잡이가 박살 난 양동이, 찌그러진 드럼통, 둘둘 말린 폐비닐 등등. 쓸모가 있어 보이는 것은 전부 아스빌람으로 보내버렸다.

이제 슬슬 돌아가려던 차. 그의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이야······ 이건 고물상에 갖다 팔아도 꽤 받겠는데?”

그건 초대형 무쇠 가마솥이었다. 직경은 100cm도 넘고, 깊이도 50~60cm는 될 성싶었다.

손잡이가 군데군데 깨졌고 녹이 슬긴 했어도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저걸로 감자도 삶아 먹고 고구마도 삶아 먹으면 딱 좋으리라.

고병갑은 주변 눈치를 슬슬 살피다가 무쇠솥을 아스빌람으로 넘겨 보냈다.

고병갑이 싱글벙글하며 차로 돌아갔다. 남들에겐 그저 쓰레기 취급받는 물건들도 그에겐 귀중한 기반 물자였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그러나 고병갑의 일과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블린들과 함께 오늘 들여온 물자를 정리하며 내일을 준비했다. 밤이 깊었을 때가 돼서야 씻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튿날이 밝았다.

고병갑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다. 적어도 근처에 있는 고물상이나 폐가구 처리장은 모조리 가볼 생각이었다.

폐천막, 찢어진 돗자리, 때 묻은 가구. 심지어 떨어진 문짝이나 철근 같은 것도 닥치는 대로 주워 담았다.

어차피 아스빌람은 넓다. 당장 필요 없는 물자는 쌓아놓으면 그만이다.

점심으로 순대국밥 한 그릇 때리려니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 사장님. 아고라 철물인데요. 2시경에 배송이 완료될 것 같아서 연락 드렸습니다. 변동 사항 없이 말씀하신 위치로 가면 될까요?

“네네. 그리로 와주세요.”

-예. 그럼 그쯤에 뵙겠습니다.

시계를 보니 2시까지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고병갑은 국밥을 얼른 털어 넣고 자리를 나섰다.

고병갑이 농기구를 배송받기로 한 위치는 인적 드문 공터였다.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물건이 도착한 상태였다. 철물점 직원이 끙끙대며 화물차에서 농기구를 내리고 있었다.

고병갑은 얼른 가서 일을 도와주었다. 그가 거드니 일이 금방 끝났다.

‘많긴 많네.’

자루에 담긴 농기구들. 바닥에 늘어놓고 보니 부피가 꽤 됐다.

당연하지. 자그마치 200자루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살펴 가세요.”

철물점 직원을 보낸 후. 고병갑은 사위를 훑었다.

‘보는 사람 없겠지?’

주변을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일부러 인적 드문 곳으로 배송 요청한 보람이 있었다.

그가 농기구를 모조리 아스빌람에 보내버렸다.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몇 바퀴 더 돌자.’

고병갑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고물상, 폐가구 처리장, 동네 분리수거장, 그냥 길가.

그의 파밍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온몸에 쓰레기 냄새가 밸 때쯤 해가 저물었다. 고병갑은 그제야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곧바로 아스빌람으로 넘어가 물자를 정리했다. 씻고 이부자리에 누웠을 땐 자정 무렵이었다.

“아이고. 어째 균열 도는 것보다 더 힘드냐.”

몸은 노곤했지만 보람찼다. 휑하던 아스빌람에 이것저것 쌓여갈 때마다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내일은 종일 아스빌람에 있어야겠네.”

고병갑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잠에 빠져들었다.

48.

「어, 그래. 쭉 당겨. 당기면서 계속 가.」

「아, 알았다!」

노멀 고블린이 둘둘 말린 비닐을 펴며 뒤로 걸었다. 팽팽하게 펴진 비닐은 두둑이 쌓은 흙더미 위로 살포시 들어앉았다.

다른 고블린들이 따라붙으며 비닐 가장자리를 흙으로 덮었다. 비닐이 오그라들거나 날아가지 않게 하는 조치다.

한쪽에선 고블린들이 두런두런 모여 앉아 그제 들여온 씨감자를 다듬고 있었다.

「다. 왔다!」

「잘했어. 좀 쉬었다가 하자.」

고병갑은 허리를 펴며 이제껏 해놓은 작업물을 보았다.

‘이제 열 고랑쯤 했나?’

고병갑은 노멀 고블린 15마리를 선출해 아침부터 농지를 조성했다.

가로 30m 세로 16m 규격으로 2개 구성했는데, 평수로 따지면 300평에 조금 못 미쳤다.

그걸 반으로 나누어 각각 감자와 고구마를 심을 예정이다.

혼자서 하면 한나절 걸릴 일이지만, 고블린들과 함께하니 작업 속도가 빨랐다.

「쉬고 있어라. 잠깐 다른 데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응.」

「얀마. 그럴 때는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하라니까.」

「응?」

「······아니다.」

고병갑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쩍! 쩍! 쩍!

숲에선 도끼질이 한창이었다.

넓은 숙영지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좀 베어낼 필요가 있었다.

-쩍! 쩍!

「넘어. 간다!」

자이언트 고블린, 투르카가 목청 크게 외쳤다. 지척에 있던 홉 고블린들이 부리나케 피신했다.

‘역시 투르카. 도끼질 하나는 끝내주네.’

자이언트 고블린은 힘이 장사다. 도끼질 몇 번이면 나무 한 그루를 뚝딱 넘겼다.

곧 홉 고블린들이 몰려들어 나무를 옮겼다.

「투르카. 그만하면 된 것 같다. 넌 도끼 놓고 좀 쉬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로드.」

「그래그래. 보자······ 어이, 작은 친구.」

고병갑이 돌멩이를 줍고 있던 노멀 고블린을 불렀다.

지목당한 녀석은 눈을 말똥말똥 뜨며 고병갑을 올려보았다.

「어. 로드. 왜?」

「동굴 가서 고블린들 싹 불러와. 전부 다.」

「전부 다?」

「어. 빨리 불러와 현기증 나니까. 달려! 달려! 빨리!」

「아, 알았다!」

「더 빨리 뛰어!」

「알았다!!!」

노멀 고블린이 후다닥 뛰어갔다. 고병갑은 노멀 고블린을 놀리는 게 재밌었다.

곧 동굴에서 수정을 캐던 고블린들이 모여들었다. 밭에서 일하는 열댓 명을 빼면 전부 모인 것이다.

「동굴 일은 이만 마무리 해. 나랑 같이 숙영지 조성하자.」

「알겠습니다.」

「일단 어제 정리한 물자부터 가져와서 전부 펼쳐 놔.」

「옙!」

‘흠. 여기도 봐줘야 하고 농지 쪽도 봐줘야 하는데.’

고병갑이 턱을 매만지며 짧게 고민했다. 할 일은 많은데 감독이 한 명인 게 아쉬웠다.

「고붕아. 그리고 키리얀.」

「부르셨습니까!」

「예, 로드!」

‘쟤들은 똘똘하니까 일을 한 번 맡겨 볼까?’

「너희 둘은 나 따라와.」

고병갑은 고붕이와 키리얀을 데리고 농지로 돌아갔다.

고병갑은 두 고블린을 세워 놓고 가꿔놓은 농지를 가리켰다.

「너희한테 맡길 일이 있어. 밭 가꿔놓은 거 보이지?」

「예. 보입니다.」

「애들 데리고 나머지 부분도 똑같이 만들어놔. 하는 방법은 쟤들이 알고 있을 거야.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없습니다, 로드.」

고붕이와 키리얀은 의욕이 넘쳤다.

「그래. 대충하면 안 되는 일이니까 하다 모르겠으면 바로 찾아오고.」

「옙!」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

고붕이와 키리얀이 밭에 투입됐다. 숲으로 떠나기 전 슬쩍 보니 노멀 고블린들과 함께 잘해나가는 것 같았다.

다시 숲으로 돌아온 고병갑.

고블린들은 시킨 대로 물자를 하나하나 늘어놓고 있었다. 고병갑은 그것들을 쓱 훑으며 대강의 조감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숙영지의 기본은 오와 열이지.’

구상은 곧 끝났다.

고병갑은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손뼉 치며 주의를 끌었다.

「자자! 일단 제일 큰 천막부터 중간에 펴자!」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은 고병갑의 손과 발이 되어 일을 척척 해나갔다. 마음이 잘 맞으니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49.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오늘 하루 고생한 결과물은 꽤 성대했다. 고병갑과 고블린들은 완성된 숙영지를 보며 흐뭇한 감상에 젖었다.

‘흠잡을 데가 없구만.’

가져온 물자 중엔 단 하나도 허투루 사용된 것이 없었다. 모두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중앙에 대형 천막이 있고, 그 주위로 작은 천막과 텐트가 열을 맞춰 들어섰다. 내부는 간소하지만 아늑했다. 돗자리와 비닐을 잘 맞춰 깔아놓은 덕에 흙을 묻히고 잘 일은 없을 터다.

천막 주위로 배수로를 파서 혹시 있을지 모를 폭우를 대비했다.

숙영치 인근에는 고블린들이 모여 식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벽돌을 쌓아 만든 화로는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그 위로 가마솥까지 얹으니 금상첨화다.

철근과 판자, 비닐을 조합해 창고도 만들었다. 당장 사용하지 않는 물자를 넣어두는 용도다.

창고가 있으니 주변 경관이 한층 깔끔해졌다.

「이건 내가 봐도 존나 잘 만들었다. 그렇지 않냐?」

「맞습니다!」

「너무. 멋집니다!」

「역시! 로드십니다!」

「오냐. 너희도 작업한다고 고생 많았다.」

300~400명을 수용해도 넉넉할 만큼 넓었다. 당분간은 인원수로 골머리 앓을 일은 없으리라.

숙영지 조성이 끝날 무렵. 농지 쪽 일도 마무리되었다.

결과물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고붕이와 키리얀이 아주 꼼꼼하게 일을 잘해놓았다. 역시 에이스들 답다.

‘기분 좋다.’

기분이 좋았다. 김하나에게 일당을 2배로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이런 날엔 술과 고기가 빠질 수 없다.

「너희 고기 얼마나 남았냐?」

「조금. 남았습니다.」

「그러냐? ······그럼 일단 씻고 밥 먹지 말고 있어 봐.」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아스빌람을 빠져나왔다.

어둠이 내리 앉은 적막한 자취방이 그를 맞이했다. 텅 빈 자취방을 보니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이 좁은 자취방이 유일한 안식처였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았다.

고병갑은 서둘러 집 근처 시장으로 갔다.

오후 9시가 다 돼서인지 가게들이 하나둘 장사를 접고 있었다.

고병갑은 평소 즐겨 가던 정육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정육점 사장이 고기를 손질하다 말고 고병갑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그 삼겹살 한 근 하고요······.”

고기를 둘러보던 고병갑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도마 옆에 있는 커다란 통이었다.

거기에는 손질하다 떨어져 나간 부산물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비곗덩어리가 대부분이고 드문드문 살코기나 내장도 있었다.

“사장님. 그건 버리시는 거예요?”

고병갑이 통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요? 뭐, 그렇지요.”

“그럼 저 주시면 안 돼요?”

“예?”

정육점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만류하듯이 말했다.

“에이, 이거 못 먹어요. 짐승 먹이로 주면 모를까.”

“괜찮은데 저 주시면 안 돼요? 부탁드릴게요.”

“······.”

거, 참 희한한 양반이네. 정육점 주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쩝······. 뭐, 그럼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고병갑은 삼겹살 한 근과 부산물이 가득 든 봉지를 전해 받았다. 그 뒤 마트에 들러 소주도 몇 병 샀다.

들뜬 마음으로 아스빌람으로 돌아간 고병갑.

한껏 말끔해진 고블린들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기 사 왔다! 가마솥에 불 올려!」

「예!」

고블린들이 신나서 화로에 불을 지폈다. 가마솥도 물로 깨끗하게 닦아놓은 터라 사용하는 데 문제없었다.

가마솥에 돼지 부산물을 몽땅 털어 넣고, 굵다란 나뭇가지로 휘휘 저어가며 볶는다.

다 익은 고기는 주워 온 스테인리스 쟁반에 모조리 옮겨 담았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많이 먹어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고병갑은 챙겨온 부르스타로 삼겹살을 구우며 고블린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술과 담배를 곁들이니 임금님 수라상도 부럽지 않았다.

그들은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몸의 노곤함을 털어냈다.

고병갑은 더없이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헌터 일을 시작한 지난 3년간 이만큼 웃어본 적이 있던가?

‘아니. 없었지.’

그의 일상은 우울로 시작해 우울로 끝났었다.

일거리 걱정, 채무 걱정, 엄마 걱정.

걱정, 걱정, 걱정.

걱정과 불안으로 점철된 게 그의 인생이었다. 웃기는커녕 얼굴에서 울상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평생 변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는데······.

「꺄르르륵!」

「꺄륵!」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며 고블린들 재롱을 보는 이 순간만큼은, 고병갑도 순수하게 즐거울 수 있었다.

고병갑은 고블린 로드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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