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5화 (15/151)

015. 기묘한 날

31.

‘저주로 암컷 고블린이 멸종했다고? 탐험가 렌드리올은 누구고 아스빌람의 12영웅은 또 뭐야?’

한 차례 탐독을 마친 고병갑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대의 상점에 진열된 물품. 거기 달린 주석은 온통 아리송한 내용뿐이었다.

그중 가장 이상야릇한 것은 ‘계몽의 씨앗’이었다.

‘신의 분노를 사서 지혜를 잃은 종족? 설마 고블린을 말하는 건가?’

고병갑은 기본적으로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딥 임팩트의 배후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 이를테면 신 비스무리 한 게 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에는 동조했다.

그러니 고대의 상점에서 심심찮게 신이란 단어가 등장해도 그저 터무니없는 미신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고블린 로드이니, 아스빌람이니 하는 초현실을 몸으로 겪고 있지 않던가?

‘놈들이 처음부터 바보였던 건 아니라는 말인가?’

고병갑은 짧게 자란 턱수염을 긁적이며 고뇌에 빠졌다. 그 무렵이 되자 목욕을 마친 고블린들이 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돌아왔다.

「키리얀! 키리얀 이리로 와봐!」

「아, 예! 로드!」

고병갑은 곧장 키리얀을 불렀다. 키리얀은 아스빌람의 구성원 중 말이 제일 잘 통하는 녀석이었다.

「야. 여기 와서 이거 좀 읽어 봐.」

고병갑은 키리얀을 소파에 앉혔다. 그 뒤 고대의 상점 메인 창 옆에 작게 딸린 홀로그램을 가리켰다. 그러자 키리얀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로드시여.」

「어, 그래. 뭐 좀 알 것 같냐?」

「그, 그게 아니라······. 저는 문자를 읽을 줄 모릅니다.」

「뭐?」

고병갑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야. 사람인 나도 읽는 걸 고블린인 네가 왜 못 읽냐?」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한 게 아니라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문자를 왜 몰라?」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기가 막히네 진짜.」

화가 난다기보다도 황당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못 한다는 거 억지로 시킬 수도 없고.

고병갑은 고블린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대신 좀 더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야. 너희 혹시 신한테 뭐 죄지은 거 있냐?」

「예에에!? 그, 그게 무슨!?」

「야야. 추궁하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지을 거 없어. 그냥 물어보는 거야.」

고병갑이 타이르고 나서야 키리얀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고병갑은 느긋한 말투로 설명에 들어갔다.

「다른 게 아니라 좀 이상한 걸 읽어서 말이야. 여기 보면 ‘신의 분노를 사서 지혜를 잃은 종족’이란 단락이 나오거든? 그게 혹시 고블린들이 아닌가 싶어서. 뭐 아는 거 없어?」

「어······.」

「모르겠어? 너희 얘기 아니야? 잘 좀 생각해 봐.」

「신······. 신······.」

키리얀은 계속해서 신이란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동공이 점점 확장됐다. 이어서는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마, 마드······. 마드무······.」

「마마무?」

「마, 마마, 마! 커헑! 끼엑! 끼에에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에엑!」

「야, 야 시발! 너 갑자기 왜 그래?」

「끼에에에에에엑! 끼아아아아아아아악!」

「얀마! 진정해! 얀마!」

키리얀이 머리를 얼싸쥐더니 별안간 목이 찢어지라 소리를 질렀다. 그건 비명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소리를 듣고 근처의 고블린들이 몰려들었다.

「로드시여! 무, 무슨?」

「끼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에엑!」

-파직!

키리얀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끝내 이성의 끈을 놓고 폭주해버린 것이다.

고블린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바로 지척에 있던 고병갑도 화들짝 놀라며 몇 발짝 물러났다.

‘타는 냄새!?’

스멀스멀 탄내가 올라왔다. 키리얀이 뿜어낸 스파크로 인해 소파 가죽에 그을음이 번지고 있었다.

가만 놔뒀다가는 오늘 들인 노력이 모두 잿더미가 될 수도 있었다.

「야 인마! 정신 차려! 야!」

「끼에에에에에에엑!」

「돌겠네!」

고병갑은 키리얀을 달래보려 애썼다. 그러나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

‘젠장!’

결심을 굳힌 그가 키리얀의 몸을 붙잡았다. 전류가 몸을 통과하니 근육이 저릿저릿해지고 척추가 찌릿했다.

「끄으으으아아!」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병갑은 키리얀을 번쩍 들어 올린 채 천막을 빠져나왔다.

「다 비켜! 다 꺼지라고!」

「아, 알겠습니다!」

「물러나라!」

고병갑이 소리치자 고블린들은 황급히 물러났다.

“후욱! 후욱!”

고병갑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키리얀을 흙바닥에 내리꽂았다. 다소 폭력적인 소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껅!」

키리얀은 짧은 비명을 지르더니 눈이 까뒤집혔다. 발작하던 그의 팔다리가 잠잠해졌고 미친 듯이 튀던 스파크도 사그라졌다.

힘 조절을 했으니 죽지는 않았을 터다. 그저 잠시 기절했을 뿐.

‘시발! 달밤에 이게 뭔 지랄이야?’

그가 저릿저릿한 몸을 손을 쥐락펴락했다. 그러더니 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가서 포션 가져와!」

「옙!」

고붕이가 헐레벌떡 뛰어가 포션을 들고 왔다. 고병갑은 키리얀에게 포션을 먹인 뒤 자신도 조금 마셨다. 몸에 큰 이상은 없는 듯했다.

아닌 밤의 소동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32.

「죄송합니다······.」

키리얀은 곧 정신을 차렸다. 몰골이 조금 초췌해졌지만,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송구해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고병갑은 떨떠름한 마음을 달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 인마. 고개 들어.」

「······.」

고병갑은 ‘왜 갑자기 발작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또 발작할까 싶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에휴.’

그가 그을음 진 소파를 내려보며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

‘건진 게 없네.’

키리얀이 기절해있는 동안 다른 고블린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노멀 고블린들이야 뭐······ 마이동풍이나 다름없었고, 홉 고블린 역시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키리얀처럼 발작하는 고블린은 없었다. ‘아는 게 없으니 발작할 이유도 없다.’라는 느낌이었다.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일단 호기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고블린들에게 어떤 뒷얘기가 있는지 몰라도 당장 알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천천히 알아가면 될 일이다.

「가서 쉬어라.」

「예······.」

키리얀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물러갔다.

고병갑은 소파에 기대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에서 잡념이 구름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럴 때는 담배 한 개비 태워야 했다.

「로드. 어디. 가?」

「담배 피우러 간다, 새꺄. 왜? 한 대 주랴?」

도리도리.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천막을 빠져나왔다.

저녁이 되니 바람이 서늘했다. 막 추운 것은 아니고 딱 좋았다. 대한민국에는 한창 여름이 오고 있건만 이곳은 아직 봄기운이 강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좀 거닐었다. 하늘을 보니 은하수가 무성했다.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물소리가 들렸다. 개울에 도착한 것이다. 어둠에 발을 헛디딜 수도 있기에 혁대에서 랜턴을 뽑아 켰다.

물이 아주 깨끗했다. 랜턴을 비추면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송사리들이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큰 물고기는 진짜로 없네.”

하기야 이렇게 깨끗한 물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없다. 고병갑은 혹시 가재가 없을까 싶어 돌 몇 개를 들춰보다가 관두었다. 국 끓여 먹을 것도 아닌데 가재는 잡아서 어디다 쓰랴?

허리를 편 그가 이번에는 안개 쪽으로 다가갔다.

“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물과 기름처럼 나뉘어진 두 개의 영역.

투명한 막 너머로는 짙은 안개가 껴서 전혀 내다보이지 않았다. 거대 괴수가 나오는 영화 ‘미스트’가 떠올랐다. 그 영화에선 괴물이 안개를 몰고 다녔더랬지.

“이 너머에 괴물 있는 거 아니야?”

그는 실없는 말을 내뱉으며 투명막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아무리 강하게 때려도 소음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물결파 같은 파문만 번져나갔다.

“아 혹시?”

문득 뭔가 생각난 고병갑이 고대의 상점을 열었다. ‘기타’ 카테고리에 들어가 상품 하나를 확인했다.

[탐험자의 깃발]

-가격 : 500,000 수정

-설명 : 희대의 탐험가이자 대륙의 정복자인 렌드리올이 사용하던 깃발. 미개척지에 사용하면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이걸 쓰면 이 너머로 넘어갈 수 있는 건가?”

척 보면 척이라고 하지 않는가. 고병갑에게도 그 정도 촉은 있었다.

“하긴. 지금은 괜찮아도 고블린이 한 오륙백 마리까지 불어나면 땅을 좀 늘리긴 해야겠네. 그나저나 더럽게 비싸구만. 오십만 수정이면 성장의 묘약이 천 개인데.”

묘약 한 병만 마셔도 무지막지하게 강해졌는데 천 병이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 어쩌면 69번째 SS급 각성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

뭐, 수정 오십만 개 캘 때까지 고블린들 허리가 버텨줄지는 미지수다.

그는 실없이 웃으며 상점 창을 꺼버렸다. 그 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누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뭐야?’

그가 랜턴을 휘휘 둘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개울에는 고블린은커녕 고라니 한 마리도 없었다.

“······기분 탓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랜턴을 돌렸다.

생각 없이 돌린 랜턴이 안개 영역을 비추었다.

고출력 랜턴의 강한 빛도 안개를 뚫고 나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투명한 막에 딱 붙어있는 거뭇한 실루엣은 비출 수 있었다.

머리. 어깨. 두 팔.

손으로 쌍안경을 만들어 막 안쪽을 들여보는 거뭇한 실루엣.

“우왁 씨발!”

고병갑이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놀란 것은 고병갑뿐만이 아닌 듯했다. 투명막 건너편의 실루엣도 놀랐는지 몸을 들썩였다.

그리고 1초 후. 실루엣이 안개 너머로 후다닥 달려가며 사라졌다.

“야! 야! 잠깐만!”

고병갑은 얼른 투명막에 붙어 실루엣을 불렀다.

「그 안에 누구야? 너 거기 있지? 야! 대답하라고!」

투명막을 쾅쾅 두들기며 몇 번을 소리쳤다. 하지만 없어진 실루엣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 열두 번 정도 부르짖었을 때 엉뚱한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로, 로드시여······?」

고병갑의 목소리를 듣고 몰려온 고블린들이었다.

고병갑은 아까운 담배를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팔을 축 늘어뜨렸다.

“······도대체 여긴 뭐야?”

33.

「그러니까 너희도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는 건지?」

「예.」

고병갑은 고블린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안개 너머에 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고블린들은 전혀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실 고블린들이 모른다고 대답한 것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웬만한 건 다 몰랐다. 심지어 자신들의 기원조차도.

암컷 고블린이 없다면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언제 태어났는지.

어디서 왔는지.

이면 세계에 있기 전에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도대체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도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쉽지도 않았다.

‘고블린 같지는 않았는데.’

거뭇한 실루엣만 비추었기에 확언은 못 한다. 다만 고블린처럼 생기진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 안개 근처에서 뭘 발견하면 나한테 바로 보고해. 사사로운 것이라도 좋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래. 나 이만 간다. 쉬어라.」

고병갑은 그렇게 말한 뒤 아스빌람을 빠져나왔다. 적막이 감도는 원룸 자취방이 그를 맞이했다.

‘뭐였을까?’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최근 몇 주 동안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 연이어 벌어지긴 했다만, 오늘만큼 기묘한 날도 없었다.

그가 몸을 씻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아, 맞아. 뭐 사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베개에 머리를 대고야 그 생각이 났다. 그래서 고대의 상점을 불러냈다.

고대의 상점은 아스빌람이 아니더라도 열렸다.

살 물건은 진즉 정해두었다. 성장의 묘약. 당분간은 그것만 살 심산이었다.

[성장의 묘약]

-가격 : 500 수정

-설명 : 모든 신체 능력을 영구히 상승시켜주는 묘약.

고병갑은 우선 한 병만 구매했다. 그 뒤 망설임 없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묘약을 먹은 뒤 후유증이 조금 겁나긴 했으나 큰 힘을 얻으려면 그 정도 고통쯤은 감수해야 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곧 전신이 떨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이······.

“음?”

······찾아오지 않았다.

심장은 곧 잠잠해졌다. 저번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뭔가 미적지근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효과 있는 거 맞아?”

고병갑은 눈을 감고 몸에 집중했다. 육체에 새로이 깃든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효과는 있는 것 같았다. 다만, 그 상승 폭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말하자면 저번에는 모든 능력치가 10만큼 올랐는데 이번에는 고작 3~4 정도 오른 것이다.

“······근육의 성장 같은 건가?”

근육을 성장시키려면 중량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점점 더 무거운 무게를 들어야만 점진적 과부하의 원리로 근육이 커진다.

그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묘약 한 병으로도 10만큼의 효과를 얻었지만, 뒤로 갈수록 더 많은 섭취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니면 더 독한 약을 먹던지.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네.”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고병갑은 입맛을 다시며 다른 상품을 둘러보았다.

‘기술’ 카테고리의 여러 상품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검술, 육체 단련술과 같은 교본 말이다. 그런 것도 어쨌든 강해지는 데 일조할 것 같았다.

‘이쪽 걸로 한 번 사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상품 정보를 읽어내려가던 중. 그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물건을 발견했다.

고대 연금술 교본-하급이 그것이었다.

[고대 연금술 교본-하급]

-가격 : 350 수정

-설명 : 고대의 기술 중 ‘연금술-하급’을 다룬 교본. 연금술을 통해 물건을 제작, 강화할 수 있고 특수한 성질을 불어넣을 수 있다.

‘물건을 제작하거나 강화할 수 있다고?’

고병갑의 머리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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