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집에 있을 때가 좋았어···. >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현지.
그녀는 미국에서의 활동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심플하게 느껴졌다.
아직 영어가 그렇게 능숙하지 않아 라디오는 하지 못했기에 그것을 제쳐두면, 인터뷰와 무대, 인터뷰와 무대의 반복일 뿐이었다.
무대에 따라, 인터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있어도 큰 틀에서는 비슷비슷한 느낌이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긴 호텔이에요.”
또한 국내 팬들과 다른 국가의 팬들을 위해 라이브 방송으로 소통하는 것까지.
“네, 저 적응 잘하고 있어요. 스케줄들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아서요. 그리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라디오에 나가기 위해, 그리고 영어로도 소통하기 위해, 현지는 박한울과 함께 열심히 영어를 공부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바디 랭귀지를 살짝 섞어야 서로 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수준이라서.
원활하게 소통하려면 반드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했다.
“하하. 제가 한울 오빠 영어 잘 못한다는 거 폭로해버린 거 아니냐고요?”
호텔의 방 안이긴 하지만,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곳에선 다른 스탭들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때문에, 이 말에 방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 터졌다.
-아ㅋㅋㅋㅋ 분위기 유쾌하넼ㅋㅋ
-한울이 형 거기 있어요?
-나 영어 1등급인데ㅋㅋ 형도 못하는 게 있네? 인간적인 모습 보기 좋아.
현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박한울을 쳐다봤다.
그는 쩝, 입맛을 다시며 가장 크게 웃은 직원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게 보여서, 현지의 입꼬리는 더욱 위로 향했다.
“그런데 오빠는 그래도 돼요. 아시잖아요. 다른 능력들이 되게 뛰어나셔서요. 그리고 활동에도 지장은 없어요. 영어는 다른 분들이 잘하시니까 괜찮아요.”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라이브 방송이 끝나고.
현지는 박한울을 포함한 소속사 직원들과 함께 미소를 머금은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소소한 얘기들 다음엔 일에 관한 얘기도 했다.
내일 무대에 관한 얘기, 그리고 새로 들어온 스케줄에 관한 얘기들까지.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끝난 다음엔.
비로소 박한울과 둘만의 시간이 시작됐다.
책상에 책을 펴고 나란히 앉아 영어를 공부하지만, 지겨움과 지루함이 전혀 없는 시간.
사실 학생 때는 공부하는 게 고역이었으나, 지금은 그와 함께 해서 그런지 재밌기만 했다.
그렇게 서로 말 한마디 없이 공부하길 얼마.
현지는 한껏 집중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빠, 저희 영어로 대화해볼래요?”
“그걸 우리끼리 한다고 의미가 있으려나?”
“그래도 한 번 해보고 싶어서요.”
어깨를 으쓱인 한울이 펜을 놓고,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저부터 할까요?”
“그래.”
현지는 잠시 동안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영어로 말문을 열었다.
“아이 러브 유.”
“···이렇게 끼부리면 위험해.”
“아이 러브 유.”
“···.”
그의 목울대가 출렁였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그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이 러브 유 투···.”
둘이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이 국내 활동 때보다 월등히 많은 것.
이는 미국 활동의 즐거움 중,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
아디다스의 브랜드 광고곡으로 만들었던 송하연과 유현지의 듀엣곡, 는 빌보드 핫100 차트 14위까지 올랐었다.
하지만, 이 곡은 뮤직 비디오 촬영 때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무대를 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미국에 한 번 부르겠지, 했는데 아직까지도 부르지 않았던 것.
사실 계약이 모델 계약도 아니었고 프로모션에 대한 얘기도 안 돼 있어서, 이 정도쯤 되면 그냥 안 부를 생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둘을 듀엣으로 광고곡을 만든 것부터 시작해서, 시야를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는 인재가 있는 모양.
그들은 내내 인내하고 있다가 마침내 최고의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여태까지 어떻게 참았대?”
내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송하연과 유현지가 떡상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는 아디다스.
그녀들이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아디다스 광고곡의 뮤비 조회수는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야 그들로 인해 아주 좋은 기회를 얻기도 했고, 자리 역시 나쁜 게 아니었기에 단번에 제안을 수락했고.
송하연과 현지는 오늘 큰 사이즈로 진행되는 아디다스 행사의 무대에 서기로 했다.
비단 듀엣 무대만이 아니라, 그녀들의 개인 무대까지 더해서.
송하연이 빌보드 1위를 하자마자 부른 것도 아니고, 송하연과 더불어 현지의 인기까지 북미에서 커다랗게 높아지고 있는 지금에서야 말이다.
“아디다스에도 실장님처럼 천재가 있나 봐요.”
송하연이 작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하연 씨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낯간지럽고 기분이 이상하네요.”
“사실인데요, 뭐.”
난 볼을 긁적이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하연 씨한테 요즘 피처링 제의도 들어오고 있다면서요?”
“네. 며칠 전에 에드 시런 싱글에도 녹음했어요.”
“와.”
현지도 그렇지만, 송하연은 더욱더 벼락스타가 되어 있었다.
사실 세계 전체로 따지자면, ‘벼락’스타가 아니라 꾸준히 인기가 있는 스타였는데 말이다.
뭐, 미국은 언제나 미국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는 거긴 했다.
빌보드 차트를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벼락스타라는 말도 영 틀린 게 아니긴 해서.
그런데 사실 벼락이든 뭐든,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지금 잘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지.
앞으로도 고꾸라지는 일 없이 잘나갈 거기도 했고.
‘근데 카메라가 대체 몇 대야···.’
난 아직 관중들이 들어서지 않은 행사장 내부를 눈으로 훑어봤다.
누가 보면 브랜드 행사가 아니라 콘서트장인 줄 알겠다.
생중계도 되고, 편집도 되어 영상이 올라간다고 하더니, 무대에 상당히 진심인 것 같았다.
난 조금 뒤 이 무대 위에 그녀들이 올라갈 것을 상상하며 그녀들을 바라봤다.
나와 마찬가지로 장내를 둘러보고 있는 현지와 송하연.
‘봐도 봐도 신기하네.’
지금 이토록 귀여운 일상적인 모습을 보자면, 과연 무대에 제대로 설 수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인데.
그녀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대 위에 올라가면 당연하다는 듯이 관객들을 홀려버리고 말 게 분명했다.
봐도 봐도, 매번 황홀하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현지야. 하연 씨. 저희 이제 다시 들어갈까요?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깨를 나란히 한 우리들은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 서로의 위치가 얼마나 올라갔건, 코앞에 어떤 무대가 기다리고 있건 간에.
우리는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로를 대했고.
변함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디다스에서의 무대는 그렇게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현지에게 쏠리고 있던 인기의 기류를 조금 더 키우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무대, 인터뷰, 무대, 인터뷰의 반복.
그리고 가끔 광고나 토크쇼까지 촬영하며 연일 성장하는 현지의 인지도와 인기.
시장이 너무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주일 주기로 바뀌는 빌보드 차트 때문인지.
미국에서의 앨범 활동은 무척이나 길었다. 짧은 국내 활동과는 다르게.
[ 10. On That Night – Hyeonji Yu ]
그렇게 우리는 10위에 오를 수 있었고.
10위를 끝으로 완만한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1위를 차지하며 미국 내에서도 슈퍼스타가 된 송하연보다는 낮은 성적.
허나, 앨범 활동을 마치고 미국을 떠나려는 우리에게서는.
아주 약간의 아쉬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내려오지 않았으며.
내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현지의 얼굴에서도 상쾌한 기분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재밌었다. 그치?”
호텔 방에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우리.
현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너무 좋았어요.”
내 물음에 고개를 젓거나 거절한 적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으며, 언제나 짧은 말로 좋다고만 말하는 그녀지만.
날 향하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생각과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비슷비슷한 대답을 들어도, 느껴지는 바가 조금씩 다르지.
그리고, 지금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판단하건대.
이 눈빛과 이 표정, 그리고 이 분위기 속에는.
아마 남자친구를 향한 사랑도 크게 담겨있지 않을까 싶다.
‘착각인가?’
뭐, 아무렴 어때.
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현지는 내 품으로 스르륵 안겨 들어왔다.
현지와 함께라면 사막 오지에 놓여 있어도 마냥 즐겁기만 할 것 같은 느낌.
우리는 미국 활동을 반추하면서도 ‘다음에 더 잘하자.’와 같이 아쉬움을 담은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었고,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었으니까.
내게는 지금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특별한 선물 같이 여겨지기만 할 뿐이었다.
***
가슴이 충만하게 차오른 채로 귀국했고.
하루를 푹 쉰 다음 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방긋방긋 올라간 입꼬리가 도통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난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 한켠에 산처럼 쌓여 있는 대본과 시나리오들 때문에.
‘저건 뭐지? 왜 여기다가 다 모아 놓은 거야.’
마치 우리 4팀뿐만이 아니라, 회사로 들어오는 모든 작품들과, 회사가 구한 모든 작품들을 다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과장을 좀 섞자면, 지금 업계를 떠돌아다니는 것과, 몇몇 곳에만 뿌려진 것들이 여기에 전부 다 모인 느낌이랄까?
나는 잠시 멍하니 서서 이를 지켜보다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한순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만 한다.
침이 꿀꺽 넘어가고, 생존본능으로 인해 몸이 사무실 바깥 쪽으로 반쯤 돌아설 즈음.
“박한울!”
윤본부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친구랑 야구장에 갔다가, 그 안에서 우연히 소꿉친구를 마주친 듯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반가움을 담은 말투로.
“···네, 윤본부장님.”
그는 친히, 웃는 얼굴로 내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미국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어. 이제 다른 건 다 손 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정말요?”
“대신, 최락현 배우랑 채희, 그리고 민정 씨랑 이성호 선배님 차기작 고르기만 해.”
그게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맞나?
내 시선은 느릿하게 움직여, 다시 저 대본의 산으로 향했다.
헛것을 본 건지 모르겠는데, 대본들 사이로 사람 손이 튀어나와 있는 것 같았다.
저건 대본 속에 파묻혀 죽은 미래의 내 손인가?
“아, 그리고 피에스타랑 장찬수랑 드리머 컴백도 틈틈이 봐줘.”
“전 4팀이에요. 그리고 엄연히 말하면 성호 삼촌도 제 담당은 아니라서요. 전 그냥 제 담당 아티스트한테만 집중할게요.”
윤본부장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는 표정으로.
“그래? 그래, 그럼.”
“···하아.”
난 아무래도 크게 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디다 써먹겠냐고.
“쯧.”
“큭큭. 내가 널 모를까. 대신 천천히 해. 일 쌓였다고 쫓기듯이 할 필요는 없어.”
“본부장님, 예전엔 이러지 않으셨잖아요.”
“아니? 팀장이었을 때랑 똑같은데? 그때도 내 밥그릇이 중요했고 내 팀이 제일 중요했잖아. 바뀐 건 하나지. 내가 본부장이 됐다는 거. 이젠 회사의 성장이 내 성장이다 이거야.”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에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누가 그랬나.
어째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호탕한 웃음이 서서히 멎고, 그는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네가 나보다 더 그렇지 않을까? 이제 곧 이 회사의 대표님이 될 몸이신데.”
“···음? 네?”
‘이제 곧’이라니?
내가 두 눈을 끔뻑끔뻑 뜨며, ‘잘못 들은 건가?’ 두 귀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아! 맞다!”
그는 내 되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마치 잊었다가 지금 막 생각난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YU엔터랑 홈엔터에서도 하루만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려는 것 같더라고. 너한텐 오늘 내로 연락 갈 거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서 이제 생각났네.”
망했다, 진짜.
“아 참!”
“대체 그 어설픈 연기는 언제까지 봐줘야 하는 겁니까?”
이제야 알겠다. 우리가 함께 3팀이었을 때, 한실장님이 왜 윤팀장님한테 그렇게 맞먹으며 까칠하게 구셨는지.
난 그냥 오랫동안 같이 있어서 친구처럼 가까워진 줄로만 알았지.
완전히 착각이었다.
지금이라면 나도 가능할 것 같아.
“너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 제의 들어왔-“
“그건 안 합니다. 무조건 거절할 거예요.”
“그래, 그것도 네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근데 다음 달에 우리 회사 자체 오디션 있어.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했는데 네가 심사위원이래.”
머리가 어지러웠고, 눈앞이 노래졌다.
이건 내가 알아서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냥 절 죽여요!”
“그건 퇴근하고 집에 가서 대표님한테 말씀드려보고. 지금까지 말한 것들, 다 내가 주도한 거 아니다? 알지?”
그렇겠지.
배우들의 차기작 결정과, 가수들의 컴백 앨범을 피드백하는 것.
그리고 타 기획사 대표님들의 부탁과, 아버지가 주도한 오디션까지.
내가 평소에 해왔던 일들에 속했다.
다만, 나를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것일 터.
‘역시 집에 있을 때가 좋았어···.’
방구석에서 굴러다니던 백수 한량 시절이 몹시도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 그런데 ‘이제 곧’ 이 회사 대표 될 몸이라고 말했던 건 뭐였지?
갑자기 생각이란 게 하기 싫어졌다.
왠지 입사 초기에 내가 꿈꾸었던 한량 대표 생활과는 너무 판이하게 다르게 흘러갈 것만 같아서.
< 역시 집에 있을 때가 좋았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