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연금술
37.
고병갑은 피와 오물이 묻은 작업복을 벗고 챙겨온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목과 얼굴도 물티슈로 잘 닦아 한층 말끔해졌다. 자고로 자차 시트에 피를 묻히고픈 차주는 없는 법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확실히 총을 쓸 때보다 피로도가 심하네.’
기진맥진할 정도는 아니지만, 몸에 어느 정도 피로가 남았다. 아무리 잘 포장해도 날붙이란 결국 몸으로 때우는 타입의 무기이니 말이다.
몸에 새긴 상처도 전보다 많았다. 운기조식이 없었다면 포션 반병 이상은 썼으리라.
피로와 부상. 두 가지 측면에서 칼은 총보다 취약했다. 그렇다면 굳이 멀쩡한 총을 놔두고 칼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세상에 바보 등신이 아니고야 손가락만 까딱하면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 총 대신 칼을 잡을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이것도 넘어서야 해.’
그러나 ‘상위’라는 타이틀에 끼기 위해서는 언젠가 총을 놓아야 했다. 현대 화기에서 날붙이 병기로.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이 역행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상위의 세계에선 총이 통하지 않는다.
뭐, 그런 걸 차치하더라도 고병갑이 칼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있었다. 바로 돈 때문이다. 사실 세상의 모든 갈등은 돈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매달 탄약값으로 지출되는 액수만 하더라도 150만 원이 넘었다. 누구에겐 껌값쯤으로 치부될지 몰라도 한 푼이 아쉬운 고병갑에겐 큰돈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서울에 도착했다. 고병갑은 협회에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갔다.
짐을 정리한 뒤에는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어, 고붕고붕 고붕이.」
아스빌람으로 오자마자 고붕이가 그를 반겼다.
「그래. 일하는데 특이사항은 없고?」
「예. 없습니다. 그리고. 로드께서. 시키신 일. 끝났습니다.」
고붕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뿔이리의 부산물이 잘 정리된 채 쌓여 있었다. 얼추 90마리분이니 양이 꽤 됐다.
「오. 잘 정리해놨네.」
가죽, 뿔, 이빨, 발톱. 종류에 맞춰 잘 분류돼있었다.
「제가. 저렇게.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 역시 작업반장이야. 아주 좋아.」
「헤헤······.」
고병갑이 칭찬해주니 입이 귀에 걸리는 고붕이. 고병갑은 쌓여 있는 부산물 쪽으로 다가갔다.
‘호오? 진짜 깔끔하게 잘해놨는데?’
괜히 기분 내라고 칭찬해주긴 했다만 솜씨가 꽤 좋았다. 고병갑은 뿔이리 가죽을 들춰보며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도 가서 일 봐라.」
「알겠습니다.」
고붕이를 보내고 나서,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을 열었다.
[보유 수정 : 1,765]
고블린들이 낮 사이 400개도 넘게 수정을 캐놓았다. 확실히 30마리 굴릴 때와는 채굴 속도가 달랐다.
그는 손가락을 놀리며 원하는 상품을 찾아 나섰다. 그가 둘러보는 카테고리는 ‘건설’이었다.
‘찾았다.’
[하급 연성소]
-가격 : 900 수정
-설명 : 물건을 제작, 강화할 수 있는 연금술 장치. 하급 연금술에 적합하다.
고병갑은 900 수정을 지불하고 하급 연성소를 사들였다. 과거 수정 투입구를 구매했을 때처럼 실체가 없는 무언가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건 어떻게 보면 군밤 기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투박하고 네모난 틀에 굴뚝처럼 두 개의 원기둥이 솟아 있었다. 기둥은 크고 널찍했는데, 저 안으로 재료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고병갑은 적당한 자리에 하급 연성소를 설치했다.
[해당 위치에 ‘하급 연성소’를 설치하시겠습니까?]
[설치를 시작합니다.]
[소요 시간 약 5분]
허상이었던 하급 연성소가 실체를 잡아갔다. 고병갑은 차분한 마음으로 그것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5분은 금방 지나갔다.
‘자, 뭘 만들어볼까.’
연성소의 사용 방법은 머릿속에 든 ‘고대 연금술 교본-하급’을 통해 숙지하고 있었다.
고병갑은 우선 시험 삼아 옷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그가 굴뚝에 뿔이리 가죽 하나를 집어넣었다. 그 뒤 연성소 전면부에 위치한 편평한 판에 두 손을 얹었다.
‘티셔츠로 할까?’
그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구상했다. 이때 잡념이 끼면 실패 확률이 올라간다. 그래서 최대한 집중했다.
고병갑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반 팔 티셔츠를 그리며 연성을 시도했다,
손을 갖다 댄 판에서 은은하게 빛이 났다.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연성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푸쉬이이이······.
연성은 금방 끝났다. 판에 깃든 빛이 사그라졌음을 확인한 고병갑은 연성소 몸체에 달린 손잡이를 확 잡아당겼다.
기대 만발로 열어본 통 안에는 정갈한 모양의 티셔츠는 개뿔. 뭔 이상한 거적 쓰레기 같은 게 하나 들어있었다.
연성 결과물이었다.
“뭐야!? 티셔츠 어디 갔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연성에 실패한 것이었다.
그가 결과물을 집어 들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걸레 이상의 활용도는 없을 듯했다.
“숙련도가 부족해서 그런가.”
고병갑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어차피 재료는 많다. 오늘 일과도 끝났는데 죽치고 앉아서 연성만 하자고 마음 먹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고병갑은 쉬지 않고 두 번째 연성에 들어갔다.
38.
뿔이리 가죽이 바닥을 보여갈 때쯤 고병갑은 못 버티고 드러누웠다. 그의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친 숨을 뿜어냈다.
“하아, 하아······. 이거 일이네.”
연금술은 체력을 소모했다. 그것도 꽤 많은 체력을. 처음에는 힘든 줄도 몰랐으나, 어느 순간에 이르러선 온몸의 힘이 쭉 빠져버렸다.
지친 와중에도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누운 채로 티셔츠 한 장을 펼쳐 들었다.
정갈하게 잘 만들어진 티셔츠다. 시판되는 여느 티셔츠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박음질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견고했다.
‘이걸로 옷 장사나 해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영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연금술 실력이 늘면 옷이나 물품을 만들어 팔 수도 있으리라.
‘나중에 엄마 밍크코트나 한 벌 만들어드려야지.’
고병갑은 어서 어머니가 완쾌하기를 빌며 몸을 일으켰다. 모르는 사이 저녁이 찾아와 어둑어둑했다.
고블들은 일을 마친 뒤 모여들어 고병갑이 연성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병갑은 성공작을 모아놓은 곳에 티셔츠를 획 던지며 말했다.
「이거 너희 가져가서 입어라. 몇 벌 없으니까 알아서 나눠 입어.」
「우와!」
고블들은 서로 가지려고 안달이었다.
고병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심신을 추스르며 마지막 연성을 시도키로 했다.
‘숙련도도 충분히 올렸으니······.’
그가 집에서 챙겨온 장검을 집어 들었다. 칼날이 많이 상해서 더 쓰기에 무리가 컸다. 새로 사거나 하다못해 수리라도 맡겨야 했다.
‘쯧! 돈 아깝게 수리는 무슨.’
사실 장비에 돈을 아끼는 헌터는 등신이다. 토벌하다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칼은 너무 비쌌다. 쓸만한 걸 사려면 몇백만 원은 줘야 했고, 심지어 수억을 호가하는 것도 있었다. 고병갑은 칼이 왜 총보다 비싼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금술은 획기적이었다. 만약 그가 구상하는 게 실현된다면 장비에 돈을 투자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고병갑은 한쪽 굴뚝에 장검을, 다른 쪽 굴뚝에는 갈퀴늑대에게서 채취한 꼬리를 넣었다. 갈퀴늑대의 꼬리는 무척 날카로워 실제로 무기 제작에 쓰였다.
‘이번에는 제작이 아니라 합성이다.’
고병갑은 심기일전해서 연성을 시작했다. 연성판이 빛을 내고 연성소가 가동됐다.
-두두두두두······. 푸쉬이이이······.
연성은 금방 끝났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몸체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 안에는 날이 잘 벼려진 장검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성공이었다.
“으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가 쾌재의 함성을 지르며 결과물을 집어 들었다.
“이야. 이거 진짜 물건인데?”
군데군데 이가 나가서 볼품없던 고물은 이제 없다.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검만이 존재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이 서슬 퍼런 날 좀 보라지.
자기가 봐도 멋졌다.
장검의 자태를 감사하다가 문득 돌린 시선에 고블린들의 무기가 들어왔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형태의 원시 무기다.
‘나중에 고블린들 것도 좀 만들어줘야겠네. 아니. 차라리 고블린들한테도 연금술이나 다른 기술을 가르쳐 볼까?’
훗날 고블린들에게 이런저런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괜찮을 성싶었다.
한 몇 명 선출해 연금술을 익히게 하면 공방을 차릴 수도 있으리라.
어디 그뿐이랴? 농사일도 가르치고 가축도 기르게 하면 식량 조달도 문제없다. 강한 이들을 꼽아 전투 요원으로 키우면 토벌도 수월해질 거고.
고블린들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꺄르르륵!」
「꺄륵!」
‘······.’
물론 시간이 좀 필요하리라. 일단은 숫자부터 더 늘려야 한다. 적어도 300명쯤은 되어야 수정 채굴에 속도가 붙고 잉여병력을 둘 수도 있을 테니.
「나 간다. 쉬어라.」
「앗! 로드시여! 벌써. 가십니까?」
「어. 나 엄마 보러 가야 돼.」
「아앗! 안녕히. 가십시오!」
「오냐.」
고블린들이 고개를 수그려 작별 인사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39.
“심 봤다!”
‘잠깐. 심 봤다가 맞나?’
고병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훌훌 털어버렸다. 심이던 노다지던 무슨 상관인가? 자고로 뜻만 통하면 그만이다.
「우으······?」
눈앞의 고블린들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고병갑은 장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씩 웃었다.
「무슨 반응이 이렇게 미적지근해? 로드 처음 보냐? 아. 처음 보지? 쩝. 한 번은 봐준다.」
「로, 로드?」
고병갑은 가평에 위치한 E랭크 균열에 발을 들인 참이었다. 한데, 이면 세계를 지키고 있던 것은 고블린 군집이었다.
E랭크 균열인 만큼 초입부엔 노멀 고블린밖에 없었다. 고병갑은 어느 노멀 고블린에게 어깨동무하며 외쳤다.
「너희들! 아스빌람에 가고 싶지 않냐?」
「아, 아스빌람!」
「가고. 싶다!」
노멀 고블린들이 웅성거렸다. 고병갑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가고 싶으면 가야지. 너희 보스한테 안내해!」
고병갑의 예상대로 이면 세계의 보스 몬스터는 홉 고블린이었다.
녀석은 고병갑을 보더니 곧장 얼어붙었다.
「헉! 다, 당신은······,」
「야야. 쫄지마.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냐?」
「지, 진짜. 로드십니까?」
「오냐. 백프로 찐텐 정품 로드다.」
고병갑은 그렇게 대답한 뒤 고블린들을 싹 훑으며 선포하듯 외쳤다.
「내가 너희 로드다! 다들 나한테 충성을 맹세해라! 그럼 내가 너희를 아스빌람으로 데리고 가주마!」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메아리가 울렸다. 그러고 1초 뒤.
「로드시여!」
「로드시여!」
「흑! 흑!」
고블린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어떤 녀석은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노멀 고블린(51), 홉 고블린(1)가 아스빌람에 아스빌람에 귀속되었습니다.]
‘좋아.’
고병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가자! 꿈과 희망의 아스빌람으로!」
고병갑이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고블린들은 아주 눈을 뱉어낼 기세로 놀랐다.
「고붕아. 고붕아 나와 봐!」
고병갑이 부르고 얼마 뒤. 고붕이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로드시여! 부르셨습니까!」
「어. 신참들 왔다. 데리고 가서 교육 좀 시켜라.」
「알겠습니다! 전부. 나를. 따라와라!」
고붕이는 익숙하게 고블린들을 인솔했다.
고병갑은 균열에 들어간 지 15분도 지나지 않아 빈손으로 나왔다.
‘조금 허무하네.’
고블린들을 추가로 영입한 것은 좋은 일이나, 왠지 헛걸음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새로 만든 장검을 시험해보고 싶었으니 말이다.
“이대로 공치기엔 너무 아쉽지.”
고병갑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임자 없는 균열이 몇 개는 있을 터다.
헌터넷 앱에 접속한 고병갑. 그는 균열 지도를 보기 위해 ‘실시간 균열 현황’ 게시판을 터치했다. 그런데 실수로 바로 옆에 있는 ‘토벌대 모집’ 게시판을 눌러버렸다.
실수라고 부르기도 뭐한 사소한 일이다. 그런데 핸드폰을 들여보던 고병갑이 멈칫했다.
한 게시글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가평역 인근 A랭크 균열. 짐꾼 1명 급구합니다! 일당 300만 원!]
‘사, 삼백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