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빌드를 올리다!
44.
고병갑은 복잡미묘한 심정이었다.
한탕 뛰고 600만 원 벌었으니 벌거벗고 춤이라도 춰야 하나 싶으면서도,
몇 가지 일이 마음에 걸려 화장실 들어갔다 그냥 나온 것처럼 찝찝했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그가 팬티 바람으로 사타구니나 벅벅 긁으며 촌스러운 천장 벽지를 올려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시발. 내가 유령들이랑 균열에 들어갔다 나온 건가?”
고병갑이 집에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 검색이었다. 오늘 함께 일했던 4인에 대해 찾아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관련된 자료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원 조회를 하면 동명의 헌터가 몇 명 나올 뿐. 그마저도 S등급은 한 명도 없었다.
보통 S등급쯤 되면 기사 한 줄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속보!] 국내 450번째 S등급 각성자 탄생! 베일에 싸인 그녀의 정체는?
-450번째 S등급 각성자 백가희. ‘아직 헌터로 진로를 결정한 건 아냐.’ 고민하는 단계. 유명 길드 물밑 작업 들어가나?
-[단독!] 백가희 헌터 아프로 길드에 입단! ‘사회에 공헌하는 헌터가 될 것!’ 담백한 소감에 응원 물결.
이런 식으로라도 말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나오는 것은,
-[연애 토픽] 강한철 10살 연하 헌터와 연애 중? ‘아직 알아가는 단계’ 그녀의 정체는?
이딴 것뿐이었다.
참고로 저기 나오는 강한철은 B급 헌터로, 헌터와 연예계 생활의 비율이 2:8쯤 되는 인간이었다.
‘가명을 쓴 건가? 아니면 미등록 헌터?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김하나가 올렸던 게시글은 그새 삭제돼 있었다. 덕분에 식별번호를 추적하려던 시도가 무색해졌다.
‘단순 가명이면 상관없지만, 만약 미등록 헌터라면······.’
각성자 특별법 제 1조 1항은 이러했다.
헌터로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는 균열에서 수렵 및 채집활동을 할 수 없다.
대체 저따위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법이 그랬다.
하여 미등록 헌터와 함께 균열을 돌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모로 보나 좋을 게 없었다.
‘괜히 어디 가서 나불대고 다니면 안 되겠어.’
S등급이랑 호흡을 맞췄다고 어깨춤까지 췄더니만 신원 미상이라니. 하여간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균열이 위치한 장소가 외진 곳이었다는 점이다. 고병갑 자신만 입 다물고 있으면 괜히 딴죽 거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건 그렇고······. 그건 대체 뭐였지?’
고병갑은 잠시 눈을 감고 레이븐과 검을 맞댔을 당시를 회상했다.
-이질적인 존재여. 너는 무엇인가?
아주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고병갑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레이븐의 목소리였다. 귀를 통해 들려오는 것이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음성.
아직도 놈의 말이 뇌리를 맴도는 듯했다.
‘이질적인 존재라고? ······하기야. 내가 좀 이질적이긴 하지.’
인간 출신의 고블린 로드. 그건 어느 각도로 봐도 부조화의 산물이었다.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자면, 고병갑은 아직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은 100%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면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하는 건 언제나 딱딱한 현실이었다.
‘레이븐도 말을 할 수가 있구나. 역시 몬스터에게도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건가?’
멸망한 고블린 왕국도 있는 마당에, 멸망한 레이븐 왕국이 있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으랴?
또 모르는 일이다. 어디 머나먼 곳에 몬스터가 모여 사는 왕국이 있을지.
그렇다면 그 왕국의 이름은 ‘이시벌럼의새끼들’쯤 되려나?
“어휴 뭔.”
고병갑이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팬티에서 손을 꺼내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다 문득 레이븐과 격돌했을 당시를 상기시켰다.
“제기랄. 공격을 막아냈는데도 그 정도 충격이라니. 화물 트럭에라도 치이는 줄 알았어.”
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강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위에는 더 위가 있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천만리구나. 지미럴.”
성장의 묘약을 몇 병이나 더 마셔야 A급 몬스터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까?
그리고 다시 얼마나 더 강해져야 A급 몬스터를 무 썰 듯 썰어버리는 S급에 비빌 수나 있을까?
“후우.”
그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누워서 사타구니나 긁는다고 눈먼 떡이 하늘에서 내려올 리가 없다.
고병갑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이게 뭔 냄새야?’
바위산엔 눅진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출처가 어디인고 했더니 고블린들이 며칠 전 잡은 뿔이리를 불에 굽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는 모양이다.
「아앗!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로드. 왔어?」
「로드시여.」
고블린들이 살갑게 웃으며 고병갑을 반겼다.
고병갑은 고블린들을 보자 왠지 정겨운 기분이 들었다. 고향 집에라도 온 기분이다.
‘나도 제정신은 아닌가 보네.’
그가 속으로 웃었다. 웃음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고병갑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고블린들에게 다가갔다.
「오냐, 형 왔다. 밥 먹고 있었냐?」
45.
아스빌람에 고블린이 142마리가 됐다. 처음 33마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꽤 많이 늘어난 셈이다.
고병갑은 새로 온 52마리의 고블린을 앉혀 놓고 생각에 잠겼다.
노멀 고블린 51마리와 홉 고블린 1마리.
얘들을 어떻게 부려먹어야 좋을까.
‘곡괭이가 부족하니까 시킬 일이 없네.’
당장 시킬 일이 없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생각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바라봐야 해.’
고블린들한테 곡괭이 몇 자루 던져주고 나 몰라라 해도 어찌어찌 보상은 얻을 수 있으리라.
어쨌든 고블린들은 계속 수정을 캘 것이고,
녀석들이 캐낸 수정으로 이것저것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한 치 앞만 보는 처사였다.
‘처음에는 아스빌람의 재건이고 뭐고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지.’
아스빌람인지 뭔지.
그저 고블린들 사정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니 그들의 왕국을 재건해줄 생각도, 고블린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줄 생각도 딱히 없었다.
단기적으로만 본다면 그게 맞을 수도 있다.
대충 고블린 부려먹으면서 성장의 묘약 좀 사 먹고, 교본 몇 개 사서 익히고······.
뭐, 그렇게만 해도 삶의 수준은 전보다 나아질 테니까.
하지만 이 비루먹을 밑바닥 인생.
단칸 자취방에서 하루하루 토벌이나 다니며 채무 갚아가는 인생을 180도 변화시키려면 길고 장대한 목표를 세워야 했다.
그리고 긴 목표는 결국 ‘아스빌람의 재건’과 합치됐다.
고블린과 고병갑은 결과적으로 운명 공동체라는 말이다.
고병갑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 앉아있던 고블린들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시선이 닿은 곳엔 천공까지 닿아있는 안개가 있었다.
‘언젠가는 저 너머로도 넘어가야 해.’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공간은 기껏해야 바위산 중턱의 한 부분이었다. 여기서 암만 지지고 볶아 봤자 소꿉장난일 뿐이다.
큰 업을 이루려면 넓은 무대로 나아가야 한다.
‘암컷 고블린도 몇 마리 들여와야 할 테고.’
균열 들락날락하며 고블린을 모집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인구수를 늘리려면 애를 낳게 해야 한다.
‘그러면 훗날 불어날 인구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인프라도 갖춰놔야겠지.’
지금만 하더라도 곡괭이가 없어서 일을 못 시키지 않는가? 게다가 새로 들인 고블린들을 수용할 공간도 없는 실정이다.
준비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좋아. 당분간은 아스빌람 쪽에 집중하자.’
저번에 사례금으로 받은 500만 원,
긴급 토벌을 완수하고 받은 보상금 100만 원.
오늘 김하나에게 받은 돈 600만 원.
그 외 고블린들과 함께 토벌 다니며 벌어들인 돈까지.
이미 예년의 2달 치 돈은 벌어놨다.
2~3주 정도는 쉬엄쉬엄 토벌 다녀도 큰 지장이 없으리라.
고병갑은 결심을 굳힌 뒤 몸을 일으켰다.
「전부 따라와.」
「옙!」
그가 고블린들을 이끌고 간 곳은 서쪽 숲이었다.
활엽수가 잔뜩 피어있는 숲. 그곳을 조금 더 넘어가면 작은 개울이 있다.
‘근처에 강도 있고. 이쯤이 좋겠네.’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너희는 여기서 나라시 까고 있어.」
「나, 나라시?」
「땅을 편평하게 해놓으란 뜻이야. 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 주워서 한쪽에 모아 놔. 나뭇가지 같은 것도 있으면 줍고.」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고블린들에게 평탄화 작업을 맡긴 뒤에 아스빌람을 빠져나왔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그가 생전 들여본 적 없는 서랍장을 뒤졌다. 다행히 찾는 물품이 있었다. 허름한 노트와 연필 한 자루.
고병갑은 팔짱을 끼고 앉아 백지를 들여보았다.
‘의, 식, 주. 그리고 생산.’
살아가기 위한 세 가지 요건.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만약 야생에 떨어진다면 위의 세 가지를 해결하는 게 가장 큰 골칫거리다.
‘로빈슨 크루소가 호들갑 떨기 좋아해서 그 난리를 피운 게 아니지.’
하지만 고병갑에겐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의’부터 볼까? 아스빌람은 밤낮으로 온난한 기후였다. 고블린들이 기본적으로 걸친 거적만 있어도 지내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물론 그곳에도 계절이 있어서 겨울이 온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겠지만, 여차하면 연금술을 통해 옷을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그다음은 ‘식’. 고블린들은 입맛이 까탈스럽지 않았다. 누린내 왕창 나는 몬스터 고기도 군말 없이 뜯어 먹을 정도니까.
식량이 떨어질 때마다 적당히 균열을 돌며 넣어주면 굶겨 죽일 일은 없으리라.
‘아냐. 그걸로는 부족해.’
고병갑은 한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아스빌람에 자체적인 식량 수급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
햄스터 키우듯 먹이를 넣어주는 건 한계가 있다. 거기에 냉장고라도 있어서 장기 보관이 가능한 것도 아니잖은가.
고블린들이 썩은 고기를 먹고 단체로 탈이라도 나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을 터.
그러나 아쉽게도 강에는 피라미들 뿐이고, 나무에는 열매가 없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짓게 해야겠지.’
쉬운 일은 아니리라. 하루 이틀로 될 일도 아니고. 하지만 훗날을 기리려면 지금부터 토반을 다져놔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 이것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고물상과 폐가구 처리장을 돌며 쓸만한 물건들을 들고 가면 되니까. 지출되는 액수라 해봐야 푼돈 수준이다.
‘나중에 수정에 여유가 생기면 집 몇 채 사주는 것도 괜찮겠네.’
고병갑은 생각나는 것들을 노트에 쓱쓱 적었다. 백지였던 종이는 어느새 까만 글자로 가득 들어찼다.
‘인생 계획도 이렇게 세밀하게 짜본 적이 없는데.’
킥킥. 웃음이 나왔다.
엄마 병원비 대랴 채무 갚으랴. 밤낮없이 돈 벌 궁리만 하던 그였다. 그런 고병갑에게 ‘멸망한 왕국의 재건’은 꽤 재밌는 유희로 다가왔다.
잠깐 머리를 식힌 고병갑은 마지막 토픽을 꺼내 들었다.
‘생산.’
가장 중요한 파트다. 고병갑에게 주어진 임무는 ‘고블린 키우기’가 아니라 ‘나라 키우기’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게 있었다. 노트의 여백이 채워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자, 계획은 끝났으니 움직여 볼까?”
그는 신이 나서 집을 빠져나왔다. 지금부터 이곳저곳 들릴 데가 많았다.
46.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네. 혹시 배송은 언제쯤 될까요?”
-내일 중에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곳으로 배송하면 될까요?
“예. 거기로 와주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전화만 한 통 해주세요.”
-예예. 알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예예~ 들어가십시오.
고병갑이 흐뭇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방금 곡괭이 100자루, 도끼 20자루, 삽 30자루, 호미 50자루를 사들였다.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제품을 판매하는 납품 업체를 찾은 것은 행운이었다. 모두 합해서 250만 원 정도뿐 들지 않았다.
당장은 남아도는 장비가 있을지 몰라도 괜찮다. 어차피 이제 본격적으로 고블린 수를 늘릴 생각이니까.
‘농기구는 됐고.’
고병갑은 쉬지 않고 전화를 돌렸다. 이번에는 다른 업체였다.
-전화 받았습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박상진 씨 맞으세요?”
-예, 맞는데요. 누구신지?
“블로그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감자랑 고구마 종자 판매하시는 분 맞으시죠?”
-아, 예예! 맞습니다!
수화기 너머 박상진의 목소리가 금세 영업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고병갑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네. 감자랑 고구마 좀 사려고요.”
본격적인 빌드업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