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변종 균열
13.
고병갑의 애마이자 보물 1호. 15년식 모닝이 힘차게 바퀴를 굴렸다. 출고된 지 벌써 10도 넘은 차량이지만 관리를 잘한 덕택에 아직 쌩쌩했다.
······물론 시속 90km만 넘어도 차체가 덩실덩실 춤추긴 했다.
그가 현재 향하고 있는 곳은 경기도 포천의 어느 외진 곳이었다. 거기에 위험도 E랭크 짜리 균열이 발생했다.
E랭크 균열은 F급 이하 부하 몬스터와 E급 보스 몬스터로 구성돼있다. 당연한 말이다마는 F랭크 균열보다 위험도가 높았다.
다만 G~F급 몬스터는 사실상 그놈이 그놈이고, 보스인 E급 몬스터도 총으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기에 토벌 난이도로만 보면 그렇게까지 차이 나지는 않았다.
단지 몬스터 머릿수가 많게는 30마리까지 늘어나므로 충분한 탄약을 준비해야 했다.
서울 도심을 벗어난 지 1시간 30분쯤 흘렀을 무렵 고병갑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로변 인근 산기슭에 균열이 발생해서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좀 걸어야 했다.
그는 머지않아 균열이 자리 잡은 장소로 도착했다.
“벌써 꽤 곪았네.”
균열은 주변 땅을 황폐화시킨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땅은 바싹 말라 푸석푸석했고, 풀과 나무는 생기를 잃어 축 늘어져 있었다.
이 균열이 발생한 게 불과 이틀 전이다. 고작 이틀인데도 자연이 이만큼이나 손상된 것이다.
농가나 축가에 균열이 발생하여 농작물이나 가축들이 떼죽임당하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헌터를 포함한 이쪽 업계 종사자들은 균열이 곧 돈이므로 많이 발생하면 발생할수록 좋아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꼭 뒤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후우. 여기서 죽으면 언제쯤 발견되려나.”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담배를 태우며 마지막 점검을 했다.
사실 이번 원정은 토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일꾼으로 쓸 고블린 포획이 주된 목적이었다.
E랭크 균열에서 나올 수 있는 F급 몬스터는 대략 30종 정도다. 개중에 흔히 보이는 것은 꺽치, 뿔이리, 두두리, 흙난쟁이, 고블린 정도.
“고블린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담배꽁초를 발로 짓이겨 끈 고병갑이 균열로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이면 세계로 넘어갔다.
이면 세계를 암시하는 우중충한 하늘. 묘하게 위화감이 드는 공기. 고병갑은 소총을 단단히 견착하고 사위를 훑었다.
당장 포착되는 몬스터는 없었다. 안전이 확보된 것을 확인하자 그는 즉시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대기하고 있던 12마리의 고블린이 튀어나왔다.
11마리의 홉 고블린과 1마리의 자이언트 고블린이다.
노멀 고블린 22마리는 불러내지 않았다. 녀석들은 지금쯤 교대로 돌아가며 수정을 채굴하고 있을 터다.
「가자.」
「옙!」
고병갑이 12마리의 고블린을 이끌고 전진했다.
비탈진 언덕의 연속이었다. 평소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인지라 길도 닦여있지 않았다. 지형만 보면 최악이다. 이래서 헌터들은 산속에 발생한 균열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돈이 1순위인 고병갑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그는 산행에 익숙했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고블린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발도 없는 맨발임에도 신이 나서 고병갑을 따랐다.
「수정은 좀 캤냐?」
「많이. 캤습니다.」
「얼마나 캤는데?」
「어··· 어···.」
고붕이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셈을 세기 시작했다.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그를 말렸다.
「됐어, 인마. 좀 이따 가서 보면 알겠지.」
「예······.」
「그나저나 이제 슬슬 몬스터가······.」
“어우욱!”
「말 끝나기 무섭게 나타나는구만. 근데 두두리네 썅.」
모습을 보인 몬스터는 식물형 몬스터인 두두리였다. 두두리를 간단하게 묘사하자면 신장 150cm 정도의 ‘나무 인간’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두두리에겐 여느 생물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머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놈들의 어깨 위는 허전했으며 눈, 코, 귀 같은 기관들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거대한 입만이 복부에 달려 존재감을 과시했다.
놈들은 다분히 위협적인 괴력을 자랑했다. 인간의 뼈를 손쉽게 분지를 정도다. 반대로 움직임은 토악질 나올 만큼 굼떴는데, 동물로 비유하자면 나무늘보 급이었다.
그래서 사냥 난이도 자체는 쉬운 편에 속했다. 방심만 하지 않으면 되니까.
「케르륵!」
홉 고블린들이 몽둥이를 꼬나들며 두두리를 경계했다.
고병갑은 두두리에게 총구를 겨누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고블린들이 있는데 구태여 탄약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조심해라. 붙잡히면 변사체 된다.」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이 튀어 나갔다. 놈들은 각자 쥔 뼈 몽둥이로 두두리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고블린은 날쌔기로 유명한 몬스터다. 덕분에 두두리와 상성이 잘 맞았다. 노멀 고블린이었다면 두두리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기 위해 몇 번이나 공격해야 했겠지만, 홉 고블린쯤 되니 힘도 꽤 좋았다.
놈들이 몽둥이질할 때마다 두두리의 몸에서 파편이 떨어져 나갔다.
「우어어어어!」
“어욱! 어우욱!”
자이언트 고블린, 투르카는 힘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2m가 넘는 신장과 100kg에 육박하는 체중에서 뿜어지는 괴력은 단 일격만으로 두두리의 몸뚱이를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타당탕탕!
고블린들의 빈틈은 고병갑이 채웠다. 군시절까지 포함하면 그가 총을 쥔 세월도 벌써 5년이다. 단 한 발의 총알 낭비도 없이 두두리의 심장부를 쏴 맞추었다.
20마리의 두두리가 전멸하는데 15분 남짓한 시간밖에 들지 않았다. 평소보다 몇 배나 빨랐다.
‘고블린들이랑 같이 사냥하니까 너무 쉬운데?’
아무리 두두리가 쉬운 사냥감이라고 해도 평소였다면 이렇게 수월하지는 않았으리라.
하기야. 홉 고블린만 해도 E등급 몬스터이고, 자이언트 고블린은 D급이다. 적으로 뒀을 때는 성가셨는데 아군이니 은근히 든든했다.
「가서 마석 걷어 와.」
「옙.」
마석을 도려내는 등의 잡일도 모두 떠맡길 수 있었다. 전과 비교하면 소모되는 피로도가 현저히 낮았다.
‘고블린 로드라는 거 엄청 편리하네.’
단지 고블린 로드라는 이유만으로 고블린들의 무한한 신뢰와 충성을 얻을 수 있다니.
막 고블린 로드가 됐을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굉장한 거였다.
마석 수거가 모두 끝나고 고병갑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균열 토벌을 완료할 것인지, 아니면 고블린이 있는 균열을 찾으러 나설 것인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돈은 벌어야 하니 온 김에 끝장을 보자고 마음먹었다.
「자, 이동하자!」
「옙!」
고병갑과 12인의 고블린은 거침없이 이면 세계를 나아갔다.
14.
“크아아아악!”
이면 세계의 보스 데빌 우드의 안면으로 십여 발의 총알이 쇄도했다. 데빌 우드는 자랑거리인 줄기 채찍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보스 몬스터가 죽자 이면 세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고병갑은 서둘러 마석을 챙긴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시계를 살폈다. 2시간 만에 토벌이 끝났다.
“빨리 끝났네. 전 같았으면 반나절은 걸렸을 텐데.”
탄약은 60발 정도 소모했을 뿐이고, 포션도 아직 많이 남았다.
“하나 더 돌까?”
하루에 균열 두 개. 예전 같았으면 시도조차 못 할 일이었다.
과거 그의 월평균 토벌 횟수는 13~15회였다. 말하자면 이틀에 한 번씩 토벌을 다닌 셈이다.
균열 하나만 돌아도 몸은 천근만근이요, 탄약이니 포션이니 고갈됐으니까.
그러나 고블린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면 하루에 균열 2개도 시도해볼 만했다.
고병갑은 핸드폰을 꺼내 주변에 미공략 균열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헌터넷을 실행시켜 꼼꼼하게 지도를 살피는 고병갑. 이내 그의 눈으로 좌표 하나가 들어왔다.
현재 위치에서 차로 20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균열의 위험도는 E랭크.
위치도 랭크도 좋았다.
한데······.
“스읍. 16일째 미공략이라고?”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균열이 16일째 미공략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해당 균열이 변종일 가능성을 암시했다.
균열은 마치 암과 같았다. 가만히 놔두면 점점 더 번지고 커진다. 최하급 F랭크 균열도 가만히 썩히고 있으면 C~D랭크까지 등급이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이다.
변종이 위험한 이유는 들어가 봐야지만 변종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겉으로는 전혀 표가 나지 않는다.
보통 변종이 일어나는 건 발생한 지 3주 이상 된 균열이다. 그렇기에 미공략 3주에 접어든 균열은 협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해 랭크를 재측정한다.
‘아직 3주를 넘지는 않았지만······.’
협회에서 정한 임계 지점을 넘기지는 않았다만 그래도 꺼림칙했다. 왜냐고? 며칠 전 고병갑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균열도 미공략 11일짜리였기 때문이다. 2주조차 안 된 균열에서도 변종이 일어났는데 16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접자. 또 무슨 험한 꼴을 보라고?’
고병갑은 마음을 접고 다른 균열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입에 문 담배가 점점 짧아짐에도 마땅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제일 가까운 게 홍천이네. 왕복하면 3시간 넘게 걸리려나.’
그가 쓴 입맛을 다셨다. 안전하지만 멀리 있는 균열을 택할까, 가깝지만 모험 가능성이 있는 균열을 택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병갑의 마음은 미공략 균열 쪽으로 기울었다.
‘저번에는 너무 조심성이 없어서 위험했던 거야. 그리고 지금은 고블린들도 있잖아.’
설령 E랭크 균열이 변종을 일으켰더라도 고블린들이 있다면 맥없이 죽지는 않으리라.
그는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 얼른 차를 타고 이동했다.
20분 후. 고병갑은 한적한 고가도로 아래에 차를 세웠다.
가뭄이 들어 잡초만 무성한 개천을 따라 200m쯤 전진하자 하수구 인근에 발생한 균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 50분. 해가 저물려거든 시간이 많이 남았다.
빠르게 장비 점검을 마치고 서둘러 균열로 들어섰다. 그가 이면 세계에 들어서자마자 한 일은 카르마 측정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진 이상 없다.’
변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면 세계의 에너지 분포가 일정치 않다는 것이다.
저번에는 그 점을 간과했다가 한순간 고블린 떼에 포위를 당했다. 두 번의 실수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고병갑은 틈틈이 카르마 측정기를 확인하자고 다짐했다.
그가 다시 한번 고블린들을 불러낸 뒤 일갈했다.
「잘 들어. 내가 도망치라고 외치면 즉시 아스빌람으로 넘어가라. 어물거리다가 뒤처지는 놈은 그냥 버리고 갈 거야.」
「알겠습니다.」
고병갑과 고블린들은 신중하게 발을 놀렸다.
홉 고블린들이 선두에 나서서 잡초 더미를 헤쳤다. 그렇게 십여 분 전진했을 때 그들은 몬스터와 마주칠 수 있었다.
문제는 죽은 몬스터였다.
‘뿔이리?’
F급 몬스터인 뿔이리였다. 스무 마리 남짓한 뿔이리가 바닥에 너저분히 깔려 죽어 있었다.
고병갑은 고블린에게 멈추라고 지시한 후 뿔이리의 시체를 살폈다. 총탄에 꿰뚫린 상처가 있었고 배는 갈려 있었다.
이 균열에 먼저 들어온 누군가 있다는 의미였다.
‘선점자가 있었다니.’
헌터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균열은 선점한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고병갑도 그 규칙을 잘 따르는 헌터 중 한 명이었다. 같은 헌터와 분란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그가 쓴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도로 나가······ 음?」
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고블린들이 하나 같이 한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 왜 그래?」
「로, 로드시여. 저쪽에. 뭔가······.」
「뭐?」
오싹함을 느낀 고병갑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거진 잡초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오싹함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총기에 장착된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댔다.
4배율 스코프로 본 세상은 이전과 조금 달랐다.
뭔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
그건 사람이었다.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죽을 둥 살 둥 달음박질하는 사람.
그리고 그 뒤를 쫓는 것은 D등급 몬스터 뇌전늑대였다.
“이런 씨!”
고병갑이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당장 도망치라고 말하려던 순간! 그의 눈에 또 하나의 이질(異質)이 관측되었다.
뇌전늑대의 등에 탄 새하얀 고블린이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