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보드 차트 인 >
“어서오세요.”
편의점을 들어오는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술에 취한 노인은 무기질한 자신의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나 보다.
아니면 생활에 불만이 많은 참에, 마침 자신이 만만해 보였거나.
“야, 알바. 너 시비 거냐?”
드라마 작가, 김새벽.
그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진짜 업무는 ‘계산’과 ‘정리’ 등이 아닌, ‘진상 관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 생각은 더욱더 견고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사과야!? 똑바로 안 해? 점장한테 지금 당장 전화해!”
“죄송합니다.”
“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진상 관리’가 아니다.
‘진상 견디기.’
김새벽은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퇴근했다.
2년을 공들여 쓴 드라마는 제작사에 묶여 아무것도 진행이 되지 않고 있는 상태.
신인이라 계약을 잘못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대본이 좋았으면 제작사가 어련히 알아서 푸시해줬을 터.
이젠 전화로 어떻게 되어가냐 물어보기도 지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기다려달란 말이었으니.
‘하아. 작가··· 그만해야 하나.’
퇴근길, 김새벽은 홀로 생각하다가 실소를 내뱉었다.
‘애초에 작가였던 적이 없었는데 무슨.’
과연 지금 자신을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보조 작가였던 적은 있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때려쳤지만.
그땐 그 지옥 같은 보조 작가 생활을 때려치고 나오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나오니 ‘현실’이라는 삭막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이젠 때려쳐야 되나.’
늦은 저녁, 김새벽은 그렇게 상념을 거듭하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 전화가 울렸다.
언젠가부터 발신 기록만 있고 수신 기록은 전혀 없던 제작사.
김새벽은 전화를 쉬이 받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젠 놔주려는 건가? 아니면··· 그냥 포기하려는 건가?
드라마를 만들지 않을 거면 놔주기를 그렇게도 바라왔건만, 막상 그쪽에서 놔줄 거라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들었다.
보조 작가 생활을 때려치고 나왔을 때처럼, 이번엔 또 새로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지이잉- 지이잉-
전화는 계속 이어졌고, 이내 끊어졌다.
“하아···.”
안도의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지이잉- 지이잉-
끊어진 전화는 곧장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김새벽은 결심을 굳혔는지, 입을 앙다물고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그러나 말이 끊나기도 전에.
핸드폰 너머로 잔뜩 흥분해 곧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작가님! 됐어요! 됐습니다! 박한울 실장님··· 아니, 정채희 배우가 우리 드라마 주연하기로 했어요!
김새벽의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김새벽을 둘러싼 세상이 바뀌었다.
단 한 사람의 결정에 의해.
***
제작사 측과의 미팅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채희는 입가에 아련한 미소 띠우며 입을 열었다.
“김새벽 작가님, 되게 서럽게 우셨죠?”
김새벽 작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가까스로 막아놨던 둑이 터진 것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그녀는 허리를 90도로 숙인 상태로 말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뭔가 가슴이 되게 찡하더라고요. 그렇게 따뜻한 대본을 쓰셨으면서 정작 작가님은 엄청 힘들어 보인 게 되게 안쓰럽기도 하고.”
채희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힘든 거 구해주면 그 사람이 진짜 진짜 감사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랑 너무 다르게 보이거든요.”
“그냥··· 그 사람이 대본을 잘 쓴 거지.”
내가 그 사람의 힘든 사정을 고려해서 작품을 고른 게 아니란 거다.
채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진짜 엄청나게 큰 거예요. 그 사람의 모든 게 다 좋게 보일 정도로.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모르는 거예요?”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채희가 예전에 울렁증으로 고생했을 때, 나한테 되게 고마워했다는 말을 저런 식으로도 말할 수 있구나.
이것도 참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진짜 열심히 하려고요. 오랜만에 TV드라마기도 하고. 재밌을 것 같아요.”
나중에 OTT에 들어가긴 하겠지만 일단 첫 공개는 TV에서 한다.
넷플릭스에선 아직도 우리 드라마가 1위던데,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어느 정도나 나오려나?
정확한 수치는 예상할 수 없으나, 그래도 확실한 건 있었다.
“그래. 잘해보자, 이번에도 대박 터질 테니까.”
대박이 확실하다는 것.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
아디다스의 브랜드 광고곡이자, 현지와 송하연의 듀엣곡 .
이 곡에 대한 반응들이 심상치 않았다. 정말로.
이제 HJ엔터에서도 드디어 빌보드 가수가 나오는 거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맴돌 정도로, 이 곡은 해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당연히 국내에서는 이미 모든 차트에서 1위를 한 지 오래.
이제, 미국에서의 결과만이 남았을 뿐이다.
나 또한 내심 기대를 품었다.
어쩌면 핫100 차트의 끄트머리에 턱걸이를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위를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빌보드 차트가 업데이트되길 기다리길 며칠.
마침내 순위가 바뀌었고.
31. Enjoy Together – Hayeon Song, Hyeonji Yu
그녀들의 곡은 31위라는, 아주 높은 순위에 차트 인 할 수 있었다.
[송하연, 유현지. 빌보드 핫100 차트 31위 쾌거! 어디까지 올라갈까?]
[아디다스의 여신들, 빌보드에서 일 내다! 송하연과 유현지의 ‘Enjoy Together’.]
[이러다가 설마 빌보드 1위까지? 전문가 “충분히 가능하다.”]
저 전문가는 대체 어떤 전문가일까?
어쨌거나 기분은 좋다.
1위까지는 아무래도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기세라면 10위권대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난 이 결과를 받아들고, 회사로 출근하는 대신 송하연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녀가 어제 통화로 앨범을 내고 싶다고 말했거든.
“하연 씨, 축하드립니다. 지금 엄청 난리도 아니에요.”
“하하. 고마워요. 정말 빌보드에 들어가는 건 남 일인 줄만 알았는데.”
한동안 썸을 탔었던 우리는 특별한 일 없이 조용히 흐지부지되었다.
눈치가 없지 않은 그녀라면 내가 누구랑 사귀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자신에게 마음이 떠났다는 것은 알아챘을 터.
‘···어쩌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녀는 구태여 이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걸 그녀답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어른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녀가 이렇게 의연하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해주고 있는 덕에, 우리의 관계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은 사라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이가 좋았으며, 여전히 서로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연 씨, 근데 앨범은 좀 작업을 오래 해야 해서, 지금 당장 내는 것보다는 당장 미국에서 스케줄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아니면 싱글을 내는 것도 관심을 이어가기 좋을 텐데. 이 화제가 언제까지 갈 지 모르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채희 씨도 국내에서 TV드라마 찍는다면서요. 미국에서 활동하지 않고. 그거 듣고 좀 놀랐어요. 최소한 넷플릭스 영화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찍으면 더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그것조차도 고집하지 않았잖아요.”
“작품은 제가 추천해줘서 그런 거예요.”
“실장님은 아티스트가 의견 있으면 다 들어주려고 하시잖아요. 채희 씨가 고집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겠죠.”
사실 채희는 넷플릭스는 아니더라도 미국 행을 고집하긴 했다.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못 간 거고.
하지만 그 얘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지.
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채희가 그렇게 해서 하연 씨도 일부러 힘든 길을 가려는 거예요?”
“아뇨. 앨범을 내고 싶어요. 그냥 그뿐이에요. 지금 해외 화제성 때문에 결정을 바꾸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애초에 결심한 게 있었어요. 실장님이랑 언제까지 같이 작업할 지 모르니까, 그때까지는 최대한 많이 결과물을 내놓자고.”
“저 어디 안 떠나요.”
“···고마워요.”
그래도 그녀는 뜻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나도 그녀의 뜻을 굳이 꺾어낼 생각은 없다.
그 결정이 조금 의아해서 물어봤을 뿐이지.
“혹시 이번에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난 싱긋 웃으며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
송하연이 이러한 결정을 했으니, 듀엣을 했던 둘 모두가 미국에 가서 활동한다는 선택지는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
아디다스 측에서 우리를 부르는 거라면 모를까, 우리가 자발적으로 찾아갈 일은 없어졌다는 거다.
당장은.
‘나중엔 모르지.’
난 현지의 담당 매니저로서, 그녀를 소회의실로 데려와 이러한 사정들을 다 설명했다.
그리고 그 끝에 가서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제가 곡을 내고 싶으면 제 곡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될까요?”
“그건 생각을 해봤는데, 역시 이번엔 다른 작곡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 하연 씨는 앨범 작업 때문에 우리 곡을 만들 수 있는 사정이 안 될 거라서.”
현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우리 회사의 A&R팀은 가뜩이나 능력이 좋았는데, 높은 향상심 덕분에 이제 그들의 실력은 더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현지의 곡이니만큼 내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송하연과 작업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좋은 곡들이 탄생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네 네임밸류도 올라갔으니까, 이번엔 해외 유명 작곡가들한테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덧붙인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전 오빠만 있으면 돼요.”
“···음악 작업에서만?”
“남자친구로서도요.”
난 답정너인 모양이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고.
난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빙구 같이 웃었다.
나도 현지 앞에서 이렇게 웃기 싫은데, 이게 내 맘대로 조절이 안 되더라고.
“크흠.”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조금 갈무리했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물었다.
“그럼 싱글곡으로 할까?”
“아뇨. 저도 정규앨범으로 낼게요.”
이로써, 한동안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두 명의 정규앨범 작업에 몸을 갈아 넣어야 할 테니.
***
“형님, 거 빌보드 차트 말고 우리 영화 반응 같은 건 모니터링 안 하십니까?”
빌보드 차트 31위에서 22위로 9계단 상승.
상위권에서 1주만에 9계단이나 상승한 것은 엄청난 일이었기에, 다음주 순위는 또 어떨지 살펴보고 있었다.
“그건 이미 다 봤어. 그리고 이제 시사횐데 무슨 새로운 반응이 있으려고. 새로운 반응 보려면 시사회 끝나고나 살펴봐야지.”
내 말에 최락현이 쩝,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 머리, 방금 전에 샵에서 엄청 비싸게 한 건데 이런 데 있어선 무신경한 모양이다.
난 피식 웃으며 물었다.
“새로운 드라마는 잘 준비하고 있어?”
“그럼요. 아주 제 마음에 쏙 드네요. 하하! 저도 이제 넷플릭스 진출이니까 세계적인 배우 되고 그러겠죠?”
최락현의 차기작은 넷플릭스 드라마로 결정됐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기간이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는 TV 드라마가 아니라 그런지, 진행속도는 매우 빨랐고.
이제 대본 리딩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난 그의 너스레를 들으며 큭큭,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데뷔작의 첫 시사회를 앞두고 긴장을 많이 한 모양인지 오늘따라 허세가 심하다.
“그렇게 겁먹을 거 없어. 성호 삼촌 봐. 아주 평온하시잖아.”
내가 턱짓으로 대기실 한 켠에 있는 성호삼촌을 가리켰다.
삼촌은 귀에 이어폰을 끼고선 태연하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거의 소파에 눕듯이 앉은 자세로.
최락현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언제 겁먹었다고 그래요? 하하. 제가 겁먹은 것처럼 보여요? 전혀요? 저 지금 엄청 신나요! 정말로요. 제가 겁먹을 이유가 뭐가 있어요. 하하! 그리고 설령 제가 요만큼 긴장했다고 해도 저 형님이랑 비교하면 안 되죠. 전 이번이 처음인데.”
“어? 방금 긴장한 거 인정한 거지?”
“···그래요, 인정! 인정! 근데 우리 형 때문이에요. 우리 형이 감독이니까 혹시나 형이 엄청 긴장하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
“쓰읍.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 할수록 그의 얼굴에서는 점점 긴장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를 다루는 방법을 이제 완벽하게 깨달았는데, 이게 내 입장에서는 참 재밌었다.
그렇게 한참을 놀려대며 그의 긴장을 모두 풀어줬을 즈음.
“무대인사 올라갈 시간입니다!”
감독 최창수.
주연 이성호, 최락현의 영화.
<양녕을 탐한 무녀>의 시사회가 마침내 시작됐다.
난 씨익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과연, 사람들은 이 신인의 연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 빌보드 차트 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