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하산이 천재매니저였다고-159화 (159/170)

< 내 생애 첫 번째 여자친구 >

오전 12시 자정.

나와 현지, 그리고 송하연은 작업실에 함께 모여 있었다.

곡도 만들고 뮤비까지 다 찍었는데, 이 늦은 시각에 우리가 모인 이유는 당연히 하나였다.

듀엣곡의 발매.

뉴욕을 기준으로 오후 12시에 발매된다고 했으니, 국내 시간으론 새벽 1시.

그러니까 즉, 한 시간 뒤였다.

이미 티저 영상도 나왔기 때문에 곡의 주인이 현지와 송하연이라는 것은 국내, 미국과 더불어 전세계에 전해졌었다.

지금도 아마 인터넷에선 활발하게 얘기가 오가고 있을 터.

그러나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그 반응들을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발매 직전인 지금도 기대나 우려와 같은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 테지만, 이미 볼 건 다 본 뒤.

우리는 여기서까지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대신, 서로의 얼굴을 맞보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데 집중했다.

“실장님, 뭐 드시고 싶으시면 과자 드실래요? 혹시 몰라서 사놨어요.”

“그래요? 마침 잘됐네요. 안 그래도 좀 출출했는데. 그런데 이 작업실은 언제 와도 항상 깔끔한 것 같아요. 저희 처음 만나서 작업했을 때 빼고는.”

“그땐··· 앨범이 잘 안 나와서 고민이 많았던 때라···.”

“하하. 당연히 이해하죠.”

난 송하연이 건네준 과자를 먹으며 현지에게 물었다.

“현지야, 너도 먹을래?”

“전 괜찮아요. 배가 안 고파서요.”

인터넷 안은 우리의 음악에 대한 얘기로 굉장히 시끌벅적할 텐데, 우리는 이에 대해 조금도 긴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곡에 대한 자신이 있기도 한데, 그녀들이 이 정도로 겁먹을 급은 아니거든.

이미 글로벌 슈퍼스타였으니까.

그런데, 사실 나는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곡에 대한 것 때문은 아니고, 현지가 자꾸 신경 쓰여서.

현지가 차 안에서 손을 잡고 두 번째로 고백했을 때 이후로 계속 이런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대화는 송하연과 더욱 많이 나누고 있는데, 신경은 계속 현지에게로 향해 있지 않나.

과자가 달아서 그런지,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새벽 1시.

아디다스의 SNS와 유튜브 계정이 동시에 업데이트되었다.

***

유현지와 송하연의 이름은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미국 애리조나 뮤직 페스티벌 이후로 더더욱.

그렇다고 그녀들의 명성이 빌보드 핫 스타들만큼은 아니었으나, 아디다스라는 대기업과 맞물려 화제를 모을 만큼은 충분했다.

“드디어 나왔어!”

애리조나 뮤직 페스티벌에서 그녀들의 무대를 직관했던 샘은 그 이후로 그녀들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보고 음악을 아무리 많이 들어봐도 직관했을 때의 그 생동감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을 파면 팔수록 더욱 깊게 빠져들기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신곡.

아디다스의 브랜드 광고용으로 만든 곡이긴 하지만, 유현지와 송하연의 열렬한 팬이 된 샘에게 있어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콜라보를 만들어준 아디다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

그는 곧장 뮤직 비디오를 틀었다.

티저에서 봤듯이, 축제의 분위기가 만연한 음악과 비디오.

시작부터 송하연의 아름다운 음색이 귀를 녹여왔고, 그 뒤를 이어 유현지의 맑고 깨끗한 보컬이 부드럽게 귀를 파고들었다.

비록 영어와 한글이 반쯤 섞여 있었으나, 자막을 켰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사실 자막이 없다고 해도 샘은 충분히 즐길 수 있었지만.

“···.”

음악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녀들이 동시에 목소리를 내는 순간.

샘의 표정은 황홀하게 젖어들었다.

너무 좋아서 아무런 말도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 또한 음악을 듣는 데 방해만 될 테니.

그렇게 샘은 화면이 까맣게 물들고 나서야, 눈을 지그시 감으며 여운을 즐길 수 있었다.

“이건 더이상 광고가 아냐. 작품이지.”

그것도 명작.

샘은 단언할 수 있었다.

북미에서는 그녀들의 인지도가 아직 낮긴 하나, 이건 노출도의 문제일 뿐.

한 번 들으면 귀를 사로잡고, 뮤비까지 보게 되면 눈과 함께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이건 무조건 빌보드 1위 해야 돼. 아니면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샘은 댓글, 좋아요, 그리고 SNS와 커뮤니티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

-그녀들은 천재적이야. 믿을 수 없어.

-유현지의 댄스 장면을 자르지 말고 보여줘! 제발 부탁해.

-아디다스는 왜 누군지도 모를 이런 가수들을 데려온 거야? 한심하군.

└너 음악도 안 들어보고 댓글 쓰는 거지? 네가 모른다고 그녀들이 유명하지 않은 게 아냐 이 멍청아. 세상을 좀 넓게 보고 살라고. 그녀들은 이미 글로벌 슈퍼스타들이니까.

-나도 누군지 몰랐는데 이 영상을 보니까 바로 이해됐어. 아디다스는 최고의 선택을 했군. 매우 훌륭해.

-···이게 K팝? 내가 알던 K팝은 이렇지 않았는데···. 이건 미쳤어.

아디다스의 계정인 데다가, 이미 티저로 홍보가 됐었기 때문에 뮤직 비디오의 조회수가 늘어나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역시나네요. 반응이 엄청 좋아요. 둘 다 천재적이래요.”

내가 씨익 웃으며 양옆에 앉은 그녀들을 번갈아 바라보자, 송하연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한테만 그런 거 아니에요. 음악이 좋다는 게 실장님 잘한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외국 사람들이 실장님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지, 한글 댓글에선 실장님 얘기도 엄청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나도 봤다. 읽는 게 좀 민망해서 빨리 넘겼는데 그걸 집어내네.

국내의 커뮤니티들과 유튜브 댓글 등에선 그녀들에 대한 언급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언급도 많이 있었다.

-5252!!!! 한울 씨! 믿고 있었다구!! ^^7

-박한울 실장을 국회로.

-박실장님 뭐냐고오오오오 미쳤잖아 진짜ㅠㅠㅠㅠㅠ

국내 팬들의 반응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지금쯤이면 유튜버들도 해외반응 같은 걸 끌어모으기 위해서 엄청 바쁘게 일하고 있겠지.

“맞아요. 실장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현지가 작게 말했다.

요즘 들어 그녀의 잔잔한 목소리에 더욱 귀가 집중되는 듯했다.

“그래. 고마워.”

1시 30분.

우리는 30분 동안 반응을 지켜보다가 작업실을 빠져나왔고.

이번에도 역시, 현지는 뒷좌석에 타고 송하연은 조수석에 앉았다.

“이제 들어가서 주무실 거예요?”

“네, 전 자려고요. 하연 씨는요? 바로 주무실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대화하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하연의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난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현지가 두 번째로 고백했을 때와 같은 상황, 그리고 같은 자리.

“조심히 들어가세요. 현지 씨도 잘 들어가요.”

손을 흔든 송하연이 마침내 집으로 들어갔을 때.

뒤에 앉아 있는 현지가 입을 열었다.

“저 옆에 앉아도 돼요?”

“어? 어, 그래.”

뒷자리에 앉은 그녀가 조수석에 앉고, 그녀의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나를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난데없이, 그리고 갑자기 말을 꺼냈다.

“오빠 좋아해요.”

“···.”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던 내게, 벌써 세 번이나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손 잡아봐도 돼요?”

난 그녀에게 순순히 손을 내밀었고,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심장이 쿵쿵 뛴다.

난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현지.

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오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빨리 가라앉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렇게 가만히 있자, 현지의 눈은 이내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차 안에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는데 심장은 계속 터질 것처럼 뛴다.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는다.

고장이 났나.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차를 출발할 수 있었다.

현지가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긴장감이 풀려, 몸을 시트에 파묻듯이 뉘였다.

지이잉- 지이잉-

채희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좀 더 이 자세 그대로 생각하고 있었겠지.

“어, 왜.”

-아까부터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모니터링을 뭐 하루종일 하나? 아니면 혹시 끝나고 여자친구라도 만난 거예요?

여자친구.

그 단어가 들려오자마자, 머릿속에서 현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 여자친구 만나고 있었어.”

직접적으로 사귀자는 말 같은 건 없었으나.

이제 여자친구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헐.

입가에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여자친구라는 단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전해졌다.

***

현지의 세 번째 고백이 결정적이었을까, 아니면 딱 그때 채희가 꺼냈던 ‘여자친구’라는 말이 결정적이었을까.

나는 지금 태어난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지가 내 생애 첫 번째 여자친구니까.

“저녁은 먹었어?”

-네, 오빠는 드셨어요?

“아직 안 먹었어. 이제 곧 먹으려고.”

24시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그녀들의 듀엣곡이 벌써부터 대박이 터졌다.

스케줄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그녀에게 쉬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대답을 듣고도 내 쪽에서 먼저 끊지 않고 말을 잇고 있었다.

비어 있는 보컬 연습실.

일단 채희와 최락현의 대본을 고르기 위해 이곳에 와 있긴 했는데, 농땡이를 피우는 월급루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일해야지.’

전화를 끊는 게 너무 아쉽긴 했으나, 그래도 내 얼굴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퇴근하고 또 전화할게.”

-네. 그리고···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는 하나일 거다.

“내가 더 고맙지.”

이런 게 바로 연애의 달콤함인가 보다.

처음이라서 그런지, 달달한 말은 좀처럼 꺼내기가 쉽지 않았으나, 그런 직접적인 표현이 없이도 이가 썩어버릴 만큼 달달한 기분이 든다.

난 바보 같이 웃는 얼굴로 다시 대본을 들었다.

-···저 힐링이 필요해요. 힐링할 수 있는 걸로 할게요.

오늘 아침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던 채희의 말대로, 힐링 드라마나 힐링 영화를 고르기 위해.

그리고 최락현에게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을 고르기 위해, 난 대본을 계속해서 살폈다.

그동안 며칠이나 뒤져봐도 좀처럼 끌리는 걸 찾을 수 없었는데.

“찾았다.”

오늘에만, 나는 두 개를 모두 다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게 사랑의 힘인가?”

***

그날 저녁, 정채희의 집.

“에휴.”

한숨을 내쉰 박송이는 짐을 내려놓으며 정채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소주와 떡볶이, 튀김, 순대, 그리고 닭발이 예쁘게 놓여 있었고.

그것들은 이미 다 차갑게 식은 뒤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차여놓고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그리고 나 위로도 잘 못한다? 이런 거 잘 안 해봤어.”

정채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울상을 지으며 반박했다.

“저 안 차였어요. 고백도 안 했고, 그리고··· 그··· 아무튼 차인 건 아니에요!”

“고백을 안 했으니까 차이지, 진작에 고백했으면 차였겠어? 하긴 네 외모에 고백이나 받아봤지, 언제 남자한테 고백 한 번 제대로 해봤겠니?”

“···선배님은 고백해봤어요?”

“난 그런 거 없어도 돼. 너랑 다르게 고수거든.”

“···.”

박송이는 소주병을 따고, 채희와 자신의 잔에 가득 따랐다.

“그러게 진작에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왜 그런 간단한 걸 못해서는···. 쯧.”

정채희의 눈빛이 사나워졌으나, 잔을 내밀고 술을 마시니 다시 눈빛이 원상복구되었다.

“하여간 이렇게 단순한 애가 그렇게 복잡하게 가려 했으니.”

“아니··· 혼내러 온 거예요, 위로하러 온 거예요! 저도 다 알거든요!?”

“내가 말했지. 나 위로 잘 못한다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멋쩍긴 한 듯, 박송이는 볼을 긁적거리며 덧붙였다.

“···그래도 좋은 점은 있어.”

“하나도 좋은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실연당한 연기는 더 잘할 수 있게 됐잖아.”

정채희의 눈이 다시 사나워졌다.

술을 마시니 다시 되돌아왔지만.

“저 진짜 이번엔 적극적으로 하려고 했었는데···. 추잡해도 그렇게 해보려고 딱 마음먹었었는데···.”

박송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실장님을 안 볼 순 없잖아. 딱 오늘까지만 슬퍼하고 내일부턴 잊어버리자.”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이제 썸도 아니고 아예 여자친구 생겨버렸다며. 이제 이 이상 하는 건 추잡함의 단계를 섬어서는 거야. 그때부턴 그냥 공포라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수긍하는 채희.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박송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그래도 이제 작품 들어간다고 해서. 원래 집중할 게 있으면 그런 거 금방 잊혀져.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슬퍼하고 내일부턴 거기에만 집중하는 거다? 알겠지?”

채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런데 혹시 선배님 경험담이에요? 정말 다 잊혀져요?”

“슬픈 사연이 있으니까 깊게 파고들진 말고.”

‘슬픈 사연’이란, 그러한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박송이도 남자를 사귀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야, 술이나 마시자.”

“네, 진짜 죽을 때까지 마셔요.”

늦은 저녁.

그녀들은 취해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술잔을 나누었다.

< 내 생애 첫 번째 여자친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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