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4화 (4/151)

004. 수정 채굴

9.

랭크.

각성자 혹은 몬스터의 등급을 구분하는 방식이다. SS부터 G까지 총 아홉 단계로 구성돼있다.

각 등급 간의 편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압도적인 벽이 존재하는 구간이 세 군데 있었다.

C급에서 B급으로 넘어가는 구간.

A급에서 S급으로 넘어가는 구간.

마지막으로 S급에서 SS로 넘어가는 구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 구간을 뭉텅이로 묶었다.

C급 이하를 하위.

A~B급을 상위.

S급을 최상위라고 칭했다.

SS급은 규격 외라는 별칭으로 불렀는데, 그 단어는 어지간해선 들일 일도 쓸 일도 없었다.

대한민국에 규격 외 각성자는 단 두 명뿐이었고 세계적으로도 7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도 설명했듯 같은 단위로 묶인 랭크는 힘의 편차가 크지 않다. 특히나 하위 랭크에서는 더 그랬다.

하여 그들의 싸움에서 중요한 건 개개인의 기량과 개인기보다는 머릿수였다.

“케르르륵!”

“키에엑! 케게겍!”

땅귀신은 기껏해야 열다섯 마리 남짓이었다. 반면 고블린은 그 두 배가 넘었다. 게다가 노멀 고블린만 하더라도 F급이었으니 전체적으로 땅귀신보다 랭크가 높았다.

고블린들은 땅귀신에게 물리지 않도록 날쌔게 움직이며 손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땅귀신 한 마리가 자지러지면 떼거리로 달려들어 타작해댔다. 땅귀신으로선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열다섯 마리의 땅귀신은 금세 정리가 됐다.

고블린들이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뒤이어선 다소 야만적인 광경이 연출됐다. 고블린들이 땅귀신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뜯어 먹기 시작한 것이다.

고블린의 뾰족한 이빨은 날고기를 뜯어 먹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잘 먹네.’

고병갑은 고블린들의 식사 장면을 조금 지켜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비위가 상한 탓이다.

지난 3년간 헌터 노릇을 하며 볼꼴 못볼꼴 다 봤다만 저건 정도가 심했다.

그는 잠깐 짬이 남는 동안 주위를 쓱 훑었다. 혹여 발견하지 못한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다행히 이렇다 할 특이점은 없었다.

「로, 로드시여······.」

등 뒤로 고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병갑은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홉 고블린 한 마리가 땅귀신 뒷다리를 두 손으로 들어 내밀고 있었다.

「뭐? 어쩌라고?」

「함께. 식사를······.」

「하! 참나.」

고병갑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래도 아주 경우 없는 것들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됐으니까 너희나 많이 처먹어라.」

「로드시여. 안 드시면. 배가 고플 겁니다.」

고병갑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홉 고블린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면서 가식적으로 웃었다.

「난 너희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니까 너나 꼭꼭 씹어서 많이 처먹으렴.」

「로드시여······!」

홉 고블린이 우수에 젖은 눈망울로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감동한 모양이다.

고병갑은 홉 고블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항상 이 홉 고블린이 다른 고블린들을 대표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냐?」

「이름. 말입니까?」

「그래. 너희들도 이름이 있을 거 아니야?」

고병갑이 으레 짐작하며 물었다. 들려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저는. 이름 없습니다. 저 고블린만. 이름 있습니다.」

홉 고블린이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지목했다.

땅귀신 한 마리를 통째로 씹어먹고 있는 자이언트 고블린이었다.

「저 고블린. 이름. 투르카입니다.」

「왜 너는 이름이 없냐?」

「약한 고블린. 이름 없습니다. 강한 고블린. 이름 있습니다.」

「오우. 더럽게 매정한 사회구만. 약하면 이름도 없다니.」

고병갑이 무의식중에 홉 고블린 쪽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홉 고블린은 콜록거리며 기침했다.

「어우야 미안하다.」

「콜록! 괘, 괜찮습니다.」

「너흰 담배 안 피우냐?」

「담배? 모릅니다.」

「쩝. 그러냐.」

고병갑은 끝물인 꽁초를 탁탁 털어 껐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 이름 지어줄까?」

「저, 정말입니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뭐. 너는 싸가지가 있으니 특별히 이름 하나 지어줄게. 뭐가 좋으려나······.」

「오오!」

홉 고블린이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고병갑을 쳐다보았다.

2~3초 정도 고민하던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야! 개똥이 어떠냐?」

「······.」

「너 지금 정색했냐?」

「저, 정색. 안 했습니다!」

「마음에 안 드냐? 그럼 고붕이는 어때?」

「고붕이?」

홉 고블린이 ‘고붕이? 고붕이?’ 하며 곱씹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좋습니다!」

「그래. 너 앞으로 고붕이 해라.」

「감사! 합니다!」

「새끼. 좋단다.」

고병갑은 고붕이를 돌려보냈다. 고붕이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고블린 무리로 돌아갔다.

고블린들의 식사는 금방 끝났다.

놈들은 남은 고깃덩이를 잘 포개어서 싸갈 준비까지 했다.

아직 균열 공략이 끝난 게 아니었다.

고병갑은 고블린들을 이끌고 이면 세계를 돌파했다.

그들 앞을 가로막는 건 계속해서 땅귀신이었다. 땅귀신이 아무리 최약체인 G등급일지라도, 전투를 치르다 보면 다치는 고블린이 나왔다.

고병갑은 미리 챙겨온 포션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해주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1시간쯤 진행하자 균열의 보스가 등장했다. 땅도깨비라 이름 붙은 F등급 몬스터다. 생김새는 땅귀신과 거의 흡사한데 갈색 털이 나 있고 덩치가 좀 더 컸다.

「다 비켜.」

고병갑은 고블린들을 물러나게 한 뒤 땅도깨비를 향해 소총탄을 퍼부었다.

놈의 털가죽이 아무리 질기다고 한들 총알을 버텨내지는 못했다.

땅도깨비는 허무하게 쓰러져 죽었다.

-쿠쿵!

균열의 보스가 죽자 이면 세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땅도깨비의 시체 위로 탈출 포탈이 떠올랐다.

「자! 빨리빨리 챙겨!」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은 죽은 몬스터의 시신을 부랴부랴 챙겼다. 일부는 고병갑의 명령에 따라 마석을 걸러내 한데 모았다.

고병갑이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준비된 고블린부터 한명 한명씩 넘어갔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챙기고 나서, 고병갑은 마석으로 두둑한 배낭을 메고 이면 세계를 빠져나왔다.

10.

“52만 원 책정되셨네요. 현찰로 드릴까요? 아니면―”

“계좌이체 해주세요.”

“네. 연동된 계좌로 금일 내 입금될 겁니다.”

가평을 찍고 서울로 돌아온 고병갑.

협회에 들러서 오늘 얻은 마석을 팔아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개운하다!”

여느 때였다면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왜냐면 그는 한 게 없었으니까.

싸움은 고블린들이 다 했다. 고병갑이 한 거라곤 보스 몬스터를 마무리한 것뿐이다.

그렇다 보니 탄약 소모도 거의 없었다. 포션을 좀 쓰긴 했다만 평소보다 크게 많이 소비한 것도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순이익이 엄청났다.

‘고블린 로드인지 뭔지. 이상한 일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점은 좋잖아?’

오늘은 정육점에 들러서 고기라도 한 근 사야겠다고 생각한 고병갑이었다.

그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시장을 거닐었다. 그때 그의 눈을 사로잡는 가게가 있었다.

-다모아 철물점&농기구

“아 맞아. 곡괭이 사야지.”

가게가 문 닫기 전에 얼른 들어갔다.

50대쯤으로 보이는 가게 주인은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고병갑이 들어오자 얼른 일어서며 영업자의 미소를 지었다. 요새 장사가 통 안돼서 뭐라도 하나 팔아야 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는지요?”

“곡괭이 좀 사려고요.”

“아유. 곡괭이는 이쪽에 쫙 있습니다.”

가게 주인이 안내해주었다.

“이런 거는 얼마나 해요?”

“만 원짜리도 있고 십만 원도 있고 다양하지요. 어디다 쓰시려고?”

“아······ 그 땅 좀 파려고요. 이게 만 원이라고요?”

“아유. 땅 팔 거면 그걸로 못해요. 그거는 약초 캘 때 쓰는 거라서요. 여기 3만 원짜리부터 보시면 됩니다.”

확실히 만 원짜리는 자루가 플라스틱으로 돼 있고 내구성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고병갑을 3만 원 라인으로 안내했다.

두툼한 나무 자루에 무쇠 머리를 얹은 곡괭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얼마예요?”

“카드로 하면 4만 원. 현찰로 하면 3만 5천 원에 해드릴게요.”

‘아······ 현찰 없는데.’

고병갑은 곡괭이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거 하나······. 아니, 잠깐만요.”

“천천히 보세요~”

“이걸로 10개 주세요.”

“10개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가게 주인은 신이 나서 곡괭이를 자루에 나눠 담았다.

“계좌이체 돼요?”

“아이구 당연히 되지요!”

고병갑은 35만 원을 지불하고 곡괭이 10개를 샀다.

어제 산 포션만 45만 원에 곡괭이가 35만 원. 새로 주문한 탄약도 20만 원어치니까 하루 사이 100만 원을 썼다.

고병갑은 돈 들어오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통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괜찮다. 아스빌람인지 뭔지 하는 데서 수정을 캐다가 팔면 되니까!

‘이거 벼락부자 되는 거 아니야?’

입꼬리가 저절로 승천했다.

가게 주인의 도움을 받아 차에 곡괭이를 옮겨 싣고 고병갑은 집으로 향했다. 가속페달을 밟는 발이 무척 가벼웠다.

집에 도착한 고병갑.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곡괭이를 싸 들고 아스빌람으로 넘어가고 싶지만, 오늘은 너무 늦었다.

이곳이 밤이면 그쪽도 밤이었다.

고병갑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이른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토요일이 밝았다. 프리 헌터. 더구나 돈에 쫓겨 사는 고병갑으서는 주말이 큰 의미가 없었다. 하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오늘 하루 자신에게 휴일 아닌 휴일을 주기로 했다.

곡괭이와 봇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로드시여!」

33마리의 고블린이 고병갑을 맞았다. 어제 잘 먹고 잤는지 얼굴에 기름이 반들반들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병갑이 소리쳤다.

「야야! 빨리 와서 이것 좀 받아!」

「네, 넵!」

고블린들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고병갑의 짐을 옮겨 받았다.

그들은 자루 안에 든 곡괭이를 보곤 눈에 물음표를 띄웠다.

「이건. 무엇?」

「어. 너희 거야, 너희 거.」

「우리 거?」

「밥값 해야지. 자, 다들 따라와!」

고병갑이 33인의 수족을 이끌고 동굴 앞으로 향했다.

「흠······. 너. 그리고 너. 그리고 너.」

고병갑은 고블린 중 힘깨나 쓸 것처럼 생긴 이들을 지목했다.

자이언트 고블린은 아직 재활 중이니 제외하고 홉 고블린만 10마리였다.

「고붕이는 쉬고 있고, 나머지는 나 따라서 들어와.」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고성능 랜턴으로 동굴을 비추며 앞장섰다. 불그스름한 수정이 랜턴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한눈에 봐도 그 양이 꽤 됐다.

고블린들도 수정을 보더니 입을 헤 벌렸다.

「예쁘다······.」

「킥킥. 예쁘지?」

「예! 예쁩니다!」

「어. 그러니까 빨리 캐.」

「예?」

「예는 뭘 예야. 곡괭이로 캐라고.」

고병갑이 턱짓했다. 홉 고블린 10마리는 어정쩡한 자세로 곡괭이를 들고 서로서로 눈치를 살폈다.

「뭘 멍하니 있어? 빨리 가서 캐라니까?」

「아,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이 헐레벌떡 가서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깡! 깡! 깡! 깡!

넓고 깊은 동굴에 곡괭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병갑은 짝다리를 짚고 서서 고블린들이 곡괭이질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읍. 하아? 쯧. 에잉!”

그의 눈썹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곡괭이질 하는 모양새가 영 못마땅했다.

왜 저렇게 어설픈 거야?

「에라이 썅! 야 인마! 줘봐!」

고병갑은 기어코 곡괭이 하나를 뺏어 들었다.

「잘 봐.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깡!

「이렇게! 내려칠 때 힘을 줘서! 어? 허리의 반동을 줘서 어? 이렇게! 딱 쳐야! 어? 허리도 안 아프고! 힘도 잘 받고! 어? 그래 안 그래?」

「오오······!」

「맞습니다!」

「로드시여! 멋집니다!」

「하 짜식들. 이게 뭐가 어렵다고. 후후.」

고병갑을 보며 손뼉을 쳐대는 홉 고블린.

박수갈채를 받으니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기세를 몰아 신나게 곡괭이질을 해댔다.

-깡! 깡! 깡! 깡!

‘잠깐. 이게 아닌데?’

그러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왜 자신이 곡괭이질을 하는 거지?

「이제 너희가 해!」

다시 선수가 교체됐다. 홉 고블린들은 고병갑이 보여준 숙련된 조교의 시범 따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아까 하던 대로 어설프게 곡괭이질을 해댔다.

고병갑은 그냥 포기했다.

그래도 괜찮다. 어디로 가든 목적지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가열차게 땅을 때리던 곡괭이가 드디어 수정 하나를 뽑아냈다.

「스탑! 멈춰!」

고병갑의 지시에 홉 고블린들이 허리를 펴며 한숨 돌렸다.

고병갑은 땅에 떨어진 수정을 주워들었다.

매끈하고 광택이 나는 붉은 보석.

고병갑은 어제 잠들기 전 보석에 관해 찾아보기까지 했다.

‘붉은빛이 도는 건 루비라고 하던데. 이게 루비인가?’

루비든 제3의 광물이든 이렇게 예쁜 보석이 돈이 안 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그의 앞으로 또 한 번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수정 채취에 성공하셨습니다.]

[‘고대의 상점’이 개방되었습니다.]

[수정을 이용해 필요한 물자를 구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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