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4화 (14/151)

014. 아스빌람 가꾸기

29.

-띵동. 띵동.

벨이 울리고 잠시. 대문을 열고 40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택배 기사 같지는 않은데?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대문 앞에 이거 버리시는 건가 해서요.”

고병갑이 대문 옆 담장에 기대진 매트리스를 가리켰다. 군데군데 때가 묻고 찢어진 낡은 것이었다. 40대 여인은 뭘 그런 걸 묻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버리는 건데요? 왜요?”

“그럼 혹시 제가 들고 가도 될까요?”

“아, 네네. 들고 가시려거든 들고 가세요. 근데 그거 더러워서 못 쓰실 텐데?”

“아. 그건 상관없어요.”

“그러면 뭐,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40대 여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까딱인 뒤 대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뭘 그런 걸 물어본대? 대충 버린 것 같다 싶으면 들고 가면 되지.”

고병갑은 여인이 중얼거린 말을 듣곤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대충 눈치 보고 슬쩍 해도 딴죽 거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터다. 하지만 열에 하나라도 시비를 걸어오면 문제가 생긴다.

헌터인 그로서는 신상에 빨간 줄을 극도로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뭐······ 버려진 물건 좀 들고 간다고 빨간 줄까지 그이겠냐마는 어쨌든 그랬다.

40대 여인이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고병갑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매트리스에 손은 얹은 상태로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매트리스는 순식간에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오케이. 매트리스 하나 득.”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주말이다. 프리 헌터인 그에게 빨간날은 딱히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 정도 쉬기로 했다. 최근 매일 균열을 돌았으니 여유가 있었다.

오늘 고병갑의 일과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쓸 만한 것을 줍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이곳저곳 쏘다녔더니 벌써 많이 주웠다.

돈이 썩어 넘친다면 백화점이나 대형 판매점을 갔을 테지만, 솔직히 고블린들에게 그 정도 투자는 좀 아까웠다.

걷다 보니 어느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분리수거장으로 가니 버려진 가구들이 꽤 많았다.

장롱부터 시작해서 냉장고, 침대, 서랍, 소파 등등. 노다지가 따로 없었다.

“이야, 이거 상태 좋네.”

가죽 소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찢어졌다뿐이지 기능적인 하자는 전혀 없었다. 돈 아깝게 멀쩡한 걸 왜 버릴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야 좋지 뭐.”

고병갑은 주변 눈치를 슬슬 살피며 죄다 아스빌람으로 보내버렸다. 당장 쓸데가 없어도 일단 챙기고 봤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땅덩이 아닌가?

마실 나가는 느낌으로 설렁설렁 걷다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고병갑은 길 가다 발견한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규모가 꽤 크고 장사가 잘되는 집이었다. 기본 메뉴를 시킨 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지?’

그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식당으로 남녀 한 쌍이 들어오고 있었다.

모자에 마스크에 안경에 아주 얼굴을 꽁꽁 가렸다. 그런데도 압도적인 존재감은 도저히 가릴 수가 없었다.

이소리. 그리고 허길남.

그들은 전국에 450명 밖에 없다는 S등급 헌터였다.

‘와 씨! S등급!’

고병갑은 입을 쩍 벌리고 두 사람의 자태를 감상했다.

그들은 말없이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고병갑은 추하게 목까지 쭉 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전신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일반인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고병갑은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뿜어지는 엄청난 농도의 카르마를 말이다. 마치 거대한 성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S등급도 이런 식당에 밥 먹으러 오는구나.’

S등급쯤 되면 매일 펜트하우스에서 마약 빨고 파티하다가 출출해지면 7성급 호텔에서 정상급 요리사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동네 칼국수 집에도 오다니.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소리랑 허길남 사귄다더니 진짜였나 보네. 사인해달라고 하면 해주려나?’

같은 헌터 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나 D급과 S급의 격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단적인 예로 식당 안 누구도 고병갑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주문하신 얼큰 칼국수 나왔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고병갑은 주문한 음식이 나왔을 때야 비로소 눈을 뗄 수 있었다.

‘쯧. 사인은 무슨. 밥이나 먹자.’

일부러 꽁꽁 싸매고 온 사람에게 사인해달라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진상일 터.

고병갑은 묵묵히 칼국수나 들이켰다.

‘운 좋네. 눈요기도 하고.’

S등급 헌터의 인기는 연예인 못지않았다.

아니. 사실상 연예인과 다를 바 없었다.

무릇 연예인이란 무엇인가? TV 방송이나 가요제, 영화 등에 출연해 장기를 뽐내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상위 헌터 중 다수는 연예인이라 부를 수 있었다.

조금 뜬금없을 수도 있다만, 여기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정부의 우상화 정책이 그것이었다.

28년 전 딥 임팩트가 발발하고 많은 사람이 불안에 떨었다. 균열과 몬스터라는 미지(未知)와 마주했으니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큰 혼란은 금방 종식됐다. 하지만 자잘한 혼란까지 여전히 건재했다.

그래서 정부는 일찌감치 헌터를 광대로 만들기로 했다. TV에 내보내 재롱을 떨게 하고 그들과 관련된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간단히 말해 히어로, 영웅, 구세주······. 뭐, 그런 허울이 필요했던 거다.

우상화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국민들은 헌터를 보다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들이 언제나 자신을 지켜줄 거라는 종교적인 믿음을 얻게 됐다.

헌터들도 광대가 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돈과 명예를 누릴 수 있을 때 누리자는 마인드였다.

덧붙이자면 헌터는 광대로서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노래도 잘했고, 연기도 잘했고, 여러 방면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인 셈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전부 카르마 덕분이다.

미지의 힘 카르마. 그것은 비단 파괴적인 부분에서만 효용을 발휘한 게 아니었다.

체내 카르마 농도가 50%를 넘어서는 상위 각성자들은 기본적으로 선남선녀에 다재다능이었다.

카르마가 그런 부분에까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S급에 이르면 노화까지 거슬렀다. 전설로만 여겨지던 불로장생을 현실로 끌고 온 것이다.

전 세계 부자들이 인공 각성자를 만들려 혈안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늙은 몸뚱이를 버리고 회춘하기 위해서.

뭐······. 그들의 바람과 달리 인공 각성자 제조에 성공한 사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와······. 이소리 진짜 예쁘다. 어떻게 가려도 예쁘냐?”

“이소리도 이소리인데 허길남도 장난 아니네. 눈 부리부리한 것 좀 봐라. 계속 보면 빨려 들어가겠다.”

“야. 저기 보다가 너 보니까 토할 것 같다. 면상 좀 치워 봐.”

“지랄하네. 네 얼굴이나 가려. 입맛 떨어지니까.”

옆 테이블에 앉은 두 청년이 낄낄거렸다.

고병갑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금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을 흘겨보았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고병갑도 어디 가서 못났다는 말을 듣진 않았다. 오히려 인물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군데군데 생기다 만 면모가 있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다.

반면 상위 각성자들은 그야말로 미(美)의 정석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상대적 박탈감도 슬슬 질려갈 때쯤 식사가 끝났다.

고병갑은 미련 없이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얼른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봐도 럭셔리보단 한 개비 225원짜리 담배에 더 어울렸다.

30.

“만 오천 원만 주세요.”

고병갑은 고물상에 들러 수레 2개를 샀다. 수정을 옮길 때 사용할 생각이었다. 많이 낡긴 했다만 수레로서 병신은 아니었다.

“사장님. 저것도 파는 거예요?”

그가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엔 아무렇게나 구겨진 파란 천막이 있었다. 행사용으로 쓰는 커다란 것이었다.

“파는 건 아니고 버리려고 놔둔 건데 왜요?”

“버리실 거면 저 주시면 안 돼요?”

“예? 저거 뭐 어디다 쓰시려고?”

“그냥 좀 쓸 데가 있어서요.”

고물상 주인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천막을 훑어보다가 대답했다.

“쩝. 필요하면 가져가세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고병갑은 수레에 천막을 나눠 실었다.

“어휴. 그거 끌고나 가시겠어요?”

“문제없어요. 고생하세요.”

고병갑은 수레를 가뿐히 끌며 고물상을 벗어났다. 성장의 묘약을 먹은 이래 웬만한 노동은 코 후비는 것만큼 쉬웠다.

그는 한적한 공원으로 들어선 뒤 그것들을 모조리 아스빌람으로 보내버렸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고병갑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벌써 오후 4시였다.

그는 간단하게 채비를 갖춘 뒤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노멀 고블린 몇 마리가 고병갑이 가져다 놓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다.

「로드시여. 왔어?」

「로드. 왔네.」

존칭과 반말이 적절하게 섞인 말투.

노멀 고블린만의 매력이다.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명령했다.

「동굴 가서 애들 불러와. 다른 애들도 싹.」

「싹?」

「전부 끌고 오라는 말이야.」

「아, 알았다!」

고블린들이 후다닥 뛰어갔다. 한 놈만 가면 될 걸 우르르 몰려갔다. 바보 같은 것들.

고병갑은 한편에 쌓인 물자들을 쓱 보았다. 한나절 돌아다니며 모은 거라곤 해도, 그 양이 상당히 많았다.

모두 정리하려면 시간깨나 걸릴 듯싶었다.

잠시 기다렸더니 고블린들이 모두 집결했다. 그들은 ‘로드시여, 로드시여’하며 인사부터 올렸다.

고병갑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휘휘 손사래 쳤다.

「어휴. 그놈의 로드시여는. 노이로제 걸리겠다, 이것들아.」

「우으······.」

「시끄럽고 지금부터 막사 구성에 들어간다. 알겠냐?」

「막사. 말입니까?」

「그래. 일단 저기 있는 천막부터 펼쳐.」

「아,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이 고병갑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평평한 땅을 골라내 행사용 천막을 펼치고, 그 아래에 돗자리를 깔았다. 침대와 소파는 각을 맞추어 배치했다.

각종 가구도 줄지어 놓았다. 솔직히 미적인 관점으로 보면 개판이었다.

‘뭐 어때? 모델하우스 만들 것도 아닌데.’

한 시간쯤 흐르자 그가 가져온 짐들이 전부 제 자리를 찾았다. 완성되고 나니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고병갑은 완성된 막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꽤 모양이 나오네.’

「앞으로 일 끝나면 여기서 쉬어라. 더럽게 아무 데서나 굴러다니지 말고.」

「옙!」

「그리고 너희들. 당장 강으로 튀어가서 목욕해라. 진짜 냄새나서 같이 못 있겠네.」

「우으······.」

「앞으로 하루에 한 번은 무조건 강에 가서 씻어. 알겠냐!」

「아,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이 강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모두가 떠난 뒤. 고병갑은 소파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고대의 상점.’

그가 속으로 읊조렸다. 곧 눈앞으로 창 하나가 떠올랐다.

[고대의 상점]

-건설

-기술

-잡화

-기타

[보유 수정 : 3,147]

‘이야. 3천 개나 모았어?’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천몇 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3천 개를 넘겼다.

확실히 일꾼이 90명이나 되니 채굴 속도가 빨랐다.

고병갑은 찬찬히 물품들을 둘러보았다.

재화가 3천이나 되니 구매할 수 있는 품목도 늘어났다.

뭐라도 사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도대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시발. 골드 드래곤 고기는 뭐길래 2000 수정이나 해? 고기가 집보다 비싼 게 말이 되냐?’

2000 수정이나 주고 샀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면 그것만큼 통탄한 일도 없다.

‘설명이 안 적혀 있으면 뭘 보고 사라는 거야? 하여간 제대로 된 게······ 음?’

불친절한 상점에 불만을 호소하던 순간이었다.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골드 드래곤 고기]

-가격 : 2,000 수정

-설명 : 신수(神獸) 골드 드래곤의 고기. 최상급 식자재로써 신들의 만찬에 쓰인다. 원기보충에 탁월한 효능을 가졌다. 다량 섭취 시 드래곤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오, 뭐야? 설명도 있잖아?”

고병갑은 자신이 멍청이가 돼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설명을 요구하자 친절하게 주석이 떠오른 것이다.

내친김에 궁금했던 상품들을 전부 훑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그는 제일 궁금했던 ‘기타’ 카테고리부터 탐독에 들어갔다.

‘보자······.’

고병갑이 품목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암컷 고블린]

-가격 : 500,000 수정

-설명 : 저주로 멸종한 암컷 고블린. 번식 기능이 있으며, 암컷을 낳을 수 있다.

[탐험자의 깃발]

-가격 : 500,000 수정

-설명 : 희대의 탐험가이자 대륙의 정복자인 렌드리올이 사용하던 깃발. 미개척지에 사용하면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트로바틴의 영혼]

-가격 : 700,000 수정

-설명 : 아스빌람의 12영웅 중 제1 기사 트로바틴의 영혼. 사용 시 생전 그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슘블란트의 영혼]

-가격 : 700,000 수정

-설명 : 아스빌람의 12영웅 중 대마법사 하슘블란트의 영혼. 사용 시 생전 그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

······

······

[계몽의 씨앗]

-가격 : 10,000,000 수정

-설명 :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씨앗. 신의 노여움을 사 끝내 지혜를 잃은 어느 종족의 얼이 담겨있다. 세계수가 싹을 틔우면 종족의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다.

마침내 마지막까지 읽은 고병갑의 감상은 이러했다.

‘뭔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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