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긴급 토벌
17.
-깡! 깡! 깡! 깡!
곡괭이질 소리가 요란하다. 고병갑은 주기적으로 귓전을 때리는 소음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꽁초를 털어 끈 뒤 동굴로 들어섰다.
랜턴 10개가 설치된 내부는 밝았다. 고블린들은 각자 곡괭이 한 자루씩 쥐고 열심히 수정을 채굴했다. 노멀 고블린 한 마리는 다른 고블린들이 캐놓은 수정을 거두어다가 수정 투입구에 집어넣는 일을 했다.
‘고대의 상점.’
고병갑이 속으로 읊조렸다. 그의 눈앞으로 창 하나가 떠올랐다.
[고대의 상점]
-건설
-기술
-잡화
-기타
[보유 수정 : 501]
‘500개 넘었네.’
「자! 쉬고 하자! 다들 연장 내려놓고 나와서 간식들 먹어!」
「옙!」
고블린들이 작업을 중단했다. 그들은 연장을 한데 모으고 랜턴을 끈 뒤 바깥으로 나왔다.
「이리 와서 음료수랑 빵 하나씩 가져가.」
커다란 아이스박스 2개엔 각각 샌드위치와 이온 음료가 들어있었다. 고블린들은 고병갑의 지시에 따라 빵과 음료를 하나씩 챙겨갔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간식을 먹는 고블린들. 고병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샌드위치 하나를 까먹었다.
그러면서 고대의 상점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수정 500개로 살 수 있는 게 뭐 있으려나.’
고대의 상점에는 총 4개의 카테고리가 있다.
건설, 기술, 잡화, 기타.
개중에 수정 500개로 구매할 수 있는 품목은 몇 개 되지 않았다. 특히 최저가가 50만 수정으로 시작하는 ‘기타’란의 물건은 단 하나도 살 수 없었다.
‘일단 건설이랑 기타는 거르고.’
그는 ‘기술’과 ‘잡화’ 카테고리의 상품들을 위주로 보았다. 재화가 한정돼있으니 아이 쇼핑은 길어지지 않았다.
[기술]
-고대 검술 교본-하급 (320 수정)
-고대 육체 단련술 교본-하급 (320 수정)
-고대 운기조식 교본-하급 (350 수정)
-고대 연금술 교본-하급 (350 수정)
[잡화]
-전사의 물약 (300 수정)
-현자의 물약 (300 수정)
-경화의 물약 (300 수정)
-신속의 물약 (300 수정)
-성장의 묘약 (500 수정)
500 수정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저 정도가 전부였다.
‘흠······.’
여러 품목 중 고병갑의 주의를 이끈 것은 ‘성장의 묘약’이었다.
그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뭘 성장시켜 준다는 거지? 혹시 체내 카르마 수치라도 올려주는 건가?’
카르마.
모든 각성자와 몬스터의 근간이 되는 미지의 에너지다. 체내 카르마 수치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카르마 수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큰 힘을 낼 수 있었다.
고병갑을 비롯한 하위 각성자들은 체내 카르마 수치가 5~11% 정도였다. 그 덕분에 균열의 역장이나 이면 세계에서도 멀쩡할 수 있었고, 여느 일반인보다 건장하며 강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상위 각성자처럼 카르마를 통해 육체를 강화한다든지, 초능력과 같은 기행을 부린다든지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하위 각성자가 결코 상위의 벽을 넘을 수 없는 이유였다. 더불어 상위 각성자들이 총과 같은 화기를 쓰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만약 저게 정말로 카르마를 늘려주는 거라면······.’
고병갑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을 굳히고 성장의 묘약을 사들였다.
보유 수정이 501개에서 1개로 줄어듦과 동시에 유리병 하나가 떠올랐다. 그가 재빨리 손을 뻗어 낚아챘다.
이윽고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성장의 묘약]
-모든 신체 능력을 영구히 상승시켜주는 묘약.
‘모든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준다고? 그것도 영구히?’
그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손바닥 크기의 유리병에는 녹색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고병갑은 코르크 마개를 따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먹고 탈 나는 거 아니야?’
그런 걱정도 잠시. 고병갑이 성장의 묘약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음? 먹을 만한데?’
꺼림칙한 생김새와 달리 맛은 그런대로 있었다. 은은한 단맛이 혀를 타고 입안에 퍼졌다. 마치 고로쇠 수액 같은 느낌이었다.
기세를 몰아 전부 해치웠다. 효과는 즉시 찾아왔다.
-두근두근!
심장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호흡은 가빠지고 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전신의 근육이 이완수축을 반복했다.
‘뭐, 뭐야 이거!?’
「으거거걹!」
고병갑이 격동하는 심장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러자 샌드위치를 까먹으며 깔깔대던 고블린들이 놀란 눈을 한 채 뛰어왔다.
「로,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으그그그긁! 그아아아앍!」
고블린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부축했다. 고병갑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덜덜 떨기만 했다.
몸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고블린들은 어쩔 줄 몰라 ‘로드시여! 로드시여!’ 소리만 연신 뱉어댔다.
‘시발. 거지 같은 거 주워 먹고 이렇게 가는구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정체도 모르는 걸 주워 먹었을까! 그런 탄식도 잠시. 그가 빠르게 진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심장의 격동도, 몸의 떨림도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
고병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보았다. 이윽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몸을 더듬거렸다.
“와······.”
몸이 변했다.
18.
고병갑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손가락 하나하나에 실리는 힘을 느꼈다. 도저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커다란 힘이 느껴졌다.
체내 카르마를 폭발시켜 얻는 힘이 아닌, 순도 100% 육체의 힘.
‘이게 내 몸이라고?’
성장의 묘약을 먹은 뒤 그는 거의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체격이 커지고 커진 몸에는 근육이 가득 들어찼다. 그뿐 아니라 정신도 맑아졌으며 시력과 청력 등의 감각 역시 놀랍도록 곤두섰다.
‘카르마가 늘어난 것 같지는 않은데.’
몸에 흐르는 카르마는 변화가 없었다. 그저 몸을 이루는 근육, 뼈, 피, 그 밖의 모든 세포가 환골탈태를 거친 기분이었다.
고병갑의 시야에 돌멩이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며 그것을 주워들었다.
‘될까?’
손아귀의 힘을 주었다. 그러자 너무도 맥없이 돌멩이가 쪼개졌다.
사실 돌멩이를 쪼개는 건 전에도 가능했다. 그도 명색이 각성자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두부 으깨듯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미쳤다······.’
고병갑은 벌떡 일어선 뒤 동굴로 들어갔다. 고블린들의 수정 채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로드시여. 좀 더 쉬시는 게······.」
「됐어. 곡괭이나 줘봐.」
그는 고붕이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곡괭이를 빼앗아 들었다. 두툼한 쇠머리가 달린 곡괭이가 너무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가 한 손만으로 곡괭이를 휘둘렀다.
-파칵!
굉장한 소리를 내며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 번 더 휘두르자 수정 한 덩이가 맥없이 떨어져 나왔다.
저번에는 수정 하나 캔다고 곡괭이질을 몇 번이나 해댔는데······.
「자. 곡괭이.」
「아아, 예!」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쉬엄쉬엄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고병갑이 아스빌람을 빠져나갔다. 6평짜리 허름한 자취방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곧장 베란다로 향했다. 그곳엔 균열 토벌에 필요한 물자가 가득 쌓여있었다. 그가 한쪽 구석에서 먼지 묻은 장검을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잡아보네.’
장검. 처음 헌터 일을 시작했을 때 부무장으로 필요하다기에 샀으나 거치적거리기만 해서 박아둔 것이었다.
탄약이 다 떨어졌을 때나 총기가 고장을 일으켰을 때를 대비한다는데, 사실 그럴 때는 그냥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게 정답이었다.
하위 각성자는 결코 상위 각성자처럼 칼 한 자루 들고 무쌍을 찍을 수 없으니까.
고병갑은 핸드폰을 꺼내 균열을 탐색했다.
원래 오늘은 쉬려고 했으나 변화된 몸을 굴려보고픈 충동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음? 근처에 하나 있네?”
무려 신림역 근처에 균열이 발생해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균열 옆에는 ‘긴급’이란 문구가 적혀있었다.
긴급 토벌.
도심에 발생한 균열은 위험하다. 몬스터가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야 없겠지만, 균열이 만들어내는 역장만으로 인명피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협회에선 헌터들을 불러 모아 긴급 토벌을 진행한다.
이면 세계를 돌며 마석과 전리품을 수집하는 일반적인 토벌이 아닌, 이면 세계의 보스를 쓰러뜨려 균열을 붕괴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토벌 방식이다.
‘발생 시간이······ 9분 전?’
균열의 랭크는 고작 E등급이었다. 고병갑은 고민할 것도 없이 장검과 소총, 90발 분량의 탄약을 챙겨 신림역으로 향했다.
긴급 토벌은 참여하는 것만으로 상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균열에 몸만 담갔다 빼는 것만으로 포상금을 받기도 했다.
신림역은 고병갑의 자취방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였다. 뛰어서 가면 5~7분 정도 걸린다.
평소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몸이 너무 가벼워!’
몸이 날 듯이 가벼웠다. 그뿐 아니라 하체 근육이 내는 추진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는 3분도 지나지 않아 신림역에 도착했다. 협회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접근 금지 푯말을 세운 채 균열을 점거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균열의 역장을 막아주는 특수 방역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했다.
고병갑은 접근 금지 푯말을 무시한 채 균열 쪽으로 다가갔다.
협회 직원 이승헌이 그에게 다가갔다.
“헌터십니까?”
“예. 긴급 토벌 알림 보고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혹시 벌써 들어간 사람이 있습니까?”
“선생님 이전에 두 분이 들어가셨습니다.”
이승헌은 고병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총기로 무장한 것을 보니 상위 헌터는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고유번호를 불러주시겠습니까?”
“447095입니다.”
“사사칠공구오. 고병갑 헌터님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포상금은 얼마입니까?”
“백만 원입니다.”
“그렇군요.”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실제로 E급 균열에서 얻을 수 있는 마석을 다 팔아야 100만 원 정도 받았으니까.
“아시겠지만, 해당 균열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상사에 대해 협회는 책임지지 아니하며―”
“예. 알고 있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고병갑은 직원들을 뒤로하고 균열에 몸을 담갔다. 이면 세계로 들어섬과 동시에 곁에 있던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
우중충한 하늘과 무거운 공기만이 그를 반겼다.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F급 몬스터 꺽치였다. 물고기의 몸통에 들짐승의 다리가 달린 기괴한 생명체다.
메뚜기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데, 재빠른 데다가 이빨이 날카로워 성가신 괴물이었다. 무엇보다 징그러웠다.
“케기기긱!”
꺽치 한 마리가 폴짝 뛰어오르더니 고병갑에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고병갑은 얼른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칼날은 너무도 쉽게 꺽치의 몸을 이등분했다. 붉은 선혈이 쫙 퍼지며 허공을 적셨다.
‘허.’
몬스터의 움직임이 너무도 굼뜨게 보였다. 고병갑은 죽은 꺽치에게서 마석을 도려내지 않고 내달렸다.
긴급 토벌의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빨리 이면 세계를 붕괴시키는 것이니까.
-타다다다당!
지하에서 총성이 들렸다. 보스 몬스터는 저기에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리로 향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꺽치들이 몸통을 들이밀었다. 고병갑은 소총을 뒤로 멘 채 칼만 휘둘러 모두 떨쳐냈다.
토막 난 꺽치의 시체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역 내부로 들어서자 두 명의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은 중년의 남성, 다른 한 명은 고병갑 또래의 여인이었다.
둘 다 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역 내부에는 몬스터 군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개찰구 너머로 50~60마리의 꺽치가 있었고 두 사람은 그쪽을 향해 닥치는 대로 총탄을 퍼붓고 있었다.
고병갑도 검을 잠시 넣어두고 소총을 들었다. 이윽고 총구가 불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