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고대의 상점
11.
‘이건 또 뭐야? 고대의 상점?’
고대의 상점이 열렸으니 수정을 이용해 물자를 구매하라는 홀로그램. 고병갑은 소가 닭 쳐다보듯 홀로그램을 들여보다가 몸에 이변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몸 안으로 무언가가 또 생겨났다.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얻은 것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그는 적잖은 황당함을 느끼며 고대의 상점을 열었다.
정면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불현듯 확장하며 하나의 창(窓)을 이루었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적절히 섞인 화면이 그를 비추었다.
[고대의 상점]
-건설
-기술
-잡화
-기타
[보유 수정 : 0]
총 4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진 상점.
생전 처음 보는 언어로 적혀있었지만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고병갑은 물론이거니, 그의 곁에 있던 10마리의 홉 고블린도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진짜 어이가 없네.’
떨떠름한 마음도 잠시. 고병갑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 가는 대로 창을 눌러보았다.
[건설]
-수정 투입구 (0 수정)
-허름한 움집 (120 수정)
-허름한 통나무 오두막 (500 수정)
-허름한 벽돌집 (650 수정)
······
······
······
-최고급 신전 (68,000 수정)
-최고급 궁전 (71,000 수정)
-최고급 아치형 교량 (180,000 수정)
-최고급 성벽 (210,000 수정)
“허······. 기가 막히네.”
건설 카테고리를 누르자 족히 수십 종의 ‘건설물’들이 나열됐다. 단순한 주거용 건물부터 복잡한 구조의 시설물까지 없는 게 없었다.
이름 옆에 붙어있는 건 가격표인 듯했다.
‘최고급 성벽?’
고병갑은 호기심에 제일 비싼 건축물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상점 창이 붉어지며 하나의 홀로그램을 띄웠다.
[‘최고급 성벽’을 구매하기 위한 수정이 부족합니다.]
[현재 충전된 수정 : 0]
[수정 투입구에 수정을 넣어 충전하십시오.]
‘수정 투입구?’
그가 창을 위로 쭉 올렸다. 제일 위쪽에서 0 수정에 판매하고 있는 수정 투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곧장 눌러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와. 이건 또 뭐야?”
지름 5m, 깊이 1m쯤 되는 원통이 허공에 떠올랐다. 아닌 밤에 홍두깨처럼 나타난 것이다.
「으힉!」
「헉!」
고블린들은 혹여 부딪칠까 싶어 머리를 얼싸쥐고 몸을 수그렸다. 다행히 원통은 실체가 없었다. 몸이나 벽도 숭숭 통과했다.
고병갑은 수족 다루듯이 원통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었다. 마치 염력을 부리는 초능력자처럼 말이다.
동굴 내부를 훨훨 날아다니는 원통을 보며 고블린들은 나지막한 탄성을 흘렸다.
[이곳에 설치할 수 없습니다.]
[충분히 넓은 공간을 확보하십시오.]
넓은 데로 나가라는 홀로그램. 고병갑은 그 말을 따라 동굴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들은 고병갑이 웬 거대한 원통을 들고나오자 까무러치며 놀랐다.
「비켜. 다 비켜.」
고블린들이 후다닥 물러났다.
고병갑은 확보된 자리에 원통을 설치했다.
[해당 위치에 ‘수정 투입구’를 설치하시겠습니까?]
[설치를 시작합니다.]
[소요 시간 약 10분]
허상이었던 수정 투입구가 실체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하던 외관이 회색 빛으로 물들었다.
고병갑과 33마리의 고블린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구경하였다.
「로, 로드시여. 이게. 무엇입니까?」
「나도 몰라, 인마. 기다려 봐.」
「앗! 아, 알겠습니다.」
그들은 수정 투입구가 완벽한 실체를 잡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수정 투입구’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10분 뒤 드디어 완성됐다. 마치 크고 넓적한 콘크리트파이프 같았다. 평범하게 생긴 외관과 달리 중앙에 뚫린 구멍에선 칠흑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와······ 뭐야 이거?」
모든 것을 빨아들일 기세로 회오리치는 속내를 보며, 고병갑은 탄식을 흘렸다. 대충 봐도 그의 상식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이걸 여기다 넣으란 말이지?’
그가 망설임 없이 수정을 던져 넣었다. 주먹 크기만 한 수정은 금세 빨려 들어갔다. 이곳저곳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충전된 건가?’
고병갑은 부푼 기대를 안고 고대의 상점을 다시 열었다.
다른 것들은 전부 똑같았다. 그는 ‘보유 수정’란을 눈여겨보았다.
[보유 수정 : 1]
“일? 일이라고?”
그의 입에서 비명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1이라니. 고작 1이라니?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벼 봐도 1은 1이었다.
“아니 저거 캔다고 곡괭이 질을 몇 번을 했는데······.”
제일 값싼 ‘허름한 움집’만 하더라도 120 수정이었다. 다시 보니 턱도 없이 비싼 가격이다. 차라리 나뭇가지 꺾어다 직접 짓고 말지.
‘세상에 거저 얻는 거 없다더니.’
최고급 성벽을 짓기 위해선 곡괭이 질을 몇 번이나 해야 할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고병갑은 호기심을 느끼며 다른 카테고리도 하나씩 살펴보았다.
「로드시여. 하던 거. 계속 합니까?」
곡괭이를 든 홉 고블린들이 불쑥 다가와 물었다.
고병갑은 상점 창에 눈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어. 그래. 가서 수정 캐고 있어. 좀 있다가 갈게.」
「알겠습니다!」
「쉬엄쉬엄해.」
「옙!」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을 찬찬히 탐독했다. 꽤 방대한 데이터를 담고 있었기에 훑어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의 표정이 점점 미묘해졌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 고병갑은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거 도대체 정체가 뭐야?’
고대의 상점에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 가득 진열돼있었다.
기술에는 말 그대로 각종 기술이 있었다.
‘고대 검술 교본’ ‘고대 무투술 교본’ 등등등.
그 외에도 ‘고대 운기조식 교본’과 같이 이름만 가지고는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잡화 카테고리에는 무기, 물약, 각종 도구가 진열돼있었다. 그것들도 하나 같이 범상치 않았다.
이를테면 ‘불을 뿜는 묘검’이라던가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든가 ‘광전사의 물약’, ‘골드 드래곤 고기’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위의 것들은 약과였다.
이상한 거로 치면 ‘기타’ 카테고리가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기타]
-암컷 고블린 (500,000 수정)
-탐험자의 깃발 (500,000 수정)
-트로바틴의 영혼 (700,000 수정)
-하슘블란트의 영혼 (700,000 수정)
······
······
······
-계몽의 씨앗 (10,000,000 수정)
‘탐험자의 깃발? 하슘블란트의 영혼? 어디다 쓰는 거길래 이렇게 비싸?’
쓰임새는 물론이요, 어떻게 생겨먹었을지 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것들이었다.
‘계몽의 씨앗······ 천만 수정?’
고병갑은 경악스러운 가격에 욕지거리를 뱉어댔다. 최고급 성벽도 21만 수정인데 씨앗 하나에 천만이라니?
‘암컷 고블린은 뭔데?’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블린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뒤 그는 깜짝 놀랐다.
이곳에 있는 23마리의 고블린. 그리고 동굴에서 수정을 채굴하는 10마리의 고블린. 그중에 ‘암컷’은 없었다. 전부 수컷이었다.
물론 고병갑에게 고블린의 외모만 보고 암수를 구별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래도 딱 보면 저놈들 사타구니 아래 달린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는 법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3년간 토벌을 다니면서도 ‘암컷 고블린’이라고 칭할만한 건 본 적이 없었다.
“왜 모르고 있었지?”
전혀 신경조차 안 쓰고 있던 것이다.
······하기야 어떤 헌터가 고블린 무리를 보며,
‘흠. 남녀가 적절한 성비를 이루고 있는 군체군. 바람직해.’
라고 생각하겠는가? 헌터는 고블린을 보면 그저 잡아 죽일 뿐이다.
「야 너희들. 여자는 어딨어?」
고병갑이 물었다. 고블린들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여자? 무엇?」
「너. 앎?」
「모름.」
노멀 고블린들은 아예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반면 고붕이는 뭔가 아는 눈치였다.
「뭘 어물거려? 여자 어딨냐니까?」
「여자······. 없습니다.」
「없다고? 자세히 말해봐.」
「오드딕이. 말했습니다. 여자 없다고. 저도 잘 모릅니다.」
「오드딕? 걔는 또 누군데?」
「죽은. 주술사님······.」
「아!」
오드딕은 고병갑이 죽인 고블린 샤먼의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고블린 샤먼은 말도 잘 통하고 아는 것도 많았다. 고병갑은 왠지 고블린 샤먼이 보고 싶었다.
「그럼 너희 새끼는 어떻게 까······. 아니. 자식은 어떻게 낳냐?」
「낳을 수. 없습니다.」
「뭐? 그러면 대가 끊길 거 아니야? 너희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온 거냐? 아니, 그보다 너희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거야?」
고붕이는 어렵다는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에휴. 그래, 됐다.」
호기심이 들긴 했으나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욕까진 없었다.
막말로 고블린 암컷이 왜 없는지 알아낸들 어디다 쓴단 말인가? 그럴 시간 있으면 돈 벌 궁리를 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이 고대의 상점이 있다면 큰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가능할 성싶었다.
되팔이하든 뭘 하든 말이다.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을 닫고 동굴로 들어갔다.
홉 고블린 10마리가 죽을상을 하며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한쪽엔 다소곳이 수정을 모아놨다.
주먹만 한 크기로 대여섯 덩어리 정도 됐다.
「야. 좀 쉬었다 해. 다 나와.」
「아,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홉 고블린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물론 수정도 챙겨서.
그는 수정 한 덩이만 품에 넣은 뒤 말했다.
「나 잠깐 갔다 올 테니까 쉬면서 수정 캐고 있어. 밥도 챙겨 먹고.」
「옙!」
그는 밖으로 빠져나가는 문을 열고 곧장 넘어갔다.
나간 김에 밥도 먹고 보석상에 가서 수정의 감정도 맡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초장부터 계획이 비틀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가 쥔 수정이 알 수 없는 외력에 이끌리더니 아스빌람으로 도로 넘어간 것이다.
“뭐야!?”
그가 허망한 눈으로 자기 가슴팍에 난 구멍을 응시했다. 아무리 들여본들 저쪽으로 넘어간 수정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수정’은 ‘아스빌람’ 밖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품목입니다.]
12.
고병갑은 집 근처 국밥집으로 가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든든하고 맛도 좋은 가성비의 귀재, 국밥을 먹으면서도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수정을 팔아 돈을 벌어들이려던 계획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어제 잠들기 전 이부자리에선 벌써 떼부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현실은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낙담하지 말자.’
그가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저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컸을 뿐. 자신에게 위해가 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돈을 벌 여러 방안이 남아 있었다.
고대의 상점.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은 미지의 능력이나 오히려 그렇기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일단 수정을 많이, 그리고 빠르게 캐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고.’
현재 아스빌람에 있는 고블린은 33마리다. 그들에게 전부 곡괭이를 쥐여주고 온종일 수정을 채굴하도록 해도 하루 100~200덩이가 고작일 터다.
그러니까 일단 일꾼부터 늘려야 했다.
‘문제없어. 고블린은 흔한 몬스터니까.’
고블린은 E급 균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몬스터였다. 균열을 돌며 보이는 족족 포섭하면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난 김에 바로 해야겠어.’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다. 고병갑은 남은 국밥을 모조리 털어 넣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 뒤 핸드폰을 꺼내 전국에 발생한 E급 균열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