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자리
25.
균열의 내부. 통칭 ‘이면 세계’라 이름 붙은 아공간(亞空間)은 참으로 신비로운 곳이다.
현실을 그대로 본뜬 모양새와 그곳에서 아무런 에너지 공급 없이 무한정 살아가는 몬스터. 미스터리라는 단어가 실로 잘 어울렸다.
28년 전 딥 임팩트 이후, 이면 세계에 관한 연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인류가 밝혀낸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부나마 밝혀진 사실을 나열하자면 대충 이러했다.
첫째. 이면 세계는 균열의 발생 직후의 모습을 모방한다. 다시 말해 균열이 이미 나타났다면 설령 그곳의 지형이 통째로 뒤바뀌어도 이면 세계엔 반영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으로 이면 세계에서 그 어떤 무지막지한 일이 벌어져도 바깥(현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둘째. 이면 세계에서 모방 된 물질은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없다. 처음 균열이 나타났을 당시만 하더라도 ‘균열이 지구의 자원 고갈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가 될 것이다.’라며 설레발 쳤다.
안타깝게도 그건 허황된 꿈이었다. 예컨대 다이아몬드 광산에 균열이 발생한다 쳐도 다이아몬드의 매장량이 2배로 뻥튀기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균열에서 취할 수 있는 자원은 몬스터가 뱉는 부산물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전부 신기루였다.
마지막으로 이면 세계가 완전히 붕괴할 때까지 탈출 포탈을 넘지 못한다면, 그 안에 갇힌 사람은 증발한다.
보스 몬스터를 퇴치하면 1~2시간 안에 이면 세계가 붕괴한다. 그 전에 탈출 포탈을 넘어 바깥으로 나가면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러지 못했을 경우가 문제다.
안에 갇힌 사람이 균열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딥 임팩트 초창기에는 그런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증발한 사람은 지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과학자들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붕괴하는 균열에 탐사로봇을 투입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매분 12장의 사진을 보내기로 했던 탐사로봇은 이면 세계가 완전히 붕괴한 이후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전송한 뒤 연결이 끊어졌다.
탐사로봇이 보내온 사진에는 형형색색의 빛줄기만이 담겨있었다.
“쩝.”
고병갑은 두 번째 대목을 떠올리고 입맛을 다셨다.
이곳이 무엇을 만들던 공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직 쓸만한 잡동사니가 내부 곳곳에 버려져 있었다.
고병갑이 눈독 들인 건 한쪽에 가득 쌓인 플라스틱 상자와 양동이였다. 그것을 아스빌람으로 들고 가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듯했다.
물을 떠먹는 데 써도 되고, 수정을 담아 옮기는 데 써도 된다. 하다못해 깔고 앉는 의자로 쓸 수도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스빌람으로 몇 개 옮겨 보았으나 결과는 뭐······ 뻔했다.
‘안 되네.’
이면 세계의 물질은 아스빌람으로 넘어가는 순간 연기가 되며 흩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이내 털어냈다.
상자 더미를 지나치던 고병갑이 한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검지로 입술을 가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쉿.」
키리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병갑은 철제 난간에 몸을 숨기고 아래쪽을 주시했다. 가브리 무리가 1층을 서성이고 있었다.
고병갑은 찬찬히 놈들의 머릿수를 세었다.
한 놈 두시기 석 삼 너구리······.
‘스물세 마리.’
셈을 마친 고병갑이 키리얀에게 속닥여 말했다.
「저 아래 말 자식들 보이지?」
「예. 보입니다.」
「지금부터 저놈들을 요격할 거야. 가능하겠어?」
「문제없습니다.」
「좋아. 준비해.」
고병갑은 난간에 총구를 걸치고 가브리를 조준했다. 키리얀은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피뢰침에 힘을 집중시켰다.
둘이 눈을 맞추었다.
-준비됐냐?
-예!
바로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래쪽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타다다당!
-파지지직!
“히이이이잉!”
느닷없이 쏟아지는 총탄과 전격에 가브리들이 발광했다. 여느 야생동물이었다면 꽁지가 빠지라 도망쳤겠지만, 놈들은 몬스터다. 당장 눈알을 돌리며 공격이 날아오는 곳을 찾아대기 시작했다.
“히이이잉!”
고병갑은 얼마 안 가 위치를 들켰다. 다행히 자리를 옮길 필요는 없었다. 가브리가 아무리 도약해봐야 3층 높이의 난간에는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형 몬스터였다면 계단을 타고 밀어닥쳤을 테지만 짐승 대가리에겐 어려운 과제였다.
이성을 잃고 펄쩍펄쩍 뛰는 가브리.
고병갑의 입장에선 어서 죽여달라며 아우성치는 표적일 뿐이었다.
그는 차근차근 가브리의 수를 줄여나갔다.
총성과 소란을 듣고 몬스터 몇 마리가 더 몰려들었다. 고병갑은 도합 서른 마리의 가브리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총과 피뢰침이 열기로 바싹 달아올랐다. 고병갑은 한숨 돌리며 몬스터들의 동향을 살폈다.
‘이 근처에는 더 없나 본데.’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십여 분간 뜸을 들이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1층은 죽은 가브리로 너저분했다. 시체란 건 언제 봐도 기분 나쁘다. 헌터 경력이 몇 년이건 똑같았다.
다만 막 헌터가 됐을 당시처럼 호들갑 떠는 일은 없었다. 고병갑은 일꾼으로 쓸 고블린 몇 마리를 불러냈다.
「여기서 조용히 마석 수거하고 있어. 잠깐 정찰 좀 하고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공장 건물을 빠져나갔다. 이곳은 부지가 굉장히 넓었다. 버려진 건물만 해도 서너 채가 더 있었다.
고병갑은 습관적으로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남은 몬스터는 스무 마리쯤이려나.’
탄약은 충분했다. 고병갑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다시 공장 건물로 돌아갔다. 짧은 사이 고블린들이 마석 해체를 끝내놓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고깃덩이 챙겨서 돌아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고붕이는 잠깐 이리로 와봐.」
「예? 옙!」
고붕이가 피 묻은 손을 쓱쓱 닦으며 다가왔다.
「새로 들어온 애들 상태 어때?」
「상태. 말입니까? 어······.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들 조금. 놀랐습니다.」
「흐음. 그래?」
고병갑은 씩 웃으며 슬그머니 어깨동무했다.
「고붕아. 너한테 특별히 하사할 임무가 있다.」
「이, 임무. 말입니까?」
「그래. 오늘부로 너를 작업반장으로 임명할 생각이야.」
「······작업반장?」
「그래, 작업반장.」
고붕이는 작업반장이란 단어가 어색한지 몇 번 곱씹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내가 부재중일 때 새로 들어온 애들 교육하고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면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 예. 아, 알 것. 같습니다.」
고병갑은 “크······.”소리를 내며 작게 손뼉쳤다.
「하여간 고붕이 똘똘하단 말이야. 내가 인마! 너를 믿으니까 그런 막중한 직책을 주는 거야. 앞으로 너한테 거는 기대가 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열심히 해. 나중에 아스빌람 재건되면 한 자리 만들어 줄 테니까.」
고붕이가 눈에서 별을 쏟아냈다.
녀석은 뭔가 해내고 말겠다는 표정을 띤 채 아스빌람으로 돌아갔다.
참 부려먹기 쉽단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던 고병갑은 문득 뒤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키리얀이 서운하다는 눈빛으로 고병갑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야야. 서운해할 거 없어. 너한테 하사할 직책도 다 생각해 놨으니까.」
「저,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인마. 고붕이한테 준 임무보다 더 막중한 거야. 아직 시기가 적절치 않아서 아무 말 않고 있었던 것뿐이지.」
‘더 막중한’이란 말이 나오자 키리얀이 들뜬 반응을 보였다.
「어떤 임무입니까?」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말해 줘봐야 소용없거든. 그러니까 괜히 다른 고블린들 앞에서 으스대지 마, 내가 말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명심하겠습니다!」
둘은 짧은 휴식을 마친 뒤 나머지 몬스터를 사냥하러 나섰다.
참고로 고병갑이 키리얀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직책은 ‘발전기’였다.
26.
D급 몬스터 혼 가브리.
여느 가브리와 비슷한 생김새지만 이마에 기다란 뿔이 나 있다. 머리 골격이 피부를 뚫고 나와 단단한 투구를 이룬 것도 특징이다.
언뜻 환상의 동물 유니콘을 연상시키지만, 네 갈래로 벌어진 아가리를 들이밀며 돌진하는 꼴은 영락없는 악귀였다.
고병갑은 총을 던져두고 장검을 뽑았다. 탄약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저 혼 가브리와 몸으로 부닥쳐보고 싶은 마음에 기행을 부린 것이었다.
“히이이이잉!”
“흡!”
장검과 뿔이 교차하며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확실히 노멀 가브리에 비하면 힘이 월등히 좋았다.
하지만 치명적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하압!”
한순간 고병갑이 힘을 집중시켜 혼 가브리를 튕겨냈다. 놈의 몸이 휘청인 틈을 타 검을 내리그었다.
혼 가브리의 목과 어깨에 기다란 자상이 남았다.
“께기기기기긱!”
비틀거리며 피를 뿜는 혼 가브리. 고병갑은 당장 끝내지 않고 몸을 뺐다.
자세를 가다듬은 그가 도발하듯 칼날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히이이이이잉!!!”
잔뜩 성이 난 혼 가브리가 발을 굴렀다. 뿔을 앞세워 돌진하는 모양새가 흡사 황소 같았다.
고병갑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녀석의 움직임을 쫓았다. 요지부동이던 그가 충돌하기 일보 직전에서야 칼날을 뿌렸다.
-서걱!
혼 가브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목이 달아난 탓이다. 쓰러진 몸뚱이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전투 종료. 이면 세계의 보스 몬스터까지 말끔하게 처리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됐어. 고작 한 마리 잡은 것 가지고 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으쓱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키리얀과 함께 죽은 몬스터에게서 마석을 채취했다. 다 합해 봐야 여덟 마리뿐이라 일꾼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마석으로 두둑한 주머니를 챙겨 이면 세계를 빠져나왔다.
토벌을 마치니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각이었다.
“세 시간 좀 넘게 걸렸나.”
예전이었다면 족히 2배는 걸렸을 것이다.
아니. 진짜 예전이었다면 처음 가브리떼를 마주했을 때 죽었으리라.
더 지체할 거 없이 서울로 돌아갔다.
가는 길. 올림픽 대로는 더이상 통제되지 않았다. 아침에 있었던 A랭크 균열이 그새 공략된 모양이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협회까지는 금방이었다.
고병갑은 오늘 수거한 마석을 전부 팔아넘겼다.
상담원 김슬기는 친절한 목소리로 마석 값을 불러주었다.
“하품질 마석 13.6kg에 중품질 마석 한 덩이네요. 78만 원 책정해드리겠습니다.”
“예? 그것밖에 안 되나요?”
“네?”
생각보다 금액이 적었다.
보통 D랭크 균열을 한 번 돌면 못해도 130만 원은 나온다.
“아! 아아······.”
그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고블린 때문이구나.’
무려 56마리의 고블린에게서 마석을 채취하지 못했으니 그만큼 돈이 줄어든 게 당연했다.
입맛이 쓰긴 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F랭크 균열보다는 값이 잘 나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네요.”
“아하하······. 연동된 계좌로 입금해 드리면 될까요?”
“아니요. 현찰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정산을 받은 뒤 그가 향한 곳은 철물점 겸 농기구 판매점이었다.
일꾼이 늘었으니 그만큼 장비를 보급해야 한다.
‘보자······, 56명이 더 들어왔으니까 못해도 50개는 더 사야 하려나? 제길. 50개만 사도 175만 원이잖아? 뭐가 그렇게 비싸?’
고병갑은 ATM기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곡괭이를 산다고 175만 원을 지출하면 명백한 적자였다.
거기다가 오늘 사용한 탄약 값이나 기름값 등등을 더하면······.
‘에이 쯧! 어차피 필요한 건데 어쩔 거야?’
그가 망설임을 떨쳐냈다.
그래. 어차피 필요한 물건이 아닌가?
그나마 최근에 목돈이 들어왔으니 망정이다. 고병갑은 100만 원을 인출 한 뒤 농기구 판매점으로 갔다.
“어서 오세······. 아이고 사장님~”
가게 주인은 벌써 두 번이나 온 고병갑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처음 왔을 때는 곡괭이 10개를 사가더니, 바로 이어서 20개나 더 사간 청년이었다.
‘또 왔네! 오늘은 몇 개나 사가려나?’
가게 주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젊은 사장님 또 오셨네요. 오늘도 곡괭이 찾으세요?”
“3만 원.”
고병갑은 가게 주인을 보자마자 선포하듯이 말했다.
“예?”
“곡괭이 50개. 현찰로 개당 3만 원 어떠세요?”
‘훅 들어오는구만!’
가게 주인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가 영업용 미소로 무장하며 대꾸했다.
“아, 아이구 젊은 사장님. 오늘은 또 50개나 사 가시게요? 나, 날도 더운데 일단 물이라도 한잔······.”
“곡괭이 50개. 현찰 150만 원.”
고병갑은 단호했다.
상황을 파악한 가게 주인이 다급하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개, 개당 3.2로 160만 원으로 하시죠? 이것도 제가 손해 보는 건데. 하하하······.”
“다른 데 둘러보고 오겠―”
“오케이! 백오십!”
가게 주인이 숨까지 헐떡이며 소리쳤다.
고작 10만 원 때문에 물주를 놓칠 수야 없었다. 오늘 50개를 사 간다면 다음번엔 100개를 사갈 지도 모를 일 아닌가?
자고로 장사란 두수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
“현찰 150만 원에 곡괭이 50개. 그렇게 합시다!”
“좋네요.”
고병갑은 150만 원을 지불하고 곡괭이 50개를 사들였다. 수량이 많은지라 가게 주인이 트럭에 실어 집 앞까지 배달해주기로 했다. 고병갑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예예~ 들어가세요.”
고병갑은 철물점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공장 같은 데서 직접 납품받든가 해야지, 원. 더럽게 비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