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9화 (19/151)

019. A랭크 균열

42.

‘장난 없네.’

고병갑은 강렬한 흡연 욕구를 느꼈다. 실제로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무는 대신 도로 집어넣었다. 옆에 선 김하나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앞을 보았다.

볼에 젖살도 다 안 빠진 아이들이 괴물을 도륙 내는 장면을.

제인, 도은호, 강한철. 그 셋은 하나 같이 제 몸만 한 초대검(超大劍)을 휘둘러댔다. 저러다가 자기 귀라도 잘라 먹지 않을까 걱정됐다.

뭐,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살쾡이가 사자를 걱정해 봤자 제 꼴만 우스울 뿐이지.

“크가가가가―끍!”

가도스와 함께 나타난 몬스터는 카브라였다.

거미 몸통에 공룡의 대가리를 단 곤충형 괴수. 크기가 웬만한 소형버스만 했다.

가도스도 카브라도 두말하면 입 아픈 강자들이다. 만약 저 괴물들이 도심지 한복판에 나타난다면 사람 백 명쯤 골로 가는 건 일도 아닐 터.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상위 19%와 상위 2%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격의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키핡!”

“께에엑!”

“끍!”

제인. 흑발에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는 무슨 마술을 부리는 듯했다. 직접 닿지 않고도 상대방을 묵사발 냈으니 말이다.

도은호. 까까머리에 가장 어린 티가 나는 소년은 힘이 장사였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검이 아니라 산을 휘두른다는 감상을 주었다.

강한철. 그는 도저히 눈으로 포착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잔상이라도 잡아낼라치면 생전 엉뚱한 곳에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희끗희끗한 새치에 피가 묻을 겨를이 없었다.

김하나는 매의 눈빛을 하곤 세 아이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마치 감정이 결여된 로봇 같았다.

이면 세계 공략에 돌입한 지 어언 1시간 30분 정도 지났다.

지금껏 몇 차례 전투가 있었는데, 김하나는 한 번도 흡족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 인간들은 대체 정체가 뭘까?’

고병갑은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저들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균열을 도는 게 아니었다.

‘무슨 테스트를 하는 것 같긴 한데······.’

김하나의 옆태를 흘겨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전방에서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갸아아아아악!”

가도스였다. 높게 도약한 녀석이 뚝 떨어지며 고병갑과 김하나를 노렸다.

고병갑은 헉! 숨을 집어삼키며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그러나 그가 나설 차례는 없었다.

가도스가 5m 앞까지 접근했을 때, 갑자기 녀석의 몸이 터져버렸다.

단어 그대로 펑! 하고 터졌다.

‘바··· 방금 무슨 일이?’

-스륵!

김하나가 칼을 거두었다.

고병갑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여자가 벤 거라고!? 내 옆에서 꼼작 않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고병갑은 수천 개로 조각난 가도스의 시체와 김하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쯧!”

김하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누가 봐도 화를 삭이는 모습이었다.

‘저 여자 또 화났네······.’

앞쪽에서 몬스터를 놓친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고병갑은 괜히 한 발짝 물러났다.

‘그나저나 슬슬 보스 놈이 뜰 때가 됐는데?’

이제껏 잡은 게 족히 200마리는 될 테고, 새로이 등장한 80여 마리의 괴물도 거의 정리됐다. 그렇다면 늦어도 다음번엔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리라.

‘쩝. 내 할 일이나 준비하자.’

고병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혁대에 매단 단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위협을 감지했다. 뒤통수에 총구라도 들이미는 듯한 기분이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고병갑은 재빨리 장검을 뽑아 뒤로 휘둘렀다.

-파칵!

칼날이 무언가와 격돌했다.

“끄윽!”

칼날을 타고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해졌다. 몸 전체가 들썩일 정도였다. 고병갑은 눈을 치켜뜨며 기습한 존재를 보았다.

‘레이븐!’

레이븐. A급에 등재된 인간형 몬스터다.

2m 정도의 신장. 근육질 몸은 회색빛을 띠고 파이프 같은 혈관이 전신에 돋아있다.

면상에는 다른 이목구비가 전혀 없고, 붉은 눈알만 8개가 달려있었다.

레이븐은 수족을 자유자재 변형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은 팔이 뾰족한 쐐기 형상을 띠고 있었다.

‘이 개 놈이!’

고병갑의 몸이 본능대로 움직였다. 보법을 밟아 공격을 흘리고, 찰나의 틈을 노려 칼을 찔러넣었다.

칼날은 정확하게 레이븐의 목을 때렸다. 하지만 파고들기는커녕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아차!

‘제길! 카르마를 둘러야 했는데!’

하위 각성자들은 카르마를 운용할 일이 거의 없다. 애당초 쥐꼬리만큼 있는 카르마로 운용이고 나발이고 할 일이 어딨겠는가?

0.1초.

아니. 0.1초의 반의반쯤 되는 짧은 시간.

레이븐과 눈을 맞춘 고병갑은 머릿속으로 어떤 음성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질적인 존재여. 너는 무엇인가?

그건 레이븐이 뱉은 말이었다.

-스르륵!

레이븐이 또 하나의 장기를 부렸다. 바로 스텔스 기능이었다. 기척도 없이 접근할 수 있었던 까닭도 저 능력 덕분이리라.

놈이 도망가리란 것을 알아챈 고병갑이 부랴부랴 장검에 카르마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댕강.

레이븐의 목이 날아갔다. 김하나의 짓이었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43.

‘······이 남자 정체가 뭐야?’

김하나가 놀란 눈으로 고병갑을 응시했다. 그녀의 이마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아무리 정신을 팔고 있었다지만······ 나보다 반응이 빨랐어. 그리고 방금의 움직임은?’

김하나는 똑똑히 보았다.

고병갑이 레이븐의 공격을 막아낸 후 곧바로 반격을 꽂아 넣는 것을. 그 동작은 대나무 결처럼 곧음과 동시에 물처럼 유연했다.

물론 정확히 카운터를 쳤음에도 고병갑의 공격은 레이븐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카르마를 싣지 않은 ‘생’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상위 각성자는 아닐진대?’

김하나는 고병갑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다시 한번 훑었다. 처음 그대로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카르마는 여전히 미약했다. 영락없는 하위 각성자다.

‘하위 각성자가 A급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고? 더구나 스텔스 상태의 기습을?’

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레이븐이 죽자 이면 세계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이 균열의 보스였던 모양이다.

“스으읍······.”

고병갑이 팔을 주물럭거리며 인상을 썼다.

김하나는 서둘러 그를 만류했다.

“손대지 마세요! 부러졌을 거예요.”

설령 천운이 따라 막아냈다 치더라도 하위가 상위의 공격을 받아냈으니 최소 골절이다.

아니. 팔의 뼈가 다 부스러졌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고병갑은 태연했다.

“아니요. 부러진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저릿저릿하네요. 좀 있으면 나을 겁니다.”

“······뭐라고요?”

그녀가 1초 정도 멍을 잡았다.

“잠시 실례할게요.”

김하나는 참을 수 없는 욕구를 느끼며 고병갑의 팔을 더듬거렸다. 나무줄기처럼 질긴 피부 안으로 꿈틀대는 근육이 느껴졌다.

‘정말이야. 뼈가 부러지지 않았어. 그것보다 이 남자······. 대체 몸을 얼마나 단련한 거야?’

신경을 안 쓰고 있어 몰랐는데, 다시 보니 보통 몸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생고무처럼 억셌으며 연마된 쇠처럼 단단했다.

카르마의 양과 농도가 강함의 척도가 되는 헌터의 세계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몸이었다.

김하나는 고병갑과 신체를 맞댄 김에 그의 카르마를 엿보았다.

‘D급 정도인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잡이 손인데 꽤 보드랍네.’

고병갑은 김하나가 자신의 팔을 만지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하니 S등급 헌터와 살을 맞댈 줄이야.

이거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쩝. 자랑할 데도 없네. 고블린들한테 하지 뭐.’

김하나는 잠시 고병갑을 팔을 주물럭대다가 손을 놓았다.

그녀가 고병갑이 맨 배낭의 측면 수납공간을 열었다. 그 안에는 최고급 포션. 이른바 엘릭서가 들어있었다.

100mL에 시가 300만 원도 넘어가는 값비싼 물건이다. 사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물량이 워낙 없어 어지간한 헌터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김하나는 엘릭서의 뚜껑을 따 고병갑에게 내밀었다.

“오분의 일정도 드세요. 다 드시면 안 돼요.”

고병갑은 엘릭서를 앞에 두고 잠깐 고민했다.

겨우 팔 저릿한 것 가지고 저 귀한 걸 마셔도 되나?

“공짜입니까? 아니면 일당에서 차감되는 겁니까?”

김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은 받지 않아요. 제 부주의로 다치신 거니까요.”

공짜라고? 그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병갑은 조심스럽게 엘릭서를 받아들었다.

“오분의 일만 드세요. 더 드시면 안 돼요.”

“아, 네네.”

‘먹으라고 줘놓고 더럽게 눈치 주는구먼.’

고병갑은 엘릭서에 입술만 붙였다 뗐다. 한 18mL 정도 마신 것 같았다.

쩝쩝거리며 음미하는 고병갑. 그는 팔의 통증이 순식간에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뿐이랴? 오랫동안 배낭을 짊어지느라 뻐근했던 어깨도 씻은 듯이 상쾌해졌다.

명약이다, 명약이다, 하더니. 과연 돈값은 하는구나.

고병갑이 감탄하고 있는 사이.

김하나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눈으로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죽었으면 골치 아파질 뻔했는데. 다행이야.’

만약 오늘 데려온 짐꾼이 고병갑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송장 치렀을 터다.

“마스터.”

세 아이가 몬스터를 모두 처리한 뒤 다가왔다.

김하나가 냉랭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잔뜩 경직된 채 고개를 숙였다.

김하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돌아가서 이야기하자꾸나. 병갑 씨 마석을 수거해주세요. 너희들도 저분을 도와드리렴.”

“네. 마스터.”

고병갑과 아이들은 마석 수거 작업에 착수했다.

고병갑은 김하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옆에 있는 도은호에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몇 살이에요?”

말을 걸자 도은호가 흠칫 놀랐다.

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김하나의 눈치를 살폈다.

‘뭐야? 저 여자 허락이 없으면 말도 못 하는 건가? ······시발. 이거 아동학대 당하고 있는 거 아니야?’

영 터무니없는 망상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까?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아니면 협회에?

“······열네 살이에요.”

“열네 살?”

고병갑은 경악했다. 아무리 헌터에 남녀노소가 없다지만 열네 살은 좀 심하잖은가?

고병갑이 김하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이쪽에 신경을 두고 있지 않았다.

“괜찮은 거 맞아요?”

“네?”

“지금 그쪽 세 분이 어떤 부조리한 일을 겪고 있지 않은가 싶어서요. 혹시 하나 씨한테······.”

고병갑은 ‘혹시 저 여자한테 학대당하고 있느냐?’라고 물으려고 했다.

그 전에 도은호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마스터는 상냥하신 분이세요.”

“아······. 그래요?”

“네.”

“혹시 서로 관계가 어떻게 돼요?”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정적.

두 사람은 말없이 마석을 도려내 배낭에 옮겨 담았다.

고병갑은 그런 정적이 싫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아요. 제가 볼 때 세 사람 다 굉장하니까요. 저야 뭐 고작 D급이니 그쪽 세계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래도 대단하다는 거 하나는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세 분 다 아직 어리잖아요. 아직 앞날이 창창해요.”

“아······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가만 보니까 하나 씨가 조금 극성맞은······ 흠흠.”

고병갑은 김하나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김하나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튼 힘내세요.”

넷이 달려드니 마석 수거는 곧 끝났다.

그들은 이면 세계를 빠져나와 주차된 곳으로 돌아갔다.

“바로 입금해드렸어요. 확인해 보세요.”

“아, 네. 문자 왔네요. ······음?”

고병갑은 송금된 금액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죠? 300만 원이 아니라 600만 원을 보내셨는데요?”

“제대로 보낸 것 맞아요.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어 조금 더 얹었어요.”

‘뭐라고? 아니 왜?’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짐꾼도 목숨을 담보삼아 돈을 버는 직업이다.

김하나가 고병갑을 ‘안전하게 지켜줄’ 의무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자.’

괜히 딴죽 걸지 않기로 했다. 막말로 덜 준다는 것도 아니고 더 준다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고병갑과 김하나 일행은 바로 헤어졌다.

김하나는 고병갑이 떠나가는 것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저 사람과 무슨 얘기를 나눴니.”

그녀가 도은호에게 물었다.

도은호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제게 몇 살이냐고 물어보았어요.”

“그게 다니?”

“······마스터가 저희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기도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마스터는 좋은 분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래. 잘했구나.”

김하나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도 내가 너희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지 않아요, 마스터.”

세 아이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김하나의 얼굴에 슬픔이 드리워졌다.

“다들 이리 오렴.”

그녀가 세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들도 거부감 없이 안겨들었다.

“미안하구나.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아주렴.”

“그런 말씀 마세요, 마스터.”

“저희는 마스터와 함께 있어서 행복해요. 힘들지 않아요.”

“언제까지고 마스터 곁에 있을게요.”

네 사람은 잠시 그러고 있었다. 잠시 후 김하나가 아이들을 놓아주었다.

그녀가 조금은 산뜻해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어땠니. 오늘 함께 한 남자. 뭔가 특별한 게 느껴지지 않았니?”

“네?”

“특별한 거요?”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글쎄요. 저는 느끼지 못했어요.”

“저도요.”

“그저 그런 하위 각성자 같던걸요. 왜 그러시나요?”

“아니. 별일 아니란다. 돌아가자꾸나.”

김하나는 은근하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만약 정말로 이레귤러라면 가만히 두어도 다시 만날 날이 올 테지.’

김하나는 이내 머릿속에서 고병갑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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