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화 (1/151)

001. 고블린 로드

1.

“하품질 마석 9.8kg. 49만 8천 원 책정해드리겠습니다. 현찰로 받으시겠어요? 아니면 계좌이체 해드릴까요?”

“계좌이체로 해주세요.”

“네. 연동된 계좌로 금일 내에 입금될 겁니다.”

“저기······.”

“말씀하세요.”

“경매로 내놓은 물건 있잖아요. 혹시 가불로 조금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상담원 김슬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고병갑의 얼굴에 민망함이 번졌다.

“혹시 단돈 10만 원이라도 미리 받을 수 있나 해서요.”

“고병갑 헌터님. 경매로 부친 물품은 낙찰되어야 수익금을 받을 수 있으세요.”

“예예, 물론 알고 있죠. 그런데 혹시 미리 좀 땡겨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죄송하지만 낙찰되지 않은 상품에 대한 수익금은 받을 수 없으십니다.”

“아, 예······. 그럼 혹시 대출은······.”

“네? 대출이요?”

“아, 대출은 은행에서 하는 거죠.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김슬기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병갑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슬기는 고병갑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하며 다음 고객을 불렀다.

“97번 고객님!”

고병갑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협회를 빠져나왔다.

날씨는 고약하리만큼 맑았다.

“아 좆됐네.”

요번 달 할당금도 어찌어찌 맞추었다.

문제는 그걸 빼면 주머니에 한 푼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돈 나갈 데가 어디 한두 군데여야지······.

대출 돌려막기도 이젠 한계다.

“다음 토벌 어떡하냐. 당장 생활비도 없는데.”

D급 헌터 고병갑.

하위권 중에선 나름 네임드 헌터다.

올해 3년 차로 경력도 꽤 있는 편이었다.

수익 역시 나쁘지 않았다. 잘 나올 땐 달에 600~700만 원씩 벌기도 하니까.

그런데도 고병갑은 항상 돈이 없었다.

빌어먹을 병원비와 깎아도 깎아도 불어나기만 하는 빚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사채에 손을 댄 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꼬르륵.

위장이 농성을 벌였다. 돌이켜 보니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다.

“······그래. 일단 밥이나 먹자.”

고병갑은 협회 근처 국밥집으로 갔다.

순대국밥을 하나 시키고 인터넷 뱅킹으로 계좌를 확인했다.

오늘 판 마석 값이 입금돼 있었다.

-KBC 은행

잔액 : ₩4,609,420

빠질 거 빠지고 국밥 한 그릇 먹으면 2~3만 원쯤 남겠구나.

기가 막혀서 쓴웃음이 나왔다.

460만 원 중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 지분이 1%도 되지 않는다는 게 도리에 맞나 싶다.

하여간 무엇을 위해 한 달 내내 토벌을 다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리투아니아로 원정을 떠났던 원정단이 금일 오후 3시경 귀국했습니다······.

하필 뉴스에선 고병갑과 다른 세계의 기사를 들려주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에 원정을 나섰던 S등급 헌터 세 명이 무사히 귀국했단다.

그들 덕분에 국가 간 연합이 더욱 돈독해졌다느니, 국격이 높아졌다느니, K-Hunter 붐이 일고 있다느니······.

국뽕을 아주 치사량으로 들이키고 있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만.”

고병갑은 덤덤했다.

닿지 못할 별을 두고 질투하던 시기는 지났다.

그는 그저 오늘 경매로 부친 물건이 하루빨리 낙찰돼 다음 토벌 준비금이라도 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국밥 한 그릇 따위야 5분 만에 들이키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곧장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없는 살림이지만 담배는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등신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니코틴과 수명을 물물교환하는 와중에도 시큰대는 발목은 계속 거슬렸다.

오늘 토벌을 하다가 다친 곳이었다.

고병갑은 배낭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유리병 안에는 붉은 액체가 1/3 정도 담겨 있었다.

힐링 포션이다.

쓸까 말까 쓸까 말까.

“아껴 써야 하는데······.”

최하급 포션도 100mL당 15만 원은 한다.

고병갑은 포션을 빤히 바라보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집에 가서 냉찜질이나 하지 뭐.

“포션 아껴 먹는 헌터는 나밖에 없을 거다, 시발.”

그가 마지막 한 모금까지 빨아들인 꽁초를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에휴. 인생 조졌다.”

그는 털래털래 집으로 돌아갔다.

2.

28년 전 지구 전역에 균열이 발생했다.

세계는 전대미문의 대사건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종말론자들은 종말을 부르짖었고, 각국 정상들은 최고 단계의 비상태세를 선포했다.

그 당시 인류는 폭발이 임박한 시한폭탄처럼 위태로웠다.

그렇다면 28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놀랍게도 푸른 별은 아주 평화로웠다.

인류는 멸망하지도, 그렇다고 문명의 쇠락을 겪지도 않았다.

오히려 잘 먹고 잘살고 과학 기술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어떻게 그랬냐고?

균열 안쪽.

그러니까 ‘이면 세계’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숨어 있긴 했다. 하지만 놈들이 바깥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괴물들은 그저 균열 안쪽에 짱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균열은 그 규모에 따라 반경 수 미터에서 수백 미터에 이르는 정체불명의 역장을 발산했고, 역장에 노출된 지대는 아주 빠르게 불모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건물이 삭아 무너지고, 식물은 말라비틀어졌으며, 그곳에 오래 머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됐다.

그러니 균열을 때려 부수긴 해야 했다.

다만 한 가지 에러 사항이 있었다.

일반인은 균열의 역장에 노출되기만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이면 세계’로 진입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주 뭍으로 나온 오징어마냥 맥도 못 추리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차에 운명처럼 각성자가 등장했다.

그들은 여느 일반인들과 달랐다. 균열의 역장에 노출된 이후 되려 큰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각성자들은 희생정신과 이타심으로 무장······ 하지는 않았고,

막대한 보상금과 명예, 권력에 대한 욕구를 불태우며 균열을 토벌했다.

그 의도야 무엇이 됐건 각성자들의 피나는 똥꼬쇼 덕분에 세계는 어찌어찌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안정을 되찾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 축제 분위기가 났다. 괴물이 뱉어내는 ‘마석’이 상당한 부가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국경이나 남극 대륙에 발생한 균열의 소유권을 두고 국가끼리 다툼을 벌일 정도였으니 28년 전 ‘대격변’은 재앙보다는 축복에 가까웠다.

그리고······.

25세 대한건아 고병갑.

그는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채무를 갚기 위해 오늘도 똥꼬쇼를 벌였다.

한데 그 똥꼬쇼가 오늘로 마지막이 될 듯했다.

‘좆됐다!’

고병갑은 건물 뒤로 몸을 숨기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주 살짝만 고개를 빼 주위를 관찰했다.

홉 고블린들이 눈에 독기를 품고 침을 질질 흘리며 두리번대고 있었다.

‘시발! 변종 균열이라니!’

변종 균열.

균열 외부에서 관측한 에너지값과 실제 에너지값이 어긋나는 경우다.

쉽게 비유하자면,

‘밖에서 봤을 때는 멸치 양식장이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상어 소굴이었다.’ 같은 경우다.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진즉 줄행랑쳤으련만 설상가상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다.

‘탄약도 거의 다 떨어졌다.’

고병갑이 허리춤에 찬 여분의 탄알집을 쓰다듬었다.

기껏해야 90발 정도 남았다.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탄약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게 한탄스러웠다.

“끄으으······.”

고병갑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홉 고블린 쌍놈의 새끼들이 쏜 화살에 옆구리가 쓸렸다.

그리 큰 부상은 아니다만, ‘마! 남자 아이가!’라며 대충 침 발라놓는다고 나을 상처도 아니었다.

고병갑이 배낭에서 힐링 포션을 꺼냈다.

이젠 밑바닥에서 1cm도 남지 않았다.

그는 남은 포션을 옆구리에 전부 쏟아부었다. 찰과상 수준의 상처는 최하급 포션으로도 금세 치료가 됐다.

‘어쩌지?’

선택지는 3가지였다.

이대로 숨죽이며 구조대(다른 헌터)가 찾아오길 기다리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 균열을 탈출하거나,

이면 세계의 보스를 잡아 균열을 붕괴시키거나.

어떤 걸 택해도 생(生)보단 사(死)의 길에 가까웠다.

이래서 협회에선 단독 토벌을 지양했다. 균열에 갇히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니까.

‘나 죽으면 우리 엄마 어떡하냐.’

고병갑의 목에 걸린 목숨은 두 명분이었다.

그가 병원비를 대지 못하면 그의 어머니도 꼼짝없이 죽을 터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고병갑은 결심을 굳힌 뒤 배낭을 버렸다.

이어서 소총과 여분 탄알집을 제외한 모든 짐을 몸에서 떼어냈다.

‘전력을 다해 도망치면 어떻게든 탈출 포탈에 닿을 수 있을 거야.’

그가 눈을 부라리며 출구 쪽을 응시했다.

이면 세계는 기본적으로 균열이 발생한 지대의 모습을 모방하고 있다.

마치 거울 속 세상처럼.

그의 현 위치는 작은 마을이다.

주변은 온통 논밭이고 중심에 민가가 있다.

민가를 빠져나와 논밭을 1km쯤 내달리면 탈출 포탈에 닿을 수 있었다.

‘하나, 둘······.’

그가 속으로 셈을 셌다.

“세······!”

“서프라이즈 머더 뻐커.”

“으악 씨발!”

-파칵!

육중한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고병갑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피해냈다.

‘저 씨발 고블린 방금 서프라이즈라고······.’

“케르륵! 케륵!”

‘잘못 들었나?’

하긴 몬스터가 사람 말을 할 리가 없다.

몇 바퀴 구른 고병갑이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경쾌한 총성과 함께 홉 고블린의 몸체가 들썩였다. 심장부를 얻어맞은 홉 고블린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홉 고블린의 랭크는 E급.

급소를 때려 맞추면 총알 한 방에도 죽일 수 있는 약한 몬스터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케륵! 케륵!”

“케에에엑!”

“케르륵! 케르르륵!”

“하······ 시발.”

사방을 가득 메운 고블린 떼거리였다.

총성을 들고 고블린이 몰려들었다.

당장 지척에 있는 것만 60~70마리는 될 성싶었다.

고병갑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뒷덜미로 조악한 화살과 죽창이 날아들었다.

어떤 것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저 씹새들이!”

고병갑이 몸을 획 돌려 총탄을 뿜어댔다.

E~F급 짜리 홉 고블린과 노멀 고블린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케르륵!”

“끍!”

고블린 한 마리가 손도끼를 투척했다.

손도끼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고병갑의 허벅지를 때렸다.

날이 뭉툭해 살점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으나 피멍이 들며 움푹 파였다.

“씨바아아아알!”

고병갑은 악을 지르며 기어코 탄창 하나를 다 비워냈다.

곧바로 몸을 돌려 뜀박질을 재개했다.

다친 다리가 아파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케르르륵!”

“케륵! 케륵!”

고병갑 한 명을 쫓는 수십 마리의 고블린.

그야말로 피 말리는 추격전이었다.

그는 중간중간 총을 쏘며 고블린들을 떨쳐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죽음의 레이싱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탈출 포탈까지 앞으로 200여 미터!

“우어어어억!”

그때 등 뒤로 괴성이 들렸다.

고블린이라고는 믿기 힘든 거대한 덩치의 괴물이 나타났다.

자이언트 고블린. 고병갑과 마찬가지로 D급에 등재된 몬스터다.

‘시발 자이언트 고블린이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고병갑이 이곳에서 해치운 자이언트 고블린만 7마리였다. 그런데도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다니!

‘제기랄. 역시 이 균열 C랭크는 되겠어!’

고병갑은 정수리가 싸해지는 것을 느끼곤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로 자이언트 고블린의 주먹이 떨어졌다.

-쾅!

“미친!”

바닥을 두어 바퀴 구른 고병갑이 얼른 견착하고 총구를 들이밀었다.

-탕! 타다다당!

총탄이 자이언트 고블린의 몸통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총알 대여섯 발을 얻어맞고도 녀석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성질만 더 자극한 듯했다.

‘제길! 진정해! 진정하라고! 머리를 노려야 해!’

고병갑은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가늠쇠에 자이언트 고블린의 머리를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어어어억!”

“뒤져!”

최적의 순간.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

“우어어억!”

“컭!”

자이언트 고블린의 우악스러운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고병갑은 대여섯 걸음이나 날아가며 바닥을 굴렀다.

갈빗대 서너 개는 나간 기분이었다.

‘씨발 기능고장······.’

하여간 이놈의 K시리즈는······.

고병갑이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말단이긴 하나 그도 명색이 각성자였다.

갈빗대 몇 개 나간 거로 죽지 않는다.

“허억, 허억!”

그가 장전 손잡이를 당겼다 놨다 반복했다.

탄알집을 쾅쾅 치기도 했다.

몇 번 반복하자 총알이 정상적으로 장전됐다.

겨우 자세를 가다듬자 자이언트 고블린의 주먹이 날아왔다.

그가 이를 빠드득 갈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꾸어······.”

총알이 자이언트 고블린의 어깨를 정확히 꿰뚫었다.

놈이 허물어졌다.

“뒤져 이 씹새들아!!!”

-타다다다다당!

그는 남은 탄약을 모조리 퍼부었다.

신경질적으로 총을 던져버린 뒤엔 탈출 포탈을 향해 달렸다.

앞으로 100m

앞으로 90m

앞으로······.

“끄아앍!”

조악한 화살 한 발이 냅다 날아와 꽂혔다.

등을 꿰뚫는 따끔한 통증.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곧이어서는 죽창이 허벅지를 쓸고 지나갔다.

손도끼와 짱돌의 소낙비도 그의 몸을 때렸다.

버틸 수 없었다.

고병갑은 포탈을 고작 50m 정도 남겨놓고 무릎을 꿇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죽는 건가.’

고개를 돌리니 고블린 떼거리는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광기와 살육만을 담은 저 눈동자 좀 보라지.

‘우리 엄마 어떡하냐고······.’

고병갑은 앞으로 고꾸라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3.

“으으······.”

고병갑이 눈을 반쯤 떴다. 무쇠 추라도 달아놓은 양 눈꺼풀이 무거웠다.

‘······살아있는 건가? 으윽!’

온몸이 아팠다. 그 와중에도 청각은 정상 작동했다.

“우이이익! 우이이익!”

“끼에에엑! 끼에에에엑!”

“께르르륵! 께르르륵!”

고블린 떼거리의 괴성이 들려왔다.

고병갑은 어질어질한 정신을 달래며 상황을 살폈다.

자신은 커다란 통나무에 묶여 있었다.

어찌나 억세게 묶였는지 짓눌린 살점이 물러 터졌다.

해가 저물어 캄캄했다. 하지만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화로가 놓였고, 전방 30m쯤에 커다란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닥불 주변으로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강강술래를 돌고 있었다.

‘뭔데 저거?’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고병갑은 조금 더 면밀하게 놈들을 관찰했다.

수십 마리의 고블린으로 이루어진 테두리.

그 중앙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고블린이 두 마리 있었다.

한 놈은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고블린이었고, 다른 한 놈은 체격이 월등하게 큰 자이언트 고블린이었다.

‘시발! 저 자이언트 고블린 안 죽었다고?’

고병갑이 경악했다.

총알을 몇 발이나 때려 넣었건만 죽이지 못했다니. 역시 D급부터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놈뿐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고블린 샤먼······.’

고병갑은 장신구로 치장한 고블린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놈의 정체는 고블린 주술사, 최소 C급은 되는 강한 괴물이다.

아마 이 균열의 보스일 것이다.

‘왜 날 죽이지 않고 이렇게 묶어놓은 거지?’

고블린들은 고병갑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괴성을 지르고, 강강술래를 돌며, 의미를 가늠하기 힘든 몸짓을 해댈 뿐.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 같긴 한데······.’

헌터 활동을 하며 적지 않은 고블린과 맞닥뜨렸지만, 저런 건 처음 보았다.

‘쯧! 내 알 바 아니지.’

뭐가 됐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고블린들의 관심을 피한 지금에야말로 탈출할 절호의 기회였다.

문제는 현재 기력으론 도저히 밧줄을 끊고 달아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고병갑의 머리가 아주 빠르게 회전했다.

잠시 후 그는 옆에 있는 화로를 이용하자고 결단 내렸다.

투박한 생김새의 화로엔 불붙은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위엔 그런 화로가 몇 개나 됐다.

그가 통나무에 묶인 채 끙끙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화로와 충분히 가까워지자 머리를 이용해 화로의 다리를 쳐대기 시작했다.

-쿵! 쿵!

고블린들이 알아채면 모든 게 끝이다.

고병갑은 최대한 조용히 화로에 박치기했다.

몇 번이나 쳐댔을까?

화로에 걸쳐있던 장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불씨가 살아있었다.

‘됐어!’

고병갑은 새카맣게 탄 장작 끝에 몸을 갖다 댔다. 이내 불씨가 밧줄로 옮겨붙었다.

-화르륵!

식물 줄기를 엮어 만든 밧줄은 무척 잘 탔다. 물론 살점도.

“끄으으으윽!”

생살이 타는 고통이란······.

고병갑은 초인적인 기지로 신음을 삼켰다.

밧줄이 충분히 탔을 때 온 힘을 다해 몸을 꿈틀거렸다.

밧줄은 맥없이 끊어졌다. 성공이었다!

고병갑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자꾸만 넘어졌다. 도저히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시발! 시발!”

욕지거리를 뱉으며 계속 시도했다.

그 모습이 흡사 걸음마를 떼려는 갓난아이 같기도 했다.

그가 마침내 두 발로 딛고 일어섰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가 핑 돌았다.

‘염병할 빈혈!’

고병갑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는 넘어지지 않으려 닥치는 대로 주변 사물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고병갑이 잡은 것은 뜨겁게 달아오른 화로였다.

“아뜨······ 흡!?”

외마디 비명.

황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버스는 이미 떠나간 뒤였다.

“케르륵?”

강강술래를 돌던 고블린의 시선이 고병갑에게 집중됐다.

수백 개의 적안을 마주 보자 오금이 다 저렸다.

‘도망을······.’

그는 몸을 돌리다가 관두었다.

빌어먹을. 이제 도망은 물 건너갔다.

피도 많이 흘리고, 몇 시간이나 묶여 있던 탓에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100m도 못 가서 붙잡힐 게 뻔하다.

그렇다고 삶을 포기했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아직 살 방도가 하나 남았긴 했다.

‘고블린 샤먼을 죽인다.’

바로 균열의 보스를 처치하는 것.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더 밀려날 벼랑도 없었다.

고병갑은 저주를 퍼부어 대며 불붙은 장작 하나를 손에 쥐었다.

거칠게 바닥을 내려치니 끝이 부서지며 꽤 괜찮은 말뚝이 만들어졌다.

고블린 샤먼은 랭크가 높은 몬스터였지만, 맷집으로 유명한 쪽은 아니었다.

말뚝으로 급소를 찌르면 일격으로도 죽일 수 있으리라.

보스가 죽으면 곧장 탈출 포탈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 천에 하나라도 살 확률이 생긴다.

“케르르륵!”

“키에에엑! 키에에엑!”

고블린 떼거리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

고병갑도 마주 달려갔다.

그의 눈동자는 고블린 샤먼을 점찍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지금 움직이지 못한다!’

고블린 샤먼은 아까부터 ‘어떤 의식’을 진행하느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말인즉 정상이 아닌 몸뚱이로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케르르륵!”

“꺼져!”

어중이떠중이를 상대해 줄 겨를이 없다.

그는 다가오는 모든 고블린을 피하거나 내치며 고블린 샤먼에게 향했다.

죽음이 임박해서일까? 그의 몸은 한계에 근접한 몸놀림을 보여주었다.

예상대로 고블린 샤먼은 움직임이 없었다.

고병갑이 위험반경까지 접근하자 이제껏 잠자코 있던 자이언트 고블린이 나섰다.

“우어어어어!”

놈이 고블린 샤먼의 앞을 막아서며 주먹을 뻗었다. 하나, 자이언트 고블린 역시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고병갑은 거의 도박하는 심정으로 몸을 굴렀다. 자이언트 고블린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빨리 일어선 그가 도약했다.

말뚝을 쥔 팔에 팽팽하게 힘이 실렸다.

고블린 샤먼의 당황한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뒤져!”

고병갑이 팔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고블린 샤먼의 심장부에서 빛의 구슬이 튀어나와 쏘아졌다.

-콰직!

나무 말뚝은 정확하게 고블린 샤먼의 심장을 꿰뚫었다.

빛의 구슬은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고병갑에게 흡수됐다.

“쿠엑!”

고블린 샤먼이 왈칵 피를 토하며 자지러졌다. 주변의 모든 고블린이 얼어붙었다.

됐다!

성공했다!

고병갑은 팔을 덜덜 떨며 환희의 웃음을 지었다.

살아나갈 수 있다. 그 일념만이 머리를 떠돌아다녔다.

그런데······.

“뭐, 뭐야?”

보스가 죽으면 이면 세계가 붕괴하며 탈출 포탈이 열려야 한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기분 나쁜 적막뿐이었다.

“왜 안 열려? 열려! 열리라고! 제길! 꺼져! 가까이 오지 마!”

고병갑이 격양된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쳤다.

설마 고블린 샤먼이 이 균열의 보스가 아닌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이곳에 고블린 샤먼보다 강한 몬스터는 없으니까.

「이럴 수가······. 안 돼······. 그럴 순 없어·····.」

그때 고병갑은 귓가를 서늘하게 하는 말소리를 들었다.

생전 처음 듣는 언어였다. 한데 어째서인지 의미만큼은 생생하게 전달됐다.

고병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하는 주체는 고블린 샤먼이었다.

놈은 절망스러운 얼굴로 고병갑을 응시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놈이 왜 아직 살아있어? 그래! 숨을 완전히 끊어놓지 않아서 그런 거야!’

고병갑은 고블린 샤먼을 완전히 죽여버리기 위해 별안간 달려들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멈춰서야 했다.

고블린 샤먼이 무릎을 꿇었다.

놈을 따라서 주위에 있던 모든 고블린이 무릎을 꿇었다.

“······?”

이놈들이 단체로 약을 했나?

고병갑이 당혹스러운 눈초리로 고블린들을 훑었다.

고블린 샤먼이 눈과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고블린 로드시여······.」

「로드시여!」

「로드시여!」

고블린 샤먼이 선창하자 다른 고블린들이 따라 말했다.

쩌렁쩌렁한 소리에 귀가 울렸다.

“······뭐?”

고병갑은 우두커니 선 채 자신을 향해 무릎 꿇은 수십 마리의 고블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앞에 한 가지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고블린 로드가 되셨습니다.]

[고블린 로드의 숙명에 따라 고블린 왕국을 재건하십시오.]

[멸망한 고블린 왕국 ‘아스빌람’이 개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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