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괘씸하네 >
카메라 앞에 선 정채희.
카메라 뒤로는 스탭들이 바글대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당장 여기 있지 않아도 되는 스탭들까지 다 그녀를 구경하러 모인 덕이다.
SBC의 새 드라마, <주점 칙칙폭폭>의 첫 촬영날.
난 스탭들의 뒤편에서 그 광경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스탠바이- 큐.”
감독의 사인이 울려 퍼졌고, 곧바로 배우들의 연기가 펼쳐졌다.
“···알바가 도망갔어. 이번에도 또!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어? 얘들아, 이모님,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이번엔 진짜 진짜 잘해줬는데.”
사장 역할을 맡은 채희가 울상을 지으며 징징댄다.
그녀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캐릭터들과는 달리, 그리 강렬하지도, 임팩트가 크지도 않은 역할이다.
작품부터가 힐링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러한 요소들이 나올 곳이 없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탭들은 그녀의 연기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장면이 장면이니만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집중을 강력하게 끌어당기며 깊게 몰입시켜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모두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옅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내가, 내가 문제라고!? 내가 왜! 그게 왜 부담이 되는데! 저저저저번에는 너무 무심했다며!”
어떤 스탭들은 숨죽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기도 했다.
‘잘 어울리네.’
나 또한 그런 그녀의 연기를 보며 킥킥댔다.
채희의 본모습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 이건 그냥 정채희, 그 자체다.
만약 배우를 하지 않고 주점 사장을 했으면 정말 이런 그림이 나오지 않았을까 의심이 될 만큼.
작가님과 감독님이 채희를 구세주처럼 바라봤던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컸으리라.
누가 봐도 이 연기는 정채희가 가장 맛있게 살릴 게 확실했으니까.
“커어어어엇! 오케이!”
감독님은 신난 목소리로 외쳤고, 정채희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굳?”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고개를 갸웃한다.
난 피식 웃으며 마주 엄지를 올려주었다.
“굳.”
“역시 이 작품 하길 잘했어요. 힘들지도 않고 재밌고.”
“그러게. 메소드 연기 엄청나더라.”
“···?”
어쩌면 이렇게 그녀의 본모습과 판박이인 캐릭터 때문에라도 작품이 더욱더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채희가 작품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하는 게 처음이라 대중들도 신선하게 바라볼 테고.
작품 내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이러한 외적인 요소들까지 힘을 받쳐준다면, 시청률 40%도 꿈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니, 그건 너무 큰 욕심인가?
“아무튼 이 작품 진짜 자신 있어요. 제가 평소엔 이런 말 안 하는 거 알죠?”
“···특히 먹는 씬?”
그녀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답인 모양이다.
“주점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지. 저 나중에 은퇴하면 진짜 주점이나 차릴까 봐요.”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사장은 먹는 사람이 아니라 파는 사람이야.”
“아니 그럼 사장은 먹지도 않고 일하나?”
“그럴 거면 장사를 왜 하냐고. 방구석에서 원없이 먹기나 하지.”
“뭐요!?”
우리가 이렇게 매번 티격태격한다는 걸 연예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스탭들이고 배우들이고 우릴 쳐다보며 웃고 있다.
이러다 촬영장 명물 되겠어.
“야, 창피하니까 말 걸지 마.”
“···! 내가 창피하다고요?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촬영장에 온 작가가 눈빛을 빛내고 있는데, 왠지 불안하다.
다음 대본에 이런 면을 살리는 건 아니겠지?
힐링 드라마의 여주인공인데 어쩌면 호불호가 크게 갈릴지도 모르겠다.
***
“우와! 피에스타다!”
“피에스타! 나 진짜 팬이야! 나 진짜 팬!”
예능 촬영장에 들어온 피에스타를 반기는 출연진들.
미니앨범 홍보를 위해 이곳저곳 너무 바쁘게 돌아다니며 정신줄을 반쯤 놓고 있었는데, 지금만큼은 정신이 또렷했다.
이제 곧 앨범이 발매되기 때문에.
“둘! 셋! 안녕하세요! 피에스타입니다!”
“안녕하세요! 피에스타입니다!”
강해정은 촬영에 열심히 임하면서도 중간중간마다 매니저와 작가들을 힐끗힐끗 쳐다봤고.
마침내 발매가 됐는지, 그들은 동시에 신호를 줬다.
“오! 발매됐어! 발매됐어!”
자신이 만든 곡을 대중들이 어떻게 들을 지 너무 떨렸는데, 어째 출연진들이 더 떨고 있는 느낌이다.
‘역시 선배님들.’
리액션이 너무 좋다.
강해정의 입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MC는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나서서 말했다.
“자! 그럼 이번 컴백 무대 안 볼 수 없죠!”
지금껏 홍보로 여러 프로그램을 녹화하며 몇 번이나 무대를 했었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떨려왔다.
아직 신인은 신인인 모양. 언제쯤이면 안 떨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강해정은 멤버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대형을 갖췄고.
“우와아아! 피에스타! 피에스타!”
“넌 좀 조용히 좀 해!”
“아니 리액션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선배들의 응원을 받으며 무대를 시작했다.
다들 어디에 있었는지, 카메라 뒤에는 스탭들이 아까보다 좀 더 많아져 있었다.
‘우리 팬이신가 보다.’
해정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댄스에는 별로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팬이 눈앞에 있으니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춤 출 수 있겠다.
해정을 비롯해 멤버들 모두, 이곳에 모인 스탭들과 출연진들이 전부 자신들의 팬인 것처럼 열심히도 무대를 보여줬고.
그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와···. 얘네가 이렇게 잘했어?”
“거 봐. 잘한다니까? 귀엽기도 엄청 귀엽지? 아마 이번 거 대박 터질 거다.”
착각일 수도 있으나, 스탭들의 입모양을 보면 분명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왠지 감이 좋았다. 이번에도 팬분들과 대중들 모두 좋아해주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촬영이 계속 진행됐고.
한 시간 뒤.
“대박! 진입 순위 4위래!”
MC가 전해준 말에 멤버들 모두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
피에스타가 또다시 음원차트와 음방 1위를 차지하며 괴물신인 라인업에서 완벽한 우위를 점하며 위상을 떨치고 있을 때.
송하연과 나는 작업실에서 평화롭게 치킨과 맥주를 나눠 먹고 있었다.
캔맥주가 아니라 피쳐로.
“10곡이면 하연 씨 팬분들이 엄청 좋아하시겠네요.”
방금 전, 우리는 마침내 10곡을 둘이서 모두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금의 이 자리는 만족스러운 작업을 마친 우리를 위한 둘만의 작은 파티.
덕분에 우리의 얼굴에선 후련함과 기쁨이 만연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작업은 순조로웠으나, 그래도 작업은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
그렇기에 맥주를 마시는 속도나 치킨을 먹는 속도 역시 느리지 않았다.
치킨이 반 마리가 사라져갈 동안 벌써 1.6L짜리 피쳐가 바닥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다 실장님 덕분이에요.”
술 때문에 살짝 붉어진 송하연의 볼. 메이크업도 거의 하지 않아서 그런지 볼이 상기된 게 더욱 잘 보였다.
“저 혼자로는 절대 이렇게 못 만들거든요. 실장님이랑 맞춰가면 맞춰갈수록 더 잘되는 느낌이에요.”
그녀는 진심으로 내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앨범을 만들 때, 지금까지보다도 더욱 빨리, 그리고 더욱 쉽게 진행됐으니까.
하지만 그건 오로지 내 덕이 아니다.
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하연 씨가 성장해서 그런 거예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 몇 단계는 더 성장했거든요.”
정말로, 내가 보기에 그녀의 재능은 오를 대로 올라와 있었다.
물론 그녀의 재능이 무럭무럭 자라난 것은 내가 옆에서 잡아준 덕이 크긴 했지만.
“그래요? 어느 정도요?”
긴가민가하며 묻는 그녀.
난 잠시 말을 고르다가 답했다.
“음. 어느 정도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냥··· 흠잡을 데가 전혀 없고, 하연 씨의 개성이 완벽하게 자리잡은 거니까요. 굳이 표현하자면, 독보적인 수준?”
“정말요? 그거 엄청 좋은 평가인 것 같은데.”
“작곡뿐만이 아니라, 노래에서도 그래요. 확실히 성장했어요. 다 하연 씨가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죠.”
내 칭찬에 송하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기분이 좋은가 보다.
“고마워요. 그래도 다 실장님 덕분이에요.”
난 가볍게 웃고 말았다. 칭찬 배틀도 아니고, 이러다가 계속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다가 자리가 끝날 것 같아서.
“맥주 더 드릴까요?”
“네.”
그녀의 잔에 마지막 맥주를 따라주었고, 우린 종이컵을 가볍게 부딪혔다.
앨범은 이제 막 만들어졌지만 마치 성공 뒤의 축배를 들듯, 우리는 꿀꺽꿀꺽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그녀가 어느 정도로 성장했냐고 물었을 때, 사실 바로 생각이 난 게 있긴 했다.
나중에 내가 말한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이 클 수도 있어서 굳이 입에 담지 않았지만.
지금도 날카롭게 벼려진 내 감은 미친듯이 외쳐대고 있었다.
이번 앨범은 빌보드에 오를 수도 있을 거라고.
‘어쩌면 상위권으로.’
아디다스의 힘 없이, 그리고 현지와의 듀엣 없이.
오로지 그녀의 솔로 앨범으로 말이다.
***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송하연의 앨범이 완성될 때까지도 현지의 앨범은 완성이 되려면 아직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래도 타이틀 곡과 더불어 수록곡 몇 개는 이미 나온 상황.
그래서 현지는 요즘 타이틀 곡의 안무를 한창 연습하는 중이었다.
그러한 와중, 어젯밤 현지와 통화했을 때였다.
송하연과의 앨범 작업이 끝나고, 기념으로 작업실에서 술을 조금 먹었다고 말했는데.
현지는 마침 잘됐다며 연습한 것 좀 봐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어느 정도 연습이 됐다고 판단해서 그런 말을 꺼낸 것일 테니, 난 당연히 알겠다고 말했고.
오늘, 출근하자마자 눈앞에 닥친 업무들을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고 연습실로 내려왔다.
“오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뽀송뽀송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요즘 댄서들이랑 같이 연습하는데, 지금 연습실엔 댄서들 없이 그녀 홀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뭐, 아무렴 어때.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난 그녀의 옆에 앉으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보고 싶어서 빨리 내려왔어.”
아직 이런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데, 저런 표정을 보기 위해서라도 난 부단하게 노력해야 했다.
만족스러운지 배시시 미소 짓고 있는 그녀.
그야말로 천사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계속 이러고 기다리고 있었어? 늦었으면 어떡하려고.”
“몸 풀고 제 노래 듣고 있었어요. 앨범 곡들이 다 좋아서.”
A&R팀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내 서포트가 결정적이었다지만, 그들의 실력과 노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이런 곡들을 가져오는 건 불가능했겠지.
송하연의 앨범도 그렇지만 현지의 앨범 역시, 난 무척이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연습하면 땀 흘리고 지저분해지잖아요. 처음은 조금 깔끔한 상태에서 하고 싶어서요.”
“음?”
‘처음? 뭐가?’라며 의문을 품으며, 옆에 앉은 현지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천천히 다가오는 얼굴.
그리고 부드럽게 포개졌다가 떼어진 입술.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과는 반대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그녀 또한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
“···죄송해요. 혹시 기분 나쁘셨어요?”
기분이 나빠?
분위기가 잡혀 있든 안 잡혀 있든, 간접적으로 예고를 했건 안 했건,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정말 티끌만큼도.
갑자기 이런다는 건 오히려, 내가 좋아서 참을 수 없었다는 거잖아.
‘그래도 남자가 돼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난 굳게 닫혀 있는 연습실 문 쪽을 힐끗 살펴봤다가, 다시 그녀의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 전의, 만나면 반갑다고 하는 것 같은 그 뽀뽀는 조금 아쉬웠으니까.
내 안의 불을 지피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긴 했지만.
그런데, 내 눈이 너무 번들거리고 있었나?
내가 고개를 슬쩍 앞으로 내밀자,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람 들어올 수 있으니까···. 지금은 연습한 거 보여드릴게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수많은 번뇌가 일어났지만.
이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그럼 시작할게요.”
곧 연습실은 음악으로 가득 찼고, 그녀 또한 그동안 연습한 것을 보여줬는데.
내 귀와 눈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이걸 어떻게 집중해. 말도 안 되지.
“어땠어요?”
“···미안. 잘 못 봤어. 다시 보여줄래? 이번엔 집중해서 볼게.”
못 봤다고 말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얼굴에선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
혹시 노린 건가?
설마 어젯밤에 연락했을 때부터?
아니 그건 아니겠지. 너무 갔다.
그런데 어쨌든.
‘괘씸하네.’
조만간 한 번 혼쭐을 내줘야겠다.
크게.
< 괘씸하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