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6화 (16/151)

016. 성장

34.

일요일. 살면서 국자 한 번 안 쥐어본 사람도 요리사로 만들어준다는 기가 막힌 날이다. 대개는 요리사 대신 동면 중인 곰이 돼버리지만, 고병갑은 달랐다. 그는 아침 6시쯤 돼서 부스스 일어났다.

이른 기상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어제 하루 쉬었으니 일도 해야 했고 오랜만에 엄마 병원도 들릴까 했다.

······사실 그건 부차적인 요인이었다. 고병갑은 소풍 당일의 초등학생처럼 들떠있었다. 그게 오래 잠들지 못한 근본적 원인이었다.

“흐흐흐.”

그가 머리맡에 놓인 3권의 책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어제 잠들기 전에 고대의 상점에서 구매한 물품이다.

[고대 검술 교본-하급]

-가격 : 320 수정

-설명 : 고대의 기술 중 ‘검술-하급’을 다룬 교본. 고대 기사단의 검술이 담겨 있다.

[고대 육체 단련술 교본-하급]

-가격 : 320 수정

-설명 : 고대의 기술 중 ‘육체 단련술-하급’을 다룬 교본. 고대 기사단의 육체 단련술이 담겨 있다.

[고대 운기조식 교본-하급]

-가격 : 350 수정

-설명 : 고대의 기술 중 ‘운기조식-하급’을 다룬 교본. 고대 기사단의 독자적인 호흡법이 담겨 있다.

3권의 교본. 총 990 수정을 지불하고 얻은 것들이었다.

[보유 수정 : 1,307]

잠들기 전에 산 성장의 묘약과 연금술 교본 값을 제하면 남는 금액은 1,307 수정. 이건 조금 아껴두어야 했다. 따로 쓸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피지로 제작된 두꺼운 교본. 고병갑은 눈곱 떼는 것도 잊고 책을 집었다.

고병갑은 어떻게 봐도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예나 지금이나 뭘 새로 배우는 일은 망설여졌다. 하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고대 검술 교본-하급’을 각인하시겠습니까?]

교본을 펼치니 내용은 안 보이고 홀로그램만 떠올랐다. 전날 밤 ‘고대 연금술 교본-하급’과 똑같았다.

‘당연하지.’

그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그러자 눈을 의심할 장면이 연출됐다. 양피지 책자가 고병갑의 몸으로 흡수된 것이다.

“으윽······!”

고병갑은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머릿속으로 방대한 지식이 밀려 들어온 후유증이었다. 비유하자면 커피를 50잔 정도 마시고 연달아 담배를 100개비 피운 기분이었다.

그는 어제 고대 연금술 교본-하급을 흡수하고 같은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머지는 오늘로 미뤘다. 그러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략 5분쯤 지나니 어지럼은 가셨다. 고병갑은 여세를 몰아 나머지 교본 2권도 전부 흡수했다.

[‘고대 검술 교본-하급’이 각인되었습니다.]

[‘고대 육체 단련술 교본-하급’이 각인되었습니다.]

[‘고대 운기조식 교본-하급’을 각인되었습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정보들이 머릿속 한구석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솔직히 기가 차는 심정이었다.

“······몇 개 더했다간 진짜 정신병 걸리겠네. 적당히 해야지.”

고병갑은 떠오르는 알림을 뒤로하고 세수부터 했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으니 그제야 정신이 좀 진정됐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테라포밍한 몇몇 지식을 음미했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들떴다. 당장 몸으로 시험해 체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밥을 차려 먹는 동안에도 핸드폰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적당한 균열을 찾기 위해서. 그 모습이 흡사 굶주린 하이에나 같았다.

식사를 마친 고병갑은 서둘러 채비를 갖추었다. 물자를 챙기고 차에 타 얼른 가속페달을 밟는다. 오늘의 목적지는 동두천이었다.

“순탄하게 가자. 순탄하게.”

일요일엔 균열 경쟁률이 낮아진다. 헌터들도 사람인지라 일요일만큼은 쉬고 싶은 것이다.

반대로 취미로 헌팅을 하는 취미꾼들은 주말마다 더욱더 극성이었다. 고병갑은 저번과 같은 불상사가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한 시간 반쯤 내달렸을까. 고병갑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도심에서도 40분 정도 떨어진 어느 시골 마을의 폐교였다.

-일반인 접근 지양! 균열 주의 구역!

그런 현수막이 군데군데 걸려있었다.

그렇다. 암이 매번 같은 자리에 재발하듯 균열도 발생했던 데 또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학교도 그런 까닭에서 폐교했으리라. 허구한 날 균열이 튀어나오니 도저히 운영할 수가 없었겠지.

잡초로 무성한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다. 좋은 징조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마친 고병갑이 균열로 다가갔다. 운동장 한가운데였다.

언제나 그렇듯 토벌의 시작은 담배다. 고병갑은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며 장비를 점검했다.

“오케이. 이상 무.”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탄약을 그리 많이 챙기지 않았다. 평소의 절반 수준이다.

오늘 메인은 총이 아니라 칼이었다.

준비가 모두 끝난 후. 고병갑은 망설임 없이 균열로 몸을 던져 넣었다.

35.

그가 오늘 방문한 균열은 E랭크였다. 저번에 D랭크 균열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기도 했으나, 단신의 힘으로 이룩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고블린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토벌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검 한 자루 들고 E랭크 균열을 토벌할 수 있는가?

토벌할 수 있다면 과연 총을 쓰는 것보다 나은 점이 있는가?

D랭크 이상에서도 통할까? 자신은 과연 하위의 벽을 넘을 수 있는가?

고병갑은 이면 세계에 들어선 뒤 검을 빼 들었다. 검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관리 없이 방치된 세월도 길었고, 근래 몇 번 사용한 탓이다.

그가 현재 지니고 있는 장검 역시 김아진에 의해 강매당한 것이었다. 품질은 거지발싸개인데 값만 비싸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보급용도 못 되는 물건이었다.

상위 헌터들이 사용하는 병기는 기본이 수천만 원이다. 비싼 건 수억을 호가하기도 했다. 고병갑으로서는 그런 물건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당초 하위 헌터인 그에게 별 필요 없는 물건이기도 했고.

“크르르르······!”

학교 담장과 이어진 조그만 숲에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뿔이리였다. 역시 E랭크 균열의 단골 소재다운 기개다.

고병갑은 총기의 멜빵을 바짝 조여 움직임에 불편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뒤 괜히 손에 침 한번 뱉고 칼을 다잡았다.

“덤벼 똥강아지야.”

“크르르르! 카아아악!”

뿔이리 아홉 마리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고병갑의 눈이 놈들의 움직임을 재빨리 포착했다.

머리가 명령을 내렸다. 고병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따랐다.

칼날이 번쩍이더니 쏜살같이 뻗어나갔다. 최초로 달려든 뿔이리의 목이 댕강 날아가고, 뒤이어 달려든 뿔이리는 세로로 갈라졌다. 세 번째 네 번째 녀석을 한 획에 비명횡사시키고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실체가 없는 바람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허공에 뜬 뿔이리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2차 공격이 들어갔다.

횡베기, 종베기, 찌르기. 담백한 연타가 이어졌다. 뿔이리 세 마리가 추가로 죽었다.

칼이 한 번 지나가면 무슨 당연한 법칙인 것처럼 피가 번졌다.

앞으로 두 마리.

“크라라라라―께겡!”

다리를 물려는 놈을 도리어 짓밟고 머리를 쪼개놓았다. 그때 팔에서 시큰한 통증이 일었다. 마지막 뿔이리가 팔뚝을 물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고병갑은 덤덤하게 팔을 내리쳤다. 뿔이리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놈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 나간 칼날이 날아들어 몸통을 쪼개버렸다.

1분.

아니. 고작 40~50초.

뿔이리 9마리가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 컵라면 하나 끓여 먹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허! 허허······. 푸흡! 푸히힛!”

고병갑의 입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조소가 흘러나왔다.

맙소사!

이건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진짜 말도 안 되잖아?’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교본. 그것들의 효용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아직 완벽히 체화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고?’

교본의 지식은 그저 고병갑에게 ‘각인’되었을 뿐이었다.

수학으로 비유하자면 겨우 덧셈의 원리 정도를 터득한 것이다. 그런데 갓 덧셈을 배운 초등학생이 세 자릿수 덧셈을 어렵지 않게 해버렸다.

거기엔 여러 보조적인 요인이 있었다.

성장의 물약으로 강화된 육체, 그리고 각 교본끼리의 시너지가 그것이었다.

‘검술을 알고 나니까 과거에 내가 칼 잡고 설쳤던 게 장난처럼 느껴져.’

검술을 익히기 전 고병갑의 몸짓은 야구 방망이 쥔 아이가 해변의 모래성을 때려 부수는 것과 큰 차이도 없었다.

칼이라는 게 그냥 쥐고 휘두르기만 하면 만사가 능통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큰 오산이었다.

정수리 끝부터 시작해서 발끝에 이르기까지. 신체의 모든 부위를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전부 체계가 잡혀 있었다. 허풍을 섞자면 괄약근을 언제 조여야 하는지까지 정해져 있었다.

환상적인 점은 육체 단련술과 검술이 완벽히 상호작용한다는 부분이었다. 그저 검술을 구사하는 것만으로 몸이 알아서 육체를 단련시켰다.

그래서 몸을 굴리면 굴릴수록 근골이 더욱더 질기고 단단해졌다.

“후후.”

고병갑은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뿔이리에게 물린 팔을 내려보았다. 피부가 조금 파인 게 다였다.

‘평소였다면 살점 한두 덩이쯤 너덜거려야 정상일 텐데. 성장의 묘약이랑 육체 단련술 덕분인가.’

“스으읍! 후우우!”

그는 쉬지 않고 ‘고대 운기조식 교본’에 나와 있는 호흡법을 실행했다. 단전을 시작으로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전신에 퍼졌다.

이윽고 팔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놀랍긴 했으나, 솔직히 말하면 큰 상처에는 못 써먹을 듯했다.

‘아무래도 포션보다는 못한 건가.’

그 점이 아쉽긴 했으나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욕심이겠지.

「몇 놈 튀어나와 봐.」

고병갑은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며 말했다. 그러자 노멀 고블린 서넛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드. 불렀어?」

「이것들 들고 가서 해체해. 가죽은 가죽대로, 이빨은 이빨대로, 마석은 마석대로 모아놓고. 알아먹었지?」

「응. 이해. 했다.」

「그래. 고기는 쟁여놨다가 먹어.」

노멀 고블린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뿔이리 시체를 아스빌람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이렇게 편한 걸 이제 알았네.’

굳이 균열 안에서 마석 해체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일단 아스빌람에 던져놓고 고블린들을 시키면 되니까.

그렇게 하면 토벌 속도도 획기적으로 빨라지리라.

‘조용하니까 몬스터가 몰려들지를 않네.’

한바탕 접전이 치러졌음에도 주위는 한산했다. 만약 총을 쏴댔다면 소리를 듣고 몬스터가 더 몰려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냉병기가 갖는 몇 가지 장점 중 하나였다. 상위 헌터들이 화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고 말이다.

고병갑은 숨어 있는 몬스터를 찾아 유유히 걸어갔다.

36.

“키야아아악! 키야야아아!”

잔뜩 성난 갈퀴늑대. 이빨, 앞다리, 날카롭게 벼려진 두 개의 꼬리로 연신 공격을 퍼붓는다.

고병갑은 여유로운 자세로 놈과 대적했다.

칼날 꼬리가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고병갑은 있는 힘껏 검을 쳐올렸다. 그러자 ‘쩡!’ 소리를 내며 갈퀴늑대가 날아갔다.

고병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목에 칼날을 쑤셔 넣었다.

“키야야아악―큵! 끄그긁!”

갈퀴늑대는 몇 번 버둥거리더니 이내 축 처졌다. 벌어진 살점으로 피가 꿀렁이며 터져 나왔다.

‘F급이나 E급이나 별 차이 없네.’

쉬웠다.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갈퀴늑대를 포함한 몬스터 18마리가 한 번에 덮쳐왔을 때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보자면 놈들은 모조리 고병갑의 손에 죽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내려보았다. 자잘한 상처가 좀 있다 뿐 대체로 멀쩡했다. 포션을 쓸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는 몬스터를 모조리 아스빌람으로 던져 버린 뒤 균열을 빠져나왔다.

-띡!

손목시계의 스톱워치가 소요 시간을 알려주었다.

57분 48초.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고블린들과 함께 사냥했을 때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빨라도 4시간이었는데 말이지.’

고블린 로드가 되기 전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시간 단축이었다.

고병갑은 성공적인 토벌을 기념하며 담배 한 개비를 태웠다. 그러면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자, 재료는 모았으니 이제 뭘 만들어볼까.’

담배를 문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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