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1화 (11/151)

011. 자리

23.

「······.」

평화롭던(?) 이면 세계에 이변이 찾아왔다.

불청객을 처단하려 벼르고 있던 고블린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우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한 홉 고블린이 눈으로 물었다. 야 이거 뭔데?

질문받은 홉 고블린이 마찬가지로 눈빛으로 대답했다. 몰라 나 무서워······.

「어쭈, 이것들 봐라? 상황 파악 안 되지?」

고병갑은 기가 찬다는 듯이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가 어떤 노멀 고블린 앞에 섰다. 노멀 고블린은 얼어붙어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뭐? 그걸로 나 찌르려고?」

그가 노멀 고블린이 쥔 조악한 단검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아니 아니······.」

「내놔.」

「우으.」

「내놓으라고.」

고병갑이 낮게 으름장 놓았다. 노멀 고블린은 덜덜 떨면서 단검을 손잡이부터 내밀었다.

고병갑은 단검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뒤로 획 던져버렸다. 저런 건 챙겨봤자 돈이 되지 않는다.

「왜 저런 살벌한 걸 들이밀고 그래? 너희한테는 칼보다 곡괭이가 더 어울려.」

「무슨. 말?」

「신경 쓰지 마. 무슨 말인지 곧 알게 될 테니까. 보자······, 어이! 거기 너.」

고병갑이 사위를 쓱 훑다가 소리쳤다. 지목당한 홉 고블린이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저, 저 말입니까?」

「그래. 하나 물어보자. 이곳엔 고블린뿐이냐?」

「어······, 어······.」

「뭘 어물거려. 빨리 말해.」

「고블린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다른 거?」

「무, 무서운 말. 있습니다.」

홉 고블린이 폐공장 깊숙한 곳을 응시하며 더듬거렸다.

「무서운 말?」

「저희는. 저기로 가면. 아, 안됩니다. 무서운 말. 화냅니다.」

‘제길. 고블린만 있는 건 아닌 건가. 그나저나 말 형상의 몬스터라면······.’

고병갑의 머릿속으로 몬스터 몇 마리가 떠올랐다. 전부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뿐이다. 짐승형 몬스터는 대개 그랬다.

그는 잠시 턱을 매만지다가 지척에 있는 노멀 고블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 아스빌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

「아, 아스빌람!?」

고블린들의 눈빛에 이채가 띄었다. 짙은 그리움이 애달픔이 느껴졌다.

「아스빌람으로 돌아가고 싶은 놈들은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

고블린들이 이번에도 서로를 돌아보았다. 고병갑은 저들에게 깔린 망설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뭐? 왜? 또 뭐가 문제인데?」

「저, 저기.」

「읊어봐.」

「저, 정말로. 로드가. 마, 맞으십니까? 저희의. 로드가······.」

「그래! 내가 너희 로드다! 보고도 모르겠냐? 왜? 고블린이 아니라서 아니꼬워?」

「그,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홉 고블린의 시선이 다시금 폐공장 쪽으로 향했다. 그랬다. 그들은 ‘무서운 말’이 두려운 것이었다.

고병갑은 어련히 눈치챈 뒤 선포하듯 말했다.

「저 안쪽의 것들이 해코지할까 봐 겁나는 거냐? 걱정하지 마라. 나는 내 소중한 노예······. 아니, 소중한 식솔들이 괴롭힘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면 너희를 아스빌람으로 데려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어주겠다. 어떠냐? 내게 복종할 테냐?」

「아스빌람!」

「아스빌람!」

고블린들이 감격에 찬 얼굴로 아스빌람을 부르짖었다. 그때 고병갑의 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노멀 고블린(31), 홉 고블린(25)가 아스빌람에 귀속되었습니다.]

총 56마리의 새로운 고블린이 수족으로 들어왔다. 현재 데리고 있는 녀석들과 합치면 90마리였다.

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밥상에 숟가락이 느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만, 일꾼이 많아지는 건 언제나 환영이었다.

「로드시여!」

「로드시여!」

고블린들이 고개를 바싹 조아렸다.

그때 고병갑은 털이 솟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과격하게 고개를 돌렸다. 전방을 주시하는 눈빛이 불에 타는 듯했다.

「인사는 됐으니까 퍼뜩 일어서!」

고병갑은 그렇게 말한 뒤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결코 감지에 능한 타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무리의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 소란을 떨어댔나.’

고병갑이 폐공장을 쏘아보다가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댔다.

아가리가 네 갈래로 찢어지고, 멧돼지 같은 엄니를 지닌 괴물 말이 떼거리로 몰려들고 있었다.

‘망할. 가브리인가!’

몬스터의 이름은 가브리. E급 짜리 몬스터로 짐승형에 속하는 녀석이었다.

짐승형 몬스터의 약점이라 하면 인간형 몬스터만큼 악랄하지 못하고, 대체로 지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놈들의 전투 방식은 상당히 정직했다.

하지만 약점을 상쇄할 만큼 큰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육체가 매우 강인하다는 것이다.

그건 체급과 등급이 올라갈수록 더욱 도드라졌다. 가브리만 하더라도 준중형에 속하는 커다란 몬스터였다. 어지간한 경주마를 왜소하게 만들 만큼 덩치가 크다는 소리다.

그런 놈들이 서른 마리 넘게 달려오고 있으면 지레 겁을 삼키는 게 인지상정이다.

‘젠장. 지형이 안 좋은데······.’

짐승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기본 전략은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 놈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위치에서 총을 쏴대면 굳이 몸으로 부닥치지 않아도 손쉽게 정리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전략은 거의 하위의 세계에서만 통했다.

뭐가 됐건 어디 숨기에는 지형이 너무 탁 트여 있었다. 하다못해 공장 안으로 숨어들기라도 했으면 사정이 나았을 터다.

고병갑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전부 내 말에 집중한다! 집중!」

「집중!」

고블린들은 자연스럽게 복명복창했다.

「내가 신호하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전부 저놈들한테 투척해라. 활을 가진 놈은 화살을 쏘고 창을 가진 놈은 투창하라는 말이야. 알아듣겠어?」

「예!」

「그다음, 내가 흩어지라고 하면 부리나케 산개해. 알겠냐!」

「알겠습니다!」

말발굽 소리에 맞춰 진동하는 심장. 고병갑은 호흡을 진정시킨 채 스코프에 눈동자를 얹었다.

‘내가 포섭한 고블린이 56마리다. D랭크 균열의 몬스터 수는 120에서 130마리 정도니까 비관적으로 잡아도 80마리만 더 정리하면 돼.’

꿀꺽.

고병갑은 가브리 떼가 자신이 정한 데드라인을 넘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히이잉!”

최선두의 가브리가 데드라인을 넘었다. 고병갑은 별안간 총을 쏴대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기다려!」

-타다다다당! 타다다당!

총구가 그야말로 열나게 불을 뿜었다. 총알은 예외 없이 가브리의 몸통을 때려 박았다.

“뀌에에에엑!”

선두로 달려오던 놈들부터 자지러졌다. 후발주자들은 발이 걸려 바닥을 뒹굴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사격 솜씨도 좋아졌어.’

성장의 묘약을 먹은 후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건 완력과 지구력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모든 감각. 이를테면 사격에 쓰이는 집중력과 판단력까지 좋아졌다.

고병갑은 탄알집 하나를 전부 비우고 재빨리 재장전했다. 그의 손은 과장 조금 보태서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탁! 노리쇠를 때려 장전을 마친 고병갑이 2차 사격을 시작했다. 고블린들은 매섭게 울려 퍼지는 총성이 무서운지 몸을 움츠렸다.

그가 기어코 탄알집 2개를 전부 비워냈을 때, 가브리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고병갑은 세 번째 탄창을 갈아 끼우며 바락바락 외쳤다.

「쏴! 전부 쏴!」

「쏴라!」

「케르르르륵!」

고블린들이 화살을, 창을, 그 밖에 손에 쥔 모든 것을 저쪽으로 집어 던졌다.

물론 적중률은 형편없었다. 튀는 게 더 많았고, 어떤 것은 가브리에게 닿지조차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나름의 장애물이 되어 가브리의 진격을 늦추었다.

「흩어져!」

「흩어져라! 흩어져!」

장전을 마친 고병갑은 그렇게 외치며 세 번째 탄창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남은 가브리는 기껏 10마리였다.

고병갑은 침착하게 놈들의 머릿수를 줄여나갔다. 그는 가브리가 30m 앞까지 접근했을 때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철컥!

탄알집이 모두 비었다.

고병갑은 총을 던지고 장검을 뽑았다.

‘다섯 마리. 될까?’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투지를 잃지 않은 건 다섯 마리였다. 녀석들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덤프트럭처럼 양 돌진했다.

네 갈래로 벌어진 아가리가 문제가 아니다. 저 몸통에 부닥치는 것만으로 뼈 몇 개쯤 부러져 나갈 터다.

고병갑이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다음 순간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세상이 느려졌다.

‘왼쪽 놈부터!’

그가 마음을 굳히고 땅을 찼다. 한껏 늘어놓았던 검을 넓게 그으며 왼쪽으로 몸을 던졌다.

-서걱!

“끼에에에에엑!”

좌측에서 덤벼오던 가브리의 앞다리 하나가 통째로 잘려나갔다. 놈은 균형을 잃고 나자빠졌다. 고병갑은 가브리의 돌진을 피해내고 얼른 자세를 다잡았다.

남은 네 마리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즉시 방향을 바꾸었다. 고병갑은 쉬지 않고 검을 뻗었다.

칼날이 또 한 놈의 목을 관통했다. 그러자마자 아래로 뚝 떨어진다. 가브리의 목과 가슴팍이 벌어져 내장이 콸콸 쏟아졌다.

“께에에에엑!”

‘앞으로 세 놈!’

그가 쉴 새 없이 팔을 휘둘렀다. 한 번의 휘적거림이 살점 한 덩이를 도려냈다. 가브리들은 몸통으로 내려찍거나 발차기를 하는 등 발악했으나 결코 고병갑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의 움직임이 워낙 민첩했기 때문이다.

소름 돋는 비명을 뿜으며 두 놈이 연달아 쓰러졌다.

“히이이이잉!”

마지막 남은 가브리가 쩍 벌어진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피하기엔 늦은 공격이었다.

“쳇!”

고병갑은 급한 대로 팔을 올려 머리를 방어했다. 가브리가 아가리를 다물자 찌릿한 고통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하지만 잘려나가지도,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녀석의 엄니는 다만 살갗을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이 말 새끼가!”

고병갑은 분노의 칼질로 마지막 가브리의 몸통을 난자했다. 곧 찢어질 듯한 신음을 내며 가브리가 쓰러졌다.

몬스터의 피를 흠씬 뒤집어쓴 고병갑은 조용히 승리를 만끽했다.

24.

「마석 거두어 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고.」

「예!」

고병갑은 고블린들을 시켜 가브리의 마석을 수거했다. 그 사이 팔의 부상을 살폈다.

살갗이 찢어졌다. 그러나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는 최하급 포션을 발라 상처를 치료했다.

‘가브리가 치악력으로 유명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이렇게 상처가 옅다니.’

각성자의 육체 강도는 일반인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그게 철판 같은 피부나 무쇠 같은 뼈를 얻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가브리의 마지막 공격은, 보통 같았다면 최소한 뼈가 으스러졌을 공격이었다.

‘육체 강도도 오른 건가? 대단한데.’

상위 각성자들의 ‘육체강화’나 ‘배리어’에 비할 바는 아니다만, 여느 하위 각성자는 넘볼 수 없는 강인한 육체를 얻었다.

고병갑은 저릿저릿한 팔을 내려 보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남은 몬스터는 오십 정도인가.’

치료를 마친 그가 재정비를 시작했다.

빈 탄알집을 수거해 새것으로 교체하고 총기와 칼의 상태도 점검했다. 칼날은 이가 상당히 나가 있었다.

싸구려 보급용 검 치고는 그런대로 버텨주고 있는 것이다.

곧 고블린들이 마석을 전부 모아 왔다. 고병갑은 두툼한 주머니를 챙긴 뒤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자, 여길 넘으면 너희들이 그토록 원하던 아스빌람에 갈 수 있다. 전부 넘어가.」

「그······. 로드. 께서는?」

「내 걱정은 됐으니까 얼른 넘어가. 너희들이 여기 있어 봤자 방해만 된다.」

「아,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은 고병갑의 지시를 따라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한 녀석까지 보내고 나서, 고병갑은 나지막이 한 이름을 불렀다.

「키리얀 나와!」

그가 일갈하자 새하얀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체구는 홉 고블린 정도이며 피부가 희고 피뢰침 모양의 창을 들고 있다.

전격을 다루는 알비노 고블린이었다. 랭크는 C등급으로 하위에선 강자로 통했다.

「부르셨습니까, 로드시여.」

「어. 나랑 나머지 괴물 좀 정리하자. 고생 좀 해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병갑은 배낭을 짊어진 후 담담히 폐공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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